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 시간여행]
"술통 쫓아 경찰 됐다"... 밴쿠버 첫 공무원은 주류 단속관
'개스타운' 주점에서 도시 탄생... "개스타운, 시 역사의 출발점은 술집"
미국 금주법 시대 밀수품 6만 박스... 캘리포니아 해안서 술 거래 성황
밴쿠버는 문자 그대로 술로 시작된 도시다. '개시(Gassy)' 잭 데이튼이 헤이스팅스 제재소 근처 노동자들을 위해 개스타운에 주점을 열었고, 이것이 개스타운의 출발점이자 밴쿠버시의 기원이 됐다.
이후 밴쿠버는 술과 주류를 둘러싼 다채롭고 때로는 문제적인 역사를 이어왔다. 밴쿠버의 가장 오래된 산업 중 하나인 주류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들을 살펴보자.
1886년 5월 10일 밴쿠버가 처음 설립됐을 때, 이 작은 지역사회에는 존 스튜어트라는 단 한 명의 경찰관만 있었다. 불과 몇 달 후, 1886년 밴쿠버 대화재가 발생해 도시 대부분이 잿더미가 됐다.
몇몇 주민들은 화재에서 위스키 통을 구하기 위해 현재 밴쿠버 항구가 있는 해변으로 옮겼다. 화재 다음 날, 위스키 통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고, 일부 사업가들이 보트에 실어 도주하려 했다. 말콤 맥클린 시장은 그 자리에서 잭슨 에이브레이를 경찰관으로 임명해 위스키를 되찾아오는 임무를 맡겼고, 에이브레이는 이후 수년간 경찰관으로 근무했다.
초창기에는 주류 판매법이 매우 느슨해 주점이 24시간 운영될 수 있었다. 일부 규칙(선거일 판매 금지, 주류 면허 필요)이 있었지만, 규제는 제한적이었다. 금주법 개념이 확산되면서 규제가 강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1917년에는 BC주에서 모든 알코올 음료의 판매가 제한됐다.
SS 비버호는 BC주 남부 해역을 항해한 가장 유명한 선박 중 하나로, 1836년 허드슨 베이 컴퍼니를 위해 운항을 시작한 이 해안의 첫 증기선이었다. 이 배는 수십 년 동안 해안을 따라 새로운 지역에 접근하고 지역사회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88년 7월 26일, 스탠리 파크의 프로스펙트 포인트 바위에 충돌하며 비버호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공식적인 사고 원인은 강한 바람이나 안개로 추정되지만, 당시 기록에 따르면 두 가지 다른 증언이 있었다. 한 증언은 비버호의 선장 조지 마르샤가 음주 운항으로 유명했다는 것이고, 다른 증언은 술에 취한 승객들이 더 많은 술을 사기 위해 밴쿠버로 돌아가자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BC주에서 금주법은 1917년부터 1921년까지 불과 몇 년밖에 지속되지 않았지만, 미국에서는 10년 이상 지속됐다. 밴쿠버의 지리적 위치 덕분에 럼주의 밀매는 큰 사업이 됐다. 가장 유명한 선박은 말라핫호로, '럼로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5개의 돛대를 가진 거대한 범선이었던 말라핫호는 1917년 빅토리아에서 건조되어 1920년대 초에 주요 럼주 밀매 선박이 됐다. 이 배는 최대 6만 박스의 주류를 실을 수 있었으며, 캐나다에서 합법적으로 생산된 술을 싣고 캘리포니아 해안의 국제 해역으로 항해했다. 그곳에서 더 작고 빠른 보트들이 불법으로 술을 시장에 유통시켰다.
BC주에서 금주법이 1921년에 끝났지만, 모든 주류가 허용된 것은 아니었다. 놀랍게도 보드카는 밴쿠버와 BC주의 다른 지역에서 불법이었다. 1955년 밴쿠버 선 사설은 "BC주 주류통제위원회의 보드카 취급 거부는 최근 재고와 판매 방법의 개선에도 불구하고 LCB의 근본적인 대중무시 태도가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며 이를 비판했다.
1958년 보드카는 정치적 이슈가 됐고, 제한이 완화됐다. 사니치의 존 티스달 주의회 의원은 "보드카가 국민 음료가 된다면 이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일이 될 것"이라며 판매에 반대했지만,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에 규제는 점차 완화됐다.
1959년 당시 밴쿠버에서 보드카를 구매하는 과정은 매우 까다로웠다. 한 박스 12병 까지만 구입이 가능했고, 고객들은 수수료와 함께 신청서를 빅토리아에 우편으로 보내고 최소 6주를 기다려야 했다. 한 박스의 가격은 60달러로, 현재 가치로 약 630달러에 해당했다.
결국 법이 개정되어 단일 병 판매가 허용됐고, 지금은 보드카 기반 음료가 BC주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주류 중 하나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