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송이 보약큐티 1년 1독 성경통독학교, 24년 6월23일(주일)>
*오늘의 읽을 말씀: 시편 136편~139편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 함이라!
*묵상자료
1.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 함이라!
시편139편은 시편 중의 왕관이란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말씀이다. 이 시편을 보면 다윗의 신앙적인 깊이나 하나님께 대한 탁월한 지식이나 아름다운 표현력이 독자를 압도한다. 시편 139편 1절부터 6절까지는 다윗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쓰고 있다. 오늘 다윗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한 분 하나님을 발견하고 놀라워하고 있다. 자기의 현실과 치부를 속속들이 알고 계시지만 항상 곁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하고 기이하다고 하는 것이다.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나를 이미 아시고, 나도 감당하기 힘든 나를 완벽하게 이끄시는 하나님을 진짜 경험한 사람들은 더 이상 고독하지 않게 된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마치 내 머리 위에 감시카메라가 달려 있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눈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항상 따라다닌다고 말한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의 속마음까지 다 아신다고 했다. 1절을 보면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신다`고 했다. 2절에서는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신다고 했다. 4절에서도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원어를 직역하면 ‘아직 혀에 말이 있기도 전에’ 벌써 아셨다는 뜻이다. 입에서 우물거리고 아직 꺼내 놓지 않은 말도 주님은 아신다는 것이다. 5절에서 다윗은 확신에 차서 말하고 있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 위기에서 그의 목숨을 건져주신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사울왕이 다윗 한 사람을 잡아 죽이지 못한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다. 어떻게 수천 명을 동원해서도 그렇게 번번이 다윗을 놓칠 수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다윗을 앞뒤로 둘러싸고 죽음에 넘겨주지 않으신 것이었다. 우리의 앞뒤에도 하나님이 에워싸고 계신다.
7절부터 12절까지는 어느 곳에나 계시는 무소부재의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7절에 보면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라고 고백한다. 다윗의 생애에 밧세바를 연모해서 불륜을 저지르고, 남편인 우리야를 전쟁터에 보내 고립시켜 죽게 했던 범죄의 순간들이 있었다. 그 순간 다윗은 하나님의 눈을 피하고자 했을 것이다. 탐욕과 갈망이 우리 안에 비누거품처럼 부글거릴 때 하나님의 눈을 피하고 싶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을 피할 수는 없다. 8절에도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고,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다`고 한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모든 것을 벗어나 저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하고 싶은 마음을 다윗은 수도 없이 경험했다. 사방을 에워싸며 점점 다가오는 사울왕의 추격 속에서 죽음의 공포를 날마다 느낄 때 얼마나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겠는가? 하나님이 우리가 어느 곳을 가도 거기에 계신 것은 우리를 붙드시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다윗이 지나고 보니 주님 앞에는 어둠도 어둠이 아니더라고 고백한다. 깜깜한 어둠인줄 알았는데 주님 안에서는 어둠이 결코 우리를 삼킬 수 없다는 것이다. 다윗이 끝이 없을 것 같던 십년 동안의 어둠의 터널을 지나왔다. 우리에게 지금 있는 어둠도 주님 안에서는 결코 어둠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 우리의 모든 영적 어둠이 벗겨지는 것이다.
끝으로 14절부터 21절은 하나님의 기묘하신 창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의 삶을 추적하며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이유를 창조에서 발견한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더욱 확신하게 하는 것이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들었나이다.` 하나님이 왜 나를 만드셨겠냐는 것이다. 다 목적이 있으셨기 때문에 만든 것이고 그래서 나를 그 목적대로 인도해 가신다는 것이다. 인체의 신비를 생각하면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상상을 초월하는 지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귀가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되고 제작된 것인지 생각해 보라. 귀는 음파를 수집해서 고막에 전달한다. 음파는 고막을 진동시키는 데, 고막은 10억분의 1센티미터 정도로 흔드는 미세한 진동을 감지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진동이 귀 속에 있는 체액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리고 신경자극으로 전환되어 뇌로 전달하고 뇌는 다양한 음파를 구분해서 사람소리, 음악소리, 동물소리를 구분해서 인식해 내는 것이다. 얼마나 신비한가? 심장은 어떤가? 심장은 하루 10만번 작동하며 5.8톤의 피를 끊임없이 퍼 올린다. 핏줄의 총길이는 12만km다. 지구둘레가 4만km이니 지구의 세 바퀴 길이의 핏줄이 우리 안에 있는 셈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묘막측 하기만 하다.
그런데 시편기자는 또 하나의 경이로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의 육체만 신비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벌써 주의 눈이 보셨고 나를 위해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몸만 우주처럼 기묘하게 조직하고 짜맞추신 게 아니다. 우주와 같은 우리 일생 전체도 하나님께서 설계해 놓으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태아로 잉태되어 아직 한 날도 되기 전에 하나님의 전지하신 직관으로 장차 우리가 어떤 삶을 살지를 다 책에 기록해 놓았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순간적으로 꿰뚫어 아시는 전지하신 직관력은 하나님만 갖고 계신 능력이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의 마음을 아셨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할 것과 또 다시 회개하고 교회를 세울 인물이 될 것을 아셨던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직관이다. 하나님의 직관은 장차 우리가 몇 살에 무슨 일을 하고, 어떤 결혼상대를 선택하고, 어떤 직장을 갖고, 아이를 몇 명이나 낳을 것이고, 언제 어떤 병에 걸릴 것이고, 이것을 다 아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책에 다 기록하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멋대로 생각하고 내 자유의지로 선택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단순하게 예견해서 그것만 적어 놓은 것이 아니다. 거기엔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에 어떻게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우리를 선하게 인도하실지 꼼꼼한 수들을 계획 해 놓으셨다는 것이다. 17절에서 다윗은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운지,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에 대해 감탄을 쏟아 내고 있다. 참으로 놀랍고 경이로우신 하나님이시다. 할렐루야. 아멘.
https://youtu.be/9W3BOaWfzx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