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우리는 주체를 독립시키자마자 생기는 문제에 대해서 잠시 언급했습니다. 이 문제는 데카르트에게는 매우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건 이중적인 의미에서 그런 것인데, 우선 그의 철학에선 매우 극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심각했고, 다음으론 그 문제의 해결이 그의 철학이 확고한 자리를 잡는 데 극히 중요했다는 점에서 심각했습니다.
데카르트는 두 개의 실체가 있다고 가정합니다. ‘연장(延長)’과 ‘사유(思惟)’가 그것입니다. 일단 여기서 ‘실체(substance)’라는 말에 대해 알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터미네이터 2>란 영화를 못 보신 분은 별로 없겠지요? 거기 보면 어떠한 모습으로도 변형될 수 있는 ‘괴물’ 같은 놈이 나옵니다. 이름은 T-1000이라고 하던가요? 미래의 세계에서 기계들이 보낸 터미네이터지요. 이 친구의 모습은 아시다시피 자유자재로 바뀝니다.
그렇지만 이 친구가 주인공의 어머니인 사라 코너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주인공의 목숨을 노리는 터미네이터인 건 변함없는 사실이죠.
이처럼 아무리 모습이 바뀌고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도 변함 없는 불변적인 본질(특징)이 바로 실체입니다.
이는 다른 변화를 만들어 내지만, 다른 것에 의존하지는 않는 영원한 특징을 뜻합니다.
비유해서 말한다면 앞의 예에서 때로는 경찰관이 되기도 했다가, 때로는 간호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다쳐서 아들을 부르는 어머니가 되기도 하는 T-1000이란 친구의 ‘실체’는, 나중에 인간들의 지도자가 되어 기계에 대항하는 소년을 살해하려는 터미네이터지요.
한편 데카르트는 좀더 일반적인 차원에서 실체를 찾으려고 합니다. 모든 사물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란 무엇일까요?
그는 이것을 ‘연장’과 ‘사유’라고 합니다.
연장은 물질, 물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데, 어떤 공간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쉽게 말하면, “모든 물체의 실체는 연장이다”는 말은 “모든 물체는 어떤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유는 한마디로 생각하는 성질입니다. 이건 공간상의 한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연장이란 성질과 구분됩니다. 정신의 실체는 바로 사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데카르트의 정신의 실체는 바로 사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데카르트의 철학은 두 개의 실체를 가정하고 있다는 뜻에서 ‘이원론(二元論)’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사유와 연장, 다시 말해 정신과 육체라는 두 실체가 결합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물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데카르트에게는 생각(사유)이 존재(연장)보다 우선합니다.
따라서 주체란 생각하는 나, 곧 정신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처럼 정신이 육체나 물질보다 우선한다는 뜻에서 데카르트의 철학은 관념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아까 말했던 문제가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정신과 육체가 이처럼 별개의 실체라면, 따라서 인식하는 정신과 인식되는 대상이 완전히 별개라면 대체 이 양자는 어떻게 일치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예컨대 육체라는 대상은 정신이란 주체에 의해 규정된다고 합시다. 그러면 육체(연장)란 실체는 정신에 의존하게 되어, 실체는 원인이지 결과가 아니라는(즉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정의에 어긋나게 됩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따라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가 아닌가, 즉 주체와 대상, 정신과 육체가 일치하는가 아닌가는 데카르트로선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러면 데카르트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을까요?
여기선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이성의 타고난 완전성이란 테제입니다.
이성의 타고난 능력(본유관념)은 완전한 것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당연히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제가 칠판에 원을 이렇게 그립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완전한 원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걸 다섯 개, 열 개, 백 개, 이백 개 그려도 마찬가질 겁니다. 그러나 저나 여러분 모두 완전한 원에 대한 관념,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재하는 모든 원이 사실은 불완전하며 완전한 원은 존재하지 않는데도, 그리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거라곤 모두 불완전한 것들뿐인데도, 우리는 완전한 원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물이나 감각 경험이 불완전하지만 인간의 이성은 완전한 것을 인식할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는 영혼(이성)에 우위를 두는 관념론의 입장을 채택합니다.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는 이 완전한 이성이라는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시 신을 끌어들입니다. 완전한 개념은 불완전한 것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마치 무에서 유가 나올 수 없는 것처럼. 그것은 완전한 존재인 신이 준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와 뭐가 다른가”하고 성급하게 비난하진 맙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선 신을 증명하고 신에 대한 믿음으로 나아가는데 반해, 데카르트는 신이 준 것은 바로 완전한 것을 사고할 수 있는 능력임을 강조합니다. 누가 준 것이든 간에 인간이 완전한 것을 인식할 능력을 타고난다는 게 그에겐 중요합니다.
어떻게 보면 데카르트는 거꾸로 이성의 완전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신을 끌어들이고 있는 셈입니다.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존재와 신앙을 위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이성의 능력을 끌어들이는 것이고요.
따라서 그들 각자에게 중심축은 정반대 되는 방향을 향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차이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사고와 서로 다른 시대를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철학에 중세적인 세계관과 근대적인 세계관이 공존한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하긴 생각해 보면 이 당시 신학적 사고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게 얼마나 어렵고 위험한 것이었겠습니까? 이러한 사정은 중세의 몰락이 거의 분명해진 그 뒤에도 마찬가지여서, 19세기 중반까지 지속됩니다. 헤겔 역시 신학적 사고 속에 자신의 철학을 세웠고, 종교 비판을 감행했던 포이어바흐(L. Feuerbach)는 대학에서 쫓겨나 시골에서 은거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갖고 있던 신학적 요소는 차라리 시대적 한계라고 해야 할 것인데, 분명한 것은 그러한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공존 속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은 근대적 세계관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탈리아의 철학자 네그리(A. Negri)는 절대왕정과 데카르트 철학을 비교합니다. 절대왕정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에 따르면 절대왕정은 봉건제 말기 그리고 근세 초기에 봉건적인 귀족과 근대적인 부르주아계급의 힘의 타협에 의해 만들어진 ‘균형 국가’입니다.
따라서 절대왕정에서는 두 반대되는 중세적 계급과 근대적 계급이 타협적으로 공존하고 있는데, 이런 점에서 데카르트는 절대왕정과 비슷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이성 능력의 완전성을 기초로 해서 이성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를테면 개념들, 수학에서의 원이란 개념은 우리가 지각(경험)하는 실제 원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에게 이 완전한 원의 개념은 실재하는 수많은 불완전한 원보다 훨씬 더 진리에 가까운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수학이야말로 확실하고 완전한 지식, 즉 진리의 모델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둘째, 이성이란 주체의 완전성과는 다른 차원에서, 대상 세계를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가?
그는 이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합니다. 그 근거는 급속히 발전하고 있던 근대 과학입니다. 과학의 발전을 통해 대상적 진리, 즉 객관적인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데카르트의 동시대인이었던 갈릴레이가 철학적으로 갖는 중요성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갈릴레이가 피사의 사탑에서 질량이 다른 두 물체를 떨어뜨려 보았다는 유명한 실험은 믿을 수 없는 신화’라고 합니다. 갈릴레이에게 중요했던 것은 오히려 실험보다는 자연과학(당시로선 물리학)을 수학화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경험적인 사실은 그 자체만으론 극히 불확실한 것이어서, 그대로 둔다면 결코 진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반복해서 확인할 수 있는 법칙으로 정식화해야 했고, 이것이 수학적인 형태로 요약될 수 있어야 비로소 ‘참된 지식(진리)’이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연이란 수학적, 기하학적 기호들로 가득 찬 책”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근대 최고의 물리학자인 뉴턴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사실 ‘보편중력의 법칙’이 더 좋은 번역인데)을 서술한 그 유명한 책의 제목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였습니다.
데카르트 역시 이러한 작업을 통해 경험적 지식의 불명료함을 씻고 분명하고 뚜렷한(clare et distincte) 판단―이 말을 흔히 ‘명석판명한 판단’이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우리말의 ‘명석하다(똑똑하다)’‘판명되다(분명히 드러나다)’와 전혀 무관합니다. 이는 일본어를 그대로 음독 번역해서 그런 것입니다―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데카르트 자신도 수학적 작업에 무척 많은 시간을 쏟았습니다. 예를 들면 그는 기하학조차 좀더 분명하고 뚜렷한 것으로 바꾸려 했습니다. 기하학은 사실 직관에 의존하는 것이죠. 이처럼 직관에 의존하고 있던 기하학을 좀더 분명하고 뚜렷한 대수학(代數學)으로 재구성하려 합니다. 그는 x축과 y축 등으로 이루어지는 ‘데카르트 평면’이란 좌표 평면 위로 기하학을 옮겨 놓습니다. 그냥 삼각형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만약 이것을 좌표 평면에 옮기면, 특정한 삼각형은 세 변의 길이가 어떻고 꼭지점이 어디 있고 하는 것들이 대수적으로 서술될 수 있는 도형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데카르트의 수학적인 면에서의 작업이었고, 철학적인 면에서 데카르트는 자연과학을 수학화 하는 것이 진리에 도달하는 길임을 보여 주려고 했습니다. 사실 갈릴레이는 자연과학에 수학을 도입했지만, 이것이 어째서 옳은지는 증명하지 않았습니다(그는 과학자였으니까요).
한편 데카르트는 갈릴레이의 이런 주장이 어째서 옳은 것인지를 증명하는 게 바로 (자신의) 철학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앞서 보았듯이, 데카르트에게 확실하고 완전한 개념의 모델은 수학이었습니다. 따라서 어떤 지식을 수학적인 형태로 환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본유관념과 일치하는 지식, 즉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유관념’이란 개념은 이래서 또 다른 중요성을 얻게 됩니다. 데카르트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철학이 과학의 근거를 확실하게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컨대 과학을 통해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데카르트이래 근대 철학 전반을 사로잡았던 일종의 ‘믿음’이었습니다. 이젠 오직 참된 지식만이 정당화될 수 있으며, 오직 과학적 지식만이 참된 지식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근대에는 어떤 지식도 자신이 과학적임을 입증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존재할 권리를 얻게 됩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한마디로 말해 과학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대를 특징짓는 이 ‘과학주의’라는 사고방식은 이미 데카르트 철학에서 가장 중심적이고 주된 지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셋째, 정신과 육체의 일치(통일) 문제 혹은 윤리학의 문제입니다.
데카르트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인간의 육체나 감정, 정념(passion) 같은 것들은 이성과 달리 절제할 줄도 모르고 자제되어 있지도 않고 굉장히 불안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안정되게 만들거나 억제하기 위해서 이성을 동원하는데 그다지 잘되진 않습니다.
예를 들면 억울하게 남한테 맞았을 때, 그리하여 머리끝까지 화가 났을 때, 이성은 어디 있는지 고랑지도 보이지 않고, 많은 사람이 불안정하게 되지요.
즉 사람들의 삶과 직결된 문제가 바로 정신과 육체의 일치, 이성과 감정의 일치라는 문제로 제기되는 겁니다. 이걸 흔히 ‘가치론’‘윤리학’‘도덕론’등의 이름으로 부르지요.
데카르트가 최고의 학문으로 도덕학을 제기하는 맥락도 이와 같습니다. 그는 학문을 커다란 나무에 비교합니다. 그 뿌리는 형이상학―‘세계는 이렇다’고 밝혀 주는 핵심적인 원리―인데, 이 형이상학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부터 나오는 철학적 원리들입니다.
그리고 그 형이상학의 뿌리 위에 줄기가 나오는데, 그 줄기는 물리학입니다. 그리고 그 줄기에서 뻗어나오는 가지들에서 의학, 역학, 도덕학과 같은 열매들이 맺힌다고 합니다. 그리고 도덕학이 이러한 것들 중 최고의 열매라고 합니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자연을 알아야 하듯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육체를 지배하고 통제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육체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육체에 작용을 미치고, 육체에서 파생하는 감정, 정념을 규제하고 그 힘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감정과 정념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정념론》이라는 책을 씁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즉 신에게서 독립할 자격을 얻으려면, 신이나 성직자가 없어도 인간(주체)이 올바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하는데, 답답하게도 인간의 육체나 감정은 제멋대로고, 이성과 같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성이 아무리 옳다고 하더라도 육체가 제멋대로라면 인간이 신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은 정당화되기 어렵다는 문제가 당연히 제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어떻게 육체를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를 다루는 도덕론이 중요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의 도덕론이 서 있는 기초입니다. 그건 한마디로 말하면 감정과 정념, 욕망과 육체적 활동을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완전한 능력을 가진 이성이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성(정신)이나 육체나 각자가 독립적인 실체임은 아까 본 바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이성, 정신은 대체 육체나 육체적 욕망, 정념에 대해 어떻게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겠습니까? 요컨대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어떻게 (이성에 따라) 일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에게는 정신과 육체가 만날, 그래서 육체가 정신의 말을 듣고 통제에 따라 줄 장소가 필요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영혼 속에 정념을 불러일으키고, 무엇인가를 욕망하게 만들고 동시에 육체로 하여금 사물을 향하거나 피하게 만드는 장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데카르트는 ‘송과선(松果腺)’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통해 정신과 육체가 만나거나 교감할 수 있을 것이며, 이로써 양자가 일치할 수 있으리라고 주장합니다. 그에 따르면 송과선은 뇌의 한복판에 있다고 하는데, 어떠한 해부학자도 아직 이것을 찾아내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하나의 문제가 다시 남는데, 그것은 이 송과선은 도대체 어떠한 실체인가 하는 것입니다.
'송과선은 사유하는 실체인가, 연장을 가진 실체인가, 즉 송과선은 정신인가 아니면 육체인가’하는 문제입니다.
아무튼 데카르트는 송과선까지 발명하면서 이 정념론을 기초로 ‘잠정적인’도덕 이론을 제시합니다. 그는 우리의 욕망에는 ‘도달할 수 있는 것’과 ‘도달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도달할 수 없는 것은 욕망하지 말고 포기하라고 합니다. 결국 가급적 이성에 의해 통제되는 상태를 위해서 제멋대로인 육체를 통제하고 욕망을 억제하라는 것이 그의 도덕론의 요체였던 것이고, 이는 사실 이성 또는 영혼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움직일 수 있다는 그의 본래의 이상에 맞는 도덕론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데카르트는 이미 대중의 무지를 일깨우고, 이성에 따라 행동하도록 하라는 윤리학적 계몽주의의 선구자였던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