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곡의 세월속에 산 과부가 / 창녕군 고암면 감리 미곡마을 편
과부(寡婦) 이야기 과부(寡婦)는 남편을 잃고 홀로 지내는 여자를 말하지요 과(寡)는 홀로라는 뜻으로 과부는 짝없는 지어미를 뜻하는데 과부는 과붓집 높임말로 과부댁(寡婦宅) 과수댁(寡守宅) 과댁(寡宅) 등으로도 불렀어요 또 홀어미라고도 부르고 남편을 미처 따라 죽지 못한사람이라는 뜻으로 미망인(未亡人)으로 부르지요 옛날에는 '상배여성'(喪配女性)이라 부르기도 했어요 옛날 가부장 제도에서는 여성들이 배우자를 잃었을 때 죽은 배우자와 함께 산채로 순장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최근까지도 인도에서는 "사티"라는 순장 풍습이 있었다 하네요 18세기까지 서양에서는 남편을 잃은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남은 생애 동안 검은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성종 8년(1477년) 과부재가(寡婦再嫁) 금지법’을 시행하여 과부 결혼을 금지하였으며 고종 31년(1894년)이 되어서야 이를 허용하였지요 특히 경국대전 반포후에는 법적으로 재가녀의 자손들은 과거에 응시할수없어 관직진출이 금지되었지요 그러나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농민군에 의해 청춘과부의 개가를 허용하라”고 요구 하였습니다
또 정약용은 “남편이 죽으면 같이 따라 죽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편이 없어도 남은 자식을 데리고 꿋꿋이 살아가는 여성이 진정한 열녀”라며 새로운 열녀상을 제시 하기도 했지요 또 실학자 박지원은 부녀가 수절하여 지아비를 바꾸지 않음은 우리의 아름다운 자랑거리라고 보면서도 과부들의 곤궁한 처지를 개탄하기도 했습니다.
강산 두리미 닭이 울어 / 시쳇날이 밝아오네 지그미는 자리하고 / 우기미는 비개하고 잣 비개 도두 비고 / 잣 이불 치치 덮고 자 두치 지은 비개 / 혼자 비니 어인 일고 둘이 비자 하였드니 / 베개 너머 눈물 모아 한강수 되었더니 / 기우 한쌍 오리 한쌍 쌍쌍이도 떠나가네 / 눈물강에 넘노느냐 이네 신세 망극하네
구슬자 : 김성이 할머니(65)소태댁 경남 창녕군 고암면 감리 미곡마을
* 원앙부부의 이상 백년해로 *
해로는 자웅이 강장속에서 평생을 같이하는 해면동물이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한쌍의 부부가 맺어져 화락하게 사는 것을 일컬어 백년해로 한다고 말했다. 원앙새 같이 금실좋은 부부가 되어 행복하게 함께 늙으라는 기원의 말이다. 백년해로는 원앙부부의 이상이었던 것이다. 생물학자들은 결혼을 종족보존이란 인간본능적 측면에서 정의하기도 한다. 얼음위에 댓님 자리보아 님과 나와 얼어 죽을망정 정든 오늘밤 더디 새오시라 더디 새오시라-라고 노래 부르던 황진이의 후예들은 또 무엇이라고 결혼을 정의할 것인가. <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같이 살자 >는 맹세는 인간의 것이기에 죽음의 신 앞에서는 휴지조각과 같다. 저승사자의 손에 끌려 북망산천으로 떠나갈 때 인간의 어떤 미련이 사자의 발길을 멈추게 할 것인가. 부부의 애정으로 발길을 묶을건가.
* 불경이부의 댓가는 정문 *
< 전생에 죄 많이 지은 자가 이승에 여자로 태어난다 >고 체념했던 우리의 할머니들. < 결혼은 여자의 무덤이다 >라고 말한 서양인이나 결혼의 < 혼 >이란 글자를 계집 < 여 >에 황혼 < 혼 >자를 붙여 만든 동양인의 사고는 어느 점에 있어서 통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부부가 나란히 저승의 열두대문을 들어가는 것은 대복. 저승사자가 사정을 봐 줄리 없어 그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저승가는 것은 부부가 나란히 술병들고 친정집 나들이 가는 것과 달라 지아비가 지어미보다 지어미가 지아비보다 먼저 저 세상으로 가야만 한다. 그러나 유독 뒤에 처진 과수댁의 삶은 뼈에 사무치는 고독과 절망감으로 엮어진다. 조선시대 여성에게 있어 가장 혹독하고 잔인했던 법은 과부에게 재가를 금하는 것이었다. 여자의 길은 한으로 점철된다. 태어날 때부터 고추를 달고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의 생이 축복받지 못하고 눈물 글썽이는 어머니의 젖을 빨아야 했다. 길쌈에다 농사에 뼈골이 다빠지는 시집살이. 겨우 자식 낳고 살림 재미 알만하면 하늘같이 믿던 낭군이 저승길로 떠난다. 여자가 남편을 사별하고 나면 그때부터 여인의 삶은 진정 끝난 것과 같다. 살림살이의 어려움과 고달픔은 다 이겨낼 수 있지만 이불섶으로 파고드는 외로움은 어찌 견뎌낼 수 있으랴. 이 세상의 어느 것으로도 여인의 한과 고독은 달래어지지 않는다. < 불경이부 >의 댓가로 정문은 고을 고을마다 섰다. 그것은 한많은 과수댁의 < 눈물의 문 >인 것이다. 짙게 들어 짙게 들어 / 임의 병이 짙게 들어 / 서울이라 남대문에 비녀 팔고 반지 팔고 / 임의 약을 지었드니 / 집이라고 돌아오니 / 임가는 줄 내 몰랐네 / 앉아 울고 서서 울고 / 석 삼년을 울고 나니 / 베개 너메 강이 되어 / 겨우 한쌍 오리 한쌍 / 쌍쌍이 떠도는고 / 겨우 겨우 이 겨우야 / 대동강은 어디 두고 / 눈물강에 니가 왔노 / 앉아 부르고 누워서 부르고 / 석 삼년을 부르고 나니 / 뒷동산 치치 올라 / 성금수라 바구 밑에 / 수만수가 대답을 하네- 하종석 할머니 구술 (61 내동댁 창녕군 고암면 감리 미곡마을 거주 )
* 자해로 여인의 정염 이겨 *
박영방의 한문소설 < 열녀성양 박씨전 >을 보면 과부가 동전을 가지고 방 이쪽에서 저쪽으로 굴리기를 수십번이나 하면서 긴 밤을 새운다는 귀절이 나온다. 허벅지를 바늘로 찔러가면서 수절한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소설이나 야화속에 흔히 등장한다. 여인의 정염은 불씨, 가슴 깊은 곳에 삵쾡이처럼 도사리고 있다. 여인의 속곳중의 단속곳 바지중치마 겉치마가 아무리 여체를 억압하더라도 정염의 불씨는 숨죽일 수 없다. 손만대면 파닥대는 생선처럼....... 남자들은 처첩을 줄줄이 둘 수 있었던 우리의 역사. 여인은 감정의 촉수들을 모조리 결박된채 장옷속에 평생을 감추고 살아가야만 했다. 그것이 여인이 걸어야 할 길로만 생각했다. 경남 창녕군 고암면 감리마을. 봄비가 제법 줄기차게 내려 활짝핀 벚꽃을 떨어뜨리는 날. 어두 컴컴한 촌가의 안방에서 마을 할머니들을 만났다. 65세의 김성이 할머니의 잔잔한 목소리가 빗소리 속에 끊일듯 이어졌다. < 내가 여남은 살 먹었을 때야. 그때 모친은 쉰살이 조금 넘었지. 여름밤에 모기를 피해 마당에 멍석을 깔고 모친 곁에 누워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지. 그때 모친은 옛날 이야기 대신 이 노래를 불러주더군 > 할머니의 곱게 늙은 얼굴위로 수십년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 그때는 어디 모친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나. 하늘의 별들이 너무 곱다고만 생각했지 > 그때 어머니한테 들은 노래가 예순살이 넘도록 잊혀지지 않는다는 할머니. 과부가가 나오자 하종석 할머니(61)도 한마디 하겠다고 나섰다. 여덟살인가 먹었을 때 동지섣달 스물서너살 먹은 숙모가 바느질 하면서 부르는 것을 익혔다고. 그때 숙모는 과수댁이 아니었다고 하니 이 과부가는 그 한스러운 가사와 곡조 때문에 여인들에게 널리 불리어졌던 것 같다. 여인이 있는 곳에는 과부가 있고 남편따라 죽지못한 미망인의 베갯머리를 적시던 눈물의 노래는 오늘도 마을마다 잊혀지지 않고 내려온다. 어찌 그것이 잊혀질 수 있는가. 여인의 원망과 한탄이 세월의 강을 따라 더욱 짙게 흘러 왔는데, 눕었으니 잼이 오나 / 앉았으니 잼이 오나 / 임도 잼도 아니 오네 / 늙은 과부는 담배질 / 젊은 과부는 한심질 / 한심 끝에는 도망질 / 서방 얻어 갔단다. 부산 지방에서 가까운 동래에서 40여년 전에 채록된 과부가 중의 하나다. 이밖에도 여러 책자에 과부가가 많이 기록되어 있다. [출처] 굴곡의 세월속에 산 과부가 / 창녕군 고암면 감리 미곡마을 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