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
강 문 석
열지 말라는 판도라 뚜껑을 열었더니 그 속에서 온갖 재앙이 튀어나와 세상에 퍼졌다는 그리스 신화의 판도라 상자는 '뜻하지 않게 일어나는 재앙'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세계 최초로 원전재난을 다룬 영화를 우리나라에서 만들면서 거기에 갖다 붙인 이름이 ‘판도라’였다. 허구로 꾸며지는 게 영화이다 보니 ‘판도라’와 같은 오락영화도 한 번 보고 기억에서 사라지면 그만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판도라’는 원전설비나 지진에 대해 쥐꼬리만 한 지식이라도 가진 사람이라면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작년 9월 경주에서 발생한 규모 5.8 강진은 더 이상 한반도가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원전의 내진설계기준은 규모 6.5 내지 7.0에 맞추어져 있다. 영화가 4년 동안 만들어진 점을 감안한다면 대본을 쓴 작가가 지진을 규모 6.1로 정한 것은 묘하게도 가까운 미래에 발생할 지진의 강도를 기똥차게 맞힌 것이 된다. 하지만 6.1이든 7.1이든 우리나라처럼 다중방호벽을 갖춘 원전설비에선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재난을 단지 영화의 흥행을 목적으로 부풀렸다는 게 문제란 생각이 든다.
영화에 등장하는 원자로는 현직 때 암반 위에 터를 잡아 건설공사를 시작하는 걸 지켜보면서 기공식에서 준공식까지 참석했던 곳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발전소다. 직군이 달라 원전에 몸담아 일할 순 없었지만 80년대 후반부터 20년 가까이 부산시 민방위강사로 ‘원전 안전’을 강의해왔고 90년대 말부터는 대학 강단에서 후학들에게 원자력공학을 가르치느라 원자력발전의 이론과 실무를 두루 살펴야만 했다. 그러고 93년 고베지진 이후엔 민방위 교과목에 ‘지진 대피요령’이 추가되는 바람에 지진에 관한 학습도 필요했다.
영화 ‘판도라’에선 강진으로 원자로 계통에 이상이 발생하면서 방사능이 유출되고 만다. 이어 폐연료봉을 보관한 수조에 균열이 생기고 수소폭발까지 일어난다. 이러한 대재앙 앞에서도 CEO는 냉각을 위한 바닷물 사용을 막고 우왕좌왕하면서 국민과 언론의 눈을 속이기에 바쁘다. ‘판도라’야 영화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실제로 원전재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발생한 후쿠시마원전사고 탓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당시 후쿠시마원전은 지진에는 별 피해 없이 견뎌냈다. 이어 발생한 강력한 지진해일 쓰나미에 원전이 침수되면서 재앙으로 번진 사고였다. 내진설계범위를 초과하는 지진이 발생했음에도 정상적으로 안전기능을 수행하던 원자력발전설비가 뒤이어 몰려온 쓰나미로 인해 외부로부터의 전력공급이 끊겼고 비상발전기마저 가동이 중단되면서 잔열을 냉각할 수 없게 되자 사고가 발생했던 것이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판도라’ 영화가 상영을 시작하자 환경단체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신나하고 있다.
상영관을 빌려 영화를 단체관람하면서 ‘잘 가라! 핵발전소!' 100만 서명운동을 벌이느라 바쁘다. 이들은 영화가 안겨준 불안감을 증폭시켜 반핵운동으로 연결시키려 안달인 것이다. 난 이들에게 진정으로 우리가 우려해야 할 것은 북한이 열어버린 지 10년이 넘는 핵무기 판도라 상자가 아닌가를 묻고 싶다. 조금이라도 위기에 처한 나라의 앞날을 걱정한다면 북한이 무려 다섯 차례나 핵실험을 해대며 우리에게 핵공격을 협박하고 미국을 핵으로 공격하는 동영상을 만들어 무모한 핵 게임을 벌이는 만행을 어떤 식으로든 막아야 한다.
북한의 핵 판도라 상자 개봉은 한반도뿐 아니라 동북아를 넘어 전 세계에 혼란과 전략적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효과적인 방어수단이 없는 우리로선 안타깝게도 미국의 사드체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광장에 나선 어느 사나이는 새로운 간첩 식별법으로 이 땅에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자가 바로 간첩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일전에 우리나라 원전을 총괄하는 공기업 한국수력원자력 본사를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그곳 원전 홍보전시관에서 만난 원자로에 대한 안전관리가 원전건설 초기보다 많이 강화된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원전설비는 해수면보다 적어도 12미터 높은 위치에 건설되고 10미터 높이의 방호벽을 세워 해일에 대비하고 있었다. 또한 3중 비상발전설비를 갖추어 발전소 정전에 대비하면서도 이동용 발전기까지 추가로 배치한다고 했다. 환경단체들이 꼭 둘러보아야할 전시관이란 생각이 들지만 위치가 산중인지라 힘들 것 같았다. 잘나가던 세계 일류 전력공기업을 토막토막 쪼갠 정권은 나라에 큰 죄를 짓고 말았다. 하루 속히 지혜를 모아 복원해야하지만 당장 전체가 어렵다면 원전이 든 한수원만이라도 모기업에 합병해야 한다.
그래야만 논란이 되고 있는 사용 후 핵연료 처분문제도 근본적인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중국에 밀리고 있는 원전수출도 따라잡게 될 것이다. 그러고 적막한 산골의 원전 홍보전시관도 서울의 명동이나 서초동 또는 대전 대구 부산 광주 등 대도시에서 만나는 날이 열릴 것이다. 세계 9위 에너지 소비국이 에너지 소비량의 96퍼센트를 수입에 의존한다면 원전 말고는 그 해결책이 없다는 것쯤은 삼척동자도 안다. 지정학적으로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이다 보니 전기를 다른 나라에서 수입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환경단체들의 주장대로 우리나라 기저부하로서 전체 전력의 30퍼센트를 담당하는 원자력을 없앤다면 부족한 전력을 해결할 마땅한 대안이 없는 게 현실이다. 신재생 대체에너지의 경제성과 공급 안정성이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하기 이전에 만약 원전을 축소한다면 국민들의 전기요금 부담이 늘어나야하고 미세먼지 발생과 전력공급 안정성 저하는 불을 보듯 뻔할 수밖에 없다. 어느 영화평론가는 앞서 흥행했던 재난영화 ‘해운대’나 ‘연가시’ ‘터널’보다 ‘판도라’가 관객 동원에 더 성공할 것이라 내다봤다.
가족애를 그린 휴머니즘 스토리에다 재난이 오기 전에 대처해야 하는 매뉴얼을 담고 있다는 걸 그 이유로 꼽았다. 그러면서 그는 허구로 꾸며지는 게 영화이긴 하지만 ‘판도라’에서의 강한 정부비판은 공교롭게도 혼미한 현 시국과 맞물려 무능한 정부의 컨트롤 타워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판박이라고까지 영화를 추켜세운다. 그런데도 개봉관의 초저녁 관람객은 10여 명 뿐이었다. 새해벽두에 남포동과 광복로를 찾은 관광객들이 적지 않았는데도 ‘판도라’가 아직 세상에 덜 알려진 탓인지 부산극장 매표창구는 썰렁했다.
천만 명 관람객을 넘어선 영화 ‘부산행’을 두고 아무도 영화에서처럼 실제로 좀비가 일상에 출현할까 걱정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영화 ‘판도라’에 대한 댓글엔 원자력발전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고를 우려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똑같이 허구를 다룬 오락영화지만 이렇게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은 좀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 원전 시스템이 안전하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일반인들은 여전히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 홍보기법에도 개선책이 요구된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