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랑삭월
Prologue
글쓴이 위한
과거, 세상을 어둠으로 물들인 채 모든 존재들의 생사여탈권을 한 손에 쥐고 세상을 뒤흔들던 마왕이 있었다. 반마인(半魔人)으로 태어나 스스로의 힘으로 인간들의 왕을 굴복시키고 세력을 넓혀 엘프들까지 모두 자신의 발아래 꿇린 진정 힘 있는 자였다.
그가 사용하는 검인 삭월검(削月劍)은 그 예리함이 하늘에 떠 있는 달도 가를 정도라 그 어떤 명검도 따를 수 없었고 그가 속해있는 마법학파인 엔트리트의 마법은 힘을 원하는 자에게 그 욕망만큼 힘을 가져다주는 마법이라 끝을 알 수 없는 야망을 가지고 있던 마왕에게 세상을 부술 정도의 거대한 힘을 주었다.
통칭, 붉은 달의 지배자라 하여 The Red Moon이라 불린 그의 이름은 에스트릭 지아레스.
하지만 그의 영화도 영원하지 않았다. 영원한 지배를 꿈꾸며 불노장생의 비술을 이룬 그였지만 신탁을 받은 용사 케디언 노바스의 거센 도전을 받게 된다. 그는 홀홀단신의 몸으로 마왕에게 지배당하고 있던 인간과 엘프들을 해방시킨다. 당시 나이 18세였던 케디언에게 마왕의 권세 아래에서 투쟁을 계속하고 있던 폴리마운틴 신전은 과거 검으로 노래를 부른다 하여 블레이드 싱어(Blade Singer)라 불리며 검사들의 칭송을 받던 유리드 스펜서의 검, 하모니(Harmony)를 케디언 노바스에게 건네게 된다. 이 검은 삭월검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명검이며 아름답기가 둘도 없는 검이라 했다. 하지만 케디언이 늙지도 않는 마왕, 에스트릭을 일대 일로 이기기는 무리가 따름이 사실이라.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폴리마운틴의 대신관 보올은 마왕과 맞서 싸울 전사들을 한데 모아 마왕에게 도전해야 한다고 케디언에게 일렀다. 케디언 역시 자신의 실력으로는 에스트릭을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바, 보올의 충고를 받아들여 세상을 돌아다니며 마왕과 맞서 싸울 동료를 찾아 헤매는데, 그들이 바로 대현자 프로드릭 카니발, 자이언트 킬러(Giant Killer) 미노 로안, 엘븐 레인저스(Elven Rangers)의 세쌍둥이 자매 제레 파치, 제레 마치, 제레 아치였다.
물론 마왕 역시 신탁을 받아 용사가 된 케디언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고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속으로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마왕의 명을 받든 마왕 휘하의 다크 나이트(Dark Knights)들과 전뢰마대(電雷魔隊)들, 그리고 에스트릭이 심혈을 기울여 키워낸 5인은 수호대들을 이용해 용사 케디언을 제거하려 하였다. 하지만 용사들은 위기를 수도 없이 겪긴 했지만 이 모든 위험을 이겨내며 실력을 키웠고, 또한 수호대 중 일인인 얼음의 마녀, 키안 제르를 용사의 동료로 맞아들이기도 했다.
자신의 모든 부하를 잃었지만 여전히 마왕, 에스트릭 지아레스는 뛰어난 검사이자 절정의 대마도사였으며 또한 끝 모를 권력의 주인이었다. 그는 홀로 용사 일행을 맞이하여 그들과 세상의 운명을 놓고 힘을 겨루었다.
어리지만 뛰어난 창의성과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정순한 마력을 가지고 있던 대현자 프로드릭 카니발도, 자신의 몸보다도 더욱 거대한 도를 다룰 정도로 엄청난 힘으로 거인과도 맞상대할 수 있었던 미노 로안도, 엘프들의 사명을 받들어 용사의 뒤를 따르며 숱한 마왕군과의 전투에서 기적과도 같은 성과를 올렸던 엘븐 레인저스의 세쌍둥이도 마왕의 지독하고도 막강한 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하지만 용사 케디언 노바스와 마왕의 손으로 탄생시킨 불사의 마녀 키안 제르는 달랐다. 마왕과 비교해서 전혀 손색이 없는, 아니 오히려 더욱 더 뛰어난 마력으로 마왕을 압도하는 키안과 수없이 많은 전투에서 이미 입신의 경지에 올라 블레이드 싱어의 검, 하모니의 모든 능력을 끌어낼 수 있게 된 케디언 노바스의 힘은 마왕과 상대해서도 전혀 물러섬이 없었다.
하지만 마왕의 악검, 삭월검은 역시 희대의 마검이었다. 삭월검은 예리할 뿐만 아니라 거대한 어둠의 정수를 담고 있었다. 제 아무리 하모니가 뛰어난 검이라 하나 마왕 에스트릭의 손에서 뿜어지는 어둠의 힘을 감당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아, 그리고 이 때 우리 인간은 위대한 인간의 영웅과 마주하게 된다.
케디언 노바스는 그 이름만으로도 찬란한 영웅임에 틀림없었다. 이미 빈사상태에 빠진 동료들을 뒤로 하고 케디언 노바스는 자신에게 내려진 신탁을 다 하기 위해 스스로 하모니를 버렸다. 이마에서부터 번져가는 빛의 문양이 용사 케디언 노바스의 온몸에 새겨질 때 용사는 그 스스로 등에서 빛의 날개를 뽑고 스스로 만들어 낸 빛의 창을 들었다. 용사는 대 이적마법(大 異蹟魔法)인 대천사소환(大天使召喚)으로 스스로 대천사를 자신의 몸에 소환시킨 것이다. 제 아무리 막강하다해도 지옥의 악마들과의 싸움으로 몇 십, 몇 백 억 년을 살아 온 대천사를 이길 수는 없는 법. 에스트릭은 결국 빛의 창에 관통당해 자신이 시체로 쌓아올린 어둠의 대지의 검은 탑 아래에 파묻히고 만다.
그것은 신의 의지를 받드는 천사가 신의 피조물인 인간의 생명을 거두어가는 일을 꺼렸기 때문이며, 케디언 역시 마왕이라고는 하나 스스로의 힘이 아닌 누군가에게 빌린 힘으로 쓰러뜨린 상대의 목숨을 거두는 것을 탐탁케 여기지 않아서였다고 한다. 물론 인간의 몸으로 대천사소환과 같은 대 이적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일이었지만 케디언은 직접 신탁을 받은 용사였고 극한으로 단련된 육체를 지녔었기에 전투 후에도 멀쩡히 살아있을 수 있었다.
비록 마왕을 쓰러뜨리긴 했지만 그것은 단지 한 번의 승리. 언제 다시 마왕이 깨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용사일행은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없었다. 케디언은 마지막 남은 대천사의 힘으로 죽음의 대지에 거대한 봉인을 만들었다. 그 이후 용사 케디언 노바스는 봉인의 반작용으로 인하여 모든 육체적 능력과 마력을 잃어버리게 되지만 사람들은 어둠에 세계에서 자신들을 구해준 용사를 기리며 그를 칭송하고 받들었다. 하지만 전투를 잃은 용사는 곧 시름시름 앓다가 10년 후 3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로부터 300년. 세상에는 새로운 악이 창궐하려 하고 있었다.
~
푸드득.
붉은 눈의 까마귀가 거대한 날개가 홰를 치며 앙상하게 말라 죽어버린 나뭇가지 아래로 내려앉았다. 땅이 이미 시커멓게 변질되어 버린 지 오래. 까마귀는 불길한 눈동자로 썩은 고기를 찾아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그런 까마귀에 눈에 조금 이상한 것이 보였다. 새대가리가 왜 새대가리겠냐만은, 그리고 그 중에서도 까마귀는 으뜸이라고는 하지만 이 죽음의 대지에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생물이 있다는 풍월을 들은 적은 없다. 아니, 그건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붉게 낀 안개로 세 사람의 실루엣이 비쳐오고 있었다. 까마귀의 눈동자가 붉은 눈 안에서 휙휙 돌아간다. 이해할 수 없다는 최대한의 의사표현이었다. 어느새 그들은 죽음의 대지와 그 밖을 경계 짓는 붉은 안개를 지나 검게 썩어버린 죽음의 대지에 발을 내딛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독특한 행색을 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유독 돋보이는 자가 있었다. 가운데에서 오만한 시선으로 주위를 죽음의 대지를 응시하며 검은 장발을 땅에 끌리듯 길게 기른 채 검은 새의 깃털로 장식한 코트를 입은 남자였는데 그 차가운 표정이 감안되더라도 그 외모는 그야말로 겨룰 자가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까마귀는 저 사내의 눈에 띠면 자신의 깃털도 모두 벗겨질 것 같아 잠시 공포감에 떨었다. 하지만 까마귀는 모르고 있었는데 까마귀가 느낀 공포는 사내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시각적 공포가 아니라 무언가 원초적인 부분에서 건드려오는 공포라는 것이다.
검은 장발의 사내 양 옆으로 자리하고 있는 두 노인 역시 대단히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왼쪽의 노파는 새하얗게 새어버린 머리를 위로 높게 틀어 올려 그 높이가 30cm는 되었고 목에는 페어리의 두개골을 이은 스산한 취미의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피로 물들인 것 같은 붉은 무복을 입고 있었는데 양 허리와 등 뒤로 세 자루의 검이 걸려 있었다. 얼굴 역시 기괴한 취미에 걸맞게 매우 추했는데 두 눈은 시커멓게 죽어버린 눈꺼풀 아래로 썩어버린 듯 빛이 보이질 않았고 대단히 큰 매부리코에 콧잔등 끝에는 잔뜩 독이 올라있어 손가락으로 만지면 손가락이 썩어버릴 듯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파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계속해서 히죽 웃고 있었는데 이빨은 다른 외모와 달리 새하얗고 깨끗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노파의 외모를 기괴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반대쪽 검은 장발의 사내 오른쪽에 자리한 노인은 그 치가 200cm는 가볍게 넘어갈 정도의 장신이었다. 길게 기른 수염은 그 큰 키에서도 자신의 무릎까지 닿았고 눈썹과 머리카락 역시 대단히 길어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자른 적이 없는 듯 했다. 노인은 옆의 노파와는 반대로 푸른 무복을 입고 있었는데 손에는 내려치는 벼락의 모습을 형상한 번개 모양의 뇌전창이 들려있었다. 풍채 역시 대단히 거대하여 전장의 선두에 서면 모든 적군을 한 눈에 굽어볼 듯 했다. 얼굴 역시 근엄한 겉모습을 대변이라도 하듯 강인한 눈동자에 고집 있어 보이는 성격을 나타내는 듯 했다.
“죽음의 대지라고 하여 무슨 괴물이라도 살고 있을 줄 알았더니 실망이군요.”
검은 장발의 사내는 오만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자 붉은 무복의 노파가 무복의 소매로 입을 가리며 간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 대공자의 눈에 하찮지 않게 보이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 하찮지 않은 것을 찾으러 가는 것이 아니겠소. 헬루인?”
“……이 노파는 에스트릭 지아레스가 지금의 대공자보다 대단하다고는 생각지 못하겠습니다. 대공자 역시 삭월검의 주인. 그리고 최강의 마법학파 헬 게이트(Hell Gate)의 마지막 전인이십니다. 과거에서 마왕이 살아 돌아온다 하더라도 현재의 대공자를 꺾을 순 없을 것입니다.”
헬루인이라 불린 노파의 말에 푸른 무복의 노인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물론, 현재의 대공자의 성취는 가공할 수준이오. 그러나 대공자께는 삭월검의 검집이 없소. 게다가 과거 에스트릭 지아레스의 마법은 이 죽음의 대지로 설명이 되오. 송구하오나 대공자. 대공자께선 아직 전대의 마왕 에스트릭 지아레스를 능가하지 못하셨소이다. 그건 그의 무위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노부가 판단할 수 있소.”
“대공자를 너무 얕보는 것이 아닌가요, 네르페릭스?”
“난 객관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오.”
네르페릭스라 불린 노인의 말에 헬루인이 불만스럽다는 듯 눈을 흘겼지만 대공자라 불린 사내는 덤덤한 표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을 보았다. 검의 날은 검은 붕대에 칭칭 매여 있어 그 검날을 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하긴. 나도 대충은 알고 있었지요. 지금의 무위로도 이 세상을 뒤집기에는 무리가 없지만 뒤집고 난 후, 즉 세상의 정상에 군림한 후에 그 자리를 지켜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아직까지 불완전한 삭월과 역시 마찬가지로 아직까진 완벽하지 못한 마법. 헬 게이트의 마법이야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겠지만 삭월의 옷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런 더러운 곳에 데려왔다고 너무 불만 품지 마시죠. 헬루인.”
“호호호. 이 노파는 대공자께서 가는 길이라면 어디든 함께입니다. 불만이 있을 리가 없지요.”
그들은 그렇게 말하며 죽음의 대지에서 가장 밝은 빛으로 둘러싸인 곳, 바로 대천사의 봉인이 잠들어 있는 검은 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까마귀는 그들의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다 곧 자신의 덩치만한 그 거대한 날개를 펼치더니 그들의 뒤를 따라 검은 탑을 향해 날아갔다.
~
검은 탑의 봉인은 거대한 4개의 진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방 청룡의 천뢰진. 서방 백호의 빙풍진. 북방 현무의 묵시진. 남방 주작의 염화진.
이것은 대천사가 자신의 수하인 사방신의 힘을 끌어다 검은 탑 사방에 각기 진을 만들고 그 중심인 검은 탑에 대천사인 자신의 힘을 끌어다 광목을 심었다. 현재에는 그 광목이 자라고 자라 검은 탑에 뿌리를 내려 거대하게 자라 있을 터였다. 이 대천사의 봉인을 해제시키려면 일단 사방신의 진을 모두 파훼하고 이 광목의 생명을 끊어야 했다. 하지만 보통 인간의 힘으로는 사방신의 진은 고사하고 죽음의 대지를 감싸고 있는 붉은 안개를 건너오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인간이라 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그런 옛말이 아무 필요가 없을 듯 했다. 한계를 극복하는 것으로 모자라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삼인의 무리가 사방신의 진을 모두 격파한 후 검은 탑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꽤나 고생입니다. 대공자.”
“차라리 진을 격파하는 것이 더 쉬웠지요.”
헬루인과 대공자는 웃으며 사방신의 진을 비웃었다. 세월이 흘러 진의 힘이 약해진 것일까? 아니면 이 삼인의 괴인들의 실력이 엄청난 것일까?
이들은 자신의 무기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서 사방신의 진을 모두 격파해냈다. 천뢰진의 번개도 빙풍진의 눈보라도 묵시진의 암흑도 염화진의 불기둥도 이들의 손짓 한 번에 장난감처럼 부서져나갔다.
그들은 당대 마왕을 노리는 자와 그 수하인 것이다.
대공자는 이미 붕대를 풀어버린 삭월검을 오른손에 든 채 눈앞에 보이는 검은 탑을 향해 걸어갔다. 검은 탑은 이미 뱀이 나뭇가지를 차지하고 있듯 거대한 광목의 뿌리들이 마구 뒤엉켜 그 본래의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일단 제가 한 번 해보지요. 대공자.”
헬루인은 추한 얼굴로 요염하게 웃으며 유령처럼 앞으로 미끄러져나갔다. 그녀의 양 손에는 60cm 정도의 곡도가 양 손에 들려 있었다. 양 옆의 검집이 비어있는 것으로 보아 그 쌍도인 듯 했다. 빛을 잃은 그녀의 눈동자에서 강한 살기의 안광이 뿌려지는 듯 싶더니 그녀의 쌍도에서 붉은 연기가 유령처럼 솟아올랐다. 헬루인은 그 조그마한 덩치에도 불구하고 잔뜩 허리를 뒤로 휘더니 광목의 몸체를 향해 쌍도를 휘둘렀다.
-서걱!
한 번에 절반 가까이 뿌리가 베어져나갔다. 헬루인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번지려할 때 갑자기 광목에서 찬란한 빛이 일더니 갈라졌던 뿌리가 다시 붙는 것이 아닌가? 헬루인은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고는 쌍도를 다시 칼집에 갈무리했다.
“호오. 놀랍군요. 어느 정도의 자기재생능력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건 예상을 넘어서는데요?”
“부끄럽습니다. 대공자.”
어느새 다가온 대공자와 네르페릭스를 향해 송구한 듯 허리를 숙이는 헬루인을 향해 대공자는 오만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되었습니다. 어차피 헬루인은 이런 강맹함보다는 예리함과 고요함을 중시하는 살수가 아닙니까? 이런 일은 헬루인보다는 네르페릭스에게 더 어울리지요. 해 보시겠습니까, 네르페릭스?”
“분부 받드오.”
대공자가 네르페릭스를 향해 시선을 돌리자 네르페릭스는 창을 쥔 채 대공자에게 포권을 한 뒤 광목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걸어가는 중간에 네르페릭스의 몸에서 미약한 기류가 얽히는 듯 하더니 그것은 곧 광풍이 되어 네르페릭스의 무복을 찢어발길 듯 흉맹하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푸른 무복과 새하얀 수염과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면서도 고요함을 잃지 않고 있던 네르페릭스는 뇌전창을 오른손에 든 채 오른팔을 뒤로 당겼다. 창끝을 바닥을 향하게 한 네르페릭스는 무심한 눈으로 광목의 뿌리가 아닌, 바닥을 파고 그 아래 숨어있는 본체를 향하고 있었다. 이것이 헬루인과 네르페릭스의 차이였다.
고요함이 그치고, 미친 듯한 바람도 한 순간 잠잠해졌다. 그것은 눈 한 번 깜빡하기도 힘들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네르페릭스의 몸은 그 한 순간을 마치 영원처럼 느끼며 바닥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창날에서 뻗어 나온 푸른색의 마력이 10m가 넘게 뻗어 나왔다. 소리도 없이 땅과 광목을 베어버린 뇌전창은 한순간에 고요함을 일으키며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고 멈춰버린 기류 역시 안정되게 흐르기 시작했다. 헬루인은 그런 네르페릭스의 모습을 식은땀을 흘리며 지켜봤고 대공자 역시 대단히 놀란 눈으로 네르페릭스를 바라보다 밝은 표정으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놀랍군!”
“보잘 것 없는 재주요. 대공자께는 미치지 못하오.”
“아니, 결코 그렇지 않아요. 이건 이미 깨달음의 경지가 아닌가? 그대가 나의 자리에 있었다면 결코 나보다 하수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네스페릭스가 고개를 젓는 바람에 그의 아름다운 수염이 흔들렸다. 대공자는 웃음으로 그를 바라보다 네스페릭스의 등 뒤로 시선을 높게 잡아 검은 탑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입성인가?”
-파득.
거대한 무언가가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검은 탑을 감싸고 있던 광목이 한순간에 썩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
검은 탑으로 입성한 대공자와 그의 수하인 헬루인과 네스페릭스는 간간히 튀어나오는 함정들과 미로를 가볍게 돌파하고 검은 탑의 정상으로 올랐다. 검은 탑의 높이는 1km가 넘는 거대한 탑이라 정상까지 오르기에 시간이 제법 걸릴 법 한데도 대공자 일행은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탑의 정상, 그 넓은 층은 하나의 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대천사가 만들어놓은 듯한 마법진과 그 허공에 삭월검의 검집이 둥실 떠 있었다.
“저것이로군. 헬루인.”
대공자의 부름에 헬루인은 자신의 쌍도를 빼들고 앞으로 나섰다. 헬루인이 마법진에 발을 들여놓자 -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마법이 발동되며 헬루인에게 압력을 가했다. 하지만 헬루인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마법진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삭월검의 검집 아래 섰다. 그녀의 몸에서 붉은색의 안개가 피어오르자 그녀를 억누르고 있던 마법진의 기운이 움츠러들며 옅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흐릿한 사람의 실루엣이 드러나나 싶더니 헬루인의 앞에 빛의 창을 든 금발의 남자가 나타났다.
“너는?”
[물러나라!]
마음에 직접 걸어오는 경고가 헬루인의 마음에 울렸다. 뜻밖의 일에 헬루인의 시커먼 눈두덩이가 꿈틀하더니 뒤로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뭔가 했더니 대천사의 잔상도 되지 못하는 가짜 천족이 아니신가요?”
[여기에는 접근할 수 없다. 물러서라.]
“고작 언령으로 만들어진 가짜가 나를 막겠다고?”
헬루인의 입가에 비웃음이 그려졌다. 아마도 그녀 앞에 서 있는 저 존재는 대천사가 마지막으로 쳐놓은 결계임에 틀림없으리라. 하지만 그의 몸이 이미 곳곳이 흐릿해져 몸을 유지하기조차 힘들어 보였는데 이것은 이들이 들어오면서 진이 부서진 것에 대한 영향이거나 네스페릭스의 일격에 죽어버린 광목의 영향인 듯 했다. 그리고 헬루인은 진짜 천족이라 하더라도 제압할 수 있는 힘이 있음을 스스로 자부하고 있었다.
[물-러-나-라-!]
그 순간 가짜 천족의 손에 들린 미약한 빛의 창이 자신의 생명을 다하여 빛을 일으켰다. 아름답지만 위압적이지는 못한 날개가 펼쳐지고 가짜 천족이 헬루인을 향해 창을 겨눈 채로 날아왔다.
-퍽!
하지만 헬루인은 강했다. 가짜 따위의 공격은 피할 가치도 없다는 듯 잔뜩 비웃음을 머금은 헬루인은 자신의 쌍도를 한 번씩 교차시켜 휘둘렀다. 일격은 혼신의 힘을 다해 돌진해오던 가짜 천족의 창을 갈랐고, 이격은 돌진력을 제어하지 못한 천족의 이마부터 사타구니까지를 완전히 가르며 가짜 천족의 몸을 양단했다.
[흐아아아-.]
“너나 죽어.”
곧 그 천족은 빛으로 화해 사라졌고 헬루인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쌍도를 다시 고쳐 쥐었다. 헬루인은 다시금 몸에서 붉은 연기를 뿜으며 기괴한 모습을 연출하더니 단숨에 허공을 밟으며 삭월검의 검집이 있는 곳까지 날아올랐다.
그녀의 손이 삭월검의 검집에 닿자 엄청난 스파크가 튀어 오르며 그녀를 방해했지만 그녀의 추한 얼굴에서는 고통보다는 희열이 가득했고 어둡게 가라앉아있던 눈동자는 시뻘건 연기를 뿌리며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탁!
그녀가 결국 삭월검의 검집을 들고 마법진 밖으로 나와 대공자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공자는 만족스런 미소로 그녀가 들어올려 자신에게 바치기 위해 삭월검의 검집을 공손하게 바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삭월검의 손잡이에 묶여 있던 검은 붕대가 거칠게 날뛰기 시작하더니 삭월검의 검집과 삭월검을 잇기 시작했다.
“이제, 삭월은 완성되었다.”
대공자는 삭월검을 검집에 넣으며 오만한 시선으로 허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하늘이 뻥 뚫려있는 검은 탑 위 하늘에서는 태양이 거칠게 쏟아지고 있었다.
“경축드립니다.”
“경축드리오.”
자신의 두 호법, 헬루인과 네르페릭스의 축하를 듣자 그제야 대공자의 목청에서 거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한 번 터진 그의 광소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 길게 이어졌다.
“크하하하하하핫!”
“……하오나 대공자.”
껄껄 웃는 대공자를 방해하는 것이 조금 껄끄러운지 헬루인은 조심스럽게 대공자를 불렀다. 눈가를 손으로 덮고 속에서 우러나오는 광소를 뿌리던 대공자의 목에서 소리가 사그라들고 그의 시선이 몸을 일으키고 있는 헬루인을 향했다.
“아마도, 이 마지막 봉인을 깸과 동시에 붉은 달의 마왕, 에스트릭 지아레스가 봉인에서 해제되었을 것입니다.”
“……!”
그녀의 말에 대공자 뿐 아니라 네르페릭스의 얼굴이 굳었다.
“그렇군. 이건…… 귀찮게 된 건가?”
“그는 다른 자의 아래에 들어갈 자가 아니오. 대공자께서 삭월의 주인이 되셨다고 하지만 전성기 때의 에스트릭을 상대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니…… 봉인에서 막 풀린 지금, 그가 깨어나기 전에 이 검은 탑과 함께 그를 장사지냈으면 하오.”
네르페릭스의 말에 대공자의 시선이 네스프릭스를 향했다. 그의 눈에는 약간 의외라는 듯 묘한 호기심을 담고 있었다.
“그대라면 오히려 마왕과 겨루어보자 할 줄 알았는데?”
“나 혼자라면 틀림없이 그리 했을 것이오. 하지만 나의 주인은 대공자. 나는 대공자를 위한 최선의 선택만을 할 것이외다.”
“흐음. 헬루인도 그렇게 생각하나요?”
“노파 역시 그리 생각합니다.”
두 노인의 말에 대공자는 뭔가 고민하는 듯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진한 흑발이 허공에 휘날린다. 하지만 대공자의 고민은 길지 않아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소! 나 역시 마왕이라 불리던 강자와 겨루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나 내 목적을 잊을 정도의 바보는 아니지. 삭월의 새로운 힘을 시험해 볼 겸, 검은 탑을 무너뜨리겠습니다!”
그 순간 대공자의 몸이 중력을 무시하고 하늘로 날았다. 하늘이 뻥 뚫린 검은 탑의 머리를 지나 검은 탑이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높이 올라온 대공자의 옆에는 여전히 두 노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삭월대참격(削月大斬擊)!”
-번쩍! 하고 초승달과 같은 시퍼런 검기가 삭월검을 따라 흐른다. 대공자에게서 비롯된 검기는 삭월검을 타고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힘과 함께 검은 탑에 내리꽂혔다. 소리도 없이 검은 탑에 작렬한 삭월대참격은 탑을 분자단위로 해체시키며 그 주위의 대지에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혔다.
“크하하하하핫!”
대공자의 광소와 함께 대공자와 두 노인의 모습이 사라져갔다.
~
푸드득.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까마귀가 폐허가 되어버린 대지에 날개를 접고 내려앉았다. 그들을 좇아 세상을 어떻게 바꿀지 지켜보고 싶던 까마귀였지만 이미 공간을 뚫고 사라져버린 그들을 찾을 방법은 까마귀에게 없었다. 단지 그들이 남긴 이 흔적으로 세상의 모습을 상상하며 위안삼아야 하겠지.
그때였다.
-퍽!
갑자기 땅에서 누군가의 손이 튀어나오며 까마귀의 목을 쥐었다. 갑작스런 공격에 까마귀의 붉은 눈이 당황으로 물들고 날개는 미친 듯 퍼덕여댔지만 그 손에 담긴 힘은 까마귀가 감히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뚜둑,
까마귀의 목이 꺾일 수 없는 방향으로 꺾이며 부리에서 숨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옆에서 또 다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고, 곧 이어 붉은 머리가 땅을 뚫고 튀어나왔다.
“퉷퉷!”
안간힘을 쓰며 기어 나온 이 정체불명의 인간은 온몸에 뒤덮인 흙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자로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의외로 앳되어 보이는 어린 얼굴이었다. 키 역시 그다지 크지 않아 160cm를 조금 넘길 듯한 왜소한 체구였다. 소년의 누워있는 이 죽음의 대지에서도 하늘은 푸르렀다.
“제기랄. 광목천 녀석.”
짓씹듯 말을 시작한 소년의 입에서는 처음의 분노와는 달리 조심스럽게 웃음이 새어나오기 시작하다 곧 그것이 우렁찬 대소로 바뀌었다.
“하하하핫! 이 자식아! 난 결국 살아 나왔다고! 안 죽었단 말이다! 광목천! 케디언! 너희들이 아무리 수를 써봤자 결국 나는 살아남았어!”
이 소년의 이름은 에스트릭 지아레스. 붉은 눈의 지배자라 불리는 300년 전의 마왕이자 대공자가 그토록 염원하던 삭월검의 전대 주인이었다.
~
한참을 누워있던 에스트릭은 팔다리를 덜덜 떨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을 도는 마력의 유통이 답답하고 원활하지 않은 걸 느끼며 자신을 봉인했던 대천사 광목천에 대한 욕을 지근지근 씹듯 풀어냈다.
“빌어먹을. 내 몸에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설마 그 새끼, 내가 봉인을 깨고 나올 걸 짐작하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에스트릭은 몸을 일으킨 후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자신의 몸에 붉은색의 마력을 집중시켰다. 그러자 죽음의 대지의 바람이 에스트릭의 몸을 감싸더니 기류가 검게 변하며 그의 몸을 감싸는 검고 큰 망토로 변해 에스트릭의 몸을 덮었다. 턱선에 살짝 닿는 그의 붉은색 단발머리와 검은 망토, 그리고 자그마한 키에 귀여운 얼굴의 조화가 쉽진 않았다.
“삭월은…… 제길, 주인을 찾았나? 매정한 자식. 갇혀있는 지 얼마나 됐다고.”
삭월검과의 공명을 시도해보려던 에스트릭은 삭월의 기운이 전혀 자신에게 와 닿지 않는 것을 느끼며 투덜거렸다. 그가 검은 탑에 봉인된 지 300년. 에스트릭 자신은 그 시간의 변화를 전혀 느끼고 있지 못했다.
“쯥. 그 자식은 까다로워서 싫은데.”
에스트릭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어디론가 힘겹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검은 탑이 완전히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발견한 에스트릭은 그제야 두 눈을 부릅뜨고 놀랐다.
“뭐, 뭐야, 이건?”
에스트릭은 황당해하며 넓게 새겨진 충격의 잔재를 둘러보다가 단숨에 날아올라 하늘 높이서 검은 탑을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에스트릭은 검은 탑을 날려버린 원인을 알아낼 수 있었다.
“……삭월대참격.”
곡선으로 크게 휘어있는 엄청난 크기의 검격의 흔적이 하늘에 올라와서야 육안으로 확인된다. 에스트릭의 어려보이는 얼굴에 짜증과 분노가 섞여 아이답지 않은 표정을 만들어냈다. 아마 누군가가 검은 탑에 침입하여 삭월검을 훔쳐내 갔으리라. 물론 삭월검의 검집만이었지만 자신이 봉인된 후 이후 사정은 하나도 알지 못하는 에스트릭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어떤 개자식이.”
에스트릭을 땅에 내려서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순간 에스트릭의 가슴에서 마치 벌레가 꿈틀대는 고통이 엄습하더니 에스트릭은 참지 못하고 그대로 검게 썩어버린 피를 한바가지 토해냈다.
“쿨럭!”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고통에 에스트릭은 무릎까지 꿇고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각혈 후에도 그치지 않는 이 참혹한 고통에 에스트릭은 봉인되기 전에도 몇 번 질러본 적 없었던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크아악!”
광목천, 이 개새끼! 내 몸에다 뭔 짓을 한 거야! 그는 광목천에게 저주를 쏟아내고 있었지만 그가 그에 대한 분노를 드러낼 수 있는 일은 핏발이 서 시뻘겋게 변해버린 눈을 부라리는 일 밖에 없었다.
“제, 제길……! 빨리, 흑랑에게……!”
에스트릭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그렇게 말하며 어디론가 기어가기 시작했다.
~
에스트릭이 자신이 다다르고자 했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던 건 이미 해가 떨어지고 보름달이 높이 뜬 밤이 돼서였다. 전신을 지배하는 고통은 조금 누그러들었지만 여전히 가슴에서 기어 올라오는 이질적인 기운들과 전신을 짓누르는 알 수 없는 제재는 에스트릭을 쉽게 일어서지 못하게 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검은 탑에서도 상당히 떨어진 숲. 죽음의 대지에 어울리게 상당히 스산하고 소름끼치는 기운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에스트릭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높게 솟아있는 나무들을 기둥삼아 한걸음, 한걸음 간신히 떼 내어가며 다다른 곳은 이미 절반쯤 부서져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한 예배당이었다.
“쿨럭……!”
예배당을 보며 고통 속에서도 득의만만한 웃음을 짓던 에스트릭의 목젖이 다시금 꿈틀대며 주먹만한 핏덩어리를 쏟아냈다. 그렇잖아도 하얀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순식간에 핏기를 잃어갔다.
“비…… 빌어먹을. 복수할 거야.”
그의 두 눈이 시뻘겋게 변하며 살기를 뿌렸다. 지금 그의 분노는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자신을 봉인한 광목천? 아니면 광목천을 소환한 케디언 노바스?
힘겹게 예배당으로 올라선 케디언은 그 곳에 가지런히 놓여져 있는 한 자루의 도(刀)를 발견하고는 고통 속에서도 힘겹게 웃었다.
“흑랑(黑狼).”
흑랑이라 불린 이 도는 보통 도와는 틀리게 상당히 얇은 도신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삭월이나 보통 검에 비해서는 조금 두껍긴 하지만 보통 베는 칼이라는 인식이 박혀있는 도의 형태로는 획기적으로 얇다 할 수 있겠다. 그러면서도 곡선 역시 도 치도는 상당히 곧았는데 얼핏 본다면 검(劍)으로 착각할 수도 있을 모습이었다. 도를 받히고 있는 힐트(Hilt)는 상당히 어두운 재질의 회색 가죽으로 뒤덮여있었는데 가드 부분은 이 회색 가죽을 제공했을 짐승의 모피가 솔처럼 매달려 있었고 그립은 완만하게 휘어 쥐기 편하게 되어 있었다. 인상적인 부분은 폼멜 쪽이었는데 마치 늑대가 노려보는 듯한 조각이 음각되어 있어 전체적인 검의 야성미를 살려주는 느낌이었다. 음각되어 있는 늑대의 눈동자에는 시뻘겋게 타오르는 듯한 루비가 대신하고 있어 마치 당장이라도 울부짖을 것 같은 생동감이 느껴졌다.
이 아름다운 도를 잠시 감상하던 에스트릭은 주저하지 않고 손을 뻗어 흑랑도(黑狼刀)를 잡았다. 하지만 흑랑도는 에스트릭에게 그렇게 만만한 물건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에스트릭이 흑랑도를 쥐자마자 단숨에 뇌가 타버릴 것 같은 두통이 에스트릭을 엄습했다.
“제, 젠장! 나야, 나라고!”
우우웅-!
하지만 흑랑도는 에스트릭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거칠게 에스트릭을 밀어내려 했다. 결국 에스트릭은 두 눈에서 피가 터지는 고통과 함께 흑랑도를 놓아야 했다.
“치잇!”
순간적으로 시력을 잃은 에스트릭은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그가 두 손에 마력을 집중해 눈을 치료하자 다행히 시력은 돌아왔지만 에스트릭은 충격을 감추지 못한 채 흑랑도를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약해진 건가? 흑랑도나 삭월검은 스스로 주인을 선택하는 검. 물론 자신들이 스스로 움직일 수 없기에 주인을 선택하는 기준이 상당히 제한될 수밖에 없지만 에스트릭은 스스로 자부하기에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을 검사요, 술사였다. 하지만 300년(본인은 깨닫고 있지 못하겠지만)의 봉인은 에스트릭의 몸을 상하게 만들어 과거 인정받았던 무구에게조차 무시당하게 하고 있으니 에스트릭은 광목천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이런 젠장! 오늘 내가 너를 가지지 못하면 마왕이 아니라 견왕이다!”
에스트릭은 거세게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서 다시 흑랑도를 쥐었다. 붉고 푸른 아크가 튀어 오르며 흑랑도는 에스트릭을 거부했지만 이번 에스트릭의 기세는 만만치 않다. 그는 흉광이 서린 두 눈으로 흑랑도를 매섭게 쳐다보며 명령하듯 외쳤다.
“나는 붉은 눈의 지배자요, 세상을 지배한 마왕이다! 내 말을……!”
그 순간 다시금 송곳으로 찔러오는 듯한 두통이 에스트릭을 괴롭혔다. 에스트릭의 입에서 거품이 새어나오고 머리가 하얗게 새버릴 것 같은 고통이었지만 에스트릭은 혀를 씹어가며 고통을 참아낸 뒤 말을 이었다.
“……내 말을, 내 말을 들어! 이 똥강아지 새끼야!”
우우우웅-!
아마도 이것이 흑랑도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저항일 것이다! 에스트릭은 마지막으로, 그리고 여태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각오하며 이를 악물었다.
~
파지직!
에스트릭은 기어코 흑랑도를 두 손으로 들어 도를 뽑아들었다. -키이잉! 고막을 괴롭히는 괴음이 동반된다. 흑랑의 마지막 반항인가? 하지만 그 반항이 효과가 있는 듯 에스트릭의 어금니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입가에 피가 터진다. 또한 에스트릭의 왼쪽 안구의 혈관 역시 터졌는지 눈에서도 작게 공기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피가 흘러내린다.
“씨양, 원하는 대로, 해 봐! 새끼야! 더 울어봐!”
화륵, 하고 흑랑도의 영혼이 타오른다. 흑랑도에서 튀어나온 진득하고 사나운 기세는 형체를 이루며 예배당을 크게 감쌌다. 하지만 에스트릭의 눈에는 흑랑도의 도신 말고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에스트릭이 무의식중에 자신의 마력을 뿜어내자 그가 만들어낸 검은 망토가 거칠게 펄럭였다.
-----!!
형용할 수 없는 울음소리가 흑랑도를 통해 퍼진다. 흑랑도를 쥐고 있던 에스트릭의 손바닥이 찢어지며 흑랑도가 튕겨져 나갔다. 에스트릭은 흑랑도가 튕겨나가는 반동에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졌고 흑랑도는 에스트릭에게서 멀리 벗어난 곳에 굳게 꽂혔다.
“제, 제길.”
에스트릭은 패배감을 감추지 못하고 피로 물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대, 대체 내 몸이 어떻게 된……?”
그 순간 에스트릭의 눈동자가 두 배로 커졌다. 뭘까, 이 엄청난 이질감은? 에스트릭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두 팔을 옆으로도, 위로도 뻗어보고 다리를 올려보고 얼굴도 만져봤다. 그 덕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됐지만 에스트릭은 지금 그런 외형을 챙길 정신이 아니었다.
짧고, 얇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짧고 얇았다. 팔 역시 터무니없이 작았다. 그러고 보니 들고 있는 흑랑도의 칼집이 묘하게 크게 느껴진다.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망토 역시 몸에는 너무 커서 바닥에 한참 끌리고 있다. 얼굴을 만져 봐도 뭔가가 다르다. 자신의 얼굴 같기는 한데, 코와 입이 원래 얼굴에 비해 모자란다. 작아졌다는 소리다. 시야 역시 좁아진 느낌이다.
“……설마.”
에스트릭은 설마 아니겠지, 하는 얼굴로 흑랑도를 향해 다가갔다. 태양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흑랑도의 도신을 보며 에스트릭은 그 답지 않게 식은땀을 흘리며 침을 삼켰다. 그가 다가가자 흑랑도는 다시 우웅, 하고 진동이 일었지만 전에 비해서는 턱없이 약했다. 에스트릭은 어렵지 않게 흑랑도를 쥐고 칼날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10살 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창백한 안색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하하하…….”
처음 보는 얼굴은 아니다. 자신의 얼굴이 막 검을 쥐기 시작한 때 정도로 돌아간 것을 보며 에스트릭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광목천. 아주 깜찍한 짓을 해놨군.”
확실히 마왕이라 불리던 때 가지고 있었던 마력이나 완력과 지금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차이가 난다. 그렇다 하더라도 현재의 힘 정도라면 하급 드래곤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이다. 전성기 시절에 상급 드래곤과 동급의 힘이었던 걸 생각한다면 엄청난 차이가 있겠지만 현재의 힘으로도 강자라 불리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원래 자신이 올랐던 경지, 다시 오르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지고 있던 힘을 이제 사용할 수 없다는 건 엄청난 답답함으로 에스트릭을 짓눌렀다. 게다가 광목천이 자신을 이런 꼴로 만든 것도 모자라 자신의 몸에 알 수 없는 장치를 해 둔 듯 했다.
에스트릭은 상념에 빠져 흑랑도에 비친 낯선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흑랑도를 칼집에 넣었다. 그리고는 등 뒤로 가로지게 메고는 그 위에 다시 망토를 덧입었다. 하지만 현재 에스트릭의 신체는 10세 소년의 그것. 흑랑도의 손잡이가 망토 위로 길게 튀어나왔다. 하지만 더 이상 흑랑도를 망토 속으로 넣었다간 칼집 끝을 바닥에 질질 끌면서 가야 할지도 모른다. 아직 완벽하게 주인으로서 인정받지 못한 에스트릭으로서는 치욕스럽지만 흑랑도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쥐는 것 정도는 어떻게 허락받은 것 같지만).
“일단, 세월이 얼마나 흘렀나부터 알아봐야겠지.”
에스트릭이 손가락을 튕기자 순식간에 망토가 검은 박쥐의 날개로 변했다. 이건 그가 붉은 눈의 지배자라 불리던 과거부터 가지고 있던 그만의 능력이다. 뱀파이어의 변이나 웨어 비스트의 변신과는 틀린 자신만의 비전(秘典)으로서 대단히 뛰어난 성능의 비행능력과 공격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마력을 사용하는 능력이 아니기 때문에 능력에 제한이 없고 수족처럼 다룰 수 있기에 과거 하급 드래곤들을 사냥할 때 그가 가장 즐겨 사용하던 능력이었다.
이 날개의 이름은 비서익(飛鼠翼). 박쥐 날개라는 뜻의 조금은 우스운 이름이지만 에스트릭은 한 번도 이 능력의 이름을 바꿔볼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다. 귀찮기도 하고.
크게 날개를 퍼득인 에스트릭은 단숨에 허공으로 솟아올라 구름을 뚫고 하늘 위로 올라섰다. 에스트릭의 붉은 눈동자에 들어오는 것은 산천초목과 끝없이 이어진 강, 그리고 멀리 보이는 지평선. 그는 그제야 봉인에서 풀렸다는 해방감을 만끽하며 쾌재를 불렀다.
“세상이여, 경배하라! 에스트릭 지아레스가 돌아간다!”
그의 비서익이 다시 한 번 퍼득이자 에스트릭의 몸은 구름을 부수며 지평선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엘리멘탈 버스터는 삭제했습니다.
새로 쓰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올리는 건 그래도 조금은 열심히 썼다고 생각하는 글입니다. 윗 내용은 일단 프롤로그지만 분량은 제법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전작에 대한 아쉬움이라면 재미있다고 응원해주시던 분들도 계셨고, 이제 막 이야기가 시작되려던 참이었던지라 아쉽기는 합니다만. 다시 쓰겠습니다. 그렇게 질책받아놓고 그대로 그 글을 놔둘 수 있을 정도로 얼굴 두꺼운 인간은 못됩니다.
다시 쓰고, 오랜만에 이 글도 손대는군요.
좋은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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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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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렇게 쓰실 수 있으시면서 왜 그런 글을 올리셨나요? 제가 지금 딴일을 하느라 세세히 읽지를 못하겠군요. 내일 다시 차근차근 읽고 감상을 남기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흑흑... 엘리멘탈 버스터가 더 재미있었어요...;ㅂ; 이런 글을 쓰실 수 있는 분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 기대하고 있었는데요. 꼭 다시 보여주시길 바래요'-'
글쎄요. 잘 보고 있던 사람들도 많은데, 몇몇 분 때문에 글 자체를 바꾼다는 건 이해가 가질 않네요. 그리고 삭제할 이유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모든 작품들이 나름대로 개성이 있었는데, 웬지 분위기가 한쪽으로만 몰려들 것 같군요. 그게 바람직한 예술 활동은 아니지요.
다시 쓴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글자 하나까지 모조리 싹 지우고 난 후 새로 쓴다는거죠. 전작이 그렇게 비참할 정도로(이런 글 쓰고 싶냐는 소리까지 들었으니까요) 혹평을 당하고 그걸 그대로 방치한다는 것 자체가 조금 꺼림칙했고... 그렇게 절 면박주신 두 분에게 빈정상한 것 이상으로, 뭐랄까요. 두고봐라라는
심정? 어쨌든 새로 써서 올리고 난 후에도 그런 말 할 수 있나 보자라는 오기가 생겨버려서요. 어쨌든 새로 쓸 겁니다. 아직은 진도가 한페이지도 못나갔지만 어쨌든요. 끝까지 붙들고늘어져볼 생각입니다.
으음, 화이팅입니다'-'/
에헤헤. 글 기대할게요. 작아진 것에 대해선, 코난이 생각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