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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 좋은 시 다시 읽기
시, 타자를 발견하는 장소
이성혁(문학평론가)
누구나 그 사람만의 기억이 있고, 역사가 있다. 시는 이 기억의 이미지들을 활성화한다. 시의 보편성은 여기에 있다. 시는 시인 개인의 역사를 바탕으로 생산되지만, 독자의 정동을 자극하면서 그의 마음에 스며든다. 이 마술적인 현상을 일으키는 것이 예술의 힘, 시의 힘이다. 그런데 이 현상은 독자 자신의 마음을 유아적으로 위무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이러한 마술적 전염은, 시에 나타난 서정적 주체라는 타자와 공감하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텍스트에서 빚어나오는 타자-서정적 주체-의 마음에 감염되면서, 독자는 자신의 고독이 외롭지 않음을 확인하고 마음을 그 타자를 향해 개방한다. 단독자들의 마음이 마술적으로 뒤엉킬 수 있는 장소가 시다. 시 독자의 글쓰기인 시 비평은 마술적으로 감염된 마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비평은 산문이기 때문에 논리화가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에게 일어난 미적 현상이 어디서 발원하는지 분석과 해석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신과 타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일어난다.
이렇듯 시에 감염되어 시 텍스트에 나타난 타자와 공감하면서부터 비평적 글쓰기가 시작된다고 할 때, 『시와산문』 2023년 봄호에 실린 시편들 중에서 필자의 마음을 움직인 시편들에 대해 글을 쓰게 된다. 우선 아래의 시가 필자의 공감을 일으켰다.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 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 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 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 허연, 「칠월」 전문
‘당신’을 기억하면서도, 마음에서 일어나는 ‘체념’을 받아들이게 된 나이가 된 것일까. 위의 시가 마음에 스며드는 것을 보면. 그런데 왜 ‘칠월’인가. 시에 따르면, “짧은 처마 밑에서/아슬아슬하게 등 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이 있었던 달이 칠월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그 고유한 기억에 따라 시인은 ‘칠월의 길’에서 ‘체념’을 만나게 된 것일 텐데, 하지만 그러한 시인의 기억이 필자 자신의 기억인 듯 느껴졌다. 필자 역시 처마 밑의 벽에 젖은 등을 붙이고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한 일이 있었던 것 같고, 그 소나기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알 수 없는 슬픔에 잠겨 아파했던 일도 있었던 것만 같다. 소나기를 보면서 왜 마음이 아려오는 걸까? 소나기는 잊어버린 욕망을 되살리면서, 살아오며 잃어버린 무엇-당신-을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젠 그 무엇을 되찾을 수 없으리라는 사실도 인정하게끔 이끄는 것이다. 저 빗물이 “낮게만 흘러다니”면서 ‘깊은 골’ 속으로 사라지듯이 말이다. 필자도 경험했다고 느껴질 만큼, 위의 시는 이러한 상기와 체념의 과정을 생생하게 되살린다.
위의 시에 따르면, 소나기가 내리는 밤이 많은 칠월은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 영화”를 볼 수 있는 달이다. 우리는 그 영화에서 애써 “잊은 그대”를 지금 시간에 아프게 만날 수 있다.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이 “아직도 내 곁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 아픔은, 우리가 자신이 살아온 삶을 아직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았다는 사실 역시 깨닫게 해준다. 우리의 마음속에 ‘그대’가 살아있음을, 그대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지 않고 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대를 사랑했고 아파했던 시절 역시 그의 삶에서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도 함께 말이다. 그래서 시인은 “절망하듯 쏟아지는” 소나기의 계절, 그를 체념에 빠뜨리는 여름을 사랑한다고 역설적으로 말한다. 그 고통의 재활이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즉 소나기를 통해 활성화된 고통스러운 기억은, 아픈 슬픔을 체험할 수 있는 마음의 능력이 여전히 자신에게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해마다 돌아올 칠월을 환영한다.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자신이 냉혹하고 무감한 존재자로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달이 칠월이기에.
시도 우리 독자에게 이러한 칠월과 같은 존재 아닐까? 시도 저 칠월의 소나기처럼 우리의 마음을 아픔으로, 또는 슬픔으로 이끌면서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확인시켜주지 않는가. 그래서 우리는 시를 읽는 것일 테다.
어디에서 옵니까 고요는 온종일 혼자와 놀다 보면 인사를 버리고 안부를 잃습니다 어떻게 말을 건넬까요 손을 흔들어도 영혼일 뿐이라면
안녕 나는 조금씩 사라집니다 오래 전 마음 같지 않습니다 마음…… 커다란 단어라는데 너무 빨갛고 어지러운 단어라는데 나에게는 걱정이 많은 말이에요 말하는 순간 놓쳐버릴까 두려운 한순간
걱정은 기도의 일종이래요 터질 때까지 풍선을 부는 사람처럼 녹지 마세요 녹지 말아요 속삭이면 더 쉽게 녹아가는 귓가입니다 다정함이 우리를 사라지게 하면 어쩌지요 더 많은 따듯함이 당신을 멀어지게 한다면
아름다움과 어리석음이 뒤섞인 뒷모습은 어디로 떠나갑니까 입을 열면 부드러운 안개가 흘러나오는 새벽 오늘의 한숨은 다정한 악기입니다 조금씩 아껴 아프다 어두워지는 근심의 힘으로 오로지 조용함으로 감싸여 유영하기를 바라던 작은 물가입니다
- 이혜미, 「차분한 마음」 전문
우리의 마음에 스며들면서 번지는 시가 있다. 위의 시가 그렇다. 위의 시를 읽다 보면 차분한 어조로 진술되는 시의 공간 속에 자신이 어느새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도 위의 시의 화자처럼 방에 고요히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곤 한다. 이때 우리의 기억 속에 숨어 있는 누군가를 떠올리기도 하며, 또는 나 자신과 만나기도 한다. 생활하면서 잊어야 했던 자기 자신, 자신도 누구인지 모르게 타자로 존재하게 된 자기 자신을. 그런데 시인은 자신을 둘러싼 이 고요가 어디에서 오는지 묻는다는 점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누구에게 묻는가? 그 고요와 맞붙어 시인에게 다가오는 누구에게. 그런데 그이는 “영혼일 뿐”인 존재자-시인 자신의 타자화된 영혼일 수도 있는-다. 그렇기에 그에게 “어떻게 말을 건넬” 수 있단 말인가. 그 영혼에게 어떻게 “손을 흔들어”야 한단 말인가. 그에겐 인사도 할 수 없고 안부도 물을 수 없다. 그에게 말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도 영혼으로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위의 시에서 진행되는 진술은 바로 ‘당신-영혼’에게 말 건네는 시인의 영혼이 하는 말일 것이다.
시인이 그 영혼에게 인사로 건넨 말은 슬프다. “나는 조금씩 사라집니다”라는 말이니까. “나는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필자가 이 시에서 꽂힌 말이 바로 그 말이었다. 필자 역시 가끔 ‘내’가 사라지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곤 하기 때문이겠다. “오래 전 마음 같지 않습니다”라는 진술 역시 마찬가지의 동감을 불러일으키는 말이다. 하나 시인은 역시 한발 더 나아가는데, 그는 ‘마음’이라는 말을 붙잡는 것이다. 마음은 “말하는 순간 놓쳐버릴” 수 있는 “너무 빨갛고 어지러운 단어라”고 말이다. 그가 마음을 표현하거나 전달하고자 하는 시인이기 때문에 ‘마음’이라는 말에 대해 “걱정이 많은” 것이리라. 시인은 그 ‘걱정’이 “기도의 일종”이라고 풀이해준다. 그 기도는 당신이 녹아 사라지지 마시라는 것. 마음을 발설하면 그 마음이 사라질 수 있어서 걱정하듯이, 당신도 사라지기 쉬우니까 걱정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신에게 그 기도를 다정하게 속삭이면, 마음처럼 당신도 “더 쉽게 녹아”간다는 것이 이 기도의 비극적인 역설이다. “다정함이 우리를 사라지게” 할 수 있으며 “더 많은 따뜻함이 당신을 멀어지게” 할 수 있다….
시인의 영혼이 영혼일 뿐인 당신에게 건네는 말은 사라짐에 대한 걱정의 말뿐이다. 나는 사라지고 있으며 당신도 사라질까 봐 걱정이라는 말. 그리고 당신은 정말 어느새 사라진다. “아름다움과 어리석음이 뒤섞인 뒷모습”을 보이며. 따뜻한 다정함의 표현이 도리어 당신을 떠나게 만든 것이다. 시인에게 찾아든 당신에게 한 말이 고작 걱정이었을 뿐이니 어리석은 일 아닌가. 하지만 그러한 어리석음의 뒷면에 아름다움이 스며든다. 그 걱정의 말은 사랑의 말이기에. 그리고 아름다움은 사랑에서 비롯되니까. 하여, 당신의 뒷모습에 대고 “어디로 떠나갑니까”라는 묻는 말은 부드러운 안개를 퍼뜨리며, 당신을 잃고 내쉬는 “한숨은 다정한 악기”가 된다. 그것은 사랑이 내는 말이며 한숨이기에. 시는 이 ‘한숨’의 아름다움으로 다시 써지며, “조금씩 아껴 아”픈 마음의 힘, “어두워지는 근심의 힘”으로 한숨 섞인 말의 아름다움은 연주된다. 그리고 시인은 이 고요하고 ‘차분한’ 시 쓰기의 작은 장소를 ‘물가’에서처럼 유영하면서 시를 써나가기 시작할 것이다.
위의 시를 읽으면, 시는 ‘영혼-당신’을 맞이하면서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시인의 마음은 ‘영혼-타자’에 잘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은 타자의 영혼, 죽은 자의 영혼까지도 잘 맞이할 수 있는 무당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죽은 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능력, 죽은 자와 만나고자 하는 노력이 시인에겐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 학살당한 사람들과 만나고자 노력하는 시인이 있다. 아래의 시가 그러한 시인을 보여준다.
우리는 끝을 보기 위해 여기에 왔다
흐린 수평선에 걸린 구름이 아랫입술을 깨물고
서서 죽은 물
하얗게 누운 비석
외계에서 온 사람들
우리는 서로에게 비밀이 되어
서로 먼저 등을 돌리라고 재촉한다
뒷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뒷모습을 들키기 싫어서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 우리는 난민이 될 수 있을까
마음속에 일어난 난을 피해 우리는 어디로 망명해야 할까
어디까지 망가질지 몰라 두려운 사람들이 선을 긋는다
감은 눈 속에서 다시 한 번 눈을 감고
눈 속의 눈을 감고
입 속에 갇힌 수백 마리 나비가 날갯짓을 하고 있다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 앞에서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폭도가 된다
서로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누워 있는 해골을 보았다
얼굴에서 살이 없어지면
모두 저렇게 표정이 사라질까
텅 빈 웃음만 남기고
서로의 고통스런 표정을 참아낼 만큼 그들은 사랑했던 걸까
해변을 걷다 보면 결국 또 여기로 돌아오겠지
여긴 벗어날 수 없는 한 덩어리의 땅이니까
아이들은 모래사장에 나무 막대기로 그림을 그린다
두고 온 집과 보고 싶은 사람들을
윤곽만 남은 얼굴들을
성급하게 식은 용암은 구멍이 많은 돌이 되고
몸보다 앞서간 말들은 툭툭 끊기고
부러진 늑골 같은 구름들
동굴의 입구에서부터 기어온 매캐하고 검은 연기를 피해 도망쳐 나온 사람들은 해변으로 끌려왔다
그들의 눈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육지일까 바다일까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우리만 볼 수 있는 어떤 빛
해변과 수평선 사이에 당신을 오래 세워두고 싶다
무지갯빛 슬리퍼 한 짝이 파도의 끄트머리에 걸려 밀려왔다 밀려간다
- 신철규, 「세화」 전문
시 제목인 ‘세화’는 제주 북부 해변 마을 이름으로, 그곳은 ‘제주 4.3 사건’ 때 수백 명씩 대규모 학살이 이루어진 마을 중 하나다.(1948년 11월 초순의 대토벌 작전에서 수백 명의 민간인 학살이 세화 등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위의 시에서 시인은 이 학살에 대한 ‘시적 증언’을 시도한다. 역사적 비극을 잊지 않고 문학으로 증언하는 작업은 문학인이 할 일 중의 하나이다. ‘세월호 참사’ 때 제창된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구호는 구호에 그치지 않는다. 시적인 다짐이다. 시란 ‘영혼-타자’와 만나고자 할 때 이루어진다고 할 때, 잊지 않고 죽은 자의 영혼을 만나는 작업은 시가 할 일 중 하나인 것이다. 이 작업은 어렵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극의 진실을 말로 표현하고자 할 때, 시인은 자신의 시 쓰기에 깃들 수 있는 거짓과 싸워야 한다. 아마 신철규 시인도 그 진통을 겪으면서 위의 시를 힘겹게 썼을 것이다.
위의 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겠다. 전반부는 “끝을 보기 위해” 여기에 온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서서 죽은 물/하얗게 누운 비석” 앞에서. “뒷모습을 들키기 싫어서” “서로 먼저 등을 돌리라고 재촉”하며, “마음속에 일어난 난을 피”하여 어딘가로 망명하고 싶어 한다. 1948년의 그 ‘난’이 지금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난 것처럼 말이다. “어디까지 망가질지 몰라 두려운 사람들이 선을 긋”지만, “눈 속의 눈을 감”은 사람들은 “입 속에 갇힌 수백 마리 나비가 날갯짓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마음으로 보게 될 것이다. 그 나비들은 ‘세화’에서 죽은 자들의 입속에 갇혀 있던 영혼들일 터, 그 영혼들은 날갯짓하며 시인의 입을 통해 세상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그 영혼들의 이야기가 시의 후반부를 이룬다. 그렇다고 시인은 그 영혼들에 빙의되어 그들의 목소리로 말하지는 않는다. 시인은 조심스럽게 이 학살에 관찰자로서 다가가고, 관찰한 사실과 시적 상상력을 융합하여 학살의 실상을 증언하고자 한다. 이때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 앞에서” “어김없이 폭도가” 되어 살해당한 학살의 현장에 다가가도록 시인을 이끈 것은 바로 저 나비들-영혼들-의 날갯짓일 테다.
시인이 관찰하고 남기고자 하는 시적 증언은 무엇인가. 그가 본 것 중 하나는 “서로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누워 있는 해골”이다. 아마 그것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죽어갔을 연인의 해골일 터, 그 해골에서 그들의 표정은 사라졌지만 “서로의 고통스런 표정을 참아낼 만큼” 마지막까지 붙잡고자 했던 서로를 향한 사랑은 감동적으로 남아 있다. 얼굴이 사라진 이후에도 남아 있는 무엇을, 사랑을 시인은 증언하고자 한다. 아이들이 “모래사장에 나무 막대기로” 그려놓은 “윤곽만 남은 얼굴들”은 그 사랑의 표현이다. 이곳은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들,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학살된 곳이다. 하여, 학살 이후의 ‘세화’는 죽음의 고통과 사랑이 뒤얽힌 곳이 되었으며, “끝을 보기 위해” 온 우리들이 그 끝인 해변을 걸어도 돌아올 수밖에 없는 곳이 되었다. 그곳은 한국인이라면 “벗어날 수 없는 한 덩어리의 땅”이 된 것이다.
이 세화 해변의 풍경은 “몸보다 앞서간 말들”이 “툭툭 끊”겨 있고 구름들은 “부러진 늑골 같”이 하늘에 고통스럽게 걸려 있지만, 한편으로 “해변과 수평선 사이”의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바다는 죽은 자들의 눈에 비친 빛, 죽은 자들인 “우리만 볼 수 있는 어떤 빛”이 펼쳐져 있는 어떤 비전을, 사랑의 장을 보여준다. 시인이 그곳에 “당신을 오래 세워두고 싶다”고 말한 것은, “파도의 끄트머리에 걸려 밀려왔다 밀려”가는 슬리퍼 한 짝이 상징하듯이 이미 바다를 건너갔을 이 죽은 자들-당신-이, ‘우리’의 눈에도 그 비전을 볼 수 있도록 이끌었다는 데에 대해 기리는 마음의 표현이겠다.
위의 시가 보여주고 있듯이, 죽은 자를 포함한 타자의 영혼과 마음을 드러내는 일이 시가 하는 일 중의 하나라고 할 때, 아래의 시도 그러한 작업에 따라 써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줄기 저 끝까지 살아 있네요
속속들이 빛을 머금고 있는 푸른 내부
움직이고 흐르고 있어요
나름의 방식으로 험한 계절을 버티고 있죠
성안드레아병원 숲 속 너른 정원
하얀 날개를 접고 나무 아래
조현병 환자 남녀가 누워 속삭인다
사십 퍼센트
그 숫자가 나의 목을 옥죄고 있어요
제발 풀어주세요 끊어주세요
의사의 건조한 설명 속에 갇히기 싫어요
우리가 결혼하면 아이에게 병이 유전될 확률
사슬로 연결된 가족이 사막을 끝없이 걷는 모습이 떠올라요
먼지를 걷어내면 다시 먼지가
어둠을 걷어내면 다시 어둠이
우리들의 움막에 드리울 거예요
어슬렁거리는 사자 거친 숨소리
우리는 알고 있어요
숲 속의 안개가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 숨어 있다는 걸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매일 약을 먹어야 해요
흔미해져 악귀가 팔을 벌리면 비명을 질러 쫓아버려야 해요
병동의 깜빡거리는 형광등처럼 생각이 자주 끊겨요
당신을 향한 항해가 나침반을 잃고 멈추어요
멍하니 바라보는 기울어진 돛
아득한 바다를 돌고 돌아 희미하게 보이는 섬으로 가요
당신과 함께 달리고 싶어요
해변에서 춤추며 모래에 남기는 아기자기한 발자국
소금기 있는 바람의 맛을 느껴 봅니다
환청을 상쇄시키는 단순한 파도 소리
저 나무도 병에 굴하지 않고 팔을 벌리고 있어요
스스로 검은 낙인을 찍지 않아 숲과 어울려 자라고 있어요
줄기가 막히면 다른 줄기로
잎이 막히면 다른 잎으로
집착이든 망상이든 꿈을 꾸겠죠
언제나 나를 읽고 쓰면 당당할 수 있어요
육십 퍼센트
우리의 아이가 건강할 확률
하지만 포기하고 싶어요
그저 상상 속에서 욕심을 내어
아이 두 명과 둘러앉은 아름다운 식탁
이제 주절거림 그만해요
빛이 남아 있을 때
고통의 고리를 저 나무에 걸어두고 당신과 잠들고 싶어요
- 윤태원, 「조현병 나무 아래」 전문
사실, 이 시를 읽었을 때 관습적인 표현이 많다고 생각해서 이 글에서 다룰 생각이 들진 않았다. 하지만 시 뒤에 붙은 <시인의 사색>을 읽고, 위의 시가 “성안드레아 병원에 입원해 있는 두 환자가 산책 시간에 숲을 거닐다가 어느 나무 아래에 누워 대화하는 장면을 그린 시”라는 것을 알고는 시를 다시 읽게 되었다. 아마 조현병을 앓고 있을 두 환자에게는 관습적이라고 느껴지는 표현들이 마음의 진실을 정말로 드러낼 수 있는 말들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낯설게 하기’나 ‘독특한 표현’이 과연 시를 성립시켜주는 것일까? 이런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이며, 시에 중요한 것은 그러한 ‘독특성’보다는 사람마다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는 진실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위의 시는 우리 사회의 타자라고 할 수 있는 조현병자들의 영혼과 진실을 이들의 대화를 재구성하여 증언하고자 한다. “혼미해져 악귀가 팔을 벌리면 비명을 질러 쫓아버려야” 하는 지난한 고투의 삶, 그리고 “우리가 결혼하면 아이에게 병이 유전될 확률”이 ‘사십 퍼센트’에, “우리의 아이가 건강할 확률”이 ‘육십 퍼센트’여서 미래를 도모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조현병자 연인. 이들의 대화를 이 시가 얼마나 충실하게 재현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시가 재구성하여 전개하고 있는 그들의 시적인 대화들은 그들의 고통스러운 삶에 들러붙어 있는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고 느껴진다.
위의 시에서 우리는 조현병이라는 굴레에 묶인 환자의 절박한 마음을 절절하게 나타내는 표현들을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위의 시는 사람들이 배척하는 조현병자들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의사의 건조한 설명 속에 갇히기 싫”다는 ‘화자-환자’의 말은, 하나의 의학적 대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조현병자들의 마음을 표현한다. “사슬로 연결된 가족이 사막을 끝없이 걷는” 이미지는, 후대에까지 유전되는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의 처지를 강렬하게 보여준다. “병동의 깜빡거리는 형광등처럼 생각이 자주 끊”기고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매일 약을 먹어야” 한다는 고백은 조현병자들의 병환이 어떠한 것인지 말해준다. “병에 굴하지 않고 팔을 벌리고” “스스로 검은 낙인을 찍지 않아 숲과 어울려 자라고 있”는 ‘저 나무’는 그들의 희망과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다. 화자는 저 나무처럼 되어야겠다는 의지로 병을 이겨내며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마지막 행, “고통의 고리를 저 나무에 걸어두고 당신과 잠들고 싶어요”라는 진술은 그들의 희구가 병의 ‘고리’를 끊고 사랑을 온전히 실현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위의 시는 우리가 외면하고 두려워하기도 하는 타자인 조현병자들이 이른바 정상인인 우리처럼 사랑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살아가고자 희구하는 사람들이며, 다만 병으로 고통받고 있을 뿐임을 알려준다. 이와 함께 이들은 우리와 함께 살 수 있도록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점도 깨우쳐준다. 위의 시 역시 타자들의 존재를 드러냄으로써 우리의 현재 삶을 반성적으로 재인식하고 변화시켜야 할 윤리적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와 관련하여, 일상에서 타자의 존재와 그 의미를 발견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아래의 시가 주목된다. 마지막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창밖으로 싸락눈이 흩날렸다
저녁에는 내 방으로
친구들이 모였다
우리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무엇으로 탄생할지
내기를 했다
지혜는 뱀
은민이는 식충식물
사람을 고르는 쪽은 없었다
케이크의 초를 끄면
눈앞의 모든 사람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하루
생일이 좋았다
내게 말을 거는 자를
적의 없이 바라볼 수 있어서
타인이 건네는 말을
덜 두려워할 수 있어서
코끝에는 연기 냄새
어두워진 세상에서
다들
제 몫의 접시를 쥐고
서 있다는 걸 안다
우리는 형광등을 켜고
김이 무럭무럭 나는 음식에
숟가락을 들이대며 웃었다
케이크를 자르면
빈 공간이 커지고
날 부르는 목소리를
경계하며 살아간다 해도
한 번쯤 불을 껐던 그 입으로
누군가를 새로이 축복할 수 있기를
떠나가는 자가 눈에 남긴 발자국을 보며
겨울이 남긴 화인이라 여겼다
사람들을 배웅하고 돌아오자
머리에선 재 냄새가 났다
- 김보나, 「무국적 발자국」 전문
위의 시는 평범한 일상의 한 국면을 유니크하고 요령 있게 스케치하면서,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사유해내고 삶의 서정을 길어내고 있다. 화자의 생일에 “내 방으로/친구들이 모여” 수다를 떨며 케이크를 잘라 함께 먹는 장면. 흔히 볼 수 있는, 친숙한 장면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장면으로부터 그가 소속되어 있는 젊은 세대의 삶이 맞닥뜨리고 있는 무엇인가를 흥미롭게 잡아내고, 어떤 복합적인 감정을 풀어낸다.
친구들과 “무엇으로 탄생할지/내기를 했”는데 “사람을 고르는 쪽은 없었다”는 진술은, 현재 젊은이들이 갖고 있는 자신의 삶에 대한 인식을 씁쓸하게 보여준다.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하는 사람으로 산다는 일이 그들에겐 피곤하고 힘든 일이라는 인식. “생일이 좋았다”라고 말하면서, “내게 말을 거는 자를/적의 없이 바라볼 수 있”고 “타인이 건네는 말을/덜 두려워할 수 있어서”라고 그 이유를 들고 있는 진술은 씁쓸함을 넘어 슬픔까지 느껴진다. 이 말은 화자에게 말을 거는 사람에게 화자가 적의 섞인 의심을 품고 일상을 살아왔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 의심은 타인이 자신에게 호의를 갖고 말을 걸 리 없다는 자학적인 의심에서 비롯되는 것일 터, 이렇게 관계가 어긋난 채 타인의 말을 의심하고 두려워하며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슬픈 일인 것이다.
타인이 자신에게 거는 말에 대해 피곤할 만큼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생일 케이크에 꽂은 초를 껐을 때 드러나는 상황, 즉 “어두워진 세상에서/다들/제 몫의 접시를 쥐고” 살아야 하는 이들의 삶이 처한 상황 때문이다. 각자도생이 시대 정신이 된 현 사회에서는, “날 부르는 목소리를/경계하며 살아”가게 되고, 케이크를 잘랐을 때 드러나는 ‘빈 공간’처럼 사람들과의 관계는 공허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시인은 공허로 빠지지 않는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음식에/숟가락을” 함께 “들이대며 웃”을 수 있는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친구들의 축복을 받으며 생일 케이크를 자르고 음식을 친구들과 같이 먹는 그 시간은 시인에게 고맙고 소중한 순간이다. 그래서 그는 타인에게도 “한 번쯤 불을 껐던 그 입으로/누군가를 새로이 축복할 수 있는” 호의를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친구들도 화자를 홀로 남기고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길 위의 눈에 발자국을 남기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 발자국은 화자의 머리 속에 ‘화인’으로 찍힌다. 타자가 화자의 삶에 뜨겁게 남긴 화인. “사람들을 배웅하고 돌아오자” 그의 머리에서 ‘재 냄새’가 난 것은 그 때문이다. 위의 시는 타인과 긍정적인 관계를 맺기 어려운 시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삶에서 타자가 얼마나 뜨거운 의미를 갖는지 일상의 한 국면으로부터 발견하는 과정을 과장 없이 보여준다. 따듯한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