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318
8월17일 [연중 제 20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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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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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P7SnFwSfVwc
[서울대교구 황병철 대건 안드레아(대신학교 영성양성)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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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반복되는 일상이 구차스러워 보일지라도, 불꽃처럼 타오르는 삶을 삽시다!>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과 백성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분히 복합적이었습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당신의 말씀을 귀 담아 듣고, 그 자리에서 회개하는 사람들은 대견스럽게 바라보셨습니다. 오랜 세월 폭군들의 압제에 시달리던 식민지 백성들의 고통 앞에서는 저절로 연민과 측은지심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외쳐도 하느님께 돌아서지 못하고 과거의 악습에 푹 빠져 도무지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가장 중요한 자신의 영혼과 영원한 생명에는 관심도 없고, 그저 오늘 하루 희희낙락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아무런 준비도, 변화를 위한 노력도 없이, 흐리멍텅한 눈동자로, 영혼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시선은 안타까움으로 가득했고, 강력한 경고 말씀이 뒤따랐습니다.
오늘 엄청 강력하고 섬뜩한 경고 말씀은 이런 분위기를 배경 삼아 나온 것이었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 49, 51)
‘세상에 불’ ‘평화가 아니라 분열’ 등의 강력한 표현은 묵시 문학을 배경으로 하신 말씀이라, 조금 난해하기에, 잘 새겨들어야만 합니다. 묵시 문학에서는 종말이 다가오면 가정에서부터 우주 전체에 이르기까지 붕괴 현상이 초래될 것을 예언합니다. 따라서 가정의 분열은 종말이 임박했음을 의미하는 전조라는 것입니다.
한 가족 안에서, 다섯 식구 중 3:2로 갈라져 맞설 것이라는 말씀,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이 맞설 것이라는 말씀, 참으로 듣기에 거북하고 난감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종말이 다가오면 하느님을 최우선적으로 선택하라는 말씀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불은 심판을 상징합니다. 즈카리야서에는 더 끔찍한 말씀이 적혀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온 땅에서 삼 분의 이가 잘려 죽고 삼 분의 일만 살아남으리라. 나는 그 삼 분의 일을 불 속에 집어넣어 은을 정제하듯 그들을 정제하고 금을 제련하듯 그들을 제련하리라.”(즈카 13, 8-9)
우리 역시 더이상 뒤로 미루지 말고 지금 결단을 내려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지르신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밤은 낮처럼 밝아졌고 그분께서 드신 횃불이 온 세상을 밝히고 있습니다. 무관심과 타성은 쫒겨나야 하고, 예수님의 불은 세상 방방곡곡으로 번져나가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장 경계하시는 백성들의 삶은 열정 없는 삶입니다. 살아있어도 이미 죽어버린 삶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뜨뜨미지근한 삶입니다. 열정이 없는 신앙, 불꽃이 없는 설교, 영혼이 없는 얼굴, 뜨거운 사랑 없는 삶, 이제는 떨쳐버려야 할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짧은 지상 생활은 그야말로 불꽃 같은 삶이었습니다. 매일 활활 타올랐습니다. 하루를 천년처럼 그렇게 알차게, 역동적으로 살아가셨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인생인데, 금쪽같은 순간들이었는데, 아무런 영양가 없이, 빈둥빈둥 허송세월한 지난 삶이 참으로 부끄럽고 송구스럽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우리네 일상이 비록 구차스럽고 초라해 보일지라도, 불꽃처럼 타오르는 삶을 추구해야겠습니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일, 대상, 존재라 할지라도 지극정성으로 대하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야겠습니다. 게으름, 나태함, 무기력한 삶을 떨치고 일분, 일초라도 의미 있게 보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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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DN5X3vFd5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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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불이 되게 하는 법: 내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는 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라며 당신 사명을 조금은 강렬한 말투로 선포하십니다. 이 ‘불’은 대체 무엇일까요?
우선 예수님은 불을 지르기 위해서는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라고 하시며 당신 죽음과 부활에 대해 미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죽음을 통해 어떤 불을 지르려고 하시는 것일까요?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에 나오는 ‘선생님의 눈물’이라는 사연이 이 진실을 보여줍니다. 반에서 왕따 당하던 정태. 정태를 때려 징계를 받게 된 가해자 아이들은 이번에는 상처가 남지 않도록 정태의 머리를 화장실 변기에 처박고 물을 내리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또 징계위원회가 열렸지만, 담임 선생님은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며 아이들에게 한 번만 더 달라고 눈물로 호소합니다.
그날 이후, 선생님은 매일 아침 누구보다 먼저 학교에 와서 화장실 변기를 맨손으로 닦기 시작했습니다. 한 달쯤 지났을 때, 가해자 세 명 중 한 아이가 울며 선생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를 안아주며 “네 잘못이 아니야. 내가 너희들을 잘못 가르친 탓이지. 정태는 여기에 머리가 박혔는데… 선생님이라도 이 더러운 변기를 깨끗하게 닦아 놓아야 가엾은 정태가 또다시 이런 일을 당해도 상처를 덜 받을 테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는 눈물을 흘렸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두 명 아이는 끝까지 용서를 빌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피는 누군가의 가슴에 들어가 불이 되어 그 아이의 자아를 태웁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이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모세가 구리뱀을 매달아도 보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누군가의 피가 그 사람 안에 들어가 새로 태어나게 만들려면 두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합니다. 하나는 피의 순수성이고 또 하나는 자아를 태우려는 의지입니다. 피가 순수하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자기 자아를 죽이기 위한 피 흘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이 그 진실을 보여줍니다. 늙은 리어왕은 세 딸에게 왕국을 세 부분으로 세 딸에게 내어주겠다고 자신에 대한 사랑을 말해 보라 합니다. 첫 두 딸은 입에 발린 소리를 하지만, 막내는 그렇지 못합니다. 리어왕은 분노하여 셋째 딸의 땅까지도 첫째와 둘째에게 줍니다. 그러나 그들은 땅을 받자 마음이 변합니다.
자신에게 온 늙은 아버지를 쫓아냅니다. 나중에 가난하게 사는 셋째만이 아버지를 받아줍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을 포함한 모든 자녀들의 죽음으로 끝나고 맙니다.
어떤 어머니는 자신이 며느리를 괴롭혀 며느리가 죽었음에도 아들이 자신을 보려 하지 않자 “내가 평생 너만을 위해 살았는데, 네가 나에게 그럴 수 있니?”라고 한탄합니다. 과연 그 피 흘림이 순수했을까요? 리어왕은 자녀들을 미래를 위한 보험쯤으로 생각하였기에 그 재산을 내어주는 피 흘림이 순수하지 못했습니다. 자녀 자아를 죽이는 불이 되려면 그 피가 내 자아의 죽음이어야 합니다.
제 책 『사랑하는 조카들아, 이것만 읽고 냉담하면 안 되겠니?』에 나오는 사례입니다. 두 아이가 일찍 부모님을 사고로 잃고 큰아버지 집에 맡겨집니다. 그러나 큰아버지는 아이들을 짐으로 여기고 학대하였습니다. 아이들은 도망 나와 멀리 부산에 있는 선생님에게 전화합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맡이 키우기로 합니다. 누나는 엄마의 말을 잘 따랐지만, 동생은 끝까지 선생님을 엄마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 때문에 사고를 당하여 병원에 입원하자, 부모 생각이 났는지 자신에게 미안해하는 선생님에게 “엄마는 아들한테 미안한 게 왜 그렇게 많아요?”라고 합니다. 선생님은 행복했고 아이들은 훌륭하게 잘 자랐습니다.
그냥 부모라고 불러주는 것에 만족할 수 있는 피 흘림, 이것만이 삼구가 빠져나가 누군가의 가슴에서 그 자아를 태우는 불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당신 사명에 참여하기 위해 그런 작은 불쏘시개가 되라고 파견받습니다. 상대가 자기 자아를 죽이기를 원한다면, 오직 나의 자아를 죽인 피만이 상대의 자아를 불사를 수 있습니다. 불쏘시개, 곧 엄마가 되는 것만으로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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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뉴욕에 있을 때 필라델피아로 ‘성극’을 보러 가곤 했습니다. 성극의 제목은 “예수, 모세, 다윗, 다니엘, 에스테르”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중에 모세와 다윗을 보았습니다. 다니엘의 이야기도 신앙인들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교회는 다니엘의 이야기에서 부활 신앙을 보았고, 다니엘의 이야기에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은 신앙을 지키다가 불가마 속에 던져졌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다니엘과 친구들을 불가마 속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이방인의 왕은 다니엘의 굳은 믿음을 보고 다니엘이 믿는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다니엘은 이방인이 섬기는 뱀을 죽였습니다. 이방인의 왕은 다니엘을 사자 굴에 넣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이방인의 왕은 다니엘이 믿는 하느님을 믿도록 칙령을 내렸습니다. 초대교회는 다니엘의 이야기에서 죽음을 넘어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다니엘 예언서는 4가지 결정을 이야기합니다. 이 결정은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결정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느님의 통치를 받아들일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장소입니다. 그 결정은 먼 훗날의 결정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해야 하는 결정입니다. 그 결정은 순간이지만 그 결정에 따라서 영원한 운명이 판가름 납니다. 이 세상은 세상의 군주와 왕에 의해서 이끌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니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름철 휴가로 여행하는 것도 좋지만 다니엘서를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우리의 목에는 두 개의 기관이 함께 있습니다. 음식물을 섭취하는 식도와 공기를 마시는 기도입니다. 음식을 섭취할 때는 자연스럽게 기도가 닫히게 됩니다. 만일 기도가 열리게 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음식물이 기도를 막게 되면 질식할 수 있고, 음식물이 폐로 가게 되면 염증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다 음식물이 기도로 가게 되더라도 우리는 재채기를 통해서 음식물을 밖으로 내보내게 됩니다. 식도와 기도가 아주 가까이 있는 것처럼 선과 악도 어쩌면 우리의 마음에 가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악한 것들이 들어오려고 하면 우리의 마음을 닫아야 합니다. 악한 것이 들어왔다면 그것을 내 마음에서 내보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메마르게 되고, 하느님과 멀어질 수 있습니다. 선한 것들이 들어오려고 하면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선한 것들이 들어왔다면 우리의 삶을 통해서 꽃을 피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 사람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깨버린 불법일지 모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새로운 세상을 보았고,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참된 행복을 느꼈고, 신분과 계급의 벽에 막혀서 답답하던 이 세상에서 하느님 앞에 모든 이가 한 형제요 자매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라면 몸이 아픈 병자들도, 장애인으로 태어나 멸시를 받았던 사람들도, 죄인이라 손가락질을 받던 사람들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축복임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렇게 아픈 것도, 장애인이 된 것도, 멸시를 받던 것도, 죄인처럼 살아야 했던 것도 모두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기 위한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삶이 파격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것 자체가 파격입니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내어주라는 말, 친구가 오리를 가자면 십리까지도 가주라는 말,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는 말,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말은 바로 파격입니다.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을 생각합니다. 교회는,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지 생각합니다. 지금 아프고, 굶주리고,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교회와 신앙인들은 바로 예수님을 친구로, 예수님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신앙인들이 이기심과 욕심 때문에 지금 가난한 이들, 굶주린 이들, 병든 이들을 외면하고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무늬만 교회요, 겉모습만 신자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하십니다. 나의 내면에 있는 악한 것들을 모두 태워야 한다고 하십니다. 근심, 걱정, 분노, 원망, 미움, 욕심이라는 쓰레기들을 태워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야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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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 주제는 ‘끝까지 전력 질주하라.’입니다.
제1독서의 배경은 기원전 605년부터 587년으로 추정됩니다. 유다 임금 치드키야와 바빌론 임금이 패권을 다투는 가운데 예레미야 예언자는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께서 유다 왕국의 멸망을 선언하시고 새로운 구원 계획을 세우실 테니 지금의 정치적 정세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합니다.
제2독서인 히브리서는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넘어온 이들 가운데 머뭇거리며 결단을 내리지 못한 이들에게 쓴 서간입니다.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히브 12,1)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12,2)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12,4) 이와 같은 권고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는 하였으나 아직 전력 질주하지 못하는 이들을 향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사명을 전합니다. 성경에서는 ‘물’과 ‘불’이 하느님 심판의 도구로 쓰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종말론적 심판을 상징하는 ‘불’의 이미지에, 성령으로 말미암은 세례와 성령 강림 때에 나타난 ‘불’을 연결합니다. 게다가 가정 분열이라는 주제도 가져오는데, 가까운 이들의 분열은 예언 전통에서 종말에 일어나는 환난의 특징입니다.(미카 7,6; 하까 2,22; 말라 3,24 참조) 이처럼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종말론적 심판과 더불어 가까운 이들과 멀어질 수 있다는 절박감도 가지게 합니다.
우리에게도 신앙 여정은 선택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따르기로 하였다면, 이제 전력 질주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끝까지 달리는 데 여러분의 발목을 잡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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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49-53: 나는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일생을 큰 고통에 시달리면서 예레미야는 고통과 권세를 갖추신 그리스도의 예언적 모습이 된다. 그는 자기 백성들로부터 반대를 받는 표적으로 나타난다. 참된 예언자는 헛된 환상이나 감언이설에 동조하지 않고 그와는 정반대로 그 상황을 새롭고 대담한 말로써 판단하여 많은 사람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마침내 대립과 불화의 상징으로 된다. 예언자들의 삶이 그러했다면 예언자 중의 예언자이신 그리스도의 운명이 더 나을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의 예언적 행동을 말해주는 말씀이 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49-50절) 불과 세례의 의미는 그분의 수난을 의미하고 있다.
그분의 수난은 완전히 살라버리고, 정화하는,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길’로 설명되기도 하고, 고통과 죽음의 물속에 잠기는 행위로써 설명되기도 하기 때문이다(시편 124,4-5 참조). 그러므로 이 두 단어는 비록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구원을 성취해 마치 성령에 의해 타오르는 거대한 불길처럼 그 구원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강한 바람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인간은 그리스도를 선택할 것인지 반대편에 설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이 선택 때문에 가족들 간에도 충돌이 일어난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51절) 이제 그분의 말씀을 선과 악, 진리와 허위를 가려내는 척도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다른 가치와 판단의 척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대립하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님의 그 말씀은 믿음과 믿음을 통해 그분과의 생활한 일치를 통하여 내적인 평화를 가지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체로 우리 마음 안에 커다란 ‘전쟁’ 즉 갈등을 일으키게 한다. 이 내적 전쟁을 통하여 모든 것을 극복하는 가운데 우리 안에 진정한 평화 즉 구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내적 전쟁은 전쟁이며 갈등이지만 범죄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의무이다. 이 갈등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 갈등을 계속해서 극복해 나가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그 갈등을 이겨내고 극복하게 될 것이다. 거기에 우리의 참 평화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이끌어 주실 것이다.
히브리 서간에서도 비록 희생을 통해서이지만 충실성과 사랑으로 찬란히 빛나는 표징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신”(히브 12,2) 그리스도의 모범을 우리에게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맺고 있다.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히브 12,4)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가면서 언제나 부딪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려 했기 때문에 세상이라는 가치 기준을 가지고 있던 그들에게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끝까지 선택한 하느님의 뜻은 평화와 구원을 받게 하였다. 예수님의 삶이 그러했다면 그분의 형제자매인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올바른 선택을 해 나가는 삶을 결심하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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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날을 향한 지금여기에서>
루카 12,49-53 (불을 지르러 왔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그날을 향한 지금여기에서>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빛 곁에 어둠
어둠 곁에 빛
지금여기 그렇게
함께 있으나
결코 서로
어울릴 수 없어
빛께서
오시는 날
마침내 가르시어
빛은 빛과
벗하여 살고
어둠은 어둠과
벗하여 죽으리니
지금여기에서
죽어도 빛이리라
선 곁에 악
악 곁에 선
지금여기 그렇게
함께 있으나
결코 서로
어울릴 수 없어
선께서
오시는 날
마침내 가르시어
선은 선과
벗하여 살고
악은 악과
벗하여 죽으리니
지금여기에서
죽어도 선이리라
참 곁에 거짓
거짓 곁에 참
지금여기 그렇게
함께 있으나
결코 서로
어울릴 수 없어
참께서
오시는 날
마침내 가르시어
참은 참과
벗하여 살고
거짓은 거짓과
벗하여 죽으리니
지금여기에서
죽어도 참이리라
믿음 곁에 불신
불신 곁에 믿음
지금여기 그렇게
함께 있으나
결코 서로
어울릴 수 없어
믿음께서
오시는 날
마침내 가르시어
믿음은 믿음과
벗하여 살고
불신은 불신과
벗하여 죽으리니
지금여기에서
죽어도 믿음이리라
희망 곁에 절망
절망 곁에 희망
지금여기 그렇게
함께 있으나
결코 서로
어울릴 수 없어
희망께서
오시는 날
마침내 가르시어
희망은 희망과
벗하여 살고
절망은 절망과
벗하여 죽으리니
지금여기에서
죽어도 희망이리라
사랑 곁에 미움
미움 곁에 사랑
지금여기 그렇게
함께 있으나
결코 서로
어울릴 수 없어
사랑께서
오시는 날
마침내 가르시어
사랑은 사랑과
벗하여 살고
미움은 미움과
벗하여 죽으리니
지금여기에서
죽어도 사랑이리라
살림 곁에 죽임
죽임 곁에 살림
지금여기 그렇게
함께 있으나
결코 서로
어울릴 수 없어
살림께서
오시는 날
마침내 가르시어
살림은 살림과
벗하여 살고
죽임은 죽임과
벗하여 죽으리니
지금여기에서
죽어도 살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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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신 분입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루카 12,49-53)
1)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는, “나는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려고 왔다.”입니다. 또는 “나는 세상에 하느님 사랑을 전해 주려고 왔다.”입니다. 성경에서 ‘불’이 ‘심판의 상징’으로 사용될 때가 많은데, 여기서는 ‘예수님의 복음’, 또는 ‘하느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라는 말씀은, 당신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은 적고, 거부하는 자들은 많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심정은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양들 쪽에서 목자의 심정에는 관심도 없고, 제멋대로 자기들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버리는 것과 같은 상황......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들을 위해서 일하시는데, 인간들 쪽에서 외면하는 상황입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세례성사의 ‘물’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라는 말씀은, 믿기를 거부하고, 회개하는 것도 거부하고, 구원의 반대쪽으로만 가는, 즉 멸망을 향해서 가는 인간들 때문에 당신이 큰 고통을 겪을 것이라는 뜻인데, 이 말씀도 인간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2)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라는 말씀은, 세상에 ‘참 평화’를 주려고 왔는데, 그것을 받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때문에 마치 분열을 일으키려고 온 것처럼 되었다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에페 2,14-18) <‘사랑’은 인류가 하나로 일치하는 방법이고, 평화’는 그 일치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주신 일이고, 그 사랑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어서 ‘참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길로 인도해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3) 그렇지만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도 거부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도 거부하는데, 그렇게 거부하는 사람들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분열’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일은 식구들과 친구들 사이에서도 일어납니다. <믿는 사람들이 분열을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일치를 지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일치를 바라십니다.(요한 17,21)>
4) 가정의 분열은 원래는 종말의 상황을 상징하고(미카 7,6), 분열된 가정이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은 ‘메시아의 구원’을 상징합니다.(말라 3,24) 여기서 식구들의 분열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종말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회개와 일치를 통해서 구원을 받으라고 호소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뒤의 14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이 말씀은, 식구들을 실제로 미워하라는 뜻도 아니고, 식구들을 버리라는 뜻도 아닙니다. 현세적인 것들에 대한 애착과 집착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 때문에 이산가족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가족은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할 영적 동반자입니다. 우리는 식구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해야 하고, 그 희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5) 식구들이 선을 등지고 악을 향해서 갈 때에, 또 구원에서 멀어지면서 자꾸만 멸망을 향해서 갈 때에, 그것을 막고 되돌아서게 만드는 것이 사랑입니다. 만일에 식구들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식구들이 가는 ‘악의 길’과 ‘멸망의 길’을 함께 간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어리석음’입니다.
‘참 사랑’은 ‘선’을 지향합니다.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의 경우에, 한쪽이 죄를 지으려고 할 때 다른 쪽에서 “이러면 안 된다.”라고 말렸다면,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지 않았을 것이고, 둘이 함께 구원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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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성현 대건안드레아 신부님]
<깨어있는 삶>
오늘은 연중 제20주일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하여 '깨어있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 변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지 금 무엇에 깨어 살아가야 하는지, 깨어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깨어있는 삶을 살기 위한 행동은 무엇인지 등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유다는 부패와 부정이 판을 치고 있었고 정치, 사회, 종교까지도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강대국들의 침공은 하느님의 경고이며 회초리였습니다. 이때 예언자 예레미야가 나타나서 정의를 선포하고 진실을 외치기 시작합니다.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이야기처럼 예레미야의 외침은 달갑지 않고 거부감을 가지고 오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어쩔 수 없이 많은 사람들로 부터 미움을 받는 표적이 되었습니다.
즉 예언자는 외로운 투쟁의 길을 걸어가며, 어떤 상황에서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과 억압, 어둡고 혼란한 세상에서도 예언자는 더욱 철저하게 하느님께 의탁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더불어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서 뜻밖의 사람 에벳멜렉을 통하여 예레미야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내시어 함께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죽음의 진흙이라는 삶 속에서 우리가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뜻밖의 구원자를 보내시어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고 계심을 의식해야겠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가 하느님을 믿고 '깨어있는 삶을 살고 있었다면, 유다 왕 치드키야는 하느님 말씀과 사람들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삶 에서 결단을 요구하는 강력한 메시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나의 자존심이나 체면, 두려움 등을 버리고 오직 하느님 편에 서서 결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루카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 을 일으키러 왔다'는 충격적인 선포를 하십니다. 불은 심판의 상징이며 벌과 정화를 의미합니다. 즉 불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이루어질 새로운 가치의 실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서만 이루어 질 승리, 곧 세례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내가 살던 공동체로부터 결별하게 되고 사회나 가정 공동체 안에서 마찰과 갈등 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분열을 통하여 진리가 드러나게 됩니다. 신앙의 가치만을 선택하여 신앙의 기초로 만들어진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가지는 것, 그것이 바로 '깨어있는 신앙인의 삶'으로 살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노력하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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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우직한 안젤로 신부님]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은 신앙인의 사명입니다."
요즘 세상은 너무나 많은 정보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옵니다. 그 많은 정보들 속에서 진실과 거짓을 식별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또한 최근 AI(인공지능)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인간에게 필요한 많은 것들을 대신해 주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것은 내가 하는 것인가? AI가 하는 것인가?'에 대한 자문과 함께 인간의 존재와 소명에 대한 묵상을 해보게 됩니다.
오늘 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리는 곧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또 유다의 임금인 치드키야에게도 "임금님께서는 바빌론 임금의 손에 넘겨지실 것입니다"(예레 37,17)라고 경고합니다.
이처럼 자기 민족의 멸망을 임금과 백성들에게 전해야 하는 예레미야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분명 예언을 거부하고 싶고 저 멀리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 입니다. 실제로 예레미야는 처음 소명을 받았을 때,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예레 1,6)라고 거부하였고, 오늘 예언 후에 예레미야는 대신들에 의해 저수 동굴에 갇혀 죽을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내가 하고 싶지 않더라도 하느님께서 입에 담아 주시면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것이 예언자의 사명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하느님의 뜻이라면 선택해야 하는 것이 신앙인의 사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듣기에 거북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 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49.51) 예수님은 이 세상 끝 날의 심판에 대한 성경의 상징적인 표현 '불'이란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이어서 말씀하신 '식구가 서로 갈라지고 분열되는 현상'도 세상, 종말에 나타날 일들입니다. 종말에 대한 언급을 통해 제자들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 하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가길 촉구하십니다. 우리가 살면서 마주하는 현장에는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이 늘 공존합니다. 때론 하느님의 뜻과 나의 뜻이 충돌하여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주 넘어지기도 합니다. 이것이 인간 앞에 놓여있는 실존적 현장인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히브 12,1-2)
이 실존의 현장에서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우리가 선택하고 가야 할 길을 꾸준히 달리도록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적대행위와 부끄러움까지도 견디어 내시며 십자가의 길을 앞서가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이 가신 길을 따라나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작은 유혹에도 쉽게 넘어지는 나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주님께 청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공동체가 서로 도와가 며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해 함께 걷는 여정이 바로 시노달리타스의 여정입니다.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가 서로를 존중하고 격려 하며 신앙의 여정에서 지치지 않도록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주님을 따르는 길에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더 해 주시도록 성모님께 전구를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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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계철 라파엘 신부님]
<고통 저 너머 행복해지기까지(루카 12,49-5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불’과 ‘세례’를 말씀하시고, 이어서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불과 세례의 말씀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실제 불을 지르시겠다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 의하면 ‘불’은 하느님 말씀을 의미합니다.(예레 20,9; 23,29) 따라서 불을 지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말씀을 전하러 오셨다는 뜻이고, 불이 타오른다는 것은 말씀이 온 세상에 퍼져나간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또 신약 성경에서 ‘불’은 하느님 나라가 오기 전에 세상이 겪게 될 종말의 심판을 뜻하기도 합니다.(마르 9,48; 마태 3,11; 7,19; 루카 3,16) 따라서 세상 구원을 위해 겪어야 할 종말의 심판이 곧 올 것을 말씀하신 것으로도 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불은 파괴하는 불이 아닌 인간 마음속을 밝게 비추고 따뜻하게 데워주며, 나쁜 것을 태우고 정화시켜 정결하게 하는 성령의 불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는 예수님께서 요한의 세례를 부정하시고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이는 구원을 위해 받으셔야 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심으로써 인류 구원을 위해 당신께서 치르셔야 할 과정으로 겪게 될 분열과,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신앙인으로서 겪어야 할 갈등과 분열을 각오해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진리와 사랑과 정의와 자유와 평화를 이루시는 활활 타오르는 불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속적인 마음에 불을 지르고 태워 없애 참 평화를 이루시고자 우리를 일깨워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속적인 욕망이나 욕심에서 얻어지는 거짓 평화를 멀리해야 합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가까울수록 그리스도의 참 평화와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하느님이 아닌 것을 하느님으로 여기고, 선이 아닌 것을 선으로 가장하며, 옳은 것이 아닌 것을 옳은 것으로 위장하고,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고 강요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선과 옳음과 진리를 지키며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를 실천하려면 혼란과 분열을 각오해야 합니다.
옳은 길을 가기 위해 반대 받는 표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박해와 고통도 감내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당당하고 단호하게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참 평화를 위해 온갖 거짓 평화와 맞서서 과감하게 깨뜨리며 용기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의 시련과 분열 속에도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위해 선택해야 할 것은 정의와 진실과 사랑입니다. 이기심과 안락함의 거짓 평화를 버리고 참 평화를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제도가 바뀌고 조직이 교체된다 해도 반드시 세상이 좋게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변화의 주체는 인간이기에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면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변화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불은 변화의 불입니다. 세상이 바뀌는 변화에 앞서, 먼저 내가 바뀌는 변화이어야 하겠습니다. 그럼으로써 세상 구원이 이루어지는 변화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불을 우리 각자의 생활 안에서 일으키라고 깨우쳐 주십니다. 만일 지금 일상생활에서 신앙인답게 살면서 겪는 어려움과 분열이 없다면, 그것은 세상 것에 안주하고 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신앙인은 세상과 신앙의 중간에서 마음에 맞는 것을 그때그때 선택하며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만을 기준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가톨릭평화신문 2025년 8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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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람마다 좋아하는 색, 싫어하는 색이 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좋아하는 색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색일까요? 녹색입니다. 그렇다면 이 녹색을 모든 사람, 그러니까 100% 다 좋아할까요? 대부분 좋아한다는 녹색이지만,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나이에 상관없이 남자는 6% 그리고 여자는 7%가 이 녹색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그래도 90% 이상이 이 색을 좋아한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여기서 학자들의 연구가 나옵니다.
학자들은 녹색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전형적인 녹색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군복, 유리병 등에 쓰는 어둡고 탁한 녹색을 말했습니다. 반대로 녹색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전형적인 녹색을 물었습니다. 신록의 녹색, 에메랄드, 그리고 녹색 바다를 꼽았습니다. 맞습니다. 녹색을 싫어하는 사람과 녹색을 좋아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녹색 자체가 달랐던 것입니다. 하긴 녹색도 다르게 많이 표현합니다. 초록색, 연두색, 청록색, 풀빛색, 비취색, 그 밖에도 푸르스름한 색, 초록스름한 색 등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또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고 함께하는 사람은 무조건 하느님을 좋아하고 환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잘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세상의 기준을 내세워서 거부하는 이유를 계속 만들고 있습니다. 즉, 어떻게 알고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좋아할 수도 또 싫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느님의 어떤 면을 바라보고 있고, 또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면 하느님을 제대로 알 수도 또 제대로 볼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라고 말씀하십니다. 평화의 예수님과 맞지 않는 말씀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불길을 붙여, 세상을 변화시키고 사람들의 마음을 태워 성화시키겠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 안에 살지 않으면서 성화되지 않습니다. 특히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고, 자기 욕심과 이심을 드러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고, 세상 것만을 바라보려는 마음을 접어야 합니다. 그래서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준과 세속적인 기준의 충돌에서 이루어지는 분열인 것입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다’라는 안일한 마음이 아니라, 끊어야 할 것은 과감하게 끊을 수 있는 결단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불길이 우리 안에 타올라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보다 하느님 나라의 기준을 따르면서, 주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신지 그 분 안에서 참된 평화와 위로를 얻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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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12,49)
흔히 사람들은 ‘최명희’는 「혼불」을 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최명희는 자신의 모든 혼과 마음 그리고 몸으로 이 ‘혼불’을 쓰기 위해 무려 17년을 쏟아붓고 홀연히 떠나간 사람입니다. ‘혼불’을 읽으면서, 저는 우리 한글의 감칠맛과 그 다양한 표현들에, 특히 여성들이 사용하는 단어들에 당황스럽기도 했습니다. 최명희 작가의 작품명이기도 한 ‘혼불’이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혼불을 보았다는 사람은 많습니다. 이것은 우리 몸 안에 있는 불덩어리로, 사람이 제 수명을 다하고 죽을 때, 미리 그 몸속에서 빠져나간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의 몸에 혼불이 있으면 산 것이고, 없으면 죽은 것입니다. 혼불은 목숨의 불, 정신의 불, 삶의 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또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힘의 불이기도 합니다. 즉 혼불은 존재의 핵이 되는 불꽃입니다. 그러기에 이미 혼불이 나가버린 사람은 사실 껍데기만 남은 어둡고 차디찬 몸이며 죽은 몸인데도, 살아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들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읽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바로 ‘최명희’의 ‘혼불’이며,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12,49) 하고 말씀하신 바를 혼불의 의미인 목숨의 불, 정신의 불, 삶의 불을 타오르게 하라는 촉구로 이해합니다. 삶의 불은, 구약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불이라고 믿었기에 타올라야 하지만, 죽음의 불은, 유대인들에게는 불은 심판을 의미하기에 동시에 태워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대할 때면 항상 의문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의도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12.49.51)라고 말씀하셨을지 궁금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우매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당연히 예수님은 이 세상에 참 평화를 주시러 오신 분이라 알고 있는데, 정작 당신은 평화가 아니라 불을 지르러 왔으며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말씀하셨기에 그렇습니다. 더욱 한 가문의 가족들이 서로 갈라지게 할 것이라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는 거짓 평화가 아닌 참 평화를 위해서 거짓된 평화를 태워버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불은 모든 것을 재로 만들어 버리듯이 거짓된 평화를 태워 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를 위해 불을 질러야 합니다. 불은 불로써 꺼야 하며, 불은 불로써 타오르도록 해야 합니다. 태워버리면 남은 것은 재 곧 죽음입니다. 이는 곧 새로운 것, 참 평화를 위해 생명을 잉태하는 죽음입니다. 처음에는 죽음만이 보일 뿐 새로운 생명은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분열만 보일 뿐, 새로운 일치와 평화는 보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평화나 일치보다 눈앞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뜻 불을 지르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직접 나셔서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신 것입니다. 당신이 이 불을 지르기 이전에 다른 사람들이 이 불을 지폈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도 두려워서 이 불을 지피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불을 지펴서 진정한 일치와 화목, 참된 평화와 사랑을 가로막고 있는 것들을 태워버리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 불로 평화를 저해하고 가로막는 지금까지의 모든 거짓과 어둠의 악습을 불살라버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불을 지르고 분열을 일으키십니다. 이는 곧 평화라는 이름으로 가려진 내면의 숨은 증오와 상처를 드러내어 상처를 아물고 치유하도록 불을 지르고 분열을 일으키러 오신 것입니다. 최명희의 상징처럼 목숨의 불, 정신의 불, 삶의 불을 타오르기 위해서 우선해야 하는 것이 이를 가로막는 것을 태워버리는 아픔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지르러 오신 불은 하느님의 나라라는 불이 타오르도록,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12,50)라고 말씀하셨듯이 그 불을 타오르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죽었습니다. 즉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라는 불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불은 이 세상 마칠 때까지 계속 번져 나가야 합니다. 전국 체전이나 아시아와 세계 올림픽의 개회식이 선포되는 순간부터 폐회식이 끝나는 순간까지 성화는 타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성화가 대회 마지막 순간까지 타올라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불도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때까지 결코 꺼져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불이 세상 마지막 날까지 타오르도록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혼불이 나가면 이미 죽은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직 죽지 않은 것처럼 믿는데 이는 어리석은 일이며 꺼지기 전에 이 혼불을 꺼지지 않도록 잘 지키며 살아가야 하듯이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역시 하느님 나라의 불이 잘 타오르도록 끊임없이 복음의 정신으로 불타올라야 합니다. 복음의 혼으로 살아야만 합니다. 예수의 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평화와 일치를 이루는 불이 타오르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은 죄와 허물을 태워버리고, 하느님 말씀으로 꺼지지 않은 평화와 사랑의 불이 세상 마지막 날까지, 우리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잘 타오르도록 이 불을 잘 간직하고 보존하도록 노력합시다. 이를 위해 늘 성령께 자리를 내어드리고 성령께서 활발하게 활동하시도록 은총을 구하도록 합시다. 히브리서의 권고처럼,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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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파괴를 위한 분열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분열>
오늘 말씀의 전례는 우리의 영혼을 태우는 뜨거운 '불'입니다.
제1독서는 예언자 예레미야가 대신들의 요청으로 죽음의 저수동굴에 던져져 박해받는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제2독서는 “우리가 달려야 할 길”(히브 12,2)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버리는”(히브 12,1) 일이요, 또 한편으로는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히브 12,2)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십니다. '불'은 구약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예레 20,9; 23,29)과 엘리야 예언자의 말(집회 48,1)을, 신약에서는 세상에 대한 종말 심판(마태 3,11;7,19; 마르 9,48; 루카 3,16)을 말하기도 합니다.
여기서의 '불'은 하늘나라의 선포를 말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하시며, 열절한 마음으로 저희에게 '불'을 지피십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 가슴을 뜨겁게 한 이 '불'은 성령에 의해서 타오르는 ‘말씀의 불혀’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교회 안이나 밖이나, 이 '불'을 싫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이미 가진 기득권으로 불빛을 짓누르고 공격합니다. 그래서 결국 예언자는 더더욱 박해받게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루카 12,50)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물 세례’로 전도활동을 시작하시어, 십자가에서 ‘피 세례’로 전도활동을 완성하셨습니다. 이 세례를 통하여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우리를 새 생명(구원)으로 이끄셨습니다.
그러나 받아야 할 이 ‘피의 세례’와 우리 안에 타올라야 할 이 ‘성령의 불’은 하나의 큰 도전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들이나 딸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결코 양다리를 걸칠 수도 두 주인을 섬길 수도 없는, 자신의 목숨마저 내걸어야 하는 도전입니다. 그것은 모순과 부조리, 불의와 거짓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세상과 맞서야만 하는 일이요, '불'로 어둠과 거짓을 사르고 자신을 파괴하고 분쇄시켜야 하는 일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문헌 <현대세계의 사목헌장>(4항)에서는 말합니다. “교회는 모든 세대를 통하여 그 시대의 표지를 탐구하고 복음의 빛으로 그것을 해명해 줄 의무를 지니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분명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이사 9,5)일진데, 어찌하여 분열을 일으키실까?
그것은 파괴를 위한 분열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분열입니다. 우리의 안주와 이기심과 세상의 불의와 부정과의 분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의 이기심과 세상의 불의와 일치를 이룰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그렇습니다. 오늘도 ‘말씀의 불’은 우리를 갈라놓고 분열시킵니다. 그것은 우리를 당신과 일치시키기 위하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흔히 분열을 회피하려 하지만, 바로 그 분열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어야 할 일입니다. 자칫 분열이 없는 듯 보여도, 사실은 거짓된 평화 속에 어둠이 도사리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열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분열 안에서 빛과 어둠을 보는 눈이 중요합니다. 분열은 어둠으로부터 오기도 하지만, 빛으로부터 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창세기> 1장 2절의 말씀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2) 그렇습니다. 우리는 카오스 속에서 빛과 어둠을 보아야 합니다. 분열이 없는 것이 평화인 것이 아니라 정의가 이루어진 것이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화의 왕이신 당신께서는 오늘도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십니다.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금은보석의 선물더미가 아니라 수술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주님!
이 칼의 불꽃이 우리 안에 활활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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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
주님!
당신은 제게 사랑의 불을 지르십니다.
제 속의 어둠을 태워 새로운 살이 돋게 하시고, 이기심을 태우고 자비가 돋게 하소서.
무관심을 태우고 사랑이 돋게 하시고, 사랑의 분열을 일으키소서.
제 살을 가르고 어둠을 몰아내시고,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고 정의와 불의를 가려내소서.
제 안에서도 이 세상에서도 당신 영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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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린이와 같이 되라>
“하느님의 나라와 어린이들”
"주님, 좋으시다, 찬미들하라.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107,1)
오늘 복음의 주제는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다’입니다. 예수님의 각별한 어린이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니 누구보다도 어린이다움을 지니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사실 나이에 관계없이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앞에서는 어린이들이요, 그래서 좋은 동시나 동요, 동화는 누구나 공감합니다. 예전 5월에 어른 피정자들과 함께 어린이날 노래를 부르면 70-80대 노인들도 어린이들처럼 즐거워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어제 8월15일 성모승천대축일에 서울대교구 유경촌 디모테오 주교님께서 선종하셨습니다. 성모님과 함께 하늘에 올림을 받으실 정도로 어린이같은 삶을 사셨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주교님 문장紋章을 만들어 준 어느 사제가 주교님 영전에 올린 글의 일부를 나눕니다.
“당신의 아름다운 품성과 깊은 믿음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강물처럼 내면을 적시며 흘렀습니다. 조용한 미소 속에는 생명의 원천이 있었고, 그 눈빛에는 저 깊은 강을 건너간 이들의 평안이 서려 있었습니다.
권위보다 섬김을, 위엄보다 겸손을 택하신 당신은 이 시대 당신이 주교로 불리움을 받은 소명을 너무나 깊이 깨닫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아주 조용히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많은 흔적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그 조용함 속에 깃든 시대의 징표를 읽습니다. 이 시대 종교가 잃어버린 진정성을 당신은 우리에게 일깨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을 생각하면 까닭없이 눈물이 납니다. 당신 앞에 비춰보이는 제 희미하고 초라한 모습을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순수한 열정의 동심을 간직한 분이셨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린이하면 떠오르는 칼릴 지브런의 고전에 속하는 <예언자>에 나오는 ‘아이들에 대하여’ 라는 잠언성글입니다.
“그대의 아이는 그대의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갈망하는 큰 생명의 아들딸이니 그들은 그대를 거쳐서 왔을뿐 그대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또 그들이 그대와 함께 있을지라도 그대의 소유가 아니다. 그대는 아이에게 사랑을 줄 수 있으나, 그대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 마라.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생각이 있으므로, 그대는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을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까지 주려고 하지 마라. 아이들의 영혼은 그대가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 조차 갈 수 없는 내일의 집에 살고 있으므로. 그대가 아이들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을 그대와 같이 만들려고 하지는 마라. 큰 생명은 뒤로 물러가지 않으며 결코 어제에 머무는 법이 없으므로.”
예수님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이런 어린이들의 특성을 깨달았기에 늘 배우는 마음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앞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어 오늘은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는 이들을 제자들이 꾸짖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예수님은 어린이들에게 강복하신후 홀연히 그곳을 떠나십니다.
어린이같은 자질은 무엇일까요? 바로 단순성과 개방성,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마음, 편견없는 태도, 변화와 적응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직 이런 사람들만이 복음의 메시지를 온전히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말 그대로 회개에 신속한 이들입니다. 마음의 귀를 활짝 열고 귀기울여 듣는 자세가 참으로 중요함을 배웁니다. 옛 현자의 가르침도 좋은 도움이 됩니다.
“공부란 지식을 쌓는 것을 넘어 사람이 되는 일이다.”<다산>
“행하고도 남은 힘이 있으면, 그때 학문을 닦으라.”<논어>
“진리는 깨닫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 말이 많다는 비난은 있어도, 많이 듣는다는 핀잔은 없다.”<다산>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논어>
회개와 직결되는 들음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도 선택입니다. 어린이같은 삶을 선택-훈련 습관화 하는 것입니다. 들음과 회개를 선택하여 일상화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여호수아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모세에 이어 등장한 여호수아가 백 십세에 책임을 다하고 삶의 무대에서 퇴장하는 멋진 죽음과 더불어 여호수아서도 끝납니다. 여호수아는 스켐집회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듭 주님을 섬길 것인지 혹은 이방신들을 섬길 것인지 선택을 촉구합니다.
“너희는 주님을 경외하며 그분을 온전하고 진실하게 섬겨라...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여호수아는 이어 백성의 거듭된 답을 받아냅니다.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우리는 주 우리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여호수아는 스켐 집회에서 백성과 계약을 맺고 그들을 위한 규정과 법규를 세웁니다. 이렇게 마지막 책임을 다한 후 주님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죽습니다. 시종여일 주님을 섬기는 일에 전념하며 그 사명을 다하고 백열 살에 세상을 떠난 주님의 종 여호수아의 아름답고 거룩한 생애입니다.
여기서 유난히 눈에 자주 띄는 “주님을 섬긴다”는 말마디입니다. 부단한 회개를 통해 겸손히 주님을 섬기는 삶을 습관화 함이 어린이같은 삶을 사는 첩경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로 정의되는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공동체의 삶이 참 소중하게 생각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섬김으로 주님을 닮게 하시며 어린이와 같이 되게 하십니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자비하심을 중생에게 베푸신 기적들을."(시편10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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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성령의 불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심은 평화를 주러 오신 것으로 생각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오늘 정반대의 말씀 곧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 안에 분열이 일어나는 것인데 제 생각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분열은 우리가 하지 못하는 분열입니다. 보통 사람인 우리로서는 감히 하지 못하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분열이란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원하지 않기 때문이고 심지어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의외로 우리는 분열 곧 갈라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 말에 많은 분이 의문을 표할 것입니다. 원치 않고 두려워하는데 왜 우리 안에 분열이 그리 많냐고?
실로 우리는 일치를 원하고 그래서 일치하려는데도 일치가 되지 않아 분열을 하는 것이고, 일치를 원하는데도 일치가 되지 않는 것은 그 일치가 내 맘에 드는 일치 곧 자기중심적인 일치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너도 같이 좋아하고,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너도 같이 가주고, 내가 원하는 것을 우리 공동체가 같이 원하는 그런 식의 일치와 불일치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치와 분열은 나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이고 그 기준이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같이해야 하는데, 다시 말해서 하느님 뜻을 따르는 것에 우리가 일치해야 하는데, 누군가 하느님 뜻 따르기를 거부할 때 우리는 분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뜻과 다를 때는 잘도 분열하면서
하느님 뜻과 다를 때는 엘리야나 오늘 독서의 에벳 멜렉처럼 불같이 일어서지 못하고 과감히 분열하지 못합니다.
이런 뜻에서 오늘 주님께서는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불의를 불살라버리는 정의의 불, 하느님과 공동체를 위해 나를 불태우는 사랑의 불이 우리에게 타오르기를 주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불이 내 안에서 타오르기를, 그 불이 우리 공동체 안에서 타오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나는 타오르는데 공동체가 같이 타오르지 않습니까? 반대로 공동체는 타오르는데 내가 젖은 짚단처럼 타오르지 않습니까?
이럴 때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절망한다면 그 불이 성령의 불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성령의 불이 내게서 타오르길, 내게서 타올라 네게도 옮겨붙기를 바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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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49ㄱ.51ㄴ)
<불과 분열의 의미!>
오늘 복음(루카 12,49-53)은 예수님께서 '불을 지르러 오셨고,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불'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리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와 그 나라로 이끄는 '성령의 불'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 받게 될 '종말의 심판'을 뜻하는 의미로도 다가옵니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지 못하고, 하느님의 나라로부터 멀어져 있고, 성령의 열매가 우리 안에 충만하지 못한 지금 우리의 모습을 두고 하시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종말의 심판에 대한 경고 말씀으로도 들려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분열'은 '선과 악의 충돌, 진실과 거짓의 충돌, 참평화와 거짓 평화의 충돌, 참종교와 이단의 충돌'로 다가옵니다. 이 충돌(싸움)을 통해 진리로 나아가기에, 분열은 또한 '정화의 의미', '다시 태어남의 의미'로도 다가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제와 영원한 구원(부활)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세상이 만많지 않습니다. 많은 것들이 교묘하게 포장되어 있고, 위장되어 있어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느님도 그렇고, 선과 진리도 그렇고, 들려오는 뉴스도 그렇습니다. 때문에 지금 깨어 있어야 하고, 정신을 바짝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불과 분열의 본질적인 의미'를 지닌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셨고, 그래서 마침내는 '부활'로 나아가셨습니다. 십자가 그 너머에 부활이 있음을, 참평화와 참행복이 있음을 분명하고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부활과 참 평화와 참 행복의 표지'인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그 너머를 향해 성큼성큼 나아갑시다! 우리가 달려가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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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카 12,51)
거짓된 평화를
깨뜨려야만
비로소
참된 평화가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분열'은
파괴가 목적이 아니라,
진리와 정의,
사랑을 향한
필연적 갈등을
뜻합니다.
복음 앞에서
일어나는 분열은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진정한 평화로
이끄는
하느님의 손길이
됩니다.
믿음의 길은
거짓 평화에
안주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의
정의와 사랑을 위해
때로는
갈등과 대립을
감수하는
용기 있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익숙한 질서와
부딪히면서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세워가는 일입니다.
그 질서의 중심에는
십자가가 있고,
십자가는 세상의
거부와 갈등을 낳지만,
바로 그 길을 통해
부활과 참된 화해가
주어집니다.
따라서
갈등과 분열은
새로운 창조를 향한
진통이며,
우리의 삶을 더 깊은
자유와 평화로 이끄는
하느님의 과정입니다.
주님은
가짜 평화와
가짜 질서를
거부하시고,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그분의 초대에
응답하며,
거짓에
머무르지 않고
사랑과 진리 안에서
더 깊은 평화와
넓은 자유로
걸어가야 합니다.
분연과 평화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을 넘어
진리를 드러내는
하느님의
과정입니다.
거짓을
내려놓게 하시는
하느님을 따르는
평화의 참된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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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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