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2월12일 [(녹)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수도회] 매순간 하느님의 표징을 발견하며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야고 1,1-11
† 복음 마르 8,11-13
◈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께 지혜를 청하라고 권하며
이렇게 덧붙입니다.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청하거나 기도할 때는 하느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가장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사실 신앙생활의 어려움은 많습니다. 그중 하나는
하느님을 눈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지요. 볼 수 없는 하느님, 들을 수
없는 하느님, 만질 수 없는 하느님을 철저하게 믿고 따라야 하기에
신앙생활이 어려운 것이지요. 굳은 신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며
바리사이들의 요구를 일축해 버리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병을 고쳐 주신 것도, 빵을
많게 하신 기적도 보았지요. 그런데도 계속하여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도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잘 알면서, 어려움이
닥치면 바리사이들처럼 하느님께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지요.
아침이면 어김없이 날이 밝고,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꽃이 피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것……. 이 모든 것이 현실 세계 안의 기적이
아닙니까? 이런 현상들이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표징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 현실 속의 기적들을 대하며, 하느님의 현존을 늘
체험하여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표징을 요구하기 전에
2018년 나해 2월12일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제1독서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리하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이다."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1,1-11
복음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1-13
스페인 바르셀로나는 엄청난 관광지입니다. 그런데 이곳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관광지가 된 것은 한 사람 덕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의 작품으로 인해 어마어마한 관광수입을 올릴 수가
있었고, 이로 인해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 주정부는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까지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평생 곡선 건물만을
건축한 안토니오 가우디입니다. 성가정 성당, 구엘공원, 구엘저택 등의
건축물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가우디의 천재성에 모두 감탄을 하지요.
이러한 건축물은 신이 만든 기적과 같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의 천재성을 일찍부터 사람들이 알아차렸을까요?
그는 건축학교에 다닌 것이 학력의 전부였습니다. 건축학교 때에도
성적이 너무 나빠서, 회의를 거듭한 끝에 졸업시켜 주기로 결정할
정도였지요. 졸업식장에서 교장은 가우디를 향해서 “우리가 천재에게
졸업장을 주는지, 바보에게 주는지 모르겠다.”는 말까지 덧붙였다고
합니다.
이런 그를 알아본 한 인물이 바로 구엘 백작이었습니다. 가우디의
재능을 알아본 한 사람이 바르셀로나를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말하는 모든 건축물은 가우디를 알아본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 가능해졌습니다. 알아봄으로 인해 기적이 나온
것입니다.
누군가를 알아본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할 때 가능합니다.
즉, 그 사람의 편에서 생각하고 바라볼 때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반적인 모습은 어떨까요? 자기 생각의 틀에 빠져서 상대방을
인정하기보다는 부정하고 또 이로 인해 거부할 때가 더 많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우리 곁에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을 스스로 거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표징을 요구하는 바리사이들을
향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많은 기적을 베풀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합니다. 왜 그럴까요? 병자의 치유만으로는 믿기 힘들었을까요?
빵의 기적으로도 부족했을까요? 바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기적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 역시 많은 표징을 주님께 요구합니다.
그러나 표징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삶 안에서 함께 하시는 주님을
알아봐야 합니다. 나의 이웃들과 함께 하시는 주님을, 사랑의 삶 안에
계시는 주님을 알아볼 때 주님께서 주시는 표징이 하나둘씩 보일
것입니다.
신이여,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꿀 수 있는 의지를, 그리고 이 둘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외부입니다.
명태, 노가리
명태는 대구와 함께 대표적인 한류성 어종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겨울에
잡히는 명태는 러시아의 오호츠크해와 베링해에서 형성된 한류대를
따라 동해로 내려온 것들입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동해안의 해수
온도가 점점 올라가면서 이제 명태가 잡히지 않습니다. 이를 두고
지구 온난화에 따른 환경 변화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동해에는 개펄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정화작용을 하는
개펄이 동해에는 없어서 농업용수와 축산용수가 그대로 바다로
흘러감에 따라 해수 온도가 올라가는 것이랍니다. 명태는 민물의
은어나 쏘가리처럼 일급수를 따라다니며 회유하는 어종이어서 점점
더러워지는 동해바다를 피해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어자원의 고갈이라고 합니다. 작은 명태까지 모두
잡아버려서 이제 씨가 마른 것입니다. 아마 ‘노가리’를 많이 드셔보셨을
것입니다. 이 노가리가 바로 명태 새끼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보기
힘들지 않습니까? 요즘도 있다고 하시는 분들은 우리나라 노가리가
아니라, 수입산 노가리를 드시는 것입니다.
개발만 최고로 생각하는 인간의 어리석은 욕심을 줄여나가면서 함께
살아가는 공생의 길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모두 잘 살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 안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주변에 대해서
조금만 관심을 갖고 살아간다면 어떨까요? 그만한 배려를 할 수 있을
것이고 함께 살아가는 길을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심과 욕심이 자연의 질서를 깨뜨리고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가우디의 구엘공원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매순간 하느님의 표징을 발견하며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2월12일 연중 제6주간 월요일 마르 8,11-13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 8,12)
매순간 하느님의 표징을 발견하며
예수님께서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여주신 뒤, 바리사이들이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보여 달라며 예수님께 시비를 겁니다(8,11).
사실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통치로 도탄에 빠진
이스라엘을 구원해줄 정치적 메시아를 고대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적 예언자임을 밝혀주는 증거를 요구한 것입니다.
이제껏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가르침과 치유와 구마를 통해
메시아이심을 보여주셨지요.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능력과
권위를 보여주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인정하려들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현실문제를 해결해주는 정치적
메시아이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성과 감각으로 증명되는
확실한 증거를 요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완고한 마음과 불신에 대해 “영으로
한숨을 쉬시며”(8,12), 그들이 요구한 표징을 단호히 거부하십니다.
왜냐하면 찾아야 할 진정한 표징은, 기적이나 이기적인 욕구 충족이나
제 입맛에 맞게 움직여주는 능력자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분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이야말로 갈망해야 할
진정한 표징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지요.
우리는 어떤 표징을 갈망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탐욕과 쾌락을
추구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한, 하느님의 사랑의 표징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하여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핵심적이며
궁극적인 표징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바라보고
갈망해야겠습니다.
돈과 권력과 명예, 인간이 만들어내는 그럴싸한 결과물들, 시선을 끌고
마음을 사로잡는 세상의 현상들이 끈질기게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찾는 표징은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고통을 품고 견뎌냄으로써, 모두를 사랑하고 더불어 행복해지는
길이신 예수님이, 바로 우리가 찾는 참 표징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황홀한 신비체험, 하늘에 나타난 십자가, 눈물
흘리는 성모상, 오상 체험, 방언, 이해할 수 없는 치유능력과 같은
특이한 현상이나 표지들에 괸심을 쏟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참 신앙은
이성적 명료함이나 현상에 있지 않고, 하늘의 표징 자체이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데 있음을 상기해야겠습니다. 표징은 주님 사랑의
표지이자 우리 믿음의 열매입니다.
사실 예수님과 함께 호흡하는 일상의 매순간이 바로 하늘의 표징이지요.
우리가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것들과 세상의 힘만 추구할 때,
예수님께서는 깊이 탄식하실 것입니다. 오늘도 사랑의 표징, 고난
속에서도 함께하는 부활의 표징을 보이며 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열린 마음으로 응답했으면 합니다. 좋음이신 주님을 거스르는 '악한
세대'가 되지 말아야겠지요!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돈이 많다고 부자는 아니잖아요?
2018년 나해 2월12일 연중 제6주간 월요일
돈이 많다고 부자는 아니잖아요?
우연히 작년 가을 방영된 ‘인간 극장’에 등장한 중2 농부 한태웅 군의
스토리를 보았습니다. 기특하기도 하고 특별하기도 해서 혼자서
한참을 웃었습니다. 해맑은 사춘기 소년이지만, 새마을 모자에, 농사용
장화에, 느릿느릿한 말투에, 영락없는 중견 농사꾼이었습니다.
장래 희망은 ‘할아버지 같은 멋진 농부’랍니다. 꼭 갖고 싶은 것은
‘힘좋은 트랙터’랍니다. 피곤해서 잠시 드러누워 있는 아버지를 향해,
일거리가 저렇게 산더미 같은데, 이렇게 누워있으면 어떡하냐며 호통을
칩니다. 직접 기른 닭과 계란을 동네 어르신들에게 배달해드리고,
팔아서 할아버지 할머니 용돈도 드립니다.
다음의 말을 중2 짜리가 한 말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돈이 많다고 부자는 아니잖아요? 돈만 많으면 뭐해요? 행복해야지.
농사도 짓고 가축도 키우면서 대농(大農)이 되고 결혼해서 지금 계신
가족들과 행복하게 사는거, 그게 제 목표예요.”
“한 2백평, 한 마지기 논으로도 대농이 될 수 있고, 염소 다섯 마리로도
대농이 될 수도 있어요. 혼자 돈 갖고 혼자 살면 뭐해요? 저는 먹고 살
만큼만 벌고, 남한테 욕 안 듣고, 제가 남들에게 베풀면서 가족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자신도 모르게 경제지상주의나 물질만능주의에 푹 젖어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큰 경종을 울리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듯이 은연 중에 ‘돈이면 다’라는 천박한 자본주의 논리의 덫에
묶여있는 우리가 귀담아 들을 말입니다. 어떻게든 이웃을 밟고
올라서겠다는 살벌한 야수의 눈빛으로, 바벨탑 쌓아올라가듯, 끝도
없는 재물의 탑을 쌓아가는 사람들, 정말이지 귀여겨 들을 말입니다.
그 모든 수모 당해가면서, 청춘과 평생을 바쳐가면서 쌓아올린 그
허황된 탑, 그러나 그 재물 한번 마음 놓고 써보지도 못하고,
식물인간으로 누워계신 분들의 얼굴도 떠오릅니다. 탑을
쌓아올리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지, 절대로 이웃들의 고통스런 얼굴을
돌아볼 여유가 없이 살다가 죽음을 목전에 둔 분들의 얼굴도
떠오릅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도 우리들의 폐부를 깊숙히 찌릅니다.
“비천한 형제는 자기가 고귀해졌음을 자랑하고, 부자는 자기가
비천해졌음을 자랑하십시오. 부자는 풀꽃처럼 스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해가 떠서 뜨겁게 내리쬐면, 풀은 마르고 꽃은 져서 그
아름다운 모습이 없어져 버립니다. 이와 같이 부자도 자기 일에만
골몰하다가 시들어 버릴 것입니다.”(야고보서 1장 9~11절)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연중 제6주간 월요일
동창 신부님 중에 운동을 잘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탁구, 테니스,
스키를 거의 선수 정도의 수준으로 잘 합니다. 저는 흉내는 내지만
동창 신부처럼 잘 하지 못합니다. 동창 신부와 저는 딱 하나 차이가
있었습니다. 동창 신부는 시간이 걸려도 먼저 기초를 잘 익히는
것입니다. 꾸준히 기초를 익히면 길이 보이고, 길이 보이면 쉽게,
편하게 운동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기초를 충실하게 하지 않으면
몸에 무리가 오고, 운동을 하지만 실력이 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기초를 제대로 배우지 않고 먼저 운동을 하면 나쁜 습관이 굳어져서
어느 정도는 하지만 어려운 단계로 나갈 수 없다고 합니다.
초대교회의 순교와 신앙을 다룬 영화중에 ‘Quo Vadis Domine’가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고, 박해의 두려움과 공포가
너무 커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 앞에 주님께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께
이렇게 말을 합니다.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로마로 갈 것이다.’ 이 말씀에 베드로 사도는
다시금 용기를 내고,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마저 던져 버리고 주님과
함께 로마로 가서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베드로 사도에게 이제 어디로
가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그곳이 어느
곳이든지 상관이 없었습니다.
지난주에 동창 신부들과 함께 며칠 동안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휴가를
떠나는 장소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휴가를 ‘누구와 함께
가느냐!’도 중요합니다. 마음이 맞고, 뜻이 통하고, 오랫동안 우정을
함께 나누었던 동창 신부들과의 휴가는 어디를 가도 즐겁고 재미있는
휴가이기 때문입니다. 가는 곳이 비록 생각보다 아름답지 않았다고
해도, 교통이 불편했다고 해도, 고생을 했다고 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그것도 추억이고, 즐거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은 인사이동이 있는 날입니다. 신부님들은 이제 정들었던 본당과
임지를 떠나서 새로운 곳으로 가게 됩니다. 사제생활을 하면서 자주
겪게 되는 일이지만 정든 곳을 떠난다는 것은 언제나 부담입니다.
새로운 곳에서 적응을 하는 것도 또한 긴장입니다. 그러나 사제들이
아무런 조건 없이 새로운 곳으로 향해 가는 것은 주님과 함께 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곳이 어느 곳이든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먼 길을 떠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어디에 있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더 중요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삶은 그곳이 어느
곳이든 이미 행복한 삶이고, 이미 은총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표징을 요구하지마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2월12일연중 제6주간 월요일(마르8,11-13)
표징을 요구하지마라.
미국에서 교포사목을 할 때입니다. 성당 앞뜰에 성모님 상을 모시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 마음을 안 어떤 분이 “한국 어느 성당에
모셔진 성모님은 성모상에 머리를 갖다 대면 꼭 안수하는 모습인데
기적도 많이 일어난답니다. 그 성모님 상을 모신 곳이 어딘지 알아보고
그런 성모님을 모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쁜
성모님을 모시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고 은총도 그 만큼 더 크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일반 판매용 성모상도 눈을 쌍꺼풀
해야 한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만 사람들은 신비한 현상에 민감합니다. 어디에 어떤
기적이 있다고 하면 그곳에 쫓아가고 그 혜택을 입고자 애를 씁니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 신비한 현상이나 기적을
통하여 드러내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찾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 더 많은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현실입니다.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주어진 은총의 열매에 매달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찾기보다 자신이 하느님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베풀어 주셨음에도 종교지도자들의 불신은 계속되고 결국
주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집과 몰이해 속에 믿음이 없는 완고한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자기들의 욕구에 맞는 것만을 요구하고 이미 보여 진 표징을 올바르게
보려하지 않고 또다시 표징만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내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일도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보여주기 위해서
오신 쇼맨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보여주기 위한 기적,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진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기적을 많이 보고 체험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기적의 삶을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기적이
믿음을 가져오기보다 믿음이 기적을 낳습니다. 어떤 성모님 상을
모시든 그 앞에서 그분의 마음으로, 그분의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면
기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랑을 베풀고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며 소외된
사람들의 상황을 바꾸어 주시고 영원한 삶을 살게 해 주어도 그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살아있는 기적입니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기적을 베풀어 준 것은 그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적 사건 안에 담긴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현상을 쫓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기적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하늘의 기적이
아무리 많이 일어난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무엇을 보여
달라고 조르지 말고 여러분이 기적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주님, 표징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눈과 깨닫는 마음을
주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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