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구 도입(1905년 봄 서구식 야구가 질례태에 의해 태화관 앞아당 시작)
한국 야구는 1901년 9월 선교를 목적으로 내한한 선교사 질레트(Phillip L, Gillett, 1874~1939)에 의해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한국식 이름은 "길례태" 즉 한국야구의 문익점으로 통한다.
당시 우리 국민들은 스포츠 활동과 같은 사치스런 생활은 감히 머리속에 떠올리지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이땅에 야구를 전해준 것이 그다.
그는 만능 스포츠맨으로 당시 미국에서 국민의 오락으로 자리잡고 본격적인 프로시대에 들어가 있던 야구를 이땅에 전한 사람이다.
그는 내한 이듬 해인 1902년 여름 평양 하령회에 참가시 글러브와 공을 지참 그 곳에 모인 선교사와 학생들이 캐치볼을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야구를 전한 것은 1905년 봄부터 였다고 전한다.
그전 1904년 여름 인사동 길을 걸어가던 그는 한국청년들이 미병사들과 어울려 야구공을 던지고 받는 모습을 목격하고 낯선 서구문물을 접하는 한국청년들의 그 진지함과 흥겨워 하는 모습을 보고 야구를 가르치면 한국청년들을 YMCA홀동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일수 있겠다고 생각한 그는 본국에 선교비품을 주문할 때 야구용품도 같이 주문했다고 한다.
1904년 12월 비로서 한국에 처음으로 야구용품들이 질레트 손에 전달되었다.
질레트는 태화관 앞마당을 지나다 캐치볼을 하는 미국병사들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한국인들을 자주 목격하고 추운 겨울이 지나고 1905년 봄 팀을 조직하고 야구를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야구(격구, 타구로 불리움)의 발상지 (태화관 앞마당)
1907년 YMCA회관 완공되기 이전까지 YMCA 임시회관으로 사용하던 "태화관-서울 종로구 인사동 194번지" 앞마당은 한국 야구의 발상지라 할 수 있다.
태화관은 원래 순화당이었다. 한때는 '이문 안 대신 댁'으로 부리었다. 이 집터는 세종대왕의 8남 영응대군이 영의정 구치관의 아들을 사위로 맞으면서 거쳐로 마련해 준 곳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후 인조가 능양군으로 왕세자의 지위에 있던 시절 이곳에서 살았고 철종조에는 당시 세력가 김흥근이 이 집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문 안 대신댁'으로 불리게 됐고 김흥근은 부용당이라는 인공연못을 만들고 태화정을 짓는 등 화려하게 가꾸었다고 한다.
황성 YMCA 야구단(1905년)
1905년 봄부터 야구장비들을 다루기 시작한 황성 YMCA 야구단은 팀으로서 골격을 갖추어 나갔던 것 같다. 황성 YMCA 야구단은 정식 창단식 행사를 가진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투수 현동순, 포수 허성, 1루수 김연호 등이 주축 선수들이다. 또한 그들은 한국 야구의 개척자라 할 수 있다.
1911년 이후에는 허성과 현동진, 박덕상은 중학야구계에 지도자로 진출 학교 야구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다고 한다.
격구 또는 타구로 불리던 야구(서양식 격구, 타구)
당시 한국에서는 어떤 물체를 막대기로 두들기면서 노는 격구 또는 타구라는 전통적인 놀이가 있었는데, 야구를 당시 사람들은 공을 배트로 때리는 특징을 잡아 '서양식 격구 또는 타구'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한국 최초의 경기(황성 YMCA : 덕어학교)
황성 YMCA 야구단이 출발하고 덕어학교, 여어학교, 일어학교, 등 각종 외국어 학교로 번져나갔고, 이듬해인 1906년 3월 15일 마침내 훈련원에서 황성 YMCA 야구단 과 덕어학교의 일정이 벌어졌다고 한다.
결과는 덕어학교의 3점차 승리로 끝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 경기가 한국인들이 치른 최초의 경기라는 것이다.
한국 최초의 여자 경기(진주에서 시작됨)
1925년 경남 진주에서는 아주 진기한 경기가 펼쳐졌다고 한다.
마산의 남자군이 이곳으로 원정을 와서 여자야구 대결을 펼쳤다는 것이다.
마산 의신여학교에서 막 졸업장을 받아든 졸업생 14명과 4명의 인솔교사가 3월 5일 진주로 넘어와 이튿날 시원여학교 교정에서 이학교 학생들과 야구 경기를 펼쳤다는 것이다.
여학생들은 곁눈질로 배웠을 뿐 기술적인 숙련도는 매우 낮아서 무더기 점수가 솓아져 9회 공방 후 마산 신의여학교가 48-40이라는 스코어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어째든 이것이 한국내 최초의 여자 야구 경기로 기록되어 있다.
경남 야구
1920년 9월 18일 마산청년회는 부산진 청년단 구락부 12명 초청 창신학교 운동장에서 친선 경기를 펼쳐 11-4로 승리할 정도로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던 것 같다.
1921년 6월 노비산 밑에 3천평의 대지에 6천여원의 공사비를 들여 운동장을 만들 정도로 체츅의 열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1921년 마산구락부는 동아일보 마산지사의 후원을 얻어 마산야구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고 한다. 진주를 비롯한 오지인 청도, 밀양, 의령 등지에 팀이 조직되어 서로 방문 친선경기를 펼쳤다는 기록이 있다.
진주의 야구 역사
1925년 도립사범학교, 진주농업학교 등과 경기를 가졌다는 진주보고는 1932년 1936년까지 갑자원 대회 조선 예선전 남선(대구, 부산, 경남 지역)에 출전하였고, 1983년 진주중이 출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두렸한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진주중은 야구부를 부활하여 1960년 중반 전국중학야구대회를 열렸던 것을 기억하는 원로분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진주중학교도 1970년 야구부가 해체되고 만다.
해체 이후 중안초등, 금성초등, 배영초등, 천전초등, 봉래초등학교 등이 진주의 야구 맥을 이어 왔다고 한다. 중앙중학교가 1978년 야구부를 창단하여 이들 초등학교 선수들을 영입했다고 한다. 그러다 3년후 1980년에 다시 해체되고 만다.
당시 선수로는 백진승(마산고 건국대), 하연종(서울명지고), 한수근(마산상고-동아대), 이일용(부산고-동국대-한국화장품), 유창근(마산고), 윤영환(마산고-부산산업대-상무-한국화장품-현 부산경성대학교 감독) 등이 1기고,
진영석(명지고-농협), 여순봉(마산고-한양대), 박성대(마산고), 진상곤(마산고), 박주용 등이 2기고,
임창길, 박종만(마산고) 등이 3기,
조성구, 박병선, 강호근 등이 4기로 활약 했다.
사회인들이 중심이 된 야구는 1976년 창립한 진주야구동호회 필두로 1978년 경상대 Enjoy Baseball, 건우회, 여명, 삼협인쇄 등 줄이어 창립하였다. 지금은 진주야구동호회, 경상대 Enjoy Baseball, 파이어노니어, Top's동호회, 무림페이퍼, 레드윙스(신호제지), 문산 Blue Diamond, J.B.C메니아, 진산야구회, White eagles야구단, 진주성 야구단 등 11개팀이 있다.
참고 : 한국야구사.
경남 스포츠 기록
진주야구동호회 창립 30주년 발간 책자 등에서 발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