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샴에서 칠라스까지 불길한 징조 느끼며 다가가
총격 사건이 발생하기 이틀 전인 지난 6월 20일 오전 5시, 우리 일행은 8인승 밴에 온갖 짐을 싣고 이슬라마바드(Islamabad)를 출발해 북부 카라코룸 히말라야로 향했다. 그리고 오후 7시에 비샴(Besham)에 도착했다. 그나마 여행자가 묵을 만한 숙소인 인터콘티넨탈호텔에 여장을 풀고 사진을 몇 컷 찍어보려 호텔 문 밖을 막 나섰을 때다.
-
- ▲ 1 타르싱마을, 한 무슬림이 오후 7시가 되자 네 번째 기도를 올리고 있다. 2 우리 일행을 에스코트한 길기트 경찰 소속 아크바르 후세인. 3 하산하는 길에서도 소총을 든 경찰의 호위를 받았다. 4 타르싱마을 아이들. 외지인에게 말을 걸고 싶어 안달을 했다. 5 양 가죽으로 만든 자루를 손질하고 있는 현지인. 자루는 우유나 치즈를 만드는 데 쓰인다.
-
순식간에 칼라슈니코프 소총을 든 정복 경찰과 군인, 그리고 무슬림 전통복장을 한 이들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그중 사복을 입은 사내가 “당장 호텔로 들어가라”고 말했다. 백주대로에서 걷는 자유를 박탈당한 나는 “당신은 누구냐?”고 대들었다.
“시큐러티(보안).”
“시큐러티? 오케이. 내가 왜 내 발로 이 거리를 걸어 다닐 수 없는지 설명해 주면 들어가겠소.”
하지만 어이없어 하는 쪽은 무슬림 복장을 한 보안요원이었다. 그는 억울한 일을 당한 것처럼 두 팔을 하늘로 들어 올리는 시늉을 했다. 마치 축구장에서 백태클을 당하고도 심판에게서 옐로카드를 이끌어 내지 못한 선수의 제스처였다. 그러고는 주변을 향해 뭐라고 지껄였다.
“저 외국인이 나보고 ‘와이(Why)’라고 했어, 이상한 사람이야.”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짐작하건대 경찰을 비롯한 파키스탄 군대는 파키스탄 탈레반(Tehrik-e-Taliban Pakistan·TTP)이 외국인을 노리고 있다는 정보를 이미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사실 나를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슬라마바드에서 북쪽으로 200km 떨어진 비샴에서 카라코룸하이웨이(Karakoram Highway·KKH)를 따라 칠라스(Chilas)에 이르는 지역은 예로부터 파키스탄 탈레반의 근거지였다. 특히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가르는 힌두쿠시산맥과 인접한 칠라스가 더욱 그랬다.
이튿날, 비샴을 떠나 칠라스로 가는 길은 경찰의 경비가 더 심했다. 지난해 8월, 바부사르패스(Babusar Pass·4,170m) 인근에서 TTP가 버스 폭탄 테러를 일으켜 시아파 무슬림 십 수 명이 숨졌으며, 6개월 전에는 TTP와 칠라스 인근 지역 주민 간에 총격전이 있었다. 삼엄한 경비는 이 때문이었으며, 비샴에서 칠라스까지 KKH를 지나는 외국인 수송 버스는 물론 현지 로컬버스까지도 지붕에 중무장 기관총을 매단 픽업트럭이 앞뒤로 호위했다. 내부 온도가 38℃까지 올라가는 밴 앞으로 중무장한 경찰이 우리를 에스코트했다. 황량한 인더스강 유역을 지나는 길이 더욱 삭막하게 느껴졌다.
반면, 6월 21일 해질녘에 도착한 칠라스 도심은 아주 평화로워 보였다. 행동을 제약하는 경찰이나 군대도 자취를 감췄다. 나는 시내 한복판 이발소에 들어가 머리를 짧게 깎고, 시장을 어슬렁거리며 바나나와 체리를 사고, 길거리에서 염소 꼬치구이를 들고 사내들과 어울렸다. 나중에 생각하니 경솔한 행동이었다. 칠라스에 묵은 다음날, 이곳에서 약 100km 떨어진 디아미르 사이트에서 외국인 원정대 10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탈레반이 마제노패스 넘어 루팔 BC로 올 수 있어요”
루팔마을을 지나면 약간의 오르막이 나온다. 오르막 길 직전, 왼편으로 야구장처럼 다이아몬드 모양을 한 초지대가 보였다. 마을 청년과 아이들이 편을 갈라 크리켓 게임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언덕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봤다. 곽원주 화백은 보자마자 화구를 꺼내 스케치했다. 설산 아래 크리켓 게임, 인(in)이나 아웃(Out)을 표시한 선도 그리고 않고, 사방팔방으로 뻗친 천연 구장이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
- ▲ 6 카라코룸하이웨이는 사납기로 유명하다. 타고 간 밴의 타이어가 펑크가 나 교체하고 있다. 7 타르싱마을에서 야영. 숙소 뒤편으로 삼각뿔처럼 솟은 라이코트피크가 보인다.
-
하지만 산 너머 불과 20여 km 떨어진 곳에서 간밤에 열한 명의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에 다시금 불안이 엄습했다.
이스마일은 BC로 올라가는 중에도 “그럴 리는 없겠지만, (도주하는 탈레반이) 디아미르에서 마제노패스(Mazeno pass·5,399m)를 넘어오면 여기 루팔”이라며, “아주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고 겁을 줬다. 마제노패스는 낭가파르바트 서쪽 능선의 시발점으로 여기서 낭가파르바트 정상으로 이르는 능선은 ‘히말라야의 난제’ 중 하나로 꼽혔다. 지난해 영국팀이 이 루트로 정상에 올랐다.
-
- ▲ 1 루팔마을에서 베이스캠프 가는 길. 푸른 초지에서 사내아이들이 크리켓 게임을 하고 있다. 그러나 불과 12시간 전, 산 너머에서는 끔찍한 참사가 있었다. 2 루팔 베이스캠프를 지키는 마모트. 카메라를 들이대자 ‘낑낑’ 소리를 내며 위협했다.
-
루팔마을에서 베이스캠프는 2시간이면 족했다. 초지는 끊어질 듯했지만, 빙하 바로 아래까지 이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일행이 찾은 곳은 헤를리히코퍼(Herlligkoffer·3,500m) BC로 불리는 ‘로 루팔(Lower Rupal)’로 트레킹 종착지다. 등반팀의 BC는 서쪽으로 더 들어간 랏부 메도(Ratbu Meadow·3,530m)에 차려진다. 루팔 벽에서 흘러내리는 빙하를 건너 거대한 둔덕을 넘어야 이곳을 볼 수 있다. 이번 시즌 5명으로 꾸려진 루마니아 등반대가 루팔 벽에 도전하고 있었지만, 헤를리히코퍼 BC에서는 루마니아 캠프가 보이지 않았다.
아쉽게도 루팔 정상부는 가스층에 가려 있었다. 꼭대기까지 모두 보여 주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위압적이고 무시무시한 벽이었다. 루팔은 지난 2005년 김창호(44·몽벨) 대장과 고 이현조(2007년 작고)씨가 라인홀트 메스너 이후 35년 만에 이 벽을 통해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올랐다.
-
- ▲ 3 낭가파르바트에서 발원한 아스토르강. 북쪽으로 흘러 나중에 인더스강과 합류한다.
-
촬영을 하고 나니, 오후 5시가 훌쩍 넘었다. 루팔 벽에 취해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그러나 간밤의 소식을 듣고도 야영을 강행하기는 어려웠다. 내려가야 하지만, 만만치 않은 하산길이었다. 이 때문에 멤버들 중에 의견이 갈렸다.
트레킹을 하면서, 장기간 원정대의 일원으로 지내면서 가장 힘든 것이 동행한 이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다. 강력하게 자기 의견을 앞세우면 누군가는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그렇다고 아무 말 않고 참고 견디기만 하면 결국 나중에 폭발해 돌이킬 수 없는 싸움이 된다. 대장부가 아닌 이상, 필부가 겪어야 할 숙명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차분하게 논의했으며, 결국 내려가기로 했다. 결론은 났지만, 내키지 않은 멤버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내려가는 길은 더욱 몸과 마음이 무거웠다. 내려가는 길은 발바닥에서 불이 났다. 우리는 다섯 시간 걸어온 길을 한숨도 쉬지 않고, 곧장 내려갔다. 오후 8시가 되자 사위는 어둑해졌다. 길은 돌과 자갈, 푸석한 모래와 황토가 가득한 삭막한 길이었다. 올라올 때는 구경삼아 와서 힘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위가 어둑해지고, 타르싱까지 가야 할 길에 걱정이 엄습할 무렵 일단의 사내들이 나타났다. 길기트 경찰 복장을 한 사내들이었다. 그들은 어깨에는 칼라슈니코프 소총을 메고, 한 손에는 가시가 촘촘히 박힌 나뭇가지를 들고 있었다.
“그게 우리를 보호할 무기인가요?”
“네. 칼라슈니코프는 첫 번째 무기, 이것은 여분의 무기지요.”
긴박한 상황에서도 유머가 있어 좋았다. 좀더 내려가자 이번에는 길기트 산악부대소속 1개 분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타르싱에서 차로 1시간 떨어진 아스토르(Astore) 주둔지에서 급파한 분대였다. 뜻하지 않게, 경찰과 군대 30여 명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하산했다. 느닷없는 호위에 안심하면서도 ‘보통 일이 아닌가 보구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TTP, 자신들이 ‘거사했다’고 공표
이틀 뒤, 우리는 비교적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스카르두로 들어설 수 있었다. 스카루드 K2모텔에 들어와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TTP의 대변인이라는 자가 동영상을 통해 “우리가 거사를 했노라”고 공표하고, 이유는 수개 월 전 “미국이 TTP 지도자를 죽인 것에 대한 보복”이라며 또 “파키스탄에서 외국인은 나가라는 메시지”라고 덧붙였다. 이해가 되지 않는 궤변이다. 베이스캠프에서 잠자고 있는 등반가를 무차별 학살하는 게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
- ▲ 4 낭가파르바트 루팔 벽과 마주보고 있는 루팔마운틴.
-
우리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서둘러 귀국했다. 사건 발생 한 달이 지났지만, 파키스탄 정부는 공식적인 발표를 내놓지 않고 있다. 올 여름, 낭가파르바트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건의 진원지였다.
히말라야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하는 산악 전문 사이트 익스플로러스웹(www.explorersweb.com)은 디아미르 사건 이후 긴급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낭가파르바트 참사 이후에도 낭가파르바트 등반을 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10명 중 4명은 “이제 파키스탄에 가지 않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20%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겠다”고 했다. 나머지는 “상황이 호전된다면 생각해 보겠다”는 답변이었다.
파키스탄 북부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에이전트, 굴람은 “이제 누가 낭가파르바트를 찾으려 하겠는가”라며 “앞으로 몇 년간 디아미르 사이트는 폐쇄될 것 같다”고 말했다. 파키스탄은 지난해 약 250팀의 원정대와 트레킹 팀이 찾았다. 근래 들어 늘어난 수치다. 그러나 디아미르 사건 이후 파키스탄 등반은 물론 관광 산업이 위협받을 처지에 놓였다.
사건 이후 독일 외교부는 즉각 파키스탄을 ‘여행 위험 국가’로 분류했다. 우리 정부는 이미 ‘여행 제한 국가’로 정해놓고 있다. 미국은 우리보다 레벨이 더 심하다.
디아미르 사이트는 KKH에서 부나르 다스(Bunar Das) 전,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 하루거리에 있다. 베이스캠프는 빙하 지역이라 황량하다. 다아미르 북쪽에 자리한 페어리 메도(Fairy Meadow·3,300m)는 낭가파르바트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힌다. KKH에서 라이코트 브리지를 건너 역시 하루 거리에 있다.
디아미르 사이트는 향후 몇 년간 등반이나 트레킹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페어리 메도나 루팔 사이트는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번 시즌 루마니아 팀이 여전히 루팔에서 악전고투하고 있다. 하지만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이 길을 굳이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문은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TTP는 사건 후 “앞으로도 외국인을 향한 테러를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또 파키스탄 등반 시즌이 열리는 매년 여름, 주기적으로 TTP 소행의 테러가 일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