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e Nacht
기혁
1
사유의 그늘 속에 너무도 많은 가능성을 담았기에
밤은 주체할 수 없이 무겁고 불룩해졌다
혁명의 태동을 갈망하는 청년들의 눈빛이
현실의 질문을 받을 때마다 밤하늘을 바라보았으므로
밤은 얼떨결에 산모 역할을 맡아 열연을 펼친다
태몽이 무엇인지
성별은 언제쯤 알 수 있는지
배냇이름은 누가
뭐라고 지어줄 것인지
도서관 한구석에 엎드린 이론의 곁으로 다가가 진짜 엄마가 된 것처럼
검고 불룩한 배를 창가로 내밀면서 속삭였다
이따금 심술이 나면 작은 발로 배를 차기도 한단다
2
어둠의 고요가 만드는 리듬과 함께 밤은 자장가를 들려주었다
청년들의 이름이 처음부터 사상이나 실천 따위가 아니었듯이
태내에 든 무엇도 정해진 것은 없었다
예상되는 외모와 성격은 어떻게 되는지
어떤 친구를 사귀고 싶은지
어른이 될 때까지 무엇을 기억하면 좋겠는지
궁금한 질문이 많아질수록 틈새에 낀 청년들의 마음도
유모차처럼 움직이곤 했다
논쟁 끝에 올려다본 밤하늘엔 불가능한 개연성보다 혁명의 작은 손과 발
크고 검은 눈동자가 먼저 떠올랐다
이쯤에서 밤은 연기를 멈추고 싶었지만 무언가 태어날 것 같은 기쁨을 함께 누리고 싶었다
출산준비물을 살피는 소중한 일이 꼭
피를 흘린 동지에게만 허용된 권리는 아니었다
갈망은 늘 오독의 실패로 밤의 문을 두드리는 법
성공과 실패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도록 청년들은 스스로 밤이 되었다
3
서로를 구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다리는 다리의 의지대로 불안은 불안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모두
같이 갈 순 없었지만
딱히 함께 갈 장소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밤이면 청년들이 사라진 장소마다 아이 울음소리가 크고 선명하게 들려왔다
명석한 인물들은 혁명과 청년의 은유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밤을 새웠으나
매번 그들의 머리통에서 밤이 시작되었다
4
디 나흐트(die Nacht),
누군가 독일어로 밤을 발음한다
여성명사였지만 여성도 명사도 배가 불룩한 부댓자루도 되지 못했다 그것은
가능성이라는 말이 존재하는 한
결코 담을 수 없는 가능성
아이의 운동화처럼 동조가 필요 없는 움직임이었다
혁명을 태아에 비유했던 역사가는 당사자의 동의도 없이
상상임신이라는 단어를 고른다
무지개색 머리카락을 사랑스럽게 쓰다듬고 싶었던 언어는 이제
혁명 이후의 의미를 감당하지 못하고 유치한 보복을 일삼는다
여기 있는 아이는 누구인가요?
학대당하지는 않았나요?
다른 아이들이 또 있나요?
진짜 부모는 누구인가요?
혁명의 2층 침대에서 사상적인 검증을 실시하는 동안 밤은
우는 아이를 감싸 안고 토닥거린다
어둠과 빛이 뒤섞여 한 덩어리 진흙처럼 보였을 무렵을 회상하면서
완벽한 가능성의 공간에선 무엇도 살지 못했음을 이야기한다
신조차 한쪽 신발을 잃어버리고 울었지
어린 시절엔 어쩔 수가 없단다
아이는 질끈 눈을 감고
밤에 뜨는 무지개가 지어낸 세상을 상상했다 하지만
영원히 아이의 생각을 읽을 순 없을 것이다 그것은 혁명과도 세상과도 밤과도
아이 자신과도 무관한 무지개의 소관일 테니까
5
밤이 낳은 것은 밤이었고 또 다른 밤도 곧 밤 속의 밤이 되었다 몇 번의 혁명이 다녀간 이후에도 밤의 총량엔 변함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 어둠 밝히기
오직 혁명에 대한 해석만이 비좁은 머리통 속에서 칼잠을 자야했다
깊은 밤 화장실에 다녀오던 ‘해석 1’이 잠든 ‘해석 2’의 발을 밟고 넘어지면
서로 밟고 밟히는 해석적 소란이 벌어졌다 난장판은 혁명의 의지와 무관했지만
날이 밝으면 으레 설득력이라고 불렀다 이상하게도
해석을 거치면 우연을 필연이라고 대답하게 된다
6
독일과 한국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사유의 눈을 피해
낮의 길이가 조금씩 짧아진다
극야(極夜)에도 백야(白夜)에도 0에 수렴한 낮과 밤은 각자의 임무를 수행 중이다
아름다운 폭죽이 소이탄(燒夷彈)이 되어 다가오는 세계에서 희망은 미지(未知)의 극지(極地)로 놓인다
디이, 지이, 나아, 흐으, 투우?
아니오, 디이, 나아, 흐으, 트으
의미 없는 한국말 독일어 발음에 가능성을 덧칠한다 미신 같았지만
어떤 과업에는 확실히 본토 발음이 필요하다
청년행복주택으로의 입주가 거부된 청년들이 불꽃놀이를 기다린다는 낭만적 사기(詐欺)의 진면목처럼
투철한 청년 정신의 일가견은 여전히 현실로 발음된다 그러므로 밤은 모의(謀議)가 아니었다
가장 실제적인 발푸르기스 나흐트(Walpurgisnacht)
저마다 목을 길게 늘이고 어둠이 낳은 무수한 변종들을 상상하는
디지기 직전의 절박함이여,
사유는 배달 오토바이를 탄 청년이 망가진 청년을 방문하듯 찾아온다 귀신을 쫓는 방상시(方相氏)탈을 쓰고
검은 봉지에는 일용할 양식 대신 마녀, 난쟁이, 반인반수, 자웅동체, 수염 난 여자 그리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감정의 정화와 순화 따위를 서비스 메뉴처럼 놓고 떠난다
---애지 가을호에서
기혁 1979년 11월 30일 경남 진주 출생. 2010년 시인세계(시) 등단, 2013년 세계일보 평론 등단. 시집으로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 『소피아 로렌의 시간』, 『다음 창문에 가장 알맞은 말을 고르시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