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평화는 오로지 용서와 화해를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전쟁과 분쟁의 참혹한 고통은 참회 통해서만 없어질 수 있어
상처 덜 아물어 용서 힘들 땐 공감 통한 연대와 위로가 먼저
“네가 용서하길 바란다. 용서란 너를 산 채로 갉아먹는 것으로부터 너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야. 또한 완전히 터놓고 사랑할 수 있는 너의 능력과 기쁨을 파괴하는 것으로부터 너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지. 지금껏 그 사람이 네가 얼마나 괴로워하고 고통당했는지 신경이라도 썼을까? 오히려 고소해하면서 잘 살았겠지. 그걸 끊어버리고 싶지 않아? 또한 너는 그 사람이 알지도 못한 채 짊어지고 있는 짐을 내려놓게 할 수 있어. 어떤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제대로 사랑한다는 의미야.”(윌리엄 폴 영 「오두막」 중)
■ 사회에 대한 관심
추석 연휴가 찾아옵니다. 어수선한 시국이지만 가족들과 평안하시길 빕니다. 시사를 자주 보십니까? 주로 어떤 소식을 보시는지요? 국제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이 걱정입니다. 어느새 내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은 바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위세를 떨치고 있으나 ‘위드 코로나’도 초읽기이고요. 또 여전히 사회 곳곳의 갈등과 사건·사고들이 적지 않습니다.
병영 부조리로 인한 안타까운 사건도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37만여 명으로 추산되는 우리 사회 은둔 청년의 급증과 자살 소식에 안타까웠습니다. 여성가족부 발표에 따르면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이들이 힘들지만, 특히 아직 어린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더 큰 악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얼마 전 이른바 인기 많은 막장 드라마로 알려진 ‘오케이 광자매’가 훈훈한 소식을 전했습니다. 극 중 인물들이 서로 용서해서 갈등이 해결돼서랍니다. 용서라는 단어를 인터넷에서 찾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용서 못 해”, “용서 안 해”라는 말도 꽤 많이 나오더군요.
■ 우리 사회는 과연 용서하는 사회인가?
용서라는 말을 어디에서 듣습니까? 친구들, 가족들 사이에서 자주 사용되나요? 대중매체에서는 용서와 평화를 종종 언급합니다. 그런데 이 용서라는 말이 일상과 너무 괴리된 말은 아닌지, 그래서 잊힌 말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여러분은 용서 못 할 사람이 있습니까? 가끔 교우분들에게 중대한 문제나 범죄와 관련해 용서는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고, 고발하거나 재판에 넘기고 벌을 받게 하는 것이 합리적일지 모른다고 말씀드립니다.
하지만 가치 있게 살고, 누군가를 살리는 데 필요한 건 용서입니다.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용서 없이 평화는 어렵습니다. 사회교리를 얘기하며 웬 용서 얘기일까요. 서로 용서해야 공동체도 화해하고 미움을 덜어 참된 평화에 이르게 됩니다. 혐오와 적대감 속에서는 평화가 아닌 복수와 폭력만이 이뤄집니다. 용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야 할 것이 아니라, 가까이해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 평화는 용서를 통해서만 가능
가톨릭교회는 용서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간추린 사회교리」를 통해 “참 평화는 오로지 용서와 화해를 통해서만 가능해진다”고 하고(517항), “그리스도인이 사회를 대하는 양식과 방법은 용서와 화해라는 그리스도교적 차원을 간직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196항) 나아가 그를 위해서 “희생을 선택하고 형제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희생까지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명시합니다.(196항)
그래서 복음은 언제나 우리를 용서라는 마당으로 초대합니다. 사탄의 일이 아닌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범죄자에게 가족을 잃은 분들에게, 테러범들에게 사랑하는 이를 잃은 분들에게 용서를 이야기함이 가능할까, 분명 어려운 일입니다. 나아가 상처가 덜 아물어 준비되지 못한 많은 분, 용서할 엄두를 못 낼 분들에게 이를 강요하기보단 먼저 필요한 공감과 환대, 연대와 위로를 선물하는 것이 적절할 겁니다. 그 또한 훗날의 용서를 위한 디딤돌이 되길 바라면서요. 용서를 지향하며 더 깊이 복음에 머물러야 합니다.
“전쟁과 분쟁의 참혹한 결과를 마주할 때 용서하기가 쉽지 않다. 폭력은, 특히 그것이 ‘잔인성과 고통의 가장 밑바닥에’ 이를 때, 고통의 무거운 짐을 지우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통은 전쟁 당사자 모두의 깊고 진실하며 용기 있는 반성, 참회로 깨끗해진 마음가짐으로 현재의 어려움에 맞설 수 있는 반성을 통해서만 없어질 수 있다. 용서받을 수 없는 과거의 짐은 오직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을 때만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은 길고 힘든 과정이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간추린 사회교리」 517항)
이주형 신부 (서울대교구 사목국 성서못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