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 때부터 이혼한 사람은 용서가 안 됐어요"
[인터뷰]결혼 29년, 남은 것은 빚과 골병뿐인 이정숙 씨
오늘 한 소녀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 소녀는 이제 중년의 여자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여공’이 되었고, 스물아홉 해의 결혼 생활 내내 노동과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제 중년이 된 소녀가 생면부지의 내게 입을 연 것도 충격이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나도 충격에 헤어나지를 못한다. 그의 목소리를 차마 이곳에 다 담지를 못한다. 글로 쓰기에는 내 스스로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이 소녀의 삶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중년의 나이를 다시 돌려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전라북도 부안. 변산반도가 있고, 채석강이 있는, 바다와 산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곳.
아홉 살 먹은 소녀가 있다. 햇볕에 시뻘겋게 탄 목덜미는 따갑기만 하다. 오늘은 소풍가는 날. 소녀는 도시락과 삶은 달걀이든 소풍 배낭 대신 고추밭에 앉아 지심을 매야 했다.
“밭에 헐 일이 천진데, 어디 니꾸사꾸 매고 놀러 간다냐. 공부도 안하는 날인디, 고추밭이나 매라. 어매 징한 그, 돌아서면 풀인디, 니들은 답답도 안하냐.” 할머니의 불호령에 소녀는 소풍을 가지 못했다.
아홉 살 소년의 이야기
“소풍가는 날은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밭을 매야 했어요. 목은 빨갛게 익고, 고랑 끝은 보이질 않고 매도 매도 그 자리를 맴도는 것 같아요. 빨갛게 익어 따가운 목보다 더 참기 힘든 게 뭔 줄 아세요.”
아홉 살 소녀는 소풍을 가지 못한 것도, 밭을 매는 일도 참을 수 있었다. 소녀가 괴로운 것은, 일을 하고 있는 밭둑이 하필 소풍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월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노래를 부르며 친구들이 소녀가 일하는 밭둑을 따라 소풍을 간다. 부끄러워 숨고 싶지만 숨을 곳도 없고, 소녀는 땅에 고개를 묻은 채 밭을 매야한다.
할아버지는 목소리를 크게 낸 적이 한 번도 없는 반면에 할머니는 호랑이 할머니로 소문이 났다. 집안의 법은 할머니의 목소리에 달려 있다. 할머니의 말을 거역한다는 것은 차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장가를 가서 부모님과 같이 사는 아버지도 할머니의 법에 꼼짝없이 묶여 살아야 했다. 일년 삼백예순날을 논과 밭에서 일을 하지만, 수확을 하면 고스란히 할머니의 곳간으로 들어가야 했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해주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할머니한테 차마 손을 벌리지 못했다. 늘 아내와 자식들에게 미안해야 했다.
시집 온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딸만 다섯을 낳으니, 그 시절 어머니가 받아야 하는 고통은 표현하지 않아도 눈에 훤하다.
할머니의 법에 묶인 식구들
가을에 추수를 하면 동네 방앗간에 나락을 쌓아두고, 찧어 먹든지, 돈 살 일이 있으면 장날에 가져다 내놓았다. 장성한 아버지는 할머니 몰래 나락 두 가마니를 방앗간에서 가져다 팔았다. 모든 것을 할머니한테 허락을 받아 할 나이는 지났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농사를 아버지가 지었기에 이 정도는 당연히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방앗간에 쌀이 없어진 것을 안 할머니는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멕여 주고 재워 주는 디 니들이 뭐가 부족해 나락을 갔다 판다냐?”
할머니 품을 떠나지 않고서는 아버지 노릇도 남편 노릇도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독립을 하겠다고 말을 한다. “그려, 어디 나가 살아봐라. 니들이 호강에 겨워 그런 가 본디, 어디 나가 봐라.”
“한겨울이었어요. 눈이 무릎 팍 위로 쌓인 날이었어요. 부모님이 딸들을 데리고 집을 나섰지요. 그 때 어머니의 배에는 막내인 다섯째 동생이 있었어요.”
할머니는 겉보리 한 말을 주었다. 이제껏 아버지가 일한 대가였다. 아버지는 차비도 없는데, 이걸 가지고 어찌 나간다 말이요, 하며 따졌다. 할머니는 겉보리를 빼앗더니 백 원짜리 종이돈을 몇 장 준다. 딱 차비다.
“당장 갈 곳이 없어 외갓집 동네로 왔어요. 빈털터리로 오니 동네에서 불쌍하다고 보리나 고구마, 김치를 가져다 줘요.”
한 겨울 쫓겨나고
겨우 배고픔을 면하고 겨울을 지냈다. 아버지는 동네에서 땅을 개간하는 곳에 가서 돌을 캐며 일을 했고, 어머니는 새우젓 장사, 생선 장사를 하였다.
외삼촌은 서울에서 공사장 막노동을 하고 지냈는데 겨울이라 일감이 마땅치 않아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외삼촌은 날이 풀리면 서울에 가서 함께 ‘노가다’를 하자고 아버지에게 말을 했다.
아버지와 외삼촌이 서울로 먼저 올라갔다. 아버지는 공사장에서 막일을 하며, 서울 창신동 산동네에 방을 하나 세를 얻어 식구들을 불렀다.
“서울이라고 올라오니, 구들도 없는 마루 방애예요. 부엌이 없어 마당에 밥을 해먹고 살았지요.”
어머니는 서울로 올라오자 소녀를 학교에 보내는 일부터 서둘렀다. 하지만 고향 학교에서는 소녀를 퇴학 처리를 해 논 상태였다. 퇴학이라 적힌 학적부를 들고 창신 초등학교를 찾아가 전학을 시켜 달라고 하니 난색을 표한다. 어머니는 없는 살림에도 가르쳐야 한다는 마음으로 돈 봉투를 만들어 교장 선생을 찾아가 사정을 했다. 교장선생은, ‘내가 이런 걸 바라고 안 받아 준 줄 알아요’하며 돈 봉투를 확 집어던진다.
무안함과 절망에 빠진 어머니가 복도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초등학교도 졸업 안하면 우찌 사람 노릇을 하겠냐’며 울고 있으니 한 선생님이 다가온다. “아주머니, 저기 가면 공민반이라고 있어요. 거기를 우선 보내세요.”
배워야 사람 노릇은 하지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초등학교를 진학하지 못한 애들을 모아 가르치는 곳이 공민학교다. 나이도 천차만별이다. 공민반에서는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맨 날 오자미나 하고 놀던 일만 소녀는 기억난다.
어머니는 공민반을 소개시켜 준 선생님께 과외를 시켜, 시험을 치룬 뒤 초등학교 5학년에 소녀를 편입시킨다.
초등학교에 올라가니 공부하는 게 만만치가 않다.
“공민반에서는 오자미하고 놀았는데, 초등학교에 오니 공부하느라 전쟁이어요. 쉬는 시간에도 친구들은 책을 손에서 놓지를 않아요. 화장실에도 가지 않고 공부를 하는 것예요.”
육학년에 올라가서는 친구들의 영향을 받아 소녀도 덩달아 공부를 하게 된다. 늦게 시작한 공부였지만, 성적이 날이 갈수록 좋아졌다.
딸들에게는 초등학교만 다니게 하는 것도 큰 호강을 시켜 주는 일처럼 여기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소녀의 아버지는 중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마라고 했다.
“담임 선새님이 절보고 어머니를 모셔 오래요. 저하고 또 한 친구하고 성적은 좋은데 진학을 하지 못한다고 하니 학비를 대 줄 테니 진학을 하래요. 그 선생님 참 무서워서 싫어했거든요. 복도에서 뛰다가 걸리면 뺨을 심하게 때리고 해서.”
당시는 부모의 동의가 있어야 진학을 할 때였다. 소녀가 1955년에 태어났고, 초등학교를 마칠 때는 열네 살인 1960년대 말이다.
집에 가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아버지는 노발대발을 하신다. 어머니한테는 학교에 가면 끝장날 줄 알라고 윽박을 질렀다.
여자가 초등학교만 나오면 되지
“학교에 가면 선생님은 왜 어머니 모시고 오지 않냐 하며, 학비를 대 줄 테니 부모님을 모셔 오라고 해요. 집에서 아버지는 무슨 학교냐며, 어머니한테 학교에 가면 난리 날 줄 알라고 소리를 치고.”
소녀는 집에 가서 막 울었다. 왜 학비를 대 준다는데도 보내 주지 않냐고 대들었다. 아버지는 우는 소녀에게 회초리를 때렸다. 맞으면서도 공부를 하겠다고 대들었다. 그럴수록 회초리는 더욱 매서워졌다.
“털실로 짠 바지를 입고 다녔는데, 얼마나 맞은 자리에 상처가 크게 났던지, 바지에 상처가 데일 때마다 무척 아렸던 기억이 나요.”
졸업을 앞두고 학교에서 자신의 희망에 대해서 써서 내라는 숙제가 있었다. 소녀는 이렇게 썼다.
‘내가 만약 중학교를 가지 못하면 미싱을 배울 것이다. 미싱을 배워 돈을 많이 벌 거다.’
창신동은 평화시장과 가깝고, 많은 사람들이 봉제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자연히 소녀가 볼 수 있었던 희망은 미싱을 배워 돈을 버는 거였다.
이 글을 본 선생님은 ‘기술도 좋고, 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사람은 배워야 한다’고 설득을 했지만, 아버지의 고집은 꺾을 수가 없었다.
미싱을 배워 돈 버는 희망
이때의 기억이 소녀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였는지 모른다.
“25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눈물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아요. 아버지의 관이 나가는데, 동생들은 눈물을 펑펑 흘렸지만 전 눈물이 나오지 않았어요. 눈에 침을 바르고, 관을 쫓아 나갔지요. 하지만 아버지의 관이 차에 실리는데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막 아버지 원망하는 소리를 하며 울었어요.”
진학을 하지 못한 소녀는 이제 더 이상 소녀가 아니다. 여공이고, 시다라 불린다. 그에게 사십년을 따라다니는 미싱과 인연이 시작된다. 동화시장의 제품공장에 취직을 했다. 나일론으로 남자들 바지를 만드는 공장이다. 미싱사들이 옷을 만들면 그걸 가져다 다리미로 다리는 일을 하였다.
“제품이 나일 롱이다 보니 잠깐 한눈을 팔면 옷을 태워 먹는 거예요. 하루에 한두 번씩. 물론 다림질만 하면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옷을 다리고 있으면 이곳저곳에서 불러서 잔심부름을 시켜요. 누가 부르면 놀래서 달려가죠. 그러다 옷을 태워 먹는 거예요.”
한 달이 지나니 월급을 주고 그만 나오라고 한다. 옷을 태워 먹는다고 쫓겨난 것이다.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어요. 그걸 가방 맨 아래에다 넣고 신주 단지 모시듯 가슴에 꼭 품고 출퇴근을 했어요. 도시락이 소중했나 봐요.”
그 곳에서 쫓겨나 블라우스 공장으로, 잠바 공장으로 떠돈다. 먼지밥 인생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억척스런 먼지밥 인생
초등학교 졸업할 때 쓴 글처럼, 미싱을 배우려고 억척을 떨어야 했다. 기술은 누가 가르쳐주지를 않았다. 점심을 먹으면 쉬지도 않고 바로 미싱으로 달려갔다. 바늘을 부러뜨려 혼이 나고, 기계 만지지 말라는 욕을 들으면서 미싱을 혼자 배웠다.
“공부를 해서 사람대접을 받기는 틀린 일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미싱을 배워 살아가야지, 하며 저하고 약속을 한 거예요.”
눈을 뜨면 공장으로 달려갔고, 잠시 미싱이 멈추는 시간이면 기계 앞에 달라붙었다. 그렇게 일 년 반이 지나 미싱사로 취직할 자리를 찾아 나선다.
미싱을 밟아 봤지만 미싱사로 취직할 만한 곳은 만만치 않았다. 아니 미싱사라고 말하며 취직을 할 자신이 없었다. 이 기술로 미싱사가 될 수 있을까.
“하루 종일 평화시장 끝에서 끝까지 돌아다녔어요. 이 공장 저 공장을 기웃거리며. 제일 쉬운 일을 하는 곳이 어딘가를 찾는 거죠. 블라우스를 만드는 공장인데, 이 정도면 할 수 있겠다 싶어 공장 문을 열고 들어섰어요. 그런데 ‘왜 왔냐’하는 말에 입이 닫힌 거예요. 거짓말을 하지 못하겠는 거예요.”
다행히 취직이 되었다. 미싱사라고 앉았지만 일은 실수투성이였다. 하루는 사장이 부른다. 가슴을 조아리며 왜 그러나 싶어 있으니까, 자장면을 사 줄 테니 일 끝나고 기다리라고 한다. 일을 잘 하지 못해 쫓겨나나 보다 생각이 들었다.
“충신동에 있는 중국집으로 데려가 짜장면을 사주더니, 너 오늘 집에 가지 마, 그러는 거예요.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왜요? 그러니, 글쎄 가지마라면 가지 마, 라고 하더니….”
자장면의 엉큼한 유혹
사장은 나이를 꽤 먹은 사람이었는데, 얼마 전에 부인이 도망갔다는 말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겁이 덜컥 났다. 중국집을 나오자 사장이 택시를 잡는다. 그 사이 뛰기 시작했다. 창신동 꼭대기가 집이었는데 그 곳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그 멀고 가파른 언덕을 쉬지 않고 달려 올라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엄마 엄마 누가 따라왔나 좀 봐, 하며 소리를 쳤죠. 어머니가 집 밖을 보더니 아무도 없다, 무슨 일이냐, 그러세요. 전 거기까지 쫓아오는 줄 알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왔거든요. 한 번도 쉬지 않고.”
어머니한테 짜장면 사 준 이야기며, 집에 가지마라고 한 이야기를 하였다. 어머니는 너 내일부터 그 공장에 가지 마라, 그리고 내일 나하고 같이 가자, 며 어서 씻고 자라고 한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와 함께 집을 나섰다. 이화여대병원에서 평화시장 쪽으로 건너가려고 하는데 사장이 그 앞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사장 앞으로 다가가니 사장은 어머니랑 함께 오는 줄은 모르고 내게, 너 어제 왜 도망갔어, 그러는 거다.
“엄마, 이 아저씨야, 그러니 사장이 놀래서 움찔해요. 어머니랑 함께 있으니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사장님, 지금 가서 장부 정리해서 우리 엄마한테 돈 주세요. 나 여기 안 다닐 거예요’하고 저는 집으로 돌아왔죠.”
첫 미싱사 시절은 허무하게 끝났다. 이젠 미싱보조 자리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기술은 금방 늘지를 못했다. 배우다가 실력 없다고 쫓겨나고, 일하다 쫓겨나고를 거듭하며 차곡차곡 기술이 쌓여 갔다. 이렇게 일 년을 도니 미싱사 소리를 할 수 있었다.
그 때부터 일한만큼 공임을 받으며 일을 하는 객공을 시작했다. 동생을 시다로 두고, 억척스럽게 일을 했다.
“잠이 깨면 새벽 네 시에도 공장으로 갔어요. 아무도 나오지 않았고, 공장문도 닫혀 있지요. 그러면 동생을 엎드리라고 하고, 동생 등을 타고 올라가 문 위에 난 조그마한 환기창을 뛰어 넘어가요. 뛰어내리면 제품이 쌓여 있어 다치지 않았거든요. 그럼 미싱을 돌리는 거예요. 시도 때도 없이.”
몸이 부서져라 미싱을 밟고
제품을 뽑는 만큼 돈을 가져가는 일이라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미싱을 했다. 남한테 지는 것도 싫었다. 몸은 부서져도 돈을 벌수 있다는 이유로 미싱에 붙어살았다. 편도선이 심하게 부었는데도 병원 가는 시간이 아까워 일만 하였다.
그렇게 몇 년을 동생들과 객공 미싱사를 하다 보니 집을 한 채 살 수 있었다. 이백 삼십만 원 짜리 집을 창신동에 샀다. 판잣집이지만 어린 나이에 내 집을 산 것이다. 그의 나이 열아홉 살이었다. 그가 얼마나 고생했는가가 눈에 그려진다.
이삼천 원 시다 월급으로 시작해 십 년도 되지 않아 집을 산 것이니. 창신동에서는 그 집 자매들이 억척이라고 소문도 나고, 효녀라는 칭찬이 자자했다.
이제 소녀를 완전히 벗어나고 결혼을 준비한다. 하지만 마땅한 짝은 찾을 수가 없었다.
소녀를 벗어나고
“집 주위에 함께 데리고 다녔던 시다가 있었다. 이 시다가 자기 어머니한테 우리 ‘오야 언니’가 결혼할 상대를 찾는다고 말한 거지요. 그 어머니가 나중에 시누이예요. 당신의 남동생을 소개했어요. 공무원이라고 하더라고요.”
남동생이 공무원이라는 말에 선을 봤다. 자신은 밤낮없이 일하는 미싱사다. 공무원, 그러면 최고의 직업이라고 생각을 했다.
“공무원이래요. 나는 그 당시 공무원을 최고로 알았어요. 왜냐면 나같이 못 배운 사람한테 공무원은 최고의 직원이거든요. 출근 시간 정확하고 퇴근 시간 정확한 그런 사람한테 시집가서 잘살고 싶었지요. 우리 하는 일은 맨 날 밤이고 낮이고, 야간도 해야 하고, 일도 힘들고 그러니까. 선을 보게 해 달라고 했지요.”
동네에서 효녀로 소문나고, 억척스럽게 일을 해 돈도 벌었고, 당시에는 미싱사하면 돈 잘 버는 직업으로 창신동에서는 알아주니, 시누이 될 사람이 남동생을 소개 한 것이다. 배우지 못한 것 빼면 나무랄 곳이 없다고.
“그 이튿날 곧바로 만났죠. 허우대는 멀쩡하고 깔끔하고요. 귀티 나게 생기고. 우리 엄마랑 만났는데, 좋더라고요. 그 다음 주에 이 사람이 우리 집을 찾아왔어요. 나는 우리 집이지만 판잣집이라 챙피했지요. 그래도 공무원인데 판잣집 보여 줄려니 챙피하잖아요. 그래서 나는 그 때부터 배운 게 없으니까 기죽어 산거예요. 판잣집에 살고, 못 배우고 그러니까.”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됐다.
지금까지 이야기는 창신동에 살며 미싱사를 했던 올해 쉰세 살인 이정숙 씨의 소녀에서 처녀 적 이야기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맺어야 했다. 어렵게 컸지만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집도 사고, 직장도 탄탄하고 인물도 훤한 신랑을 만났으니. 이 보다 더 좋은 이야기가 어디에 있겠는가. 앞으로는 신랑이 가져다 준 월급만 알뜰히 모아 애들 공부만 잘 시킨다면 세상에서 더 부러울 일이 없을 것이다.
공무원 신랑을 만나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을 맺지 못한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서론에 불과하다. 이정숙 씨의 굴곡 어린 삶은 여기서 시작이 된다. 그리고 이 시작은 차마 글로 옮기기도 힘들 정도의 아픔을 지니고 있다. 어디까지 써야 하고 어디를 쓰지 말아야 할지를 도저히 분간할 수도 없다. 인터뷰를 하고 나서 써야 되나 말아야 되는가를 가지고 일주일을 흘려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쓸 수 있는 만큼만 쓰기로 결정을 했다. 쓸 수 없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인터뷰 도중에 이정숙 씨 눈에 핏줄이 터졌다. 아마 눈이 터지지 않았다면 머리가 터졌으리라. 그 피맺힌 눈을 지울 수 없어, 그리고 이 이야기를 쓰지 않고, 내 머리에 간직해 둔다면 내 머리 속의 핏줄이 터질 것 같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이라도 써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 때 기죽으며 결혼 한 것이 평생 간 거예요. 여태껏 고생하고 산거지요. 맨 날 무식한 년, 초등학교도 못 나온 년 소리를 들으며. 나 초등학교 졸업장도 있는데….”
수상한 조짐은 결혼 전부터 있었다. 신혼 방을 구하러 다니는데, 동서랑 함께 다녔다. 신혼 방도 신랑 돈이 아닌 형제간이 조금씩 모아 방을 얻어 주는 모양이었다. 공무원 생활을 했는데, 집에 가져다주고 모은 게 없었나 하고 생각했다.
“신혼여행 가서부터 나보고 돈 없다고 돈을 내놓으래요. 그래서 결혼할 때 친구들이 용돈 걷어서 주잖아요. 그것 좀 있어서 그걸 쓰고 했는데….”
집들이를 하는 데, 신랑과 함께 동사무소를 다니는 사람들이, “아, 이 사람 나쁜 사람이야. 결혼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중매를 한다니까 총각 행세를 하고 다녀.” 그런다. 그 때는 일부러 하는 짓궂은 농담이겠지 하고 넘어갔다.
설마, 짓궂은 농담이겠지
결혼을 하고 쌀값을 줘야 밥을 할 텐데, 돈을 주지 않는다. “쌀이 없는데요.” 했더니, “요 앞 가게에 가서 외상으로 가져다 먹으라”고 한다.
언제 외상을 해봤는가? 그것도 새댁이 낯선 동네에 와서 외상 쌀을 달라고 하는 말은 입에서 나오지를 않는다. 배는 고프지만, 외상 달라는 말을 하지 못해 쌀집이 있는 골목을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왔다 갔다 하며 떨려서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신랑이 와서 밥을 가져오라고 하면 어찌할까 하는 두려운 생각에 외상으로 쌀을 가져다 밥을 했다.
월급날이 되어도 월급을 주지 않는다. 신랑은 결혼 전에 빚이 백팔십만 원이 있었는데, 빚쟁이가 찾아와 난리를 치니 어찌하겠냐고, 잘못하면 동사무소에서 창피를 사서 쫓겨날 지도 모르는데, 라는 말에 참아야 했다.
“공무원 월급이 팔만 원정도 할 때예요. 내가 나가 벌면 공무원 월급에 서너 배는 벌 때거든요. 빚이 있어 월급을 못 가져다준다고 해도 내가 나가벌면 금방 갚을 수 있는데 하며 별로 크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총각 때 빚도 질 수 있지 하며 지나쳐 간 거예요.”
외상 쌀 좀 주세요
임신한 배는 불러왔다. 신랑의 월급 한번 보지 못하고, 병원에서 첫 애를 낳았다. 아들이다. 하지만 신랑이 오지 않는다. 병원비를 내 줄 사람도 없다. 가운데 시누이는 큰 시누이 네로 가보라 하고, 큰 시누이 네는 딴 데서 알아보라고 하고. 결국 큰 집 네에서 부동산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에게 돈을 빌려 퇴원을 했다. 애를 낳은 지 일주일 밖에 되지 않았는데, 병원비 갚을 일이 꿈만 같았다. 급하다고 해서 돈을 돌려 빌려줬으니 빨리 달라고 하지만 신랑은 대꾸도 없었다.
“그 때 친정집은 미싱을 갖다 두고 제품 일을 하고 있었어요. 창신동에서. 아이 낳은 지 한 달 만에 친정으로 갔어요. 막무가내로 일을 해야겠다고 하니, 친정집은 난리가 났지요. 그 몸으로 무슨 일을 하냐고, 죽으려고 환장했냐며.”
아이를 미싱 옆에다 눕혀 두고 미싱을 하다가 애가 울면 젖을 먹이고, 또 일을 했다. 먼지 구덩이에서 아이를 두다 보니 감기에 걸리고, 먹은 것을 토하기도 하고 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신랑이 돈을 주지 않으니.
뒤에 안 일이지만 신랑이 집에 돈을 가져오지 않은 이유는 딴 곳에 있었다. 바람을 피우고 다녔다. 29년 살면서 바람을 피다가 경찰서에 들어간 일만 세 번이라고 한다.
바람만 피우고 다닌 것이 아니다. 집에 들어오면 이정숙 씨를 때리곤 했다. 술을 마시고 밤 열두 시에 들어오면 몇 시간씩 때린 뒤 잠을 잤다. 밤새 술주정을 하고 때린 뒤 신랑은 자고, 이정숙 씨는 미싱 일을 해야 했다.
바람난 신랑의 폭력
“옛날부터 술 먹고 밤중에 오고, 집에 오면 식구들 괴롭히고 한 것이, 맨 날 여자들하고 그러고 다니면서 집에 와서는 밤 새 두들겨 패고, 잠 안 재우고 한 것이, 지가 술 먹고 다니는 것처럼 보이려고, 여자랑 다닌 걸 감추려고 그런 거예요. 내가 맞고 그러면 술 때문에 그러나보다 하며 딴 곳으로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려고….”
지나고 생각하니 이렇게 때린 것도 바람피운 일을 감추기 위해 한 일처럼 여겨진다. 바람피운 것을 감추고 술주정하는 걸로 인식시키기 위해 늦게 들어온 날은 때린 것이다.
구십오 년에는 분당에 공무원 특별 분양을 받아 아파트에 입주를 했다. 입주를 하자마자 가압류가 더덕더덕 붙기 시작하였다. 결국 아파트는 경매에 넘어가고 말았다. 모두 신랑이 가져다 쓴 빚이다.
이정숙 씨는 지금도 청량리에 보증금 삼천만 원하는 임대 아파트에 살고 있다. 이정숙 씨의 집 이야기를 듣다 보면 화를 넘어 분노가 일어난다.
분당 아파트를 남편 빚으로 날리고 이정숙 씨는 성남의 태평동 산꼭대기에 지하 전셋집으로 옮긴다. 거기에 미싱을 가져다 두고 일을 했다. 하지만 돈벌이는 시원치가 않았다.
“그래서 대출을 얻어 장사를 해보려고 은행에 갔어요. 그런데 신용불량자래요. 분당에 아파트 분양 받을 때 중도금을 내야 하는데, 제가 대출을 해야한다고 해요. 인감을 가지고 은행에 갔더니, 저는 밖에 앉아 있으라고 하고, 은행 직원하고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저는 아파트 중도금 대출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제 이름으로 대출받아 딴 데 쓰고 갚지 않아 제가 신용불량자가 된 거예요. 저는 감쪽같이 모른 거죠.”
월급은 주지 않지, 성남에서 미싱 일은 돈이 되지 않지, 결국 애들을 떼어놓고 임금을 좀 더 많이 받으려고 답십리까지 제품 일을 다니기도 했다. 성남에서 답십리까지 다니는 일이 만만치 않아 동대문 근처 숭인동으로 집을 옮긴다. 월세를 내는 지하실 방이다.
지하실 방 인생
보증금이 걸려 있으면 신랑이 가져가기에 보증금은 될 수 있으면 적게 내는 달세 방을 찾아다닌다. 물론 서울에서 그 돈으로 얻을 집도 없었지만. 계를 몇 군데씩 넣어 집을 얻으면, 전세를 달세로 바꿔 홀랑 가져다 쓰니 될 수 있으면 보증금이 없는 달세를 찾아 다녔다.
지금 청량리 임대 아파트는 다행히 이정숙 씨 명의로 되어 있어, 이정숙 씨 동의가 없으면 빼지를 못한다는 걸 알고 입주하였다.
지하실 방에 살다 보니 고생도 많이 했다. 하수구에 모터를 달아 물을 끌어올렸는데, 모터에 머리카락이라도 걸리는 날에는 물이 역류하여 집이 물바다가 되곤 했다. 물이 넘치면 밤새 대야로 퍼내야 했다. 어떤 때는 똥물이 넘치기도 해, 물을 닦아내고 나면 누렇게 바닥이 변했다. 물이 차면 합선이 되어 전기도 나갔다. 밤새 물을 푸고 촛불을 켜 놓고 집안일을 했다.
노량진에 살 때는 전당포 안에 있는 단칸방을 세를 얻어 살았다. 전당포 창살 안에 방이 있는데 밤이 되면 전당포 주인은 집으로 간다. 아기 아빠는 집에 들어오지를 않지, 밤에는 온갖 사람들이 와서 전당포 좁은 창 안을 들여다보며 기웃거려 겁에 질려 살아야 했다. 밤에는 이불 밑에 식칼을 두고 잠을 자야 했다.
식칼을 품고 자다
아들이 셋인데, 모두 어려운 속에서도 잘 커 줬다. 큰 아들은 장학금을 받으며 박사과정을 받고 있으며, 막내는 전교 학생회장을 할 정도로 학교에서 공부도 잘 하고, 인기도 좋다.
한 때 큰 아들은 병원 치료를 받기도 했다. 아버지는 집에 와서 폭력을 행사하지, 어머니는 새벽에 나가 밤늦게까지 일을 하느라 아이를 떼어놓고 다녀야 하니 정서 장애가 온 것이다.
“큰 애가 시장에 가서 옷을 사 입히면 애리가 하나도 없어요. 다 씹어 먹어. 그러니까 애를 놔 놓기만 하고, 맨 날 떼어놓고 아침에 나가면 밤중에 오고, 또 아주 어렸을 적에는 이 사람한테 맡기고, 저 사람한테 맡기고, 시골에다 할머니한테 맡기고 하니, 큰집에다 맡기고, 이러고 다녔으니…. 옷을 사줘 입히고, 와서 보면 다 씹어 먹어 애리가 없는 거야.”
옷을 사주면 왼쪽 칼라를 입으로 잘근잘근 씹어 한쪽 칼라가 없어지곤 했다. 서울대병원에 입원을 시키고 6개월간 치료를 받아야 했다.
친정어머니는 다시는 애를 갖지 말라고 했다. 딸이 사는 꼴이 너무 안 되어 보여. 피임을 하면 부작용이 생겼다. 약을 먹으면 속이 뒤집히고 그랬다. 그러다 보니 일 년에도 몇 번씩 애를 가졌다. 그때마다 병원에 가서 애를 지웠다. 한 해에 대여섯 번씩 애를 지운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애를 지운 천벌을 받은 거지요.”
한 해도 대여섯 번 아이를 지우다
추석 대목을 앞두고 일이 밀려들어왔다. 잠시도 미싱을 떠날 틈이 없었다. 대목을 놓치면 돈을 버는 것이 여의치 않는다. 잠도 자지 않고 일을 하다 보니 하혈을 시작했다. 하지만 일은 밀려 있지, 병원에 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얼마나 하혈을 많이 했는지 엉덩이 살이 물러질 정도였다. 결국 쓰러졌고, 병원에 가니 유산을 너무 많이 해 자궁이 얇아질 대로 얇아져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저는 애는 셋 정도 낳아 키우고 싶었거든요. 큰 아들 혼자 크는 것은 너무 외로울까 봐…. 앞으로는 애를 갖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에 임신을 하고 둘째 애를 낳았어요. 둘째 애를 갖고 팔 개월 째에는 임신중독증이 왔어요.”
관절이 아파 오며 뼈가 휘고, 계단을 오르내리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앓았다. 땅을 짚고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하지만 더 이상 유산을 하면 애를 갖기도 힘들고, 생명이 위독하다는 말에 애를 낳아야 했다. 셋째를 임신하고는 관절 아픈 것이 나아지는가 싶었지만, 한번 골병든 몸은 쉽게 좋아지지 않았다.
둘째 애를 낳으면 그렇지 않겠지, 나이가 들면 돌아오겠지 하며 스물아홉 해를 남편과 살아왔지만, 남편은 변하지 않았다. 아직도 가정을 뒤로 한 채 딴 여자를 만나고 다니고, 나이를 들어도 폭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제 그 폭력이 자신만이 아니라 자식들한테 이어진다.
이정숙 씨는 새로운 결심을 한다.
“바람피우는 것을 알면서도 이혼을 하겠다는 생각은 해보지를 않았어요. 애들 때문에 그런 생각을 가지지 못했어요. 남편도 ‘당신은 나랑 헤어져 살 수 없다’고 했어요. 미련했던 거죠. 하지만 이제 이혼하기로 했어요. 아이들도 동의했고요.”
여기까지 오는데 29년이 걸렸다. 죽어라 일하며 번 돈도 쏙쏙 날려 먹고, 신랑한테 월급도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하며 온 몸에 골병만 남은 뒤에 결심을 한 것이다.
새로운 결심, 이혼이다
“내 주관은 처녀 때부터 이혼한 사람은 진짜 용서가 안됐어요. 어떻게 자식을 놔두고 이혼을 하나, 나는 절대 고지식해서 이혼은 안 된다고 생각한 사람이었거든요.”
예전처럼 남편이 잘하겠다고 하면 같이 사는 것이 아니냐고 묻자, 결코 그런 일은 없다고 한다.
“이제 알았어요. 더 이상 속지 않을 거예요.”
이혼 서류를 접수하였다. 하지만 이정숙 씨가 고생한 대가는 받을 길이 없다. 남편의 월급은 이미 2/3이상이 빚쟁이들 차지고, 남편이 모아 둔 재산은 하나도 없다. 유일하게 정년퇴임하면 받게 될 연금은 본인 이외의 누구도 손을 댈 수 없다고 한다.
“위자료 한 푼 받지 못하는 거예요. 남편의 퇴직연금은 손을 댈 수가 없다고 해요. 너무나 억울해요. 어찌할 방법이 없나요. 아직 빚이 오천만 원이나 있거든요. 신랑이 저희 친정집을 담보한 빚이랑…. 빚만 안은 채 이혼을 해야 해요. 이처럼 억울한 사정을 법이 지켜 주지 못하면…, 저희 같은 사람은 어찌 살아가야 하나요.”
이혼소송을 하며 변호사를 선임하다 보니, 몇 백만 원 빚을 져야 했다. 남편에게 유일하게 받아 낼 수 있는 퇴직연금은 당사자 이외에는 손을 댈 수 없다 하니, 이혼을 해도 고스란히 빚만 안은 채 떠나야 한다. 미싱밖에 모르고 살아온 이정숙 씨의 앞날은 막막하기만 하다. 어느 곳에 도움을 요청해야 할지 넋을 놓고 앉아있다.
이정숙 씨의 삶을 들은 사람들은 미련하다고 이야기 할지 모른다. 뭐 하러 여태 살았냐고 손가락질을 할지 모른다. 이혼율이 높다는 기사가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이정숙 씨의 나이 대에 이혼이란 꿈에도 생각하지 않은 단어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정숙 씨와 같은 사람들이 아직도 이 땅에 숱하게 있는 것이 더 아픈 현실이다. 이제라도 말을 하며 자신의 권리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여기까지 오게 한 것도 커다란 용기였는지 모른다.
이정숙 씨의 용기에
고생하며 자란 사람들이 이제는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를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아직도 ‘해피엔딩’보다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사회는 해피엔딩만을 이야기하고, 이정숙 씨와 같은 이야기는 홀로 가슴에 삭이던지 쉬쉬하는 게 통념이다.
이정숙 씨의 시작은 지금부터일지 모른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난관이 앞에 놓일지도 알 수 없다. 그리고 이혼을 떳떳하게 이야기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이 현실을 딛고 일어서는 이정숙 씨의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보다 소중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네 시간이 넘게 진행된 인터뷰 동안에 이정숙 씨의 눈은 터지고 말았다. 눈에는 피가 어려 있다. 그가 간 뒤로 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듣고만 있어야 하는 못남에 가슴만 아파해야 했다.
‘저 좀 도와주세요.’ 아직도 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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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 가슴이 참으로 무너집니다...참으로 무너집니다. 그 수많은, 수겹의 고통을 다겪어서 안다기 보다, 그 고통의 정도가 글을 읽는 제 가슴으로 겹겹이 아주 겹겹이 스며듭니다. 그 똑같은 고통을 겪어서가 아닌, 그 고통의 마음모양새와 똑같은 마음이 되어 그 고통의 정도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삶의 거친 충격으로 자살하는 수많은 사람들, 심각한 행동장애를 일으키는 아이들, 그 사람들이 진정 원하는건, 그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는 누군가가 필요하다는것. 만약 내가 나의 고통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난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기에, 그 고통을 함께하고 느낄수 있는것이라고. 내 열린 가슴으로 느낄수
있다고. 그 고통이 나의 눈물이 되어 지금 내가 함께 한다고. 우리는 나눌수 있기에, 느낄수 있기에, 이해할수 있기에 삶을 지탱할 용기를 얻는 희망이 있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