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구간 지기."
영랑가[泳郞家].젊은 당주는 초고급 두루마리 양지에 쓰인 소개장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더미로 던져버리며 말했다.오른쪽 얼굴로 길게 땋은 머리가 찰랑거리며 움직인다.
렴은 젊은 당주의 입에서 나온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가만히 서있었다.
"알아들었으면 나가봐."
렴의 얼굴은 애초부터 보지도 않고 단 1초도 걸리지않아 소개장을 내팽겨친 젊은 당주의 입에서는
서릿발보다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렴은 고개를 깊이 숙인 후 집무실을 나섰다.한참을 성큼성큼
걷다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마구간 지기?저 건방진 젊은 당주는 자신에게 마구간 지기나 하라고
말했다.이 내가 마구간 지기라고?화가 나기 전에 먼저 황당함에 머리가 띵했다.한방 먹은 기분이다.
"하- 이거 너무 쉬우면 시시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잘 됬군.언젠가 그 건방진 얼굴이 내 밑에서
고개를 조아리게 해주지,영랑 당주."
렴은 빙긋이 미소지으며 집무실 쪽을 바라보았다.마구간 지기라.선왕이 아시면 배를 잡고 구르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렴은 팔을 걷어붙였다.
사건은 일주일 전.류렴이 선왕과의 내기게임에서 완벽한 압승을 거둔 후 궁밖으로 나오게 되었을 때.
류렴의 보좌,권율이 최대한 좋은 이미지를 남겨주겠다면서 소개장을 꽤나 정성들여 류렴과 함께
영랑가로 보냈는데 저 건방진 영랑당주는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내팽겨쳤다.류렴.아니,렴은
그 콧대높은 사선가의 자존심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왕의 보좌는 아니지만 감히 일국 황태자의 보좌가
쓴 소개장을 읽어보지도 않고 내팽겨친 시점에서 사선의 콧대는 이미 왕보다 높았다.
"그것도 가장 하인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주다니.내 정체를 알고 심술을 내는건가."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렴은 약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알아챘든 모르고 있든 처음부터 각오한 일이다.해야할 일은 반드시한다.난 지금 하인일뿐이니."
어떤 현자가 과거가 중요하다 하던가.중요한 것은 현재다.과거에 일국 황태자였던 어쨌던 지금은
단순한 영랑가의 하인,마구간 지기.그것 하나 못해서 어떻게 역대왕들이 다 받아내지 못한 사선의
충성을 한몸에 받을 생각을 한다는 말인가.최강의....선왕을 뛰어넘겠다고 선언했다.허드렛일 정도로
물러서서 어떻게 사선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새로 온 하인?당주님께 마구간 일을 선사받았다고?하하하하,거 총각도 힘들게 됬구만.근데...
그렇게 곱상한 얼굴을 하고서 일은 제대로 하겠수?내가 말씀드려서 집무실 일이라도 거들게 해줄까?"
"아닙니다.처음 온 자가 어떻게 그런 큰일부터 할 수 있겠습니까.전 마구간 지기가 적당합니다."
"흐음- 그런가.뭐,알겠으니 저기 있는 통과 마대자루를 가지고 가서 마구간 청소부터 시작하게.
상당히 크니 만만치는 않겠지만 당주님도 무슨 생각이 있어서 자네를 보냈을테니...잘부탁함세."
"네."
덜컹덜컹 물통과 마대자루를 어깨에 짊어지고 간 마구간은 렴의 상상보다 훨씬 더 넓고 공활했다.
렴이 살던 궁만큼은 크지않지만 저 크기 정도라면 무시할 수 없을거다.
"도대체....이곳 당주는 내가 뭐가 그렇게 맘에 안든거지?"
렴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
................
.........
...
"당주님."
"서림.네가 여긴 왠일이지.사서일이 다 끝난모양이구나."
"아닙니다.당주님께 막 정리가 끝난 개정 계획안을 갖다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래?"
영랑당주는 서림이 주는 개정 계획안을 받아들었다.다시 서류에 파고드는 영랑당주를 보면서
서림은 머뭇머뭇 무언가를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듯 했다.
"....뭐지?서림,나한테 무슨 할 말이라도?"
"네에.저,오늘 온 권율보좌관 소개로 온 청년말입니다."
"아,그...."
이름이 기억이 안나는지 약간 얼굴을 찌푸린다.서림은 약간 한숨을 내쉬며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렴."
"아,그래 렴.그 사내는 왜?"
"정말 영문을 모르겠습니다.그 청년은 권율님의 소개장으로 온 사람입니다.그런데 서사일은 커녕
마구간 지기....라니.그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말이 안 될 이유는 또 뭐가있지?"
"뭐가 있다니....솔직히 말해보십시오,당주님.저 청년의 어디가 맘에 안드시는겁니까?"
"맘에 안들어?난 그 사내에 걸맞는 일을 주었을 뿐이다.내가 사사로운 감정으로 그런 일을 맡겼다고
보는건가?그리고 그런 일조차 하지못하는 녀석이 사서일은 커녕 내 집무를 도와줄 수 있겠느냐."
"....그럼.....당주님께서는 집무를 맡기실 생각이 있긴 하신건가요?"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서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영랑당주를 바라보았다.당주는 상당히 그 눈빛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불쾌한 듯이 말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거지,서림."
"당신은 정말 솔직하지 못한 분이군요.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셨으면 좋았지 않습니까."
".....서림,할일없으면 당장 집무실에서 나가."
"그 성격.고치지않으면 정말 후회할 겁니다."
그말에 당주의 눈썹이 위협스럽게 올라갔다.
'쓱쓱'
"후우- 노동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군."
하기사 몸을 쓰는 일에는 무예밖에 갈고닦지 않았으니 잘은 모르지만 청소를 한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일일 줄이야 이제서야 몸소 깨닫게 되는 바였다.남이 대신 일해주는게 당연했던 렴에겐
상당히 생소하고 낯선 노동이였다.
'푸르르르르'
렴 곁에 있는 말이 푸르르- 몸을 턴다.그것을 보던 렴이 흠- 하고 생각하더니 싱긋- 웃으며 말했다.
"좋아,오늘은 널 목욕시켜주마.자- 내가 꺼내줄테니."
끽.나무문을 열고 고삐를 잡은 렴은 다각다각 소리를 내며 얌전히 자신을 따라오는 말을 보며
궁에서 자신과 승마연습을 했던 검은 말이 떠올랐다.이제는 만날 수 없지만.렴은 말갛게 흐르는
강물의 물을 물통에 한가득 담은 후 바가지로 떠서 말의 등허리에 뿌렸다.촤아악- 소리가 흐르자
말이 푸르르 몸을 떨었다.그 바람에 물의 절반은 뒤집어 쓴 렴이 어안이 벙벙해 가만히 서있다가
하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저 청년,이번에 새로 들어온 마구간 지기?"
"그런가봐요.마구간 지기를 남자에게 시키다니 당주님께서도 별난 분이시네요."
"이봐,어디 당주님을 흉봐.그 입 좀 조심해.하인들이 들었음 어쩔 뻔했어?"
"아차차.조심할께요."
멀리서 여자들이 작은 목소리로 떠들어댄다.렴은 그것을 힐끔 바라보더니 묵묵히 그 말의 털을
쓸어주었다.간만에 목욕을 하는건지 말도 기분이 좋은지 작게 푸르르 거린다.이 나라는.렴은 청아한
하늘로 눈을 돌렸다.그래,이 나라는.
"말 목욕도 시켜주고 청소는 거의 끝냈나보지?"
"아,관리인님.그게...왠지 이 말을 보니 목욕을 하고싶어하는 것 같아서.."
"하하하.말들 기분까지 생각하다니,거 좋은 마구간 지기가 다 되었구만."
"하하.저...그런데,이 저택에는 여자분들이 꽤 많은 것 같네요."
"아아,시현[侍顯 -모시는 여성,즉 시녀]들 말이지?당주님께서는 현[顯]들을 꽤 차별없이
대하시는 아량넓은 분이시라서 이 저택에는 현들이 꽤 많은 편일세."
시현들이라.여성을 현[顯]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나라는.이 나라에서는 여성은 남성만큼의 대우는
받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달이 언제나 짙은 안개에 가리는것을 여성으로 비유.그래서 여성을
하현[河顯]이라고 불렀다.뜻은 물에 나타나는 덧없는 잔상.작은 바람이 불어도 사라지는 그 잔상처럼
여성은 덧없는 존재라며 멸시당했다.시현들은 그나마 나은 존재이다.대부분의 현이라 불리는 여성들은
태어나자마자 길가에 버려지고 죽임당하고 팔려가기 때문이다.집 저택에 여자들이 많은 곳은
그 집의 주인이 아량이 넓거나 별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정말 이 저택에는 여성,즉 현들이 많다.정확히 반은 아니더라도 엇비슷하다.그만큼 영랑당주가
배포가 크다는 것인가.아니면 여자를 좋아하는 호색한인가.자신을 마구간 지기로 덜컥 정한것을
보면 남자를 싫어할지도 모르지만......아마,그렇지는 않을테지.
"그렇군요.좋은 분이신 것 같네요."
"그렇지?참 좋은 분이지.어느 하나 불공평하게 대하지 않으시고 다정하게 대해주시니까.
....그치만 그건 역시 어렸을 적 어머님이...."
"...네?"
"아.이런 너무 쓸데없는 말을 했구만.그럼 일 잘하게나."
관리인은 강아지 풀을 한손에 쥐고 팔랑팔랑 흔들며 곧 렴 곁을 떠났다.어머님?렴은 그 낯선 단어에
약간 주춤거렸다.어머님이라.그런 이름.....그런 존재.그런게 있었던가.
"자- 너도 씻고나니 꽤나 잘생긴녀석이었구나.기분 좋은 건 알겠지만 이제 그만 돌아가자."
렴은 말고삐를 꾹 쥐고는 마구간으로 발길을 돌렸다.현을 차별없이 대하는 주인이라.그런 사람이
있을줄이야.훗- 자조적인 미소를 살짝 지은 렴은 수려한 눈동자가 약간 차갑게 변해갔다.그런 인간이
있었다는 말인가.이거 너무 의외라서 웃음이 날 정도였다.그치만 재미있으니 조금 더 지켜볼까.
........렴은 차갑게 미소지은체 영랑당주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