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막(酒幕)에서
김용호
어디든 멀찌감치 통한다는
길 옆
주막
그
수없이 입술이 닿은
이 빠진 낡은 사발에
나도 입술을 댄다.
흡사
정처럼 옮아오는
막걸리 맛
여기
대대로 슬픈 노정(路程)이 집산(集散)하고
알맞은 자리, 저만치
위엄 있는 송덕비(頌德碑) 위로
맵고도 쓴 시간이 흘러가고......
세월이여!
소금보다 짜다는
인생을 안주하요
주막을 나서면,
노을 비낀 길은
가없이 길고 가늘더라만,
내 입술이 닿은 그런 사발에
누가 또한 닿으랴
이런 무렵에
(시집 『날개』, 1956)
[어휘풀이]
-노정 : 목적지까지의 거리, 또는 목적지까지 걸리는 시간, 거쳐 지나가는 길이나 과정
[작품해설]
1935년경부터 창작활동을 시작한 김용호는, 노자영(盧子泳)이 주재한 『신인문학』에 시 「첫여름 밤 귀를 기울이다」를 발표한데 이어, 민족의 비분을 읊은 장시 「낙동강」(1938)을 발표한 후 『맥』 동인이 됨으로써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펼치게 된다. 현실 인식이 남달리 강했던 그는 일제 말 붓을 꺾고 침묵을 지키다가 제2시집 『해마다 피는 꽃』(1948)에서 민족의 암담한 시절의 비분을 노래한다. 그 후 시집 『푸른 별』에서는 소시민의 인정과 애환을 다루는 서정적인 경향으로 기울었으나, 후기 시집 『의상 세례』에서는 다시 역사적 현실 인식을 보여 준다.
이 시는 인생을 나그네 길에 비유하여, 나그네가 거쳐가는 주막의 소박한 분위기와 막걸리의 털털한 맛이 어우러져 순박한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잔잔히 느끼게 해 주는 감상적인 서정시이다.
1연은 도입부로, ‘길옆’과 ‘주막’을 각각 한 행으로 처리하여 ‘어디든 멀찌감치 통하는’ 주막의 위치를 소개하고 있다. 2연은 서민적인 주막의 정취를 읊은 부분으로, ‘수없이 입술이 닿은 / 이 빠진 낡은 사발에’ 화자인 ‘나’도 입술을 대고 있다. 3연에서는 화자가 ‘정처럼 옮아오는 막걸리 맛’을 느낀다로 함으로써 그가 낡은 사발을 사용했던 서민들의 삶에 대해 애정을 느끼고 있음을 알려 준다. 4연에서는 서민들의 인정과 나그네의 고독, 그리고 민중들의 애환을 간직한 곳이 주막임을 말한다. 5연은 ‘세월이여!’라는 탄식을 통해 세월의 덧없음에 대한 허망함뿐 아니라, 송덕비의 하찮음에 대한 비웃음까지 드러낸다. 6연은 삶에 지친 화자가 주막을 나서는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7연은 나그네 같은 인생길의 끝없는 여정을 상징적으로 제시한다. 8연에서는 내일 ‘이런 무렵에’ 자신이 마시던 그 사발에 누군가 입술을 대고 술을 마실 것인가를 반문하는 표현을 통해 서민들의 소박한 인정이 계속될 것임을 보여 준다.
[작가소개]
김용호(金容浩)
만석(萬石), 학산(鶴山), 야돈(野豚), 추강(秋江)
1912년 경상남도 마산 출생
마산상업학교 및 일본 메이지(明治)대학 전문부 법과 졸업
1935년 『신인문학』에 시 『첫여름밤 귀를 기울이다』를 발표하며 등단
1946년 에술신문사 주간
1956년 단국대학교 국문과 교수 역임
1962년 한국펜플럽 부회장
1973년 사망
시집 : 『향연』(1941), 『해마다 피는 꽃』(1948), 『푸른 별』(1952), 『남해 찬가』(1952), 『날개』(1956), 『항쟁의 광장』(1960), 『의상 세레』(1962), 『시원 산책』(1964), 『김용호시선집』(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