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중학교 동문회에도 새로운 집행부가 구성되었다.
2월 하순에 신임 집행부의 워크샵이 있었다.
1박2일간 여주에서 알찬 행사를 마치고 상경하는 길.
각자의 집으로 가지 않고 단체로 한남동에 있는 '불루 스퀘어' 삼성전자홀로 갔다.
한국인뿐만 아니라 전세계인에게 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선사해 주었던 불후의 작품을 관람하기 위해서 였다.
바로, 감동대작 뮤지컬 '레미제라블'이었다.
도착해 보니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없이 대만원이었다.
작년 11월 28일 初演 이후로 매회 매진사례가 이어졌다.
당연했다.
그만큼 약간의 부연이나 설명조차 불필요한 초대형 스케일의 휴매니즘 대작이었다.
3월 6일이 고별무대.
바쁜 일들 핑계로 뜸을 들였다간 배 떠난 황량한 항구에서 안타까움만을 곱씹을 판이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워크샵 이후에 단체로 이동했던 거였다.
시작도 하기 전에 가슴이 떨렸다.
게다가 때마침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었던 함박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세상도, 관객들도 모두가 심쿵이었다.
특히 이번 공연은 전세계에서 각자 활동하던 기라성같은 한국 최고의 뮤지컬 배우들이 힘을 모은 합동공연이었다.
그야말로 초호화 캐스팅이었다.
또한 거장 빅토르 위고의 숨결이 그대로 녹아 흐르는 작품이었다.
영화, 소설, 연극, 오페라, 뮤지컬 등으로 이미 세계인들의 영혼을 수도 없이 흔들어댔던 수작이었다.
2012년 한국어 초연 이후로 금세 40만명이나 줄을 지어 관람했을 만큼의 뜨거웠던 반향이었으니 두말해 무었하겠는가.
나는 이번에 특히 한 사람을 보고 싶었다.
그의 연기와 노래가 궁금했다.
극 중 혁명의 리더로 눈부신 활약을 펼쳤던 '앙졸라'였다.
그 앙졸라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던 배우는 바로 '민우혁'이었다.
그는 젊고 훤칠했다.
멋진 외모에 말쑥한 매너 그리고 시원시원한 연기에 성악까지 완벽하게 겸비한 그를, 블루 스퀘어의 화려하고 그 큰 무대에서 세세하게 접해보고 싶었고 느껴보고 싶었다.
과연 앙졸라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청년은 출중했고 아름다웠다.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라 스토리의 줄거리를 거론하는 자체가 진부하기 짝이없다.
빵을 훔친 죄로 19년을 감옥에서 보낸 장발장.
가석방되었지만 전과자에 대한 세상의 멸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우연한 기회에 딘뉴 주교의 고귀한 사랑을 경험한 뒤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급기야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장이 되었고 그 도시의 市長으로까지 선출되었다.
그야말로 상전벽해였고 완벽한 出世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약자들 편에서 온정을 베풀었던 까닭에 시민들은 그에게 사랑과 존경을 보냈다.
장발장이 사업체를 운영할 때 직원으로 있었던 여인 '판틴'.
어느 날, 딸의 양육비를 벌기 위해 길거리에서 몸을 파는 그녀를 보게 된 장발장은 판틴을 향한 연민의 끈을 놓지 않았다.
끝내 엄마의 쓸슬한 죽음으로 세상에 홀로 남겨지게 된 '판틴'의 딸 '코제트'를 구해 장발장은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어느 시대, 어느 국가에서나 동일했지만 부패하고 무능한 수구세력들에 반기를 든 건 학생들이었다.
특히 프랑스의 '앙샹 레짐'에 치열하게 항거하며 전면에 나섰던 이가 있었으니 그 이가 바로 청년 革命家 '앙졸라'였다.
앙졸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망했고 혁명세력의 대오를 이끌었다.
그런 혼돈의 상황 속에서 어느덧 아름다운 숙녀로 성장한 '코제트'는 학생 혁명가 중 한 사람인 '마리우스'를 알게 되었고
그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졌다.
혁명에 참가한 마리우스가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장발장이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장발장과 한평생 대척점에 서 있었던 '자베르 경감'은 훗날 자신의 존재론적 가치를 처절하게 깨달았다.
자신의 정의에 대한 원칙이 장발장의 자비와 사랑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그는 극심한 회의에 휩싸였고 결국 세느강에 투신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랬다.
역시 세상을 바꾸는 건 총칼이 아니라 사랑과 감동이었다.
혁명을 꿈꾸었던 청년 마리우스와 딸처럼 애지중지 키웠던 코젯이 결혼하자 장발장은 일생의 소임을 내려놓은 채 그들 곁을 떠났다.
하지만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 바로 장발장이란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마리우스는 사랑하는 아내 코젯을 데리고 장발장을 찾아갔다.
거룩한 임종을 맞이하는 장발장을 만나 이제까지의 숨겨진 모든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다.
인생의 숱한 질곡들, 멸시와 천대 그리고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한결같이 유지했던 숭고한 사랑과 헌신의 일생이
그의 마지막 말들속에 오롯이 녹아 흐르고 있었다.
국경과 시대를 초월한 레미제라블의 가슴 먹먹한 감동, 그 감동의 발원지도 바로 이 대목, 이 지점 언저리였다.
사람들은 죽는 날까지 부나방처럼 돈과 권력을 쫓지만 인생의 정수는 순수한 휴매니즘과 博愛에 있음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었다.
막이 내리기 전에 절절한 노래가 흘렀다.
먼저 간 장발장, 자베르, 판틴, 에포닌, 혁명을 위해 목숨 바친 앙졸라와 수많은 학생들을 위한 감사와 명복의 노래였다.
산 자들의 사랑과 새로운 세상을 향한 희망의 노래였다.
그리고 생의 찬미였다.
그렇게 대단원의 막이 내려졌지만 관객들은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했다.
진심어린 박수도 한동안 그칠 줄을 몰랐다.
위대한 작품과 멋진 공연을 펼쳐준 뛰어난 배우들에게 보내는 진정한 오마주였다.
정애누나는 내 2년 선배다.
뮤지컬이 끝나자 누나와 선후배들이 공연장을 나와 배우 대기실 앞으로 갔다.
얼마 후에 키 크고 잘생긴 '앙졸라'가 평상복으로 갈아 입고 나왔다.
정애누나 큰 아들 앙졸라, 민우혁.
역시 우혁이는 밝고 친절했다.
전국적으로 많은 고정팬들을 두고 있어 가는 곳마다 싸인 공세를 받곤하는 젊은 배우였다.
전도가 무척이나 기대되는 신예다.
금년 하반기엔 다른 작품에서 主演으로 또다시 우혁이만의 뜨거운 열정과 정제된 예술혼을 불태울 예정이라고 하니
벌써부터 기대도 되고 마음이 설렌다.
이번에 위고의 원작을 뮤지컬로 각색한 작가 '알랭 부를리'가 이런 말을 남겼다.
"이 세상에 궁핍과 배고품으로 苦痛받는 누군가가 존재하는 한, 언제까지나 이 작품은 그 고유한 절대 가치를 잃지 않을 것이다."
벌써 132년 전인 1885년 봄에 세상을 뜬 빅토르 위고.
인생은 짧아도 예술이 어째서 길고 영원한 지를 다시 한번 절감했던 작품이었다.
"사랑하는 우혁아"
정말 수고 많았다.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해서 鐘은 더 아파야 하고, 더 인내해야 한단다.
이 점을 꼭 상기하면서 더 열정적으로, 더 겸손하게 정진해 주기 바란다.
너의 빛나는 내일과 영광을 위해 나도 늘 기도하마.
그리고
"정애누나".
우혁이의 밝은 눈빛과 치열한 예술혼을 보면서 그 안에 녹아 흐르는 누나의 헌신과 사랑을 보았습니다.
강보에 싸인 작은 애기가 이렇게 훌륭한 대한민국 최고 수준의 뮤지컬 배우로 성장하기까지 지난 삼십여년 간 누나가 흘렸을 땀과
숱한 기도가 내 눈에도 보이는 듯했어요.
아들을 잘 키웠습니다.
이 지면을 빌려, 누나에게도 감사와 祝賀의 박수를 보냅니다.
오늘 하루도 장발장같은 생각으로, 장발장같은 행동으로 긴 인생의 스토리텔링을 값지게 써내려가는 복된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은 사랑입니다.
세상은 감동이자 소통입니다.
모두에게 감사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