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법(無爲法)의 힘
所以者何오 一切賢聖이 皆以無爲法으로 以有差別이니이다.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모든 현성이 다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금강경』의 본뜻을 잘 나타내므로 사구게(四句偈) 만큼이나 널리 인용되고 있다.
모든 눈뜬 사람, 마음의 눈이 밝게 열린 사람은 ‘해도 함이 없는 법’으로 차별을 둔다. 라고 한다.
이것은 온갖 가르침, 온갖 경전이 모두 함이 없는 한 가지 법의 한 마음으로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러니 차별에 매달릴 것이 아니다. 차별(差別)이라고 하니 우선 초기 불교 교리를 떠올릴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삼승(三乘)을 위해 각각 근기에 맞는 방편을 설하셨다.
성문(聲聞)을 위해서는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사성제(四聖諦)를 설하셨고
연각(緣覺)을 위해서는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의 십이인연(十二因緣)을 가르치셨다.
또한 보살들을 위해서는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반야(般若)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실천덕목을 주셨다.
그 사람 사람의 수준에 따라 나열했지만 사실은 한 맛이다.
그것은 했으되 함이 없는 도리, 즉 무위법(無爲法)인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들도 제각각 부처님의 별의별 그물코에 다 걸려 있다.
“나는 불교가 무엇인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방생 갈 때 재미있더라.
동참금 조금만 내면 가만히 앉아서 공기 좋고 경치 좋은데 가서 착한 일 할 수 있으니.”
“나는 후손도 없이 돌아가신 삼촌 제사 지내는 데에 불교가 필요하더라.”
“나는 절하는 것이 그저 좋더라.”
“나는 염불 삼매에 빠지는 것이 흐뭇하더라.” 하는 식으로 나름대로의 방편에 걸려 있는 것이다.
각자 개인의 취향과 관심사와 수준에 따라 분별되는 것이지만
결국은 불교라는 근본 그릇 속에 다 포함하는 것이다.
이렇게 밖으로 드러나는 행위뿐만 아니고 우리 개인의 의식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눈, 귀, 코, 혀,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온갖 것들을 낱낱이 분별할 뿐만 아니라
의식 작용도 끝없이-끝없이 자아낸다.
하루 동안에 일으키는 마음 작용을 다 정리해 놓으면 아마도 팔만대장경만큼이나 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현실적으로 삶을 펼쳐가는 것은 가지가지 차별적인 것이다.
이와 같이 하루 동안에도 많고 많은 분별을 하고,
심지어는 지금까지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끊임없이 자아내고
또 앞으로도 끝없이 계속 자아내겠지만 그것이 나온 근원 자리를 찾아보면 도저히 찾을 길이 없다.
도대체 그 근원 자리에는 얼마나 많고 많은 마음의 양이 있기에
이렇게도 낱낱이 차별하는 의식을 벌일 수 있나 하고 찾아보려면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그 자리는 석가도 달마도 찾을 수 없다.
“토끼의 뿔을 베어 오라.”
“거북이의 털을 가져오라.”라고 하면 구해 오지 못한다.
왜냐하면 원래로 토끼는 뿔이 없고, 거북이는 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처럼 하나의 오차도 없이 작용하게 하는 힘, 그 근원 자리를 찾으면 찾을수록 없다.
그 까닭은 우리의 노력과 깨달음이 부족하여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텅-비고 적적(寂寂)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또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없는 것도 아니다.
없다면 아예 의식 작용이 생기는 것조차 못하니까.
그러니 분명히 있기는 있다. 그러하기에 무한히 의식 작용이 흘러나올 수 있는 것이다.
죽은 물건이 아니므로 무한히 계속하여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자리, 무한히 펼쳐지게 하는 그 자리,
본질적으로 고요하고 텅 빈 바로 그 자리가 무위법(無爲法)일 것이다.
그 자리 외에 무위법이 있다면 무위법이 아니다. 있는 자리이니 유위법(有爲法)이 된다.
유위법은 없앨 수 있고, 없어지는 법이다.
없어질 수 없고 없앨 수 없는 무위법이므로 얼마든지 그 어떤 것도 나올 수 있다.
부처님도 거기 바로 그 무위법에 근거를 두었기에
어떠한 경전도 설할 수 있었고 팔만대장경도 설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근본 생명체에서 전개되는 오묘한 실상을 보고 가르침을 남김없이 펴셨지만,
그 근본 자리를 들여다보니
아직도 무궁무진한 진실이 많이 남아 있어서 천지가 끝날 때까지 말을 해도 다 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하루는 나무 밑에서 쉬고 계시다가 손에 나뭇잎을 훑어 제자에게 물으셨다.
“제자여, 내 손 안에 있는 나뭇잎 수는 얼마나 되겠는가?”
“5~6개 정도입니다.”
“그러면 저 나무에 달려있는 나뭇잎의 수는 얼마이겠는가?”
“저 나무 나뭇잎의 수는 너무나도 많아 도저히 셀 수가 없습니다.”
“내 설법도 그러하다. 내가 그동안 진리를 설한 것은 내 손안에 있는 나뭇잎의 수와 같고,
아직도 설하지 못한 그 자리에 있는 설법은 저 나무에 달려 있는 나뭇잎 수와 같다.”
이와 같이 우리의 진실 생명 자리에는 엄청난 힘과 에너지가 있다.
그런 엄청난 힘은 석가, 달마와 같은 성현이라고 해서 더 많은 것이 아니고
우리 중생이라고 해서 적은 것이 아니다. 누구나 똑같이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있는 무위법의 실체를 이와 같이 바로 알고
계발하여 쓴다면 상상으로 요량할 수 없는 힘이 나온다.
진실로 우리가 지닌 무위법의 힘은 천 개의 태양보다도 더 크다고 하겠다.
- 무비 스님 – 금강경 강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