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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주사(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천불산. www.unjusa.org 061-374-0660)
: 내 사랑 못냄이 편
찜질방(화순보석랜드)에서 7:50 출발. 822번 도로에서 817번 지방도로를 바꿔 올라타니 웬 초등학교가 눈에 선뜻 들어온다.(남편동초교) 방학이겠지만 그래도 조용히 들어가 한 쪽의 팔각정에서 라면(설렁탕면)에 떡국 가래를 한웅큼 넣고 김치를 척척 걸쳐 먹고 나니 배가 빵빵하다. 고백컨대, 사실 난 배만 부르면 맴이 편안타. 왜 그럴까? 너무 단순 무식하나?
운주사! 제법 호가 난 사찰이다. 험에도 너무 이른 시간이라(9:20) 그런지 입장료(2,500냥)는 냈지만 주차요원이 출근하지 않아 주차비는 나갈 때 내란다.(혹여 주차비를 아낄 수 있을까 싶어 관람을 조금 서둘렀는데, 하마 11시 다 됐지 싶은데 그래도 출근 안했더라.)
9층석탑인데 탑이 너무 너무 많아 이것만 대표적으로...
비산비야의 비탈마다 돌부처요! 황토밭마다 석탑이 줄지어 서 있다. 그런데 못 생겼다 하더니만, 정말 지지리도 안 받쳐준다. 이목구비가 멀쩡한 것은 애당초 찾을 수 없다. 찌그러지고 뒤틀린 얼굴에 문드러진 코와 입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귀는 짝짝이, 아무리 후한 눈으로 봐도 여축없는 거렁뱅이 모습이다. 하~! 그런데 이상하다! 돌부처들을 쳐다보면서, 씨~익! 나도 몰래 쪼개는 웃음이 나오면서 “짜~식들” 싶다. 아~하! 내보다 더 못생긴 네가 좋다는 심사인 갚다.
여러분들은 운주사 이름을 어디서 처음 들으셨나요? 전 대한민국 3대 구라 중 한 명으로 알려진 황석영의 「장길산」에서였다. 그런데 오늘날 글로벌한 시대에 즈음하여 이 절집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린(1987년) 인물은 독일 예술 평론가 요헨 힐트만이라고 한다. 그는 「미륵 - 한국의 성스러운 돌들」을 통해, 어떤 예술작품도 운주사만큼 자신을 감동시키지 못했다고 고마운 말씀을 전하고 있다. 이제사 너를 찾은 나의 안목이 몹시도 부끄럽다.
두꺼운 돕빠에 얼굴만 내놓은 한 아주머니가 한도 없이 끝도 없이 돌고 있네요! 한 많은 이 세상...
나라를 잃은 백제 유민들이 능주 땅으로 모여 들었다. 영구산 계곡에 천불 천탑을 세우면 미륵세상이 되어 백제가 부흥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모인 것이다. 온 백제 땅의 돌들을 이고 지고 끌며. 하룻밤 새 천불 천탑을 만들어야 한다. 이제 두 분의 부처만 일으켜 세우면 된다. 그런데 닭이 울고 만다. 결국 두 석불을 일으켜 세우지 못함으로써(와불) 미완의 땅이 되고 만다. 그래서인지 탑들에는 우리 불교미술사에는 나타나지 않는 마름모, 엑스자, 빗살 등의 요상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는 해독 불가의 시츄에이션이 전개되고 있다.
이 와불이 운주사의 대표적인 석조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 절집의 단전에 해당되는 곳은 ‘감실쌍불’이다. 다락방 같은 감실에 두 분 석불이 등을 마주대고 앉아 있다. 일주문을 바라보고 있는 석불에 연지를 바른 듯한 흔적이 새겨져 있고, 그 반대편 석불은 (대웅전 방향) 어깨선 등이 다소 거칠게 묘사되어 있다.
한 쌍의 감실 석불. 수 백년 동안 토라진 채...
이제는 절집을 전체적으로 조망해 보기 위해 뒷산으로 올라가 본다. 나지막한 높이의 솔숲을 지나니 맷돌 형태의 똥글똥글한 돌덩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소위 운주사의 비밀을 캘 수 있는 열쇠라고 야단떠는 이들도 있다. 북두칠성을 본떠서, 일곱 개 별들의 밝기에 따라 돌의 크기가 각기 다르고, 돌들 간격의 비례나 각도가 북두칠성과 같고, 머리부분 두 돌의 중심선을 연장하면 정북 방향을 가리키는데, 그 방향에 와불이 누워 있다. 그러니 칠성바위는 북두칠성이고 와불은 ‘뭐시라’? 바로 북극성인 셈이다.
천문학에 대한 선인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누구의 솜씨인지, 개성이 강렬하다.
〈평점〉 ★★★★☆
◉. 쌍봉사(화순군 이양면 증리 중조산 기슭)
: 목탑의 원조를 찾아서
뜻하지 않게 주차비를 아꼈기에, 착 가라앉은 음색인 「The indian road」를 시끌벅적인 「Hotel California」(Eagles)로 얼른 바꾼다. 이 두 절집은 한 동네이다. 금방 간다. 한 2년 만에 오는 갑다. 그 때에는 동료 교수들 간의 답사였다. 그러니 여 교수도 있었고 더러는 부인을 대동한 이도 있었다. 원래 답사란 게 그렇지 않은가? 저녁에는 술잔치이다. 그래서인지 마침 신호가 싸르르 온다. 모두들 쌍봉사를 완상하고 내려오면서, 나는 입구에 있는 해우소엘 일착으로 달려갔다. 허~걱! 이~런! 남녀 혼용이다. 어디 그 뿐인가! 칸막이가 현대식 판넬이 아니라 겨우 허리춤밖에 오지 않는 나무 판떼기이다. 아무리 고도를 한껏 낮추어도 머리 윗 부분은 까맣게 드러날 게다. 어이구! 정말 대략 난감이다. 꺼~엉 껑 대고 있는데, 벌컥 들어오면... 우~와! 이걸 우야노? 생체학적인 인내심도 이미 바닥인데... 정말 C껍했다.
인물이 약해졌으면 좋았을텐데...
이 절집의 가장 큰 특징은 대웅전이 목탑 속에 있다는 점이다. 법주사(속리산) 팔상전과 함께 현존하는 유이有二한 목탑이다.(다층 전각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목탑이란다) 허지만 팔상전은 조선조 양식인 반면, 이 대웅전은 삼국시대 양식이라, 그야말로 우리나라 목탑의 원형인 게다. 그런데 이 귀한 목탑이 80년대 중반에 불이나 전소되고 말았는데, 다행히 실측 도면이 남아 있기에, 2년 전에야 비로소 복원했단다. 재미있게도, 불길이 치솟자 인근 밭에서 일하시던 할아버지 한 분이 석가모니 부처, 가섭존자, 아난존자 상을 차례로 업고 나오셨는데, 쌍봉사 스님의 말씀이 이러했다. “장정 둘이서도 못 들어요” 이 이야기가 어느새 전설이 되고 있다.
장닌의 치열한 직업의식
대웅전 뒤로 석축이 있다. 크기가 제멋대로인 돌덩어리를 곱게 다듬어 짜 맞추었다. 큰 조작 작은 조각이 서로 몸 비벼가며 빈틈없이 붙어 있다. 전통 조각보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움이다. 누군가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축이라고 우겨도 곧이 들을만하겠다.(누군가 = DK, ㅋㅋㅋ×3)
조형미가 멋들어진 부도. 사진의 정 중앙에 보이죠! 가릉빈가!
역시 이 절집이 자랑하는 최고의 걸작품은 철감선사 부도탑이다. 이 부도탑은 지리산 연곡사 동부도와 함께 최고의 조형미라고 평해지고 있다. 우리는 흔히 ‘떡 주무르듯 한다’는 말을 부담없이 써 대는데, 기단부 아랫돌에 정교하게 새겨진 연꽃잎이라든가 탑신의 십이간지의 동물들을 마음을 열고 완상한다면, 엄정하게는 이런 경우에 국한해서 써야하지 싶다. 부도 조각의 백미는 기단부 윗돌의 가릉빈가이다. 사람의 몸에 날개를 달고 천상의 소리를 낸다는 상상의 새를 말한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해, 심인보는 “철감선사 부도탑이 아니면 피리, 비파, 요고, 바라 등을 연주하고 있는 가릉빈가의 모습은 보기 힘들다”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비록 평상시 이 극락조를 쉽게 구경할 수 있는 건 아님에도, 요번 답사에서는 두 번 더 만나게 되는 행운을 가진다. 짜~안!
〈평점〉 ★★★★☆
◉. 무위사 편(강진군 성전면 월출산 기슭, www.muwisa.co.kr)
개사아~ 오고 만다. 아침부터 잔뜩 찌푸린 하늘이더만... 비가 와도 밥은 먹어야겠제! 절집 입구부터 마땅한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상점조차 없더라! 그랬는데, 「전라남도청소년수련관」(?)이 선뜻 눈에 들어온다. 두말 않고 운전해 들어갔다. 한켠에 있는 팔각정에서 취사도구를 꺼내들고 한 끼 끓여먹을 준비를 하는데, 누군가가 부른다. 관계 직원인 모양이다. 그 자리 선 채로 대답 않고 성의를 다해 뛰어가서, 사정을 이야기하니 “으~음!” 이어서 “ 예!” 한다. 고맙다고 답례하고서 몇 발짝 돌아오는데, 또 부른다. “기왕 그러면 우리 직원 식당을 이용하세요” 와! 마다할 이유가 없제! 대여섯 평 쯤 될라나! 가스레인지, 전자레인지 게다가 뜨거운 온수도 철철 나온다. 김치찌개를 맛있게 끓여먹고선, 식탁 위에 맥주 2깡(빅 사이즈)과 사과 한 알을 살며시 올려놓고 나왔다.
공사로 난리 부르스 중이지만 그래도 극락전은 '무위'한 듯 합니다.
학생수련관에서 점심을 해 먹고 있을 때의 진도개 가족들. 젖먹는 강아지들, 쪼~옥! 쪽!
가파른 경사문제를 이렇게 해결하여 안정감을 극대화하였음.
년전 직장 내 ‘불자교수회’라는 모임에서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사찰 답사를 간다고 했을 때 불자도 아니면서 얹혀간 적이 있었다. 몇 군데 사찰을 돌아 본, 다음 선생님과 사모님 몇 분께 어디가 제일 기억에 남는지를 여쭤보니 무위사를 들먹이는 분이 가장 많았던 재미난 기억이 있다. 바삐 움직이는 도회지적 삶에 익숙한 사람들은 무위사에 당도하는 순간 그 소담하고, 검소하며 질박한 아름다움에 일순 멍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러한 아름다움은 다름 아닌 텅 빈 마당 때문이리라. 너무 넓어 황량하지도, 좁아 옹색하지도 않은 마당이 텅 비어 있다. 석탑도 석물도 없다. 시선을 빼앗는 것도, 걸리는 것도 없다. 늙은 팽나무, 느티나무 그림자만이 마당을 쓸고 지나간다. 아무 것도 들이지 않은 마당이 무위를 가르친다. 진정 들이는 것보다 들이지 않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랬는데 다 망가졌다. 제삼자인 단순한 관람객으로서만 갖는 지나친 편견인지 모르겠으나, 고색을 창연한 채로 둘 수는 없었을까? ‘무위’란 뭔가? 혹자는 “위함이 없다”라고 아리쏭하게 풀이하더라만, 바로 “함이 없다” 즉 인위적이지 않거나 의도적이지 않다는 게다. 근데, 불도저가 절집 처처를 온통 파헤치고 있고, 집채만한 기중기가 아름드리 목재를 운반하느라 부산을 떨고 있다. 이제 ‘무위’에 걸맞는 분위기는 단아한 맞배지붕의 극락보전 밖에 없는 것 같다.(다른 사찰들은 적어도 대웅전만큼은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그리하야~ 삼국시대의 고형古形을유지하고 있는 극락보전(국보)과 목조 아미타삼존불상, 극락보전 사면벽화 그리고 선관대사편광탑비(이상 보물) 등이 유명하지만 일일이 소개할 마음이 일지 않는다. 대신, 그런 실망에도 불구하고, 백의관음벽화만은 그냥 넘어가서는 예의가 아닌 것 같다.
그 유명한 백의관음도의 수수께끼
언뜻 보면, 위 사진들은 서로 다른 실물을 찍은 것 같다. 오른쪽 사진은 보시다시피 하반신은 늘씬한데 비해, 얼굴이 오종쫑하고 가슴부위도 옹축되어 있는 등 전체적인 비례가 하나도 맞지 않고 있다. 게다가 옷깃이 바람에 날리는 모습이 여간 어색하지 않아 기초가 되어 있지 않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각종 화집에 수록된 진본의 모습이다. 그러면 왼쪽 사진은? 바로 무위사 현장에서는 이렇게 찍힌단다. 아니 동일한 실물이 어째서 이러키나 차이 지는가?
어쨌든 이 그림은 무위사 대웅보전 후불탱화의 그 뒷면에 그려진 그림이다. 거의 전부의 사찰에서 후불탱화의 이면은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데, 이 사찰에서만큼은, 이면지 재활용 지침에 따라, 이처럼 재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절집에서든 후불탱화의 뒤쪽을 한번 들여다보셨는지? 대개, 사람 한 명 겨우 지나갈 만큼의 공간뿐이다. 그리고 이 그림은 딱 내 키만큼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그러니 고개를 한껏 치켜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온전히 볼 요량으로 뒤로 물러간다고 하더라도 겨우 1m정도의 여유뿐이다. 이런 극단적인 열악한 공간 속에서 작품을 온전히 조망할 수 있도록 그린 것이다. 즉, 올려다보는 사람의 시점에서 가장 아름답게 보이도록 비례를 왜곡해서 그린 것이다. 그저 놀랄 따름이다. 현대 회화에서 이런 기법을 무어라고 하는지? 그런 기법이 소개되어 있기나 한지? 자랑스럽다. 우리들의 선인이...(이미 이해하셨겠지만, 오른쪽 사진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그림의 정 중앙에서 찍은 것이다)
〈평점〉 ★★☆☆☆
◉. 미황사(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달마산 중턱 www.mihwangsa.org 061-533-3521) 편
: 아! 미황사! 눈물이 난다.
이 근처로 답사오기도 했고 산행도 여러 번 했지만, 그 때마다 미황사를 둘러보는 분복이 없었다. 단체로 왔으니까! 지나칠 때마다 아쉬워, “언젠가는 ...” 벼르고 있었다. 특히 노을이 질 때 좋단다. 하늘이 온통 황금색으로 물들고 바다도 덩달아 물들어 그 빛이 달마산까지 밀려와 도솔봉을 불질러 버리고 끝내는 싸리나무 기둥까지 금칠해 버리기에, 노을과 노을에 물든 달마산 암릉 그리고 노을빛에 더욱 찬란한 금빛을 더하는 대웅전 부처를 세 가지 미황이라고 부른단다. 헌데, 오호! 통재라! 빗줄기는 더 줄기차지며 또 굵어지고 있다. 어쩌겠나! 오늘만이 주는, 비오는 날의 풍광에 흠뻑 젖어보기로 하자!
혼탁한 사바세계가 끝날 즈음 저 멀리 장엄한 화엄세계가 엿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단아한 대웅전과 이광사의 편액
가파른 오르막길을 기분좋게 오르고 나면 사하루 누각을 통한 대웅보전의 단아한 모습이 방실방실 답사객들을 반긴다. 먼저, ‘大雄寶殿’이라는, 내가 참 좋아하는, 원교 이광사의 글씨가 선뜻 눈에 들어온다. 얼마나 단정한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모범생의 모습이다. 단, (잘 모르지만) 글 쓸 때 호흡이 다소 거칠었지 않았나? 라는 느낌이 쪼끔 든다. 어쨌든 그는 50세 때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에서 문초를 당할 때, “내게 뛰어난 글씨 재주가 있으니 내 목숨을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라고 통곡했는데 이를 가긍히 여겨 영조대왕이 귀향으로 감면 조치했다고 한다. 또 완당 선생과의 일화도 잘 알려져 있다. 완당은 55세 때 제주도로 위리안치 명을 받고 가는 도중 해남 대둔사에 들르게 되는데, 당시 대둔사에는 오늘날 다선茶禪으로 유명한 초의선사가 주석하고 계셨다. 마침 대웅전 현판에 원교의 글씨가 걸려 있는 걸 보고서 초의에게 조선의 글씨를 망쳐 놓은 글씨를 걸어 놓았다고 질책하면서 대신 걸어 놓을 ‘대웅보전’을 하나 써 주었다. 그러다가 63세 장장 9년 동안의 유배를 마치고 귀향할 때 또다시 초의선사를 만나, “여보게 초의, 원교의 현판을 다시 달고 내 글씨를 떼어내게. 그 때는 내가 잘못 보았네” 했단다. 그 원교의 글씨를 여러 분께서는 보고 계신 것이외다.
기암괴석의 달마산을 배경으로 한 미황사. 안정감이 극치이다. 달마산 함 가고잪다!
이 뭣꼬? 답사객을 위한 해우소랍니다.
대웅보전 기둥의 주춧돌에는 특이하게도 게와 가재가 조각되어 있지만 그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대웅전 내에 비치되어 있는 법고대의 이쁘기 그지없는 색상의 코믹한 자태이다. 지금은 목탁을 올려놓고 있지만 본래 법고대였단다. 여러 분! “보시기에 아주 좋았더라” 입니까? 멋들어진 조형물에(아마 전국에서 유일하지 않을까요?) 쪼끔한 목탁이 뭡니까? 이렇게나 안목이 없어서야! 원!
대충 이런 정도이다. 이러면, 무얼 보고 눈물이 난다고 했는지? 라고 의아해 하실 게다. 다름 아니라 절집을 에워싸고 있는 분위기인 게다. 대웅전에서 내려다보면 아스라한 산그리메에 이어 멀리 남해 바다의 쪽빛이 들어오고, 올려다보면 호남의 금강산이라는 달마산의 기암괴석이 주는 강렬한 기세가 일품이다. 게다가 가파른 지세를 한껏 변용함으로써 갖게 된 안정적인 절집 구도도 눈을 끄는 대목이다. 그리하여 내려오면서 만난 다른 일행들에게 물어 보았다. 소회를.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일부러 사진을 찍지 않고 마음에 담아 간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할 만한 경관이라고 여겨진다. 또 조금만 생각을 다듬어 본다면 이 절집의 캐랙터가 무언지를 쉽게 실감할 수 있다. 원래 절집의 당호 등은 여러 가지 종교적 지향점과 관련하여 짓는 게 일반적이다. 헌데 이 절집은 미학적인 견지에서 존립의 본질을 추구하고자 한 것이다.
〈평점〉 ★★★★★
추기 : 여기 사진은 전부 제가 찍은 것은 아닙니다. 날씨가 흐려 사진 이미지가 흐릿한 것은 버릴 수 밖에 없었고 또 대부분의 사찰에서 보물 등이 많은 대웅전 내에서는 촬영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료와 인터넷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요! 또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을 보아서는 아니 됩니다.
첫댓글 무위사 편에 '가파른 경사문제를 이렇게 해결하여...'라는 해설이 있는 사진은 미황사 사진임을 알려 드립니다. 또 개별 사진들을 클릭하시면 확대해서 볼 수 있습니다. 가릉빈가라든가 달마산 등등
교수님! 멋진 여행입니다. 3 편이 기대됩니다.
쿵후하는 땡초는 아직 안 나오네요. 필요하시면 제 모습이라도......
셋째날 선운사 편에서 땡초(땡추,당취)들의 이야기가 비장감있게 소개됩니다.
교수님 저 좀 데리고 가라고 옛날에 동내 행님한테 하듯이 졸랐는데 안 데리고 가시다니, 정말 좀 더 강력하게 조를것 잘못했다는 생각이 점점....그런데 저라도 혼자 다녔겠습니다. 멋있습니다.
절 여행 코디네이터로 하셔도 좋을 듯합니다. ^^!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교수님, 언제 부산 오세요. 얼굴 한번 보입시더.
야~
운주사는 저도 가봤고, 월출산을 오르면서도 무위사는 그냥 지나쳤고, 미황사는 인터넷으로 보고 있었는데, 대리 여행 잘하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