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차 표
이 병 률
저녁에 같이 만난 사람이
저녁을 다 먹고 헤어지면서 기차표 한 장을 준다
오늘 책장에서 책을 꺼내 읽는데
책장 사이에서 오래된 기차표가 나왔다고 한다
뭐라도 주고 싶었다며
6년 전의 날짜와 먼 나라 독일의 도시의 출발지와 목적지가 적힌
Von: 드레스덴
Nach: 라이프찌히
나도 책갈피로 쓰겠다고 마음을 먹고 기차표를 들고나오다가
그 표를 어디에 또다시 쓸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
기찻길 차단기 앞에 괜히 오래 서서 오지 않는 기차를 바라보다가
더 사랑해야 할 몇몇 얼굴들을 생각하다가
기차표에 적힌 출발일이 내일 하고도 아침인지도 몰라
가로등 가까이로 가서 기차표를 꺼내보았다
내가 내일 사라져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소문을 만들어야 할지도 모르겠으며
이 기차표는 사용하고 또 사용할 수 있다는 가정으로
짐을 싸야 할지도 모르겠으므로
Von: 여기
Nach: 영원
〈이병률 시인〉
-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 시집 '바람의 사생활' '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등
- 수상 '현대시학작품상' '발견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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