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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7. 묵상글 ( 연중 34주간 목요일. - 종말 관상이 주님 관상이 되는.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직 / 04:38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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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7. 연중 34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11.27 04:33
- 종말 관상이 주님 관상이 되는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권능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요즘은 세상 달력으로나 교회 달력으로나 좀 스산합니다.
추워지고 나무에 이파리들이 다 떨어져 버린 데다가
미사의 독서와 복음은 계속 종말에 관해 얘기하니 말입니다.
그러기에 자칫하면 우울한 감정에 머물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잘 아시겠지만, 우울한 감정에 머묾은
인간적인 것이고 그런 뜻에서 비신앙인 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왜냐면 신앙이 없는 사람은 세상의 종말과 함께 자신도 종말을 맞게 된다고
생각하기에 주님 말씀처럼 까무러치게 되겠지만
신앙인은 종말이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오시는 것이니
필리비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 신앙인인지 아닌지는 종말 상황에서 잘 드러날 것입니다.
비신앙인이고 세속적인 사람은 공포에 휩싸이고 두려움 때문에 까무러치지만
신앙인은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라는 오늘 주님 말씀처럼 주님을 봅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는 말씀은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라는 말씀이고,
기도하라는 말씀이며 기도 중에서도 관상적인 기도를 하라는 말씀이지요.
이 참 신앙인의 모범으로 이번 주간 독서는 다니엘서를 읽는데
오늘 독서의 다니엘이 바로 사자 앞에서 주님을 본 사람이지요.
사자 앞에서 주님을 본 다니엘처럼
죽음 앞에서 주님을 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참 신앙인이라면 종말 관상이 주님 관상으로 이어지는
그런 기도를 해야 함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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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7. 연중 34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늘 인도자이자 보호자이신 주님과 함께>
“주님, 세세대대에 찬송과 영광을 받으소서.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당신 이름은 찬미받으소서.”(다니3,52ㄴ-ㄷ)
어제 신문은 지난 11월 25일 <영원한 현역>으로 살다가 새벽 91세로 별세한 국민배우 이순재씨에 대한 기사로 한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아름다운 삶을 살았는지 알게 됩니다. 무신론자의 삶이었다 고백하지만 참으로 양심에 따라 최선을 다해 살아온 모범적 삶이 감동을 줍니다. 이분이 남긴 잠언성 말마디도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연기에 완성이란 없다, 죽을 때까지 도전해야 한다.”
“배우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무조건 작품 그 자체다.”
“무대에서 쓰러져 죽는 것이 가장 행복한 죽음이다.“
“예술이란 영원한 미완성....나는 완성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한다.”
“여러분께 평생 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말마디의 내용들이 치열한 신자의 삶에도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과 공부의 시기 11월 위령성월에 좋은 배움의 대상이 되는 이순재씨의 삶과 죽음입니다. 2023년 <장수상회>에서 이순재와 노년의 사랑을 그린 배우 박정자는 말합니다.
“어떤 역이든, 어떤 상황이든 당신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온몸과 온맘으로 불사르신 분이시다. 다 이루셨다고 생각한다.”
참 멋진 삶과 죽음을 보여준 국민배우 이순재입니다. 어제 연피정 내용은 <전례와 뇌과학>이었습니다. 그 내용을 일부 소개합니다.
“전례는 리듬적이고 반복적이다. 이것이 전레의 가장 중요한 측면중 하나다. 전례의 리듬은 세대를 넘어선다. 전례가 뇌를 동기화한다. 전례는 개별 참가자의 중추신경내에서 정서적 지각, 인지적 운동 과정을 동기화하는 역할을 한다. 몸은 항상 심장리듬, 호흡리듬, 호르몬 리듬, 뇌리듬등 리듬으로 가득 차 있다. 바로 전례의 리듬은 신체에 물리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전례는 신화를 강화하는 강력한 메카니즘을 제공한다. 전례는 신화의 이야기를 인지적으로, 정서적으로, 내장적으로 사람들이 느끼도록 돕는다.”
전례와 삶은 함께 갑니다. 신앙훈련에, 영성훈련에 믿는 이들에게 얼마나 결정적 도움이 되는 전례활동의 수행인지 깨닫습니다. 구약의 전례 전통을 고스란히 전수받아 잘 활용하는 가톨릭의 영성은 전례영성이요 가톨릭의 전례의 아름다움과 깊이는 그대로 하느님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반영합니다.
바로 그 전례 효과의 본보기가 다니엘입니다. 바빌론 유배중에도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를 드린 다니엘이요 이로 인해 적대자들에게 고발을 당합니다. 다니엘을 사랑한 다리우스 임금은 어쩔수 없이 그를 사자굴에 던지지만 새벽이 되자 사자굴에 가서 슬픈 목소리로 외칩니다. 둘이 주고 받은 대화가 감동적입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성실히 섬기는 너의 하느님께서 너를 사자들에게서 구해 내실 수 있었느냐?”
“임금님, 만수무강 하시기를 빕니다. 저의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으므로, 사자들이 저를 해치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그분 앞에서 무죄하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임금님, 저는 임금님께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누가 뭐래도 하느님 앞에 떳떳하면, 무죄이면 됩니다. 이런 이들은 언제 어디서든 하느님께서 친히 인도자와 보호자가 되어 주십니다. 다니엘처럼 전례의 생활화, 신앙의 생활화, 영성의 생활화가 그를 언제나 하느님 앞에서 무죄한 삶으로 이끌었음을 봅니다.
AI시대일수록 전례 기도를 통한 신앙과 영성의 평생 지속적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인간 영혼의 마지막 최후 보루이자 안식처는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역시 언제 어디서나 인간품위의 우선 순위는 하느님 믿음, 건강, 돈입니다. 다니엘을 통해 살아 계신 하느님을 체험한 다리우스 임금의 칙령을 통한 하느님 고백도 참 신선한 감동입니다.
“누구나 다니엘의 하느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해야 한다. 그분은 살아 계신 하느님,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나라는 불멸의 나라, 그분의 통치는 끝까지 이어진다. 그분은 구해 내시고 구원하시는 분, 하늘과 땅에서 표징과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 다니엘을 사자들의 손에서 구해 내셨다.”
다니엘의 이야기는 시공을 초월하여 이런저런 사유로 고통과 시련중인 모든 신자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오늘 복음의 상황은 물론 혼란하고 복잡한 오늘의 현실에서 더욱 빛나는 희망의 표징, 회개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다니엘입니다. 예수님의 예표와 같은 다니엘입니다.
우리 모두 또 하나의 다니엘이, 예수님이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상황에 일희일비 좌절하거나 흔들릴 것이 아니라, 늘 눈 들어 전에도 오셨고, 지금도 오시고, 앞으로도 오실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미의 말씀이 우리를 백절불굴의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때>는 바로 지금 미사가 봉헌되는 <이때>입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21,27-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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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7. 연중 34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지금 <전례시기>의 막바지에 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마지막 날’에 벌어질 무시무시한 표징들을 듣습니다. 곧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고’와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에 대한 표징들입니다.
이는 ‘종말’, 곧 ‘구원’은 올 것이라는 사실과 하느님께서 그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그때에 그 어떤 시련을 당하더라도 절망하지 말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이는 ‘종말’ 그날이 우주의 파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이 새롭게 창조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곧 그날의 대재앙은 단순히 미래를 앗아가는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를 “속량”하실 것이라는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그래서 떼이야르 드 샤르뎅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의 종말은 집단적 죽음이나 멸망, 결별이 아니라 하나의 변형이 될 것입니다. 곧 인간의 종말은 분열과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와 새로운 탄생이 될 것입니다. 곧 대재앙이 아니라 정신적 역전이 될 것입니다. 정신은 역전하고 다른 영역으로 들어갈 것이며, 세계는 순간적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안에서의 희열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말론적인 표현들을 미래의 세상 종말에 대한 지식을 전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삶에 대한 태도’를 말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종말론적인 표징들은 우주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신학적인 표현으로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그분은 먼 미래에 오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오셨고, 세상은 이미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완성의 때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바로 지금 이곳’에서 그분을 맞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헨리 나웬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은 오십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내년이 아니라 올해,
우리의 비참함이 다 지나가고 난 뒤에가 아니라 그 비참함 한가운데로,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곳으로 주님은 오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바로 지금의 우리의 삶 안에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때”에 결정적으로는 드러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주님!
새롭게 하소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게 하소서.
변형되게 하소서. 당신의 속량을 입게 하소서.
바로 지금 당신을 맞이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으로 하여 역전되고
당신 승리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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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7. 연중 34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휴가 중에 울산엘 다녀왔습니다. 울산에는 뉴욕에 있을 때 함께 지냈던 신부님이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함께 지냈던 인연으로 많이 가까워졌습니다. 신부님은 제게 울산의 명소를 안내해 주었습니다. 처음 간 곳은 ‘통도사’였습니다. 통도사는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합니다. 1390년이 된 고찰입니다. 통도사는 삼보사찰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삼보란 ‘불, 법, 승’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불은 부처님을 뜻하고, 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하고, 승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스님을 뜻한다고 합니다. 통도사는 ‘불’을 상징하는 사찰이기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통도사의 대웅전에는 ‘불상’이 없다고 합니다. 통도사로 가는 길옆에는 계곡이 있었고, 울창한 나무가 있었습니다. 불가의 ‘삼보(三寶)’ 이야기를 들으면서 교회가 신앙으로 믿는 ‘삼위일체’의 하느님 생각이 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도 생각났습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였고, 복음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표징이었고,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두 번째 간 곳은 ‘태화(太和) 국가 지정 공원’이었습니다. 공원에는 ‘십리대나무길’이 있었고, 옆으로는 태화강이 흘렀습니다. 태화라는 말은 신라시대의 ‘연호’였다고 합니다. 높게 자란 대나무 숲을 걸으면서 ‘매, 난, 국, 죽’이라는 사군자가 생각났습니다. 대나무는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기 때문에, 절개(節介)와 변치 않는 충성심을 상징합니다. 채근담(菜根譚)》에는 “대나무는 속이 비어 겸허함을 배우게 하고, 마디가 있어 절개를 일깨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추운 겨울에도 꺾이지 않고 푸른 대나무는 역경 속에서도 신념을 지키는 군자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대나무는 속이 비어 있습니다. 이것은 겸허한 마음, 비움의 미학, 그리고 자아를 비운 깨달음의 경지를 상징합니다. 불교에서도 ‘공(空)’의 정신을 대나무로 표현하곤 했습니다. 속이 비었기에 바람이 통하고, 고요함 속에서도 유연함을 유지합니다. 대나무는 눈에 띄게 자라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일단 자라기 시작하면 매우 빠르게 성장합니다. 이 때문에 “대나무는 땅속에서 오랫동안 뿌리를 키운 후에야 하늘로 솟는다”라는 말처럼, 인내와 준비의 시간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대나무는 바람에 흔들려도 부러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유연하지만 꺾이지 않는 강인한 정신을 나타냅니다. 즉,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면서도 근본을 잃지 않는 삶의 지혜를 상징합니다. 공자는 이를 “강직하되 부드럽게”라는 군자의 덕으로 보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지켜주었습니다. 다니엘을 사랑했던 왕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내 나라의 통치가 미치는 모든 곳에서는 누구나 다니엘의 하느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해야 한다. 그분은 살아 계신 하느님,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나라는 불멸의 나라, 그분의 통치는 끝까지 이어진다. 그분은 구해 내시고 구원하시는 분, 하늘과 땅에서 표징과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 다니엘을 사자들의 손에서 구해 내셨다.” 왕은 하느님께 찬양을 드렸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왕에게는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도 무사하게 살아온 날이 감사한 날입니다. 성찬의 전례의 중심에는 ‘감사송’이 있습니다. 사제는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기 전에 이렇게 기도를 바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 감사와 영광을 드림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옵니다. 무수한 천사가 밤낮으로 아버지를 섬기고 그 빛나는 얼굴을 뵈오며 끊임없이 찬양하오니 저희도 그들과 함께 하늘 아래 모든 조물과 더불어 기뻐하며 아버지의 이름을 찬송하나이다.”
돌아보면 2025년에도 감사할 일이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건강을 주셨습니다. 주일이면 함께 미사 할 공동체를 맡겨 주셨습니다. 마음을 열고 대화할 수 있는 동료 사제들이 곁에 있습니다. 한국으로 휴가 와서 좋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감사할 일입니다. 2026년이 어떻게 지나갈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묵시록의 예언을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신 것처럼 멸망하는 것도 무섭지는 않습니다. 오늘 하루만 충실하게 살 수 있다면 됩니다. 오늘 하루를 감사드리면 살 수 있으면 됩니다. 그것이 모인 것이 지난날들이고, 그것이 모이면 미래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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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7. 연중 34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감사, 은총, 그리고 관계성~~~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11월 26일 수요일- 마흔여덟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감사의 정을 수양하기!
은총을 받아, 우리는 감사와 자비를 나눌 수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신학자 크리스틴 D. 폴은 '감사'가 우리의 형제적 친교(communio)와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우리의 삶이 감사로 형성될 때, 우리는 일상의 선과 아름다움을 더 잘 인식하게 됩니다. 우리는 만족하며,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음을 느끼고, 그 축복을 나누고자 열망합니다. 우리는 다른 인간 존재 자체를 기뻐할 수 있습니다. 감사의 공동체 안에서, 각 개인과 그들의 봉헌은 인정되고 존중되며, 하느님의 성실하심에 대한 증언이 끊임없이 드러나 공동체가 그 구성원들의 기쁨을 함께 누립니다. 감사의 표현은 공동체를 말씀과 성령, 그리고 하느님의 일에 살아있게 합니다.
그러한 공동체는 '아름다운 땅'으로서, 그 문화는 은총이며, 그 구성원들께서는 삶을 하느님의 선물로 인식하십니다. 이 땅에서는 풍성한 용서와 잦은 전례적 축제가 발견됩니다. 우리는 흔히 개인과 공동체가 성덕과 선으로 성장하는 길을 규율, 교정, 도전의 노력에서 찾으려 하지만, 은총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기 쉽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깊은 이해에 뿌리내릴 때 가장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폴(Pohl)은 미시시피에 있는 작은 그리스도인 인종 간 공동체가 갈등의 한가운데에서도 서로에게 은총과 감사를 발견하실 수 있었던 과정을 나누어 주십니다.
그 공동체가 위기의 시기를 겪고 있을 때, 외부에서 온 한 친구께서 이렇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여러분께서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성장하시는 길은 서로에게 요구를 하심으로써가 아니라… 서로에게 은총을 베푸심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은총은 사랑으로 표현되며, 그것이 공정하거나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을 때에도, 그리고 ‘다른 이들이 참으로 무례하게 행동할 때에도’ 드러납니다.”
이 지혜로운 이는 계속 이렇게 조언합니다:
어떤 교회 지도자가 공동체가 '새로운 은총의 문'의 처방을 받아들였을 때 느낀 기쁨을 설명해 주십니다. 공동체 생활의 '재료'는 놀랍도록 단순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온 존재에 깊이 새기고, 이미 용서받은 이처럼 살아가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서로를 돌보시고, 서로를 용서하시며, 함께 일상의 봉사를 실천하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받은 은총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감사와 자비로써 밖으로 향할 수 있게 됩니다. 감사는 '하느님 현존' 안에서 우리의 집’이 되며, 헨리 나우웬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생명 자체에 친밀히 참여하는 것'이 되어 '우리 자신을 훨씬 넘어 하느님께, 모든 창조에, 우리에게 생명과 사랑과 돌봄을 주신 이들에게까지 뻗어 나갑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우리 공동체의 이야기를 나누는 모든 분들과 직접 만나, 그분들의 말씀이 제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전하고 싶을 때가 자주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신시아가 들려준 ‘소리 내어 읽기’의 이야기가 제 마음을 깊이 울렸습니다. 저는 지난 이틀 동안 묵상을 소리 내어 읽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새로운 귀와 부드럽고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를 하나로 모아주신 리처드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Kate F.
References
[1] Henri J. M. Nouwen, Gracias! A Latin American Journal (Harper and Row, 1983), 21, 55.
Christine D. Pohl, Living into Community: Cultivating Practices That Sustain Us (Eerdmans, 2012), 22–23.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Debby Hudson, untitled (detail), 2018,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하늘을 향해 두 손을 펼친 사람의 실루엣은 삶이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임을 인식하는 감사의 자세를 시각적으로 드러냅니다. 그 모습은 은총이 안으로 흘러들고 밖으로 흘러나가며,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하느님을 하나로 이어 주는 신비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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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7. 연중 34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사람들이 볼 것이다.(루카 21,25-27)
표징들이 이미 일어났다
복음서와 예언서에 기록되고 우리 안에서 실현된 표정들은 주님의 오심을 알려 줍니다. 우리는 예언된 표징들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왔음을 압니다. 루카 복음서에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표징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이 일은 이미 이루어졌고 아무도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사람들이 당황하여 거꾸러지지 않는 곳이 지금 우리 시대에 어디 있습니까? 복음서에 서술된 모든 표징이 거의 다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4 우리는 또 다른 그리스도들이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께 젖을 먹인 가슴은 복됩니다!(루카 11,27).
엑카르트는 하느님의 말씀인 우리와 하느님의 말씀인 그리스도가 어떻게 다른지를 표현하기 위해 단어 하나를 만들어 낸다. 그는 우리가 하느님의 형용사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 말씀 자체를 위한 형용사가 된다. 하느님의 영으로부터 나의 영에게 전해진 말은 실로 열매를 풍성히 맺는 말이자 일깨우고 다시 살리는 말이다. 그것은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속삭임이지만,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너는 신성하다. 나와 너 사이에는 사이가 없다. 이 선물을 거리낌 없이 가져라. 네가 이것을 기억하고 본받게 하려고 내가 너에게 나의 말씀을 주는 것이니, 가서 그 말씀을 전하여라.(513)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6장 오직 하느님만을
통고의 마리아
영원히
투이 관구 본부 수도원에서의 수도 생활 6년 끝에 (1934년 10월 3일) 루치아는 종신 서원을 하게 되었다.
되찾을 두려움 없이 온전히 주님과 성모님의 것이 되어 버린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행복일까!
이 신비스런 혼례식에서 루치아는 드디어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에게 둘러싸이는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
13세 때 고향을 떠난 지 14년 만의 만남이었다. 어머니, 두 언니, 사촌들, 또 옛 친구 한 사람도 먼 파티마로부터 일부러 먼 길을 달려와서 오늘의 행복을 함께 해주였다. 호세 다 실바 주교 친히 이 예식을 주관해 주셨다.
파티마의 성모를 뵌 소녀를 가두고 있던 침묵의 벽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린 일격을 가한 사람도 주교 자신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 누구도 그녀의 겸손이 시련을 견딜 수 있을까 하고 염려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통고의 마리아 수녀’가 어머니를 서원식에 초대했을 때, 어머니는 회답에 무슨 선물이 좋겠느냐고 물어 왔다. 수녀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는 회답을 보냈는데 어머니 마리아 로사는 승락하지 않았다.
“네 언니도, 이 어미도 축하하는 마음의 표시로 무엇이든 하고 싶으니 꼭 말해 주기 바란다."
하고 거듭 재촉이 왔다.
“그 정성 너무 과분합니다. 필요한 모든 것은 다 있으니 언짢게 생각마시고 그냥 오시기만을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옵니다" 하고 다시 회답을 보냈으나 그래도 어머니는 같은 말을 재삼 전해 와서 루치아는 할 수 없이 꽃과 꿀이 좋겠다고 써 보냈다.
산토스의 집에서는 코르크나무 껍질로 만든 광주리에 싱싱한 꿀을 담고 조심스럽게 정성을 다해 짐을 꾸렸다. 이것이야말로 그 옛날 마리아 로사가 “사랑을 속여 어지렵게 하는 거짓말장이”라고 욕하면서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던 띨의 천하에도 드문 혼례식에 보내는 자애가 넘치는 축하 선물인 것이다.
이렇게 포르투갈 산의 향기와 생기가 조금이나마 스페인의 수도원에 봉물로 들어온 것이다.(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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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7. 연중 34주간 목요일. 갑곳성지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의 “속량”이란 죄와 죽음, 절망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하느님의 구원을 뜻합니다. 세상은 무너지고, 인간이 붙잡고 있던 모든 확실성이 흔들리는 순간에도, 그리스도인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바라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해방과 구원이 바로 그런 순간에 더욱 확실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다인들에게 신앙의 중심이었지만, 결국 무너졌습니다. 이는 인간이 쌓아 올린 어떠한 권력과 체계, 심지어 가장 거룩해 보이는 구조물도 영원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무너짐 속에서도 하느님의 계획은 좌절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삶 속에서도 작은 성전들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붙잡던 건강이 무너질 때, 인간관계가 깨어질 때, 내가 의지하던 재산이나 명예가 무너질 때,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순간을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속량의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의지하던 세상적인 기둥들이 무너져야 비로소 하느님만을 바라보게 되고, 그분의 구원이 우리 삶 안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 속에서 작은 종말과 무너짐을 경험할 때, 그것을 두려움으로만 바라보지 맙시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우리를 더 자유롭게 하고, 더 온전히 구원하시려는 은총의 순간으로 믿고 희망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몸을 곧추 세우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어떤 어둠 속에서도 구원의 빛을 바라보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의 핑계는 여기서 무너집니다.
얼마전 tv를 통해 전달된 뉴스입니다.
‘파리 패럴림픽이 열전에 돌입한 가운데 브라질의 가브리엘지뉴(가브리엘 아라우주) 수영 선수가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가브리엘지뉴는 이번 대회 남자 100미터 배영 S2와 50미터 배영 S2에서 각각 금메달을 목에 걸며 2관왕에 올랐는데요.
팔과 다리가 제대로 발달하지 않는 포코멜리아를 안고 태어난 그는 특유의 돌핀킥을 이용해 다른 경쟁자들을 속도에서 압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수영 선수의 수영을 찾아봤습니다.
팔은 거의 없고 두 다리는 정말 짧고 짧았습니다.
그런데…. 물에 들어가는 순간 그는 자기 별명대로 ‘로켓맨’이었습니다. 어느새 그의 목에는 두 개의 금메달이 걸려있었습니다.
그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건, 상황, 환경, 경제력…. 모두 다 핑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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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8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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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7. 연중 34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많은 분이 좋아하는 고급 생선인 참치에 대한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른 생선에 비해 가격이 상당히 비싸지요. 그런데 19세기까지만 해도 참치는 먹지 않는 생선이었다고 합니다. 질 낮은 생선으로 취급되었고, 특히 참치 뱃살은 기름 냄새가 강하고 쉽게 상해서 고양이에게나 던져 주는 부위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생선’으로 취급되던 이 참치가 20세기 초 냉장, 냉동 기술의 발달로 고급 식재료가 된 것입니다.
랍스터도 그렇습니다. 19세기 미국 해안가에 넘쳐나던 흔한 갑각류로, 감옥 수감자와 하층민의 음식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랍스터를 한 달에 두 번 이상 먹게 하면 학대’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이 밖에도 김, 감자 등도 처음에는 가치가 낮게 평가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크게 재평가되었습니다. 음식만 그럴까요? 컴퓨터도 1970년 초만 해도 ‘장난감, 취미용 기기’라는 평가였지만, 현재는 현대 문명의 중심에 있습니다. 한옥도 한때 불편하고 비효율적인 집으로 여겼지만, 지금은 문화유산, 고급 주거 형태로 재발견되었습니다.
시간의 흐름으로 완전히 180도 바뀌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 관해 부정적인 말씀을 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닫힌 마음으로 포기하고 좌절하는 삶이 아닌, 열린 마음으로 희망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고정관념에 싸여 있으면 이 시대에 맞게 활동하시는 주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세상의 끝과 사람의 아들이 오심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자칫 무섭게 느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정치 사회적으로 혼돈의 시대였던 이스라엘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말씀에 걱정이 되고 절망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상황에서도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십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여기서 ‘속량’이라는 단어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속량은 노예 해방을 뜻하는 것입니다. 종말은 파멸이 아니라, 박해받던 신앙인에게는 ‘완전한 해방’의 날임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재난과 전쟁을 보며 공포에 떨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야 합니다. 신앙인에게 종말은 심판이 아니라, 우리가 그토록 기다려온 구원이 완성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의 눈을 가지고 살아가야 불안한 세상에서도 당당하게 신앙을 간직하면서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늙는다는 걸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계를 돌리는 방법은 없다. 그러므로 인생의 질문은 이게 된다. 내가 여기 있는 동안 무얼 할 것인가?(골디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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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7. 연중 34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두 번째 오심~~~
여기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B. Yeats)가 1919년에 쓴 〈두 번째 오심(The Second Coming)〉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예이츠는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깊은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그것을 문명의 종말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가 말하는 '두 번째 오심'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다시 오심이 아니라, 오히려 불길하고 사악한 어떤 존재의 출현을 의미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교적 희망을 선포하기 전에 먼저 세상의 악과 혼돈을 체험해야만 하는지도 모릅니다.
넓게 퍼져가는 소용돌이 속 계속 돌아가는
매가 매부리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중심이 힘을 잃고
온 세상이 혼돈하다.
피로 물든 물결이 밀려들어
전 세계에 천진의 양식이 익사한다.
최선의 자들은 신념을 잃었고
최악의 자들은 강렬한 열정에 사로잡혔다.
분명 어떤 계시가 꼭 오겠다.
분명 재림이 도래하고 있다.
두 번째 오심! 이 말이 나오자마자
세계의 혼으로부터 출현된 어떤 거대한 형상이
내 눈을 어지럽힌다.
황량한 사막의 어딘가에서
사자의 몸, 인간의 머리를 한 괴물은
태양처럼 텅 비고 비정한 눈으로 노려보며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주변에 격노한 새들의 그림자가 맴돌다
어둠이 다시 내리지만 난 이제 안다.
이천 년간의 바위 같은 잠이
흔들리는 요람 속에서 악몽에 시달리는 것을
그리고 어떤 사나운 짐승이, 마침내 자기 때가 되어서
탄생을 위해 베들레헴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가.
시간의 흐름은 가장 슬픈 신비입니다. 뒤돌아보기만 해도 모든 것이 결국 먼지로 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회의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러시아 시인 예프투셴코는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세계가 죽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매일 하나의 세계가 죽고 또 하나의 세계가 태어납니다. 똑같이. 그러나 눈이 늘 과거만을 향해 있다면,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이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고 있다는 진정한 현실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예이츠가 분명히 보았듯이, 끔찍한 것들도 태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것들도 태어납니다. 예프투셴코의 삶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그는 여덟 살에 첫 소설을 썼다고 합니다. 종이가 부족했기 때문에 할머니가 가지고 있던 칼 맑스의 『자본론』 이라는 책의 줄 사이에 그 소설을 썼다고 합니다!
인간의 현실은 어디에나 스며들며, 가장 자주 어린 손길 속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것은 상상력으로 가득합니다. 시는 단지 옛날의 말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는 현재입니다. 너무 젊고, 너무 신선해서 혁명적인 글조차도 낡아 보이게 만듭니다. 지금 우리는 전례의 끝 시기에, 끝과 새로운 시작의 시(詩)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은 오늘도, 지금, 이 순간에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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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7. 연중 34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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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116401&menu=4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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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7. 연중 34주간 목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내릴 재난과 진노를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예루살렘이 황폐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세상에 나타날 표징들로 이어집니다.
그것으로 세상 사람들은 공포와 두려움에 떨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때에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은
다니엘이 환시로 본 것입니다.
그때는 사람의 아들이 세상을 다스리는 때로
어떤 관점에서 보면 세상의 종말을 이야기합니다.
세상에 나타날 표징들 때문에
사람들은 공포와 두려움에 떨게 되지만
그보다 종말에 있을 심판 때문에
사람들은 종말을 두려워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은
그래서 사람들에게 가장 큰 두려움을 느끼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움에 사람들은 몸을 구부리고 머리를 숙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정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즉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심판이 두려운 이유는
자기 잘못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에
심판은 죄에 대한 벌을 생각하게 해서
우리는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속량을 말씀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아야하지만
그 죗값을 하느님께서 대신 치루어주셨음을 말씀하십니다.
즉 죄는 지었지만
벌은 받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며
우리의 죄를 대신 하는 죽음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종말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 다스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시점이 될 것입니다.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 삶의 마지막도 생각하게 됩니다.
나약한 나의 모습만 바라본다면
마지막은 분명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그렇지만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도 바라본다면
마지막은 또다른 행복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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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7. 연중 34주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21,20-28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간 동안, 우리는 계속해서 세상의 종말에 관한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오늘은 엊그제 복음에서 예고하셨던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시면서, 온 이스라엘에 닥쳐올 환난에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하며 그 대처가 우리의 구원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설명하시지요. 하느님의 분노가 닥쳐오면 그분의 도성 예루살렘은 적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짓밟힐 것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며, 포로가 되어 머나먼 타국 땅으로 끌려갈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평화를 상징하던 예루살렘은 그렇게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완전히 황폐해져 사람들 눈에 완전히 멸망한 것처럼 보이겠지요.
하지만 그런 상황은 유다인들이 기대하던 게 아닙니다. 그들이 그토록 간절하게 ‘메시아’를 기다린 것은 그분께서 오시기만 하면 다른 민족들에게 짓밟히고 핍박받던 자신들을 해방시키시고, 다윗 시대에 누리던 번영을 되찾아 주시리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리스도’라고 믿고 따르던 예수님이 오히려 예루살렘이 완전히 무너지고 황폐해 질거라고 말씀하시니 너무나 당황스럽고 실망이 컸을 겁니다. 게다가 그분께서 그런 상황에 대한 ‘대책’이라고 알려주시는 내용은 더더욱 실망스러웠지요. 조상들이 물려준 땅을 버리고 산으로 달아나라니요? 자기 삶의 기반이 다 거기 있는데 그런 예루살렘을 두고 몸만 빠져나가라니요? ‘내가 너희를 지켜주마’하고 앞장 서서 이끌어주시지는 못할망정, ‘그런 일이 닥치면 도망치라’는 너무나 무책임하고 무력한 말씀을 하시는 분을 어떻게 ‘메시아’라고 믿고 따를 수 있겠는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셔서도, 그런 상황을 해결할 능력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그런 슬프고 괴로운 일이 닥치게 되는 건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꾸만 그분 뜻을 거스르는 불충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잘못된 길을 계속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신들에게 하느님의 분노가 닥쳐온다고 해서 ‘어떻게 우리한테 그러실 수 있느냐’고 그분을 원망할 수 있을까요? 같은 잘못을 반복하며 제 스스로 멸망의 구렁으로 들어가는 자녀들을 우쭈쭈하며 달래기만 하는 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분노를 쏟으시는 건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셔서도 아니고, 그들이 진짜 멸망하기를 바라셔서도 아닙니다. 더 늦어서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그들이 이제라도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눈물을 머금고 ‘사랑의 매’를 드시는 것이지요. 그런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예루살렘에 버티고 앉아서 ‘아무 것도 잃지 않게 해달라’고 떼를 쓸 게 아니라, 자기들을 세속적인 것들에 눈 돌리게 하는 그리하여 하느님과 그분 뜻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그곳에서 즉시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거룩한 땅인 ‘산’으로 피신해야 합니다. 또한 그렇게라도 해서 자기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기들에게 닥쳐온 환난이 그저 ‘멸망’이 아님을,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미워하셔서 벌 주시는게 아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매섭도록 아픈 회초리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며 그 안에서 자기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희망에서 힘을 얻어 어떤 고난과 시련이 닥쳐와도 슬픔과 절망으로 주눅들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러 오실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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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7. 연중 34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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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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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7. 연중 34주간 목요일. 김종업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제1독서 (다니6,12-28)
"저의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으므로, 사자들이 저를 해치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그분 앞에서 무죄하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임금님, 저는 임금님께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23)
메디아의 다리우스 임금은 밤새 잠 한 숨 못자고 단식하면서 기도하다가 동이 트기도 전, 어두움이 가시기 시작할 때 채비를 갖추고 급히 사자 굴로 달려갔다.
다니엘서 6장 14절, 16절, 18절에 이어지는 19절의 다리우스 임금에 대한 묘사는 다리우스 임금이 다니엘을 얼마나 극진히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죄인이 당연히 죽음이 예견되는 형벌을 당하면서도 밤을 지나 아침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으면, 그 사람은 사면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고 한다.
다니엘서 6장 20절의 '새벽에 날이 밝자마자'에서 '새벽에'에 해당하는 '삐쉬파르파라'(bishiparpara)는 동녘에 해가 뜨기도 전 어두움이 가시기 시작하는 가장 이른 새벽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즉 다리우스 임금은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꺼낼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간에 사자 굴에 찾아간 것이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불안했지만, 한편으로는 혹시 하느님께서 다니엘을 구원하셨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함을 가지고 발걸음을 서둘러서 사자 굴을 찾아갔을 것이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 무려 8시간 이상 있으면서도 몸 하나 상하지 않고 안전하게 살아 나온 이 사건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있다.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꾸며낸 설화라고 주장하는 비평론자들은 다니엘서가 B.C.2세기에 다니엘의 이름을 차용한 익명의 저자에 의해 서술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다니엘의 사자 굴 사건은 B.C.2세기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치하에서 혹독하게 박해를 당하던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과 구원을 생생하게 설명하기 위해 저자가 고안한 문학적 창작이라고 주장한다.
비평론자들은 인간의 상식과 과학적 기준에 맞지 않는 기적적 사건들을 역사적 사실이 아닌 설화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다니엘의 사자 굴 사건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다니엘이 사자 굴 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학자들 가운데 다니엘이 사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은 이유를 합리적인 방법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다.
전날 저녁에 다니엘을 사자 굴에 던져 넣기 전에 다리우스 임금이 비밀리에 여러 마리의 사자들을 배불리 먹였기 때문에 그 사자들이 배가 고프지 않아 다니엘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다리우스 임금은 다니엘을 살리기 위해 고민하던 전날 점심때부터 저녁 해 질 때까지 그런 술수를 시도할 여력조차 없었으며, 오직 다니엘을 살릴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있을지에 대해서만 몰두했을 것이다.
동시에 그런 술수를 동원했다면, 그가 다니엘로 말미암아 그처럼 슬퍼하고 한 숨도 자지않으며 단식하고 새벽에 급히 나가 다니엘의 하느님을 들먹이며 그 하느님이 구원해 주었느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다니엘을 고발한 자들이 그 사자 굴에 던져졌을 때에 그 사자들은 그들의 뼈를 모조리 부주어 먹어버렸다.
다니엘을 고발한 자들이 던져진 시간과 다니엘이 사자 굴 밖으로 나온 시간의 차이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이에 사자들이 갑자가 배가 고파졌을 리도 만무한다. 사자들은 다니엘이 굴 속에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물지도 심지어 발톱으로 할퀴지도 않았다.
이것은 다니엘이 설명한대로 하느님께서 다니엘이 사자 굴안에 떨어지기 전에 이미 천사를 보내어 그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1장 33절에는 믿음의 조상들 가운데서 믿음으로 '사자들의 입을 막은' 조상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로 다니엘이 그 사람이었으며,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도 해를 당하지 않고 살아 남은 사건은 오로지 하느님의 권능을 인정하는 믿음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천사를'에 해당하는 '말라케흐'(mallakeh; his angel)는 단수형으로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한 천사를 의미한다.
그 천사가 눈에 보이는 형태로 사자 굴 안으로 보내졌는지, 아니면 비가시적 형태로 단지 영적 상태로만 보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유사한 예를 통해 당시 상황을 추정할 수 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이글거리는 용광로에 들어갔을 때, 밖에서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은 결박되지 않은 네 번째 사람을 보았고, 그 형상은 신의 아들과 같았다(다니3,92).
만일 다니엘이 말한 천사가 그런 존재였거나 유사한 존재였다면, 다니엘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적 형태로 그 사자 굴 안에 있었을 것이다.
사자들이 감히 그 천사를 건드릴 수 없었다는 것은 그 천사가 신적인 존재 또는 초월적인 위치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 천사는 하느님에 의해 특별히 파견되었으며, 다니엘이 사자 굴에 떨어지기 전에 이미 사자들의 입을 막아 놓았다.
'입을 막으셨으므로'에 해당하는 '우싸가르 품'(usagar pum)은 문자적으로 '입을 닫아 버렸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천사가 손으로 사자들의 입을 막았다기보다 천사의 초월적이고 신비한 능력을 통해 사자들이 다니엘에 대해 전혀 식욕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다니엘에 대한 두려움을 품게 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천사를 통해 사자들의 입을 막으신 하느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전부 다 이해될 수 없는 분이시다(로마11,33; 신명29,29참조).
한편 다니엘은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신 것이 두 가지 이유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나는 다니엘이 하느님 대전에 무죄하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다니엘이 다리우스 임금에게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그분 앞에서'에 해당하는 '카다모히'(qadamohi; before Him)는 '하느님 앞'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나의 무죄함이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라는 표현과 함께 사용되어 살아계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신뢰하고 당신 대전에 의롭게 살아가는 신실한 자들을 반드시 구원하여 주신다고 하는 다니엘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실로 인간 임금은 자신에게 충성스러운 다니엘을 보호하는 것에 실패하였지만, 살아계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대전에 의롭게 사는 다니엘을 구원하시는 데에 결코 실패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대전에 신실하기 위해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는 다니엘을 구원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살아계심과 다니엘의 의로움이라는 양면을 임금과 여러 고발자들 앞에서 분명히 입증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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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루카 복음서에서 예루살렘 멸망 예고는 세 차례 등장하는데(19,43-44; 21,20-24; 23,28-31 참조), 오늘 복음은 그 가운데 두 번째 예고입니다.
마태오 복음(24,15-21 참조)과 마르코 복음(13,14-19 참조)의 병행 구절에서는 묵시 문학적 문체를 사용하며 종말의 대 환난을 집중적으로 묘사합니다.
반면 루카 복음은 예루살렘 파괴를 역사적 사건에 더 초점을 맞춥니다.
루카 복음사가의 신학에 따르면, 이는 메시아 임금,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최종 심판의 예고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예루살렘에만 한정되어 있던 구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시작점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뻗어 나간다는 ‘보편적 구원’의 주제를 다룹니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라는 내용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이 이제 유다인에게만 머물지 않고 만백성에게 선포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복음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에 집중합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은 다니엘서 7장 13절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이는 종말론적 메시아에 대한 구약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해석입니다.
우리는 ‘보편적 구원’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널리 선포되고 모든 이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복음화의 탁월한 도구가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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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4주간 목요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
(루카21,20-28)
20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 적군 로마에게 포위될 것을 말씀하신데 하느님의 뜻을 적대하는 곧 사람의 욕망, 뜻을 만족시켜주는 그 세상(로마)의 힘, 말(법)이 이스라엘을 점령하여 황폐해질 것이라는 말씀이시다.
현세의 우리의 모습을 보라하신다. 세상화가 되어가는 교회, 우리의 모습이다.
21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 구원의 힘이 없는 세상화가 된 예루살렘에서 나와라. 들어가지 마라 하신다. 빠져 나와 산으로 달아나라 하신다.
예수님이 계신 산이다. 그곳이 우리의 도피처라는 말씀이시다. 죄인들의 도피처가 되시기 위한 그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해 기도 하시는 산이다.
(루가6,12) 12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루가22,39) 39 예수님께서 밖으로 나가시어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도피처란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으실 우리의 대사제, 예수께서 계신 곳이다.
(민수35,28) 28 살인자는 대사제가 죽을 때까지 반드시 도피 성읍에서 살아야 한다. 대사제가 죽은 다음에야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갈 수 있다.
22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 성경에 예고된 징벌은 하느님의 뜻을 떠난, 버린 그 죄들이 받는 죄의 징벌인 것이다.
23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 잉태는 했지만 낳지 못한 여자, 곧 말슴은 받았지만 그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하느님의 아들로 우리의 구원자 그 도피성으로 깨닫지 못하고 말씀을 문자 그대로 품고있는 여자다.
젖먹이가 딸린 여자, 아이를 낳기는 했는데 곧 말씀을 깨닫기는 했지만 젖먹이 수준인 여자다.
(히브5,12-13) 12 사실 시간으로 보면 여러분은 벌써 교사가 되었어야 할 터인데, *아직도 하느님 말씀의 초보적인 원리를 *다시 남에게서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젖이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3 젖을 먹고 사는 사람은 모두 *아기이므로,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에 서툽니다.
= 말씀을 하느님의 뜻으로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 신앙은 종교 행위등, 자기 의로움으로 구원에 이르려 애쓴다. 스스로가 도피성을 쌓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대신 죽어줄 구원자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땅의 의로움, 곧 사람의 열심으로 얻을 수 있는 구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옳고 그름, 곧 말씀을 받을 때, 가르침을 들을 때. 사람의 뜻으로 주는 그름과 하느님의 뜻으로 주는 오름을 분별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도피처가 없다. 도피처가 어디 있는지, 도피처가 되어 줄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임신한 여자, 깨달음이 젖먹이 같이 분별 못하는 여자, 모두 불행한 것이다.
24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 다른 민족, 세상의 삶을 사는 한, 하늘의 참 평화는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태6,7)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 하느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빈말 기도이다.
25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26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 말씀을 하느님의 뜻으로 깨닫지 못한 여자, 그래서 말씀에서 피신처를 찾지 못한 여자, 자기행위 자기 열심을 의지하는 여자에게서 이다. 그런데 그 모든일이 ,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라 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씨)을 하느님의 뜻으로 깨닫지 못하도록 빼앗아 먹는, 그래서 구원을 못 받게 하는 하늘의 새, 사탄이다.(마르4,4 14참조)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탄, 그들의 그 거짓된 일을 더 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말씀이시다. 그들의 거짓된 말, 가르침이 힘을 쓸 수 없는 구원의 완성의 때가 다 되었다는 것이다.
27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사람들이 볼 것이다.
= 비를 품은 구름이다. 곧 하늘의 물, 말씀으로 오신다는 것이다. 구원의 진리, 그 말씀으로 오시는 것이다.
28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아멘.
(이사55,10-11) 10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11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오늘 말씀)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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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4주간 목요일 복음(루카21,20~28)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침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27~28)
루카 복음 21장 27절은 예수님의 영광스런 재림을 직접적인 어휘로 묘사하고 있다.
루카 복음 21장 25절과 26절은 종말에 두려워 떨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한 반면에, 21장 27절은 그리스도께서 권능과 큰 영광으로 오시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사실 21장 27절은 다니엘서 7장 13절과 14절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구절로서 '사람의 아들'(인자,人子)의 재림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특히 이 모습은 승천하신 예수님의 모습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사도1,9~12), 하늘로 올라가실 때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재림 때에도 동일하게 재현될 것임을 보여 준다.
한편 루카 복음 21장 28절의 '이러한 일들'로 번역된 지시 대명사 '투톤'(tuton; these things)이 무엇을 가리키는 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많은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나타나는 우주적 징조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재림 시기의 정확한 때와 시간을 알 수 없지만, 말씀에 예언된 나타나는 징조들을 통해 그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재림의 시간에는 사람들이 극단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일텐데, 그것은 그 재림의 날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벌에 처해지는 두려움과 고통의 날이 될 것이며, 믿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는 완전한 기쁨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사람들에게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로 권고하신다.
이 표현은 공관 복음의 병행 기사에서 루카 복음에만 나온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천사를 보내어 선택하신 이들을 모으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이 나온다(마태24,31; 마르13,27).
이러한 차이는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사가가 마지막 날에 하실 예수님의 일을 중심으로 기록하였고,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을 중심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말하자면,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사가의 시선은 하늘에 있었고, 루카 복음사가의 시선은 땅에 있었다.
루카 복음사가가 이렇게 기록한 것은 특별히 예수님을 따름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이들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기 위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허리를 펴고'라는 뜻으로 번역된 '아나큅사테'(anakypsate; stand up)의 원형 '아나큅토'(anakypto)는 '스스로 일으키다','치켜 올리다'는 뜻이다.
그러나 비유적으로는 사람의 정신이나 원기를 '돋우어주다','고무시키다'는 뜻도 있다.
그리고 '들어라'로 번역된 '에파라테'(eparate; lift up)의 원형 '에파이로' (epairo)는 자신의 신체의 일부, 즉 '손'(1티모2,8)이나 '머리'등을 '높이 들어올리다'는 뜻이다.
따라서 세상의 마지막 때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징조를 볼 때, 신앙인들은 머리를 들고 그 징조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주님의 재림의 때를 기다리라는 것이다.
믿지 않는 이들은 세상의 마지막 때에 두려움으로 숨을 곳을 찾게 될 것이지만, 신앙인들은 그 때에 세상의 모든 것에 미련을 두지 말며 세상적인 관심을 내려놓고, 오로지 도래할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며, 새롭게 펼쳐질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대하고 희망을 가지라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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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27일 목요일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김동희 모세 신부)
오늘 독서에서 다니엘은 사람들에게 고발당하여 임금 앞에 끌려갑니다.
“서른 날 동안 임금님 말고 다른 어떤 신이나 사람에게 기도를 올리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자 굴에 던진다.”(다니 6,13)라는 다리우스 임금의 금령을 어기고 그가 하루에 세 번 하느님께 기도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을 누구보다도 아꼈던 임금은 “네가 성실히 섬기는 너의 하느님께서 너를 구해 내시기를 빈다.”(6,17)라고 말하면서 하는 수 없이 그를 사자 굴로 보냅니다.
다음날 새벽, 단식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운 뒤 임금이 사자 굴로 가 다니엘을 부르니 그가 응답합니다.
하느님께서 천사들을 시켜 사자들의 입을 막고 다니엘을 구하신 것이었지요.
임금은 기뻐하며 다니엘을 끌어 올리고, 악의로 다니엘을 고발한 이들을 그 가족들과 함께 사자 굴 속에 던져 버립니다. 그날 그렇게 운명이 서로 바뀝니다.
이십여 년 전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여동생이 저를 위하여 보험을 들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동생은 보험이 왜 필요한지 열심히 이야기하였고, 오빠인 저는 신부로서 보험이 왜 필요 없는지를 한참 설명하였지요.
제게는 하느님과 교회가 보험이라고요.
저를 지금까지 키워 준 큰 자비와 은혜로움을 알기에 하느님과 교회에 저를 온전히 맡기고 하느님과 교회를 믿는다고요.
만약 교회가 어려워지면 그 교회와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싶다고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종말이 징벌의 날이면서 또한 믿음의 자녀인 저희에게는 속량의 날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굳게 의지하여 제 몸과 마음을 맡기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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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27일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그리스도인’은 세상 두려움에 흔들리지 않는다.
복음 (루카21,17-28)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18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19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인내의 힘을 위해 시련을 허락하셨으나 하느님께서 먼저 인내로 우리 죄인들을 기다려 주셨다는 것을 희망으로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까지 묵상했다. 오늘은 우리가 어떤 인내를 해야 할지 말씀하신다.
20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 예루살렘이 적군에 포위되어 무너진 것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AD70년 경에 있었다. 그러나 성경은, 주님은 그것을 기억하라는 것이 아니다. ‘왜, 황폐해 졌는지 깨달으라.’ 하시는 것이다.
오늘날 하느님의 성전인 교회가, 성도들이 하느님의 적대자들, 곧 거짓 사도들의 ‘육신의 욕망을 위한 거짓 가르침과 그 세상의 힘에 포위된 그 황폐함을 보라’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 감사의 영광을 드리는 예배가 아닌, ‘자신들의 뜻(욕망)을 위한 제사로 드리는 신앙은 아닌지 보라’ 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은 그런 이들을 찾지 않으신다.
(요한4,23-24) 23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24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2티모4,3-4) 3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더 이상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입니다. 호기심에 가득 찬 그들은 자기들의 욕망에 따라 교사들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4 그리고 진리에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신화 쪽으로 돌아설 것입니다.
(마르7,7-8. 13,22) 7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할 수만 있으면 선택된 이들까지 속이려고 표징과 이적들을 일으킬 것이다.
(티토1,14) 14 유다인들의 신화, 그리고 진리를 저버리는 인간들의 계명에 정신을 팔지 않게 하십시오.
21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 유대 주의와 예루살렘, 곧 율법의 행위와 인간들의 신화, 계명(지혜)의 가르침에서 빠져나와 높은 산이신 하느님의 뜻인 그리스도의 대속, 그 구원의 진리, 새 계약(계명)으로 달아나라(믿어라)하시는 말씀이다.
사람의 뜻을 만족 시켜 주는(감동 시키는) 그 악인들의 헛된 가르침으로 다시 돌아가지 말라는 말씀이다.
(시편1,1-2) 1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2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22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 지금 우리(교회)의 모습을 보자, 우리의 뜻(소원)을 들어주실 능력의 예수님만 계신 것은 아닌지.... 그래서 베드로 처럼(마르8,33) 그 능력의 예수님 만을 따르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의 죄로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진리로 말하면 그 진리의 신앙으로, 그분의 지체로 의지(의탁)하며 살고 있는지... 신. 구약 모든 성경은 구원의 진리로 ‘그리스도’만 말하고 있다.
(루가24,25-27)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 베드로 처럼 그리스도를 원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위한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그것이 무서운 일이며 징벌의 날인 것이다.
(마르8,31-33) 31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3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23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 진노는 말씀을 열심히 먹었지만(임신) 하느님의 뜻을 낳지(깨닫지) 못한, 그래서 인간의 뜻, 육의 만족을 위한 말씀으로 따르게 되는데 ‘젖을 먹고 사는 사람은 모두 아기이므로,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에 서툽니다.’(히브5,13) 그러면 여전히 자신의 죄가 그대로 남아있는 하느님의 진노의 상태에 있게 되는 불행이 된다는 말씀이다.
24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세상)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세상)에게 짓밟힐 것이다.
= 실제로는 유대인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것이 곧 세상 신의 노예로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루가4,6) 6 그분께 말하였다.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
25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 교회인 우리가 예수님께서 ‘그릇되다’하신(요한16,8) 세상의 힘인 그 세상의 논리를 진리로 말하고 따른다면 공포에 휩싸일 것이라는 말씀이다. 곧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주시는 죄의 용서, 그 쉼, 안식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세상의 말을 하지 말라고 입을 막으신 것이고, ‘세상이 속이는 세상의 평화를 위한 제사를 드리지 말라’ 고 막으시는 것이다. 지금 ‘코로나’ 같은 질병의 공포에 떨고 있다면 세상의 것을 위해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26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 세상 사람들은 두려워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두려워하지도, 흔들리지도 않는다. 왜? 하늘의 세력(靈的)인 사탄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곧 하느님의 말씀을 적대했던 사탄의 힘, 약속이 무너질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을 믿고 살았던 사람들은 두려워 떨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서 주신 구원의 약속, 그 진리의 말씀이 영원히 지키시기에’ 두려워하지도, 흔들리지도, 않게 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믿고, 인내로 기다리면......
27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사람들이 볼 것이다. 28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 율법(제사와 윤리)과 세상이 말하는 육신을 위한, 진리가 아닌 영 의 구원을 위해 우리의 죄로 죽으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곧 구원의 진리, 새 계약(계명)으로 깨닫고 믿어, 율법과 세상이 주는 헛된 가르침에 흔들리지 않고, 인내로 따르는 그리스도인만이 누릴 수 있는 속량이다.
☨보호자 성령님!
사람의 말, 법과 하느님의 말씀, 진리를 잘 분별하여 십자가의 예수님으로, 구원의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깨달아 흔들리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 인내로 하느님의 속량을 누리도록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해 간구해 주소서. 우리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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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7. 연중 34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원석님
김건태 신부님_종말과 재림
예루살렘의 파멸을 예고하신 다음, 예수님은 세상의 종말과 영광 속의 재림을 미리 보여줄 표징들에 대하여 말씀하시며, 당신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세상에서 구원사업을 이어나갈 제자들과 이들을 기초 삼아 세운 교회 구성원들의 신앙 수준을 점검하고 한 단계 더 끌어올리고자 하십니다.
세상의 종말
‘마지막 때’ 하면, 흔히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서는 우주적 재앙과 전복의 성격을 먼저 떠올리곤 합니다. 때로는, 복음서에 예고된 이러저러한 표징이 이제 도래했다고 확인해줄 누군가를 찾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종말은 아직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마지막 때가 언제 올지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도록 허락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이와는 달리, 하느님 아버지 이외는 누구도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고 여러 차례 확언하셨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이 있다면, 그때에는 근원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그리스도는 정녕 인간을 향하여 오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근원적인 변화의 중요성과 규모는, 그것들이 세상 종말을 학술적으로 묘사해주는 것 이상으로, 그리스도 재림의 중요성과 찬란함을 돋보이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가난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오셨던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향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나타나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분을 기다리며 살아온 사람들은 두려울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이 사람들에게 속량의 날, 선의의 사람들이 기다려온 모든 것이 성취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파멸과 재앙으로 돌아갈 세상을 원치 않으시고, 허무로 운명지어진 인류를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활하고, 선으로 세상과 인류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선성 앞에 모든 것을 꽃피울 세상과 인류를 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다시 뵈려는 열망과 오로지 그분 안에 머물고자 하는 열정으로 살아온 신앙의 선조들, 곧 초대교회 신자들은 세상의 종말을 고대하며, “하늘의 세력이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도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었던” 사람들, “속량이 가까이 왔음”을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 또한 기다리는 마음, 신앙의 선조들과 똑같은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며 그날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 불안하고 초조한 상황을 마주하더라도 흔들리거나 포기하는 일 없이, 선으로 세상과 인류를 창조하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감사의 마음으로 더 기도하고 더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인의 하루, 복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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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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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4420
11월27일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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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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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작은형제회 김명경 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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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서 살아 숨 쉬는 분이십니다!>
어제 하느님을 거슬러 자신을 한껏 들여 높였던 네부카드네차르의 후계자 벨사차르 임금이었습니다. 천명이나 되는 수많은 대신들과 왕비와 후궁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아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냥 적당히 잔치를 하면 좋을 텐테 호기가 했던지,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해온 거룩한 금은 제기 잔들을 가져오라 하고, 그 거룩한 잔에 술을 잔뜩 부어 들이마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금과 은, 청동과 쇠, 나무와 돌로 된 신들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마디로 하느님을 완전히 얕보고 대놓고 무시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아무리 자비하시고 인내가 크신 하느님이시지만, 그런 사악하고 무례한 행동 앞에 크게 진노하십니다. 기이하고 특별한 표징을 그 사악한 사람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사람들 앞에 갑지가 사람 손가락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촛대 앞 왕궁 석고 벽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에 벨사차르 임금은 아차 했겠지요. 내가 너무 나갔구나. 내가 큰 실수를 했구나, 하는 후회와 함께 허리의 뼈마디들이 풀리고 무릎이 서로 부딪쳤습니다. 그만큼 놀라고 당황했던 것입니다.
임금은 그 특별한 광경을 잘 풀이해준 다니엘의 총명함과 하느님을 향한 한결같은 믿음을 보고 그를 총애합니다. 그리고 그가 믿는 하느님을 크게 칭송합니다. 일종의 장엄한 신앙고백과도 같습니다. 어제만 해도 주님을 모욕하던 임금이 오늘을 주님을 찬양하고 있으니,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분은 살아 계신 하느님,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나라는 불멸의 나라, 그분의 통치는 끝까지 이어진다. 그분은 구해 내시고 구원하시는 분, 하늘과 땅에서 표징과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 다니엘을 사자들의 손에서 구해 내셨다.”(다니 6, 27-28)
임금의 외침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그는 만백성 앞에 하느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분은 살아 계신 하느님.” 그는 자신의 두 눈으로 하느님의 실체를 확인했기에, 그렇게 외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멀리 떨어져 계신 분, 우리와 무관한 분이 아니라, 우리네 일상사 안에 살아 계시는 분, 우리 인생 여정을 밀착 동행하시는 분, 다른 장소가 아니라 바로 내 안에서 살아 숨 쉬는 분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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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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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겟 픽세이션(Target Fixation)의 법칙: "보는 곳으로 간다">
1240년, 이탈리아 아시시의 산 다미아노 수도원에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쳤습니다. 잔혹하기로 소문난 이슬람의 사라센 군대가 수도원 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수녀들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원장 수녀의 방으로 달려갔습니다. 당시 원장이었던 성녀 클라라는 병석에 누워 꼼짝도 못 할 만큼 쇠약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클라라는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부축을 받아 일어나 성체광(Monstrance)을 높이 쳐다들고 성벽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녀의 눈은 담을 넘으려는 칼과 창, 그리고 살기 등등한 적군을 향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시선은 오직 성체광 안에 계신 예수님께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적들을 보지 않고 주님을 보며 기도했습니다. "주님, 당신을 섬기는 이 여종들을 지켜주소서."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성체광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고, 그 압도적인 빛과 영적인 기운에 눌린 사라센 군대는 혼비백산하여 도망쳤습니다. 땅의 군대를 이긴 것은 칼이 아니라, 하늘을 응시하는 한 수녀의 시선이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저는 여러분께 '타겟 픽세이션(Target Fixation, 주시 이끌림 현상)'이라는 법칙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는 단순히 "보면 간다"는 속담이 아닙니다.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에서 발견된 무서운 뇌과학적 현상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전투기 조종사들은 지상의 적군 벙커를 폭격하기 위해 급강하를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폭탄을 투하하고 기수를 올려야 할 시점에도, 수많은 베테랑 조종사들이 마치 최면에 걸린 듯 자신이 맞추려는 타겟(벙커)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계속 돌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격추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타겟에 충돌해 폭사했습니다. 뇌가 위기 상황에서 두려움의 대상을 응시하는 순간, 생존 본능마저 마비되고 몸이 그쪽으로 빨려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이 '타겟 픽세이션'의 기원입니다.
이 죽음의 법칙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은 F1 레이서들입니다. 시속 300km로 코너를 돌 때, 벽에 부딪힐 위험은 항상 존재합니다. 전설적인 레이서 아일톤 세나는 신입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고 합니다. "벽을 보지 마라. 벽을 보는 순간 네 차는 벽에 박힌다. 트랙의 탈출구(Exit)를 보라."
사고가 나는 순간을 슬로모션으로 보면, 드라이버의 헬멧(시선)이 트랙이 아니라 충돌할 벽을 향해 고정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박으면 안 돼, 박으면 안 돼"라고 생각하며 벽을 쳐다보지만, 뇌는 부정어를 인식하지 못하고 시선이 가는 대로 핸들을 꺾어버립니다. 벽(절망)이 아니라 길(탈출구)을 봐야 빠져나갑니다. 사람은 보는 곳으로 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이 시선의 법칙을 완벽하게 증명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물 위를 걷는 베드로입니다. 칠흑 같은 밤, 베드로가 배 밖으로 발을 내디뎠을 때 그는 기적처럼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때 그의 눈은 오직 '탈출구'이신 예수님의 눈을 향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가 물에 빠진 이유를 정확히 기록합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겁에 질려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마태 14,30).
파도가 갑자기 높아진 것이 아닙니다. 중력의 법칙이 변한 것도 아닙니다. 베드로의 시선이 예수님에게서 '거센 바람(벽, 장애물)'으로 옮겨가 '타겟 픽세이션'이 일어난 순간, 그의 영혼과 육체는 그 공포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을 보면 위를 걷고, 바람을 보면 빠져 죽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종말의 징조를 예고하십니다.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이 나타나고...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혼절할 것이다." 전쟁, 지진, 기근... 세상이 흔들릴 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 재난(벽)을 쳐다봅니다. 뉴스를 보며 공포에 떨고, 무너지는 경제를 보며 한숨 쉽니다. 재난에 시선이 고정되어 영혼이 그쪽으로 추락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F1 레이서와 같은 처방을 내리십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세상은 땅을 보며 "아이고 죽겠네" 하고 벽에 부딪히지만, 신앙인은 고개를 들어 구름 타고 오시는 사람의 아들, 곧 우리의 영원한 '탈출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땅이 흔들릴수록 하늘을 봐야 균형을 잡을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 열왕기 하권에는 이 시선의 차이가 극명하게 나옵니다. 아람 군대가 도탄 성을 겹겹이 포위했을 때, 엘리사의 사환은 '적군(벽)'만 보고 공포에 질려 소리칩니다. "아이고, 주인님! 큰일 났습니다. 우리는 다 죽었습니다!" 그는 타겟 픽세이션에 걸려 죽음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평온하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 편이 그들보다 더 많다." 그리고 사환의 눈을 열어줍니다. 사환의 눈이 열리자, 그는 보았습니다. 적군보다 더 크고 웅장한 불마와 불수레가 온 산을 뒤덮고 엘리사를 호위하고 있는 것을. 같은 장소에 있었지만, 땅을 본 자는 절망했고 하늘을 본 자는 승리했습니다.
자연 만물도 이 이치를 알고 있습니다. 해바라기를 보십시오. 해바라기의 뿌리는 어둡고 축축하고 지저분한 흙 속에 박혀 있습니다. 하지만 해바라기는 땅을 보며 "아이고 더러워라" 하지 않습니다. 해바라기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직 태양의 궤적만을 쫓아 고개를 쳐듭니다. 진흙 속에 발을 담그고 있어도 머리는 태양을 향해 있기에, 해바라기는 썩지 않고 밝고 노란 꽃을 피워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광야 시절 이스라엘 백성이 불 뱀에 물려 죽어갈 때를 기억하십니까? 그들은 땅에 있는 뱀만 쳐다보다가 독이 퍼져 죽어갔습니다. 그때 하느님은 뱀을 없애주는 대신, 모세에게 구리 뱀을 만들어 장대 높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은 살 것이다."(민수 21,8)
이것은 '시선의 훈련'입니다. 독이 퍼지는 고통 속에서도 억지로 고개를 들어 높이 달린 것을 바라보는 행위, 그것이 믿음이고 그것이 구원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습니까? 경제적 위기, 질병, 실패라는 벽이 여러분을 향해 달려옵니까? 그 벽을 쳐다보지 마십시오. 전투기 조종사들처럼 그것만 보다가는 그곳에 추락합니다. 시선을 돌려, 그 너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유일한 탈출구를 뚫어지게 바라보십시오.
"사람은 보는 곳으로 간다." 이 법칙을 잊지 마십시오. 재난을 보면 재난 속으로 빠지지만, 주님을 보면 주님 품으로 가게 됩니다. 오늘,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여러분의 구원자를 바라보십시오. 그 시선이 여러분을 살릴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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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휴가 중에 울산엘 다녀왔습니다. 울산에는 뉴욕에 있을 때 함께 지냈던 신부님이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함께 지냈던 인연으로 많이 가까워졌습니다. 신부님은 제게 울산의 명소를 안내해 주었습니다. 처음 간 곳은 ‘통도사’였습니다. 통도사는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합니다. 1390년이 된 고찰입니다. 통도사는 삼보사찰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삼보란 ‘불, 법, 승’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불은 부처님을 뜻하고, 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하고, 승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스님을 뜻한다고 합니다. 통도사는 ‘불’을 상징하는 사찰이기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통도사의 대웅전에는 ‘불상’이 없다고 합니다. 통도사로 가는 길옆에는 계곡이 있었고, 울창한 나무가 있었습니다. 불가의 ‘삼보(三寶)’ 이야기를 들으면서 교회가 신앙으로 믿는 ‘삼위일체’의 하느님 생각이 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도 생각났습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였고, 복음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표징이었고,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두 번째 간 곳은 ‘태화(太和) 국가 지정 공원’이었습니다. 공원에는 ‘십리대나무길’이 있었고, 옆으로는 태화강이 흘렀습니다. 태화라는 말은 신라시대의 ‘연호’였다고 합니다. 높게 자란 대나무 숲을 걸으면서 ‘매, 난, 국, 죽’이라는 사군자가 생각났습니다. 대나무는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기 때문에, 절개(節介)와 변치 않는 충성심을 상징합니다. 채근담(菜根譚)》에는 “대나무는 속이 비어 겸허함을 배우게 하고, 마디가 있어 절개를 일깨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추운 겨울에도 꺾이지 않고 푸른 대나무는 역경 속에서도 신념을 지키는 군자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대나무는 속이 비어 있습니다. 이것은 겸허한 마음, 비움의 미학, 그리고 자아를 비운 깨달음의 경지를 상징합니다. 불교에서도 ‘공(空)’의 정신을 대나무로 표현하곤 했습니다. 속이 비었기에 바람이 통하고, 고요함 속에서도 유연함을 유지합니다. 대나무는 눈에 띄게 자라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일단 자라기 시작하면 매우 빠르게 성장합니다. 이 때문에 “대나무는 땅속에서 오랫동안 뿌리를 키운 후에야 하늘로 솟는다”라는 말처럼, 인내와 준비의 시간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대나무는 바람에 흔들려도 부러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유연하지만 꺾이지 않는 강인한 정신을 나타냅니다. 즉,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면서도 근본을 잃지 않는 삶의 지혜를 상징합니다. 공자는 이를 “강직하되 부드럽게”라는 군자의 덕으로 보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지켜주었습니다. 다니엘을 사랑했던 왕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내 나라의 통치가 미치는 모든 곳에서는 누구나 다니엘의 하느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해야 한다. 그분은 살아 계신 하느님,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나라는 불멸의 나라, 그분의 통치는 끝까지 이어진다. 그분은 구해 내시고 구원하시는 분, 하늘과 땅에서 표징과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 다니엘을 사자들의 손에서 구해 내셨다.” 왕은 하느님께 찬양을 드렸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왕에게는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도 무사하게 살아온 날이 감사한 날입니다. 성찬의 전례의 중심에는 ‘감사송’이 있습니다. 사제는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기 전에 이렇게 기도를 바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 감사와 영광을 드림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옵니다. 무수한 천사가 밤낮으로 아버지를 섬기고 그 빛나는 얼굴을 뵈오며 끊임없이 찬양하오니 저희도 그들과 함께 하늘 아래 모든 조물과 더불어 기뻐하며 아버지의 이름을 찬송하나이다.”
돌아보면 2025년에도 감사할 일이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건강을 주셨습니다. 주일이면 함께 미사 할 공동체를 맡겨 주셨습니다. 마음을 열고 대화할 수 있는 동료 사제들이 곁에 있습니다. 한국으로 휴가 와서 좋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감사할 일입니다. 2026년이 어떻게 지나갈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묵시록의 예언을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신 것처럼 멸망하는 것도 무섭지는 않습니다. 오늘 하루만 충실하게 살 수 있다면 됩니다. 오늘 하루를 감사드리면 살 수 있으면 됩니다. 그것이 모인 것이 지난날들이고, 그것이 모이면 미래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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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오늘 독서에서 다니엘은 사람들에게 고발당하여 임금 앞에 끌려갑니다. “서른 날 동안 임금님 말고 다른 어떤 신이나 사람에게 기도를 올리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자 굴에 던진다.”(다니 6,13)라는 다리우스 임금의 금령을 어기고 그가 하루에 세 번 하느님께 기도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을 누구보다도 아꼈던 임금은 “네가 성실히 섬기는 너의 하느님께서 너를 구해 내시기를 빈다.”(6,17)라고 말하면서 하는 수 없이 그를 사자 굴로 보냅니다.
다음날 새벽, 단식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운 뒤 임금이 사자 굴로 가 다니엘을 부르니 그가 응답합니다. 하느님께서 천사들을 시켜 사자들의 입을 막고 다니엘을 구하신 것이었지요. 임금은 기뻐하며 다니엘을 끌어 올리고, 악의로 다니엘을 고발한 이들을 그 가족들과 함께 사자 굴 속에 던져 버립니다. 그날 그렇게 운명이 서로 바뀝니다.
이십여 년 전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여동생이 저를 위하여 보험을 들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동생은 보험이 왜 필요한지 열심히 이야기하였고, 오빠인 저는 신부로서 보험이 왜 필요 없는지를 한참 설명하였지요. 제게는 하느님과 교회가 보험이라고요. 저를 지금까지 키워 준 큰 자비와 은혜로움을 알기에 하느님과 교회에 저를 온전히 맡기고 하느님과 교회를 믿는다고요. 만약 교회가 어려워지면 그 교회와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싶다고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종말이 징벌의 날이면서 또한 믿음의 자녀인 저희에게는 속량의 날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굳게 의지하여 제 몸과 마음을 맡기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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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1,20-28: “이 땅에는 무서운 재난이 닥칠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함락과 세상 종말을 예고하신다. 세상은 때로 두려움과 혼란 속에 놓일 수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끝까지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통해 믿음 안에서 깨어있고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함을 배우게 된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20절) 예루살렘의 파멸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인간의 회개와 불순종에 따른 경고이다. 이어서 종말과 환난을 말씀하시며, 신자들에게 두려움 없는 깨어있음을 강조하신다. 해와 달, 별들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이 신앙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분은 비밀리에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영광과 신성으로 오셔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신자들을 구원하신다(28절).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종말의 표징은 믿음을 시험하고, 신자들을 연단시키는 도구이다. 두려움 대신 믿음과 소망으로 맞이할 때, 우리는 영광스러운 구원을 체험하게 된다.”(De Civitate Dei, XX, 25)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강조한다: “주님의 영광스런 재림을 바라보며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는 말씀은, 모든 신자가 깨어있는 삶과 영적 준비를 갖추어야 함을 알리는 것이다.”(Homiliae in Lucam, 79)
복음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 환난과 종말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에 큰 재난과 박해가 닥치더라도,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신다.
영적 깨어있음과 신앙생활: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두려움과 집착으로 가려지지 않도록, 매일 기도와 묵상으로 깨어있어야 한다.
주님 재림의 소망 속에서 살라: 주님의 재림은 단순한 미래 사건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목적과 신앙 여정을 완성하는 영광의 순간이다.
예수님은 종말의 환난 속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광스럽게 변화시키실 것을 약속하신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두려움 대신 희망으로, 세상 걱정 대신 주님을 바라보며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함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주님, 우리가 어떤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굳게 지키며, 당신의 재림과 영광스런 구원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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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의 아들처럼>
루카 21,20-28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시다,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처럼>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7-28)
내게
사람이
불신일지라도
나는
사람에게
믿음이기를
사람의 아들처럼
내게
사람이
절망일지라도
나는
사람에게
희망이기를
사람의 아들처럼
내게
사람이
미움일지라도
나는
사람에게
사랑이기를
사람의 아들처럼
내게
사람이
슬픔일지라도
나는
사람에게
기쁨이기를
사람의 아들처럼
내게
사람이
저주일지라도
나는
사람에게
축복이기를
사람의 아들처럼
내게
사람이
억압일지라도
나는
사람에게
해방이기를
사람의 아들처럼
내게
사람이
죽임일지라도
나는
사람에게
살림이기를
사람의 아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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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종말과 재림의 날은 ‘구원 받는 날’이고, ‘기쁜 날’입니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0-28)
1) 예수님께서는 앞의 6절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셨는데, 여기서는 예루살렘이라는 도시 전체의 멸망을 예고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종말과는 상관이 없는 일, 또 종말이 오기 전에 일어날 일로 예고되어 있고, 단순히 한 도시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심판으로 예고되어 있습니다. <앞의 19장에도 예루살렘 멸망 예고 말씀이 있고(루카 19,41-44), 20장에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는 말씀이 있습니다.(루카 20,16)>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믿지 않고, 회개하지도 않았고,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재판 때,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 라는 말을 하면서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사형을 요구했습니다.(마태 27,25) 예루살렘의(이스라엘의) 멸망은 하느님께서 바로 그 ‘책임’을 물으신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2)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라는 말씀은, “죄인들과 함께 있다가 심판이 내릴 때 함께 휩쓸려서 심판받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또는 예루살렘을 심판하신다고 해도, 그것은 사실상 죄를 지은 죄인들만을 심판하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또는 예루살렘 시민이라는 이유만으로 의인들이 죄인들과 함께 심판받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모님도, 사도들도 모두 유대인이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열왕기 상권 9장 7절, 다니엘서 9장 26절, 미카서 3장 12절 등에 있는 ‘예루살렘(이스라엘) 멸망 예고 말씀’들을 가리킵니다. ‘징벌의 날’은, ‘하느님께서 직접 심판하시는 날’입니다. 이 말은, 예루살렘 멸망은 하느님의 심판에 의한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는 말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흔히 일어나는 전쟁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이라는 말씀은, 임신과 출산이 무슨 잘못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심판이 엄청나게 참혹하고 무서운 재난이라는 뜻이고, 피난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을 것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는, “하느님의 심판은 아무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입니다.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는, “이방인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이고, 뜻은 “종말의 날이 올 때까지”입니다.
3) 25절과 26절은 ‘종말의 날’을 묘사한 말씀입니다.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라는 말씀과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다.”라는 말씀이, 실제로 어떤 일들을 나타내는 말씀인지는 모릅니다. 어떻든 종말의 날이 오면 우주 전체의 질서가 무너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입니다.(묵시 21,1)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무서움’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대상이라는 점입니다.
하느님을 모르거나 안 믿는다고 해도, 종교와 신앙이 다르다고 해도, 아무도 종말의 심판을 피하지 못합니다. 또 지구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우주 전체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지구를 떠나서 다른 별로 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땅속 깊은 곳에 피난처를 만들어 놓는 일도 아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죄인들에게는 ‘심판관’으로 오시는 분이지만, 충실한 신앙인들에게는 ‘구세주’로 오시는 분입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는, “그날은 너희가 자유와 해방과 구원을 얻는 날이다. 그러니 기뻐하여라.”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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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유혹은 달콤합니다. 현혹되지 마십시오>
지금 이 순간, 나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어떻게 했는가? 좋은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때가 되면 지나갑니다. 인생의 여정에 아쉬움이 있든 그렇지 않든 어느 날 마지막에 직면하게 되고 하느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됩니다. 그날에 분명한 것은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온 사람과 세상에 매여 산 사람이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준비한 사람은 알곡으로 하늘 곳간에 그렇지 않은 사람은 쭉정이로 불에 태워지는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재앙이 닥칠 때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 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에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루카21,21).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도시는 화려함과 편리함 속에 누릴 수 있는 온갖 것들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사람의 욕심과 계획이 지배하는 곳이요, 그곳에 맛들이면 빠져나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결국, 도시는 하느님의 다스림보다는 인간적인 생각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그곳으로부터 빠져나가라고 호소하십니다.
그러나 발을 빼기가 왜 그리 어려운지요. 내일 망할 것을 알면서도 예나 지금이나 온갖 죄악이 거기서 사람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유혹은 항상 달콤합니다.
그에 비해 산과 시골은 순수함과 깨끗함이 거기에 있습니다. 오염 되지 않은 맑고 소박한 정겨움이 있습니다. 인위적인 조작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와 법칙이 살아있습니다. 흐르는 시냇물에 목을 적시고 발을 담글 수 있어 좋고, 메뚜기가 뛰어놀고 다람쥐가 활개를 치며, 까치밥을 남겨 놓은 감나무가 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빙판 길에 모래를 뿌리시는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러니 그곳을 두고 성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순리가 살아있는 곳에 생명도 있습니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마구 파헤치면 결국은 죽고 맙니다. 혼자만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죽게 만듭니다. 환경파괴로 말미암아 자연의 고마움도 사라지고 재앙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21,28).하시니 이제 우리의 마음을 정리해야 하겠습니다. 화려하고 편리한 인간적인 생각에 머물러 재앙을 자초하거나 세상 것, 이상하고 신비한 일에 현혹되지 말고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지혜,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머리를 들어야 하겠습니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바로 그때가 구원의 때임을 잊지 말고 그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종말 예언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두려움과 공포이지만 믿는 사람에게는 환희와 희망입니다. 마지막 매달릴 곳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내 한평생을 예수님 안에, 내 온전하게 그 말씀 안에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 그분만을 따릅니다.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 그분만을 따릅니다. 이 땅 위에서 산다하여도 이 땅 위에서 산다하여도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그분만을 따릅니다”(가톨릭성가445)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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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전신 마취를 하고 수술대에 올라 본 경험이 있습니다.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수술실로 이동하면서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냥 누워 있는 것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누운 채로 눈을 뜨지 못한다면 …….’
대개 두려움이란,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이고 다른 거대한 힘에 의하여 자신의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생각에서 찾아옵니다. 그 힘에 우리는 모든 것을 내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잃으면, 사랑하는 사람도 만날 수 없고, 내가 이루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생각이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마지막 날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유다인들에게 가장 소중했던 도시인 예루살렘의 멸망, 임신한 여자에게 가장 소중한 배 속의 아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젖먹이 아이 ……, 그 소중함을 더 이상 볼 수도, 만질 수도, 사랑할 수도 없다는 두려움이 닥쳐옵니다.
나약한 인간에게는 너무나도 거대한 자연의 힘이 이제까지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다는 공포가 밀려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 두려움을 온몸으로 맞이할 뿐입니다. 그런데 정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까요?
아닙니다. 마지막 순간일지라도 서로의 소중함을 느끼며 한 번이라도 더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삶이 행복했다고, 미안하다고 안아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종말의 때를 살고 있습니다. 내일 당장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우리의 소중함을 깨닫는 데 소홀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오셔서 행하시는 그 전능한 힘에 온몸을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모든 것을 잃게 하는 힘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는 희망의 힘임을 믿고 살아가는 신앙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소중함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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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의 신앙생활이 새롭게 창조될 것이라는 약속>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마지막 날’에 벌어질 무시무시한 표징들을 듣습니다. 곧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고’와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에 대한 표징들입니다. 이는 ‘종말’, 곧 ‘구원’은 올 것이라는 사실과 하느님께서 그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그때에 그 어떤 시련을 당하더라도 절망하지 말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이는 ‘종말’ 그날이 우주의 파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이 새롭게 창조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곧 그날의 대재앙은 단순히 미래를 앗아가는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를 '속량'하실 것이라는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그래서 떼이야르 드 샤르뎅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의 종말은 집단적 죽음이나 멸망, 결별이 아니라 하나의 변형이 될 것입니다. 곧 인간의 종말은 분열과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와 새로운 탄생이 될 것입니다. 곧 대재앙이 아니라 정신적 역전이 될 것입니다. 정신은 역전하고 다른 영역으로 들어갈 것이며, 세계는 순간적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안에서의 희열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말론적인 표현들을 미래의 세상 종말에 대한 지식을 전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삶에 대한 태도’를 말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종말론적인 표징들은 우주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신학적인 표현으로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그분은 먼 미래에 오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오셨고, 세상은 이미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완성의 때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바로 지금 이곳’에서 그분을 맞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헨리 나웬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은 오십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내년이 아니라 올해, 우리의 비참함이 다 지나가고 난 뒤에가 아니라 그 비참함 한가운데로,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곳으로 주님은 오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바로 지금의 우리의 삶 안에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때'에 결정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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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주님!
새롭게 하소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게 하소서.
변형되게 하소서.
당신의 속량을 입게 하소서.
바로 지금 당신을 맞이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으로 하여 역전되고 당신 승리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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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종말 관상이 주님 관상이 되는>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권능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요즘은 세상 달력으로나 교회 달력으로나 좀 스산합니다. 추워지고 나무에 이파리들이 다 떨어져 버린 데다가 미사의 독서와 복음은 계속 종말에 관해 얘기하니 말입니다.
그러기에 자칫하면 우울한 감정에 머물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잘 아시겠지만, 우울한 감정에 머묾은 인간적인 것이고 그런 뜻에서 비신앙인 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왜냐면 신앙이 없는 사람은 세상의 종말과 함께 자신도 종말을 맞게 된다고 생각하기에 주님 말씀처럼 까무러치게 되겠지만 신앙인은 종말이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오시는 것이니 필리비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 신앙인인지 아닌지는 종말 상황에서 잘 드러날 것입니다. 비신앙인이고 세속적인 사람은 공포에 휩싸이고 두려움 때문에 까무러치지만 신앙인은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라는 오늘 주님 말씀처럼 주님을 봅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는 말씀은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라는 말씀이고, 기도하라는 말씀이며 기도 중에서도 관상적인 기도를 하라는 말씀이지요.
이 참 신앙인의 모범으로 이번 주간 독서는 다니엘서를 읽는데 오늘 독서의 다니엘이 바로 사자 앞에서 주님을 본 사람이지요.
사자 앞에서 주님을 본 다니엘처럼 죽음 앞에서 주님을 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참 신앙인이라면 종말 관상이 주님 관상으로 이어지는 그런 기도를 해야 함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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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착한 죽음을 준비하는 기도!>
오늘 복음(루카 21,20-28)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는 말씀'과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에 대한 말씀'입니다.
전례력으로 한 해의 끝자락에 와 있습니다. 이제 3일이 지나면 새로운 한 해인 대림 제1주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끝자락에 와 있는 요즘 듣는 독서와 복음은 끝에 대한 말씀, 곧 종말에 대한 말씀입니다. 종말의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우리라는 분명한 인식과 그 인식에 바탕을 둔 우리의 준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이 준비로 '착한 죽음, 곧 선종에 대한 묵상'을 합니다.
베네딕토 13세 교황님의 기도로 알려진 '착한 죽음을 준비하는 기도'를 함께 바치며 묵상해 봅시다!
'착한 죽음을 준비하는 기도'
자애 깊으신 주 예수님,
당신의 수난과 피땀과 죽음으로 청하오니,
제가 준비 없는 불의의 죽음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
지극히 인자하신 주 예수님,
당신이 당하신 극심한 고통과
혹독한 채찍질과 가시관으로 청하오니,
제가 준비없이 또 성사를 받지 못한 채
죽음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
저의 하느님이신 사랑하올 예수님,
당신의 모든 고통과 성혈과 상처로 청하오니,
저로 하여금 황급히 이 세상을 떠나지 않게 하소서.
저의 구원자이신 예수님,
당신이 만드신 이 생명을 황급히 부르지 마시고
죄를 보속할 시간을 주소서.
영원히 주님을 사랑하고 찬미할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 안에서 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주 예수님,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표시인
십자가상 다섯 상처로 청하오니,
세상 모든 이를 구원하기 위해 흘리신
그 거룩한 피로 구원된 이 종이
착한 죽음을 맞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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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본질을
바라보라는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우리들 삶은
종종
예상치 못한
사건과 위기로
흔들립니다.
하나가 무너지면
하나가 일어납니다.
무너짐과
새로움은
언제나
하나의
모습입니다.
하느님께로
되돌아감이
우리 삶의
본질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당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속량의 주체는
언제나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오히려 위기는
우리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는
은총의
순간입니다.
마음의 중심을
다시 세우는
시간입니다.
머리를 들듯
마음을
하느님께
들어 올려야
합니다.
하느님과
함께 흐르는
우리들 본연의
삶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위해
속량의 길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무너짐이
새로운 질서와
회복을 향한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생명의 빛과
희망을
다시 발견하는
무너짐과
새로움입니다.
거짓 자아의
무너짐이
가까워진
속량(贖良)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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