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12. 11.) KBS ‘진품명품’ 프로그램에는 세로로 긴 서예작품이 하나 출품되었습니다.
바로 고종 황제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義親王) 이강이 쓴 글씨입니다.
작품에는 의친왕이 아닌 ‘이강공(李堈公)’라고 쓰여 있어
고종황제 때 의친왕으로 책봉되었지만,
일본에 국권이 빼앗긴 뒤 왕이 아닌 ‘공(公)’으로 격이 낮춰졌음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의친왕은 조선 왕족 가운데 유일하게 항일운동에 참여한 인물입니다.
▲ 의친왕(왼쪽), 의친왕 망명 미수사건 기사(조선일보 1920. 6. 30)
의친왕은 1919년 독립운동 단체인 ‘대동단(大同團)’의 전협(全協)ㆍ최익환(崔益煥) 등과
상해 임시정부로의 탈출을 모의하였으며,
계획을 실행에 옮기던 도중
그해 11월 만주 안동(安東)에서 일본 경찰에게 들켜 강제로 송환되었지요.
1919년 11월 20일 자 독립신문 기사에는 "의친왕 전하께서
상해로 오시던 길에 안동에서 적에게 잡히셨도다.
전하 일생의 불우에 동정하고 전하의 애국적 용기를 칭송하던 국민은
전하를 적의 손에서 구하지 못함을 슬퍼하고 통분하리로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의친왕은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낸 편지에
“나는 차라리 자유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 정부의 친왕(일왕의 아들이나 형제)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 한인들에게 표시하고,
아울러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에 몸 바치기를 원한다.”라고 썼습니다.
이후, 일제로부터 계속해서 일본으로 올 것을 강요받았던 의친왕은
끝까지 거절하여 배일 정신을 지켜내었으며,
1940년 창씨개명령이 떨어졌을 때 창씨개명을 거절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뒤 의친왕은 주색에 빠지거나 미친 것으로 가장하여 일제 감시의 눈을 피해 살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