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오는 밤에
김용호
오누이들의
정다운 얘기에
어느 집 질화로엔
밤알이 토실토실 익겠다.
콩기름 불
실고추처럼 가늘게 피어나던 밤
파묻은 불씨를 헤쳐
잎담배를 피우며
“고놈, 눈동자가 초롱같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할머니
바깥엔 연방 눈이 내리고
오늘밤처럼 눈이 내리고
다만 이제 나 홀로
눈을 밟으며 간다.
오우버 자락에
구수한 할머니의 옛 얘기를 싸고,
어린 시절의 그 눈을 밟으며 간다.
오누이들의
정다운 얘기에
어느 집 질화로엔
밤알이 토실토실 익겠다.
(시집 『시원 산책』, 1964)
[어휘풀이]
-질화로 : 질흙으로 구워 만든 화로
-조롱같애 : 초롱같다. (눈이나 귀, 정신이) 환하게 밝다.
초롱은 등롱(燈籠)을 달리 이르는 말.
[작품해설]
이 시는, 어느 눈 내리는 겨울밤, 길을 걷던 시적 화자가 누이와 함께 질화로에 밤을 구워 먹으며 할머니께 옛날이야기를 졸라대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추억에 잠기는 내용으로, 향토적 서정성이 듬뿍 담긴 작품이다. 할머니는 이니 세상을 떠나셨고, ‘질화로에 밤알이 토실토실 익어 가던’ 어린 시절의 정겨움도 모두 사라져 버린 메마른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화자는 홀로 눈길을 걸으며 고독에 젖다가 ‘구수한 할머니의 옛 얘기’를 떠올리고는 흘러가 버린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시인은 의도적으로 ‘질화로’ · ‘밤알’ · ‘콩기름 불’ · ‘실고추’ · ‘불씨’ · ‘잎담배’ · ‘초롱’ 등의 순박하고 인정미 넘치는 시어를 사용하여 작품의 분위기를 더욱 정겹게 만드는 한편, 옛것에 대한 아쉬움을 강조하는 이중 효과를 얻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는 떠난 것은 모두 정겨운 것이고, 잃어버린 것은 모두 그리운 것이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준다. 이처럼 이 시는 각박한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대인들로 하여금 누구나 지니고 있는 포근한 추억에 젖어들게 한 번쯤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기에 충분하다.
[작가소개]
김용호(金容浩)
만석(萬石), 학산(鶴山), 야돈(野豚), 추강(秋江)
1912년 경상남도 마산 출생
마산상업학교 및 일본 메이지(明治)대학 전문부 법과 졸업
1935년 『신인문학』에 시 『첫여름밤 귀를 기울이다』를 발표하며 등단
1946년 에술신문사 주간
1956년 단국대학교 국문과 교수 역임
1962년 한국펜플럽 부회장
1973년 사망
시집 : 『향연』(1941), 『해마다 피는 꽃』(1948), 『푸른 별』(1952), 『남해 찬가』(1952), 『날개』(1956), 『항쟁의 광장』(1960), 『의상 세레』(1962), 『시원 산책』(1964), 『김용호시선집』(1983)
첫댓글 따뜻한 시를 가져오셨네요
잘 감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현정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늘 ~ 지금처럼 자주자주 이곳에서
만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