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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은 사람들
롬 1:18-23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롬 1:18-23 / [인간의 타락한 모습]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밀쳐 내는 사악한 모든 인간에게 하늘에서 진노를 내리십니다. 19) 인간은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20) 세상이 창조된 이래 인간들은 땅과 하늘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고 그분이 어떠한 분이며 또 얼마나 위대하고 능력이 영원한 분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심판날에 하나님 앞에 설 때 인간은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21)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는 커녕 날마다 하나님께서 돌보아주시는데도 감사조차 드리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또 인간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어리석은 생각마저 품고, 그 어리석은 생각에 아둔해져 분별력조차 잃어버렸습니다. 22) 하나님 없이도 현명하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와는 반대로 완전히 어리석은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23) 그들은 영원히 살아 계시는 영광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대신에 나무나 돌로 썩어 없어질 인간이나 새나 짐승이나 뱀 따위의 형상을 본뜬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18). 바울은 악인들을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라고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18-20)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하나님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셔서 영원히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라는 것이며, 불의는 그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오히려 그 분이 만드신 피조물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들의 이러한 불의한 행동에 대해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것입니다. 진리를 막는 악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거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오히려 그 영광을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짐승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만물에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신성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 만물을 통해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사실을 몰랐다고 변명할지 모르겠지만,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아는 지식을 사람들 마음속에 보여주셨기에 그것은 변명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21-23)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연 만물에 시선을 두고 사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햇빛과 비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해와 비만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해와 비 등의 모양을 만들고 하나님인양 섬깁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예술적으로 깎아 만들까, 어떻게 섬겨야 내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에 대한 연구에 온 집중과 목적을 둡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자신들의 지혜라고 자부하겠지만, 바울이 보기에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며, 미련한 마음의 결과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안에서 썩어질 피조물의 영광으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창조되어진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되 바르게 알아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 아닌 “진리로 불의를 막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적용: 당신은 하나님보다 관심을 갖고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도 섬기고 세상 것에도 마음을 두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많은 이들이 커다란 행복을 고대하면서 작은 기쁨을 잃어버린다.-펄 벅. 등산을 하는 사람은 보통 정상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때 등산가는 두 부류로 나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정상에 오르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그는 산 중턱의 나무, 샘터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등산하는 과정을 즐깁니다. 등산하는 내내 산의 이곳저곳을 살피며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 기 쓰며 오르기도 하지만, 때로는 주변의 아름다움에 만족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악에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기에 독생자를 희생시켜 우리를 구원하셨지만, 경건치 않으며 불의할 때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며 내 마음에 불의가 있다면 회개하는 하루되시기 바랍니다.
< 설 교 >
모든 사람에게 복음은 필요합니다!
만나교회 / 김병삼 목사
제가 지난 주간에 책을 한 권 읽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한동대에 예배를 인도하러 갔다가 지금 교목으로 계시는 분에게 건네받은 책인데, 제목이 [한동대에서 만나 하나님]입니다. 이 책은 이분의 아들이 한국에 방문해서 한 학기 동안 한동대를 다니게 되었는데 그 속에서 만났던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그 책에서 가장 멋있는 구절을 꼽으라면 바로 이런 구절입니다.
“변방에서 열방을 꿈꾸라!”
제가 처음 한동대에 설교를 하러 갔던 때가 10여 년 전입니다. 그때는 그곳이 진흙 펄이었고, 한동대라고 이름 붙여진 이유도 기숙사 한 동, 강의실 한 동뿐이어서 그렇다는 이야기도 생길 만큼 그럴 정도로 그 곳은 외진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변방에서 열방을 꿈꾸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가면 인상적인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Why not change the world!”
“세상을 바꾸자! 우리가 바꾸지 못할 세상이 어디 있는가!”
이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 2010년 한동대 총학생회장이 꿈을 이야기하는데, “포장마차, 떡볶이 장사”가 그 학생의 꿈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포장마차에 저녁을 먹으러 들어갔는데, 돈을 내려고 보니까 가격표에 액수가 정해져 있지 않고 거기에 성경 구절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먹은 만큼 양심껏 내고 가세요!” 그것을 보면서 이 학생에게 꿈이 생겼습니다. ‘하나님 제가 손해를 볼지 모르지만, 제 삶을 통해서, 직업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 책에 보면 한 카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그 카페에 가면 시계가 여러 개 있습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보통은 런던, 뉴욕, 파리 등과 같이 대도시의 시간을 보여주는 데 반해 이곳의 시계는 에티오피아, 케냐, 네팔, 쿠바와 같은 나라의 시계가 걸려 있었습니다. 돈을 벌려고 하는 아니 성공하려는 사람들이 관심 두지 않는 나라의 시간이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야기합니다. 그 카페는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시계를 바라보는 학생들을 통해 그 땅을 바꾸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하는 꿈이 있다고 말입니다.
불편한 진실
우리가 꿈꾸는, 아니 바라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우리는 잘못했을 때, 용서받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하나님의 사랑이 굉장히 일방적이고, 우리식대로 해석한 사랑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양면성 즉, 용서와 공의가 있다고 하는 것을 알면서도, 나에게는 한쪽 사랑만 적용되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식을 키우며 경험하는 것처럼, 한쪽의 사랑, 일방적인 사랑, 즉 인격적이지 않은 사랑이 관계를 엉망으로 만드는 것을 압니다.
오늘 우리는 불편하지만, 사랑에 대한 진실에 직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진노해야 하는 이유와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안부하고, 자신이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인 것을 알렸습니다. 어쩌면 그가 두렵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받은 사랑과 더불어, 그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진노 때문에 말입니다.
본문 18절 말씀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나요?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이유는 악한 것들이 당신의 피조물들을 집어삼키는 것을 방관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대상은 “진리를 막는 자들”에 대해서입니다.
그러면 진리를 막는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경건하지 못함’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불의’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godlessness’와 ‘wickedness’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경건하지 못함이란, 하나님을 무시하고 존경하지 않는 것, 그래서 마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언제 가장 기분이 나쁘신가요? 누군가에 의해 무시당했을 때가 아닌가요? 요즘 하는 말로 ‘투명인간’처럼 인식되는 것이 우리를 얼마나 분노하게 하나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장 진노하시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경건하지 못한 우리의 행위라는 것이죠. 즉,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 게다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명백하게 주셨는데도 말입니다.
지난 주간에 어떤 신학대학교의 학생과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영성 집회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밑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찬양을 하는데 신학생들이 600명 정도 모인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맨 앞에 있는 아이 하나가 거만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서 다른 학생들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다른 학생들은 찬양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기도하는데. 어느 순간 이 아이의 자세가 바뀌더니 손을 들고 찬양하며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그 눈빛이 다른 학생들을 조롱하는 그리고 경멸하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을 보았습니다.
그때 떠오른 말씀이 “원수가 네 안에 있느니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저 눈빛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제가 3시간 동안 두 번의 설교를 하면서 그 학생을 바라보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 아이가 오늘 말씀 가운데 저 태도와 조롱의 눈빛을 바뀌게 해 주세요.’
제가 이 글을 페이스북에 올려놓았는데 어떤 분이 저에게 이런 댓글을 남겼습니다.
“목사님도 올챙이였을 적을 생각해 보세요.”
저는 하나님께서 그 아이도 바꿔주시리라 생각합니다.
본문 19절을 보세요.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불의입니다.
‘불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하는 규율을 지키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의가 ‘경건하지 못함’과 연관되는 것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자들에게서 나오는 행동이 불의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람들의 삶은 경건하며, 의로움이 묻어납니다.
우리가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의”라는 것이, 우리 자신의 의로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의’를 말한다는 것이지요. 똑 같은 이야기 같지만,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셀코치들과 소그룹 성경공부를 하는 시간에 한 주간 동안 말씀을 묵상하며 있었던 일들을 나누는 시간이 있는데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를 당혹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신앙인들의 무례함이라는 것입니다. 오래 믿으면 믿을수록 우리에게 찾아오는 유혹이 있습니다. “나의 의를 드러내고 싶은 것”입니다. 문제는 나의 옳음을 드러내기 위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것이지요.
제가 미국에서 부목사로 사역하던 때, 참 열심이었습니다. 어려움을 겪는 교인들을 보며 아파하는 마음으로 성경공부도 하고, 찬양예배를 만들기도 하고.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 저에게 만족을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저 때문에 담임목사님이 참 힘드셨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를 가장 당혹케하는 것이 있다면, 신앙인들의 무례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래 믿으면 믿을수록 우리들에게 찾아오는 유혹이 있죠. "나의 의를 드러내고 싶은 것" 문제는 나의 옳음을 드러내기 위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부목사로 사역하던 때, 참 열심이었습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교인들을 보며 아파하는 마음으로 성경공부도 하고, 찬양예배도 만들기도 하고. . .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 저에게 만족을 가져다주기도 했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저 때문에 담임목사님이 참 힘드셨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 부목사로 그 목사님을 섬긴다면 조금은 더 신중하고, 더 잘할 수 있을텐데. . . 라는 생각도 들구요.우리를 가장 당혹케하는 것이 있다면, 신앙인들의 무례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래 믿으면 믿을수록 우리들에게 찾아오는 유혹이 있죠. "나의 의를 드러내고 싶은 것" 문제는 나의 옳음을 드러내기 위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부목사로 사역하던 때, 참 열심이었습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교인들을 보며 아파하는 마음으로 성경공부도 하고, 찬양예배도 만들기도 하고. . .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 저에게 만족을 가져다주기도 했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저 때문에 담임목사님이 참 힘드셨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 부목사로 그 목사님을 섬긴다면 조금은 더 신중하고, 더 잘할 수 있을텐데. . . 라는 생각도 들구요. 터키와 그리스를 도는 동안 가장 친절했던 사람들이 베뢰아사람들이었노라고. . .
모든 도시가 화장실에서 돈을 받을 때, 그곳사람들은 돈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친절하게 안내도 하는 사람들. . .
아마도 급할 때 받은 친절이기에 더욱 인상에 남았을지도 모르죠.
우리를 가장 당혹케하는 것이 있다면, 신앙인들의 무례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래 믿으면 믿을수록 우리들에게 찾아오는 유혹이 있죠. "나의 의를 드러내고 싶은 것" 문제는 나의 옳음을 드러내기 위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부목사로 사역하던 때, 참 열심이었습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교인들을 보며 아파하는 마음으로 성경공부도 하고, 찬양예배도 만들기도 하고. . .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 저에게 만족을 가져다주기도 했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저 때문에 담임목사님이 참 힘드셨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 부목사로 그 목사님을 섬긴다면 조금은 더 신중하고, 더 잘할 수 있을텐데. . . 라는 생각도 들구요.
사도바울이 베뢰아에서 만난 그리스도인들 참 신사적이어서 기분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열심이 좀 신사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조금은 매력적인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의로움으로 인해 누군가 힘들어 하거나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도 옳은 것인가요? 반대로, 내가 인정하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도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요?
이렇게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야 하는데, 철저하게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흔히 “몰랐다!” 즉 무지함으로 핑계를 삼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모르지 않았다! 너희 속에 이미 하나님께서 알만할 것을 보이셨다!”라고 말입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가 몰랐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외면했다고 표현해야 옳을 것입니다. 애써 무시하며 정당화하려고 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핑계치 못할지니. . .
본문 20절입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우리는 이 땅 위에 살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것들도 참 많이 있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원하든 원하지 않던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일들을 자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만나 교회 초창기에 귀신들린 사람들이 교회로 찾아와 기도하고, 대화하고 축사사역을 했던 적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한 가정이 아이를 데리고 와서 기도를 해 달라고 하는데, 딱 봐도 신체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악한 영이 하나님의 영을 알아본다는 것이죠. 이러한 영적인 일들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동일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도 바울이 말씀을 전하면서 있었던 사건인데요. 사도행전 19:12-17입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그것을 이용하고 희롱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는 믿을 때에 나타나는 것이지, 이용하려고 할 때 얼마나 수치를 당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지요.
악한 영이 더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이미 알 만한 것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용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던 당시도 마찬가지죠.
많은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그 귀신들이 무서워 도망하며 예수님의 권세를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1장 14절 이하의 말씀을 보세요.
“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
착각하는 인생
본문 22절입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큰 지혜를 가진 사람, 아니 인생을 조금만 더 산 사람이 봐도 지혜로운 척하는 사람들이 우습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지난가을에 제 사무실에서 청소년부 교사 몇 사람과 식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중 3학생하고 상담 아닌 상담, 아니 고민을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런 시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중 3학생 왈: 선생님 저 이제 공부 접을 겁니다. 제가 공부에는 취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 야! 네가 공부를 접기에는 너무 이른 거 아니니?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 그러나 학생의 전부는 공부고, 너는 학생이잖아!
선생님 부인이 옆에서 보다가: 야! 공부가 뭐 종이접기니? ‘접게’
중 3학생: 선생님, 저는 꿈이 주부 되는 거예요. 공부 안 하고 주부 될 거예요.
선생님 부인: 야! 주부는 아무나 되는 줄 알아! 주부 되려면 언, 외, 수 과탐 사탐 다하고 예체능까지 해야 돼, 그래야 애 낳아서 가르치고 숙제해주지. 얘가 주부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나 해.
인생을 살아보지 않은 그 아이의 이야기가 선생님에게 얼마나 무지하게 들렸겠습니까?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얼마나 어리석은 아이입니까?
그런데 우리의 삶이 바로 그런 아이처럼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나 어리석은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이죠.
특히 사도 바울은 본문 23절에서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인간의 가장 우둔함이 우상숭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 vs. 썩어질 우상”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의 가치를 세상에 둘 때, 썩어질 것에 가치를 두고, 아니 그것을 넘어서 숭배하고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 없어질 것들에게 우리의 인생이 지배를 받을 때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하지만 썩어지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때, 우리의 신앙에서 아주 본질적인, 그래서 아주 급진적인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을 보면,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성경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목숨을 던진 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 데이비드 플렛이 쓴 [래디컬]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존 패튼 (John Paton, 1824-1907)은 요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한창 성장하던 교회를 10년 넘게 섬기던 목회자였다. 하나님은 그에게 복음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식인종들이 우글거리는 뉴헤브리디스 군도 (New Hebrides)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부담을 주셨다.
패튼은 특별한 한 섬으로 들어가고 싶어 했다. 20년 전에 두 선교사가 상륙했다가 잡아먹힌 곳이었다. 당연히 선배 선교사들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만류가 빗발쳤다. 패튼은 이렇게 적었다. “마음씨 좋은 한 노신사는 나를 붙들고는 소리 내어 우셨다. 식인종이 살고 있다니까요! 목사님도 잡아먹을 거라고요!”
존 패튼은 노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딕슨 씨. 머잖아 선생님도 가진 것을 모두 남겨 둔 채 무덤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거기서는 벌레들이 주검을 뜯어먹겠지요. 주님만을 섬기다 죽는다면 벌레가 먹든 식인종이 먹든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마지막 때가 되면 선생님처럼 저도, 그리스도처럼 깨끗한 몸으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노인은 눈물을 닦고 방을 나가면서 이렇게 외쳤다.
“그렇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서른세 살 때, 존 패튼은 아내와 함께 뉴헤브리디스 군도로 들어갔다. 도착한 지 얼마 뒤에 아내와 갓난아이는 세상을 떠났다. 패튼은 맨손으로 땅을 파헤쳐서 그들의 시신을 묻었다. 그 뒤로도 생명을 위협하는 일들이 끝없이 벌어졌다. 하지만 몇 년의 시간이 지나자, 뉴헤브리디스에 사는 수많은 식인종이 그리스도가 주시는 평안을 알게 되었고 오스트레일리아와 스코틀랜드를 비롯한 많은 서방세계가 복음 전도에 대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렇죠?
세상의 가치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고, 세상 가치를 가지고 인생의 목표와 영광을 보기를 원한다면 결코 내릴 수 없는 결단을 내린 것이죠.
제가 지난해 9월 아침 묵상하며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의 삶은 급진적이 된다!"
며칠 동안 만나 교회 사역자들이 함께 새로운 비전을 세워가는 세미나를 진행 중입니다. 목회자들에게 목숨을 걸만한, 아니 한 번쯤은 미쳐 볼 만한 사역이 무엇인지를 찾아보는 것이죠.
한 목사님이 이런 질문을 하네요. "목사님! 우리 부목사들이 오래 살기를 원하시나요? 빨리 죽기를 원하시나요?"
직접적인 답을 하지 않았지만, "세상을 바꿔 놓은 사람들이 그렇게 오래 산 것 같지는 않은데."라고 말했죠.
죽음을 실패로 보는 사람들에게 늘 죽음은 두려움이죠. 그래서 급진적인 삶을 살기가 어렵습니다. 이 땅의 역사는 누군가 생명을 던졌던 희생 위에서 열매를 맺었습니다. 단지 우리에게 주는 선택은 '죽음 앞에서 씨를 뿌리는 인생’이 될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급진적 희생을 밟으며 '열매를 거두는 인생'이 될 것이냐를 선택하는 것이죠. 죽음을 상급으로 여기면 뭔가 급진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네요.
누군가 이런 댓글을 남겼습니다. “데이비드 보더니스는 그의 책에서 아인슈타인의 말을 인용합니다. "하나의 목적에 자신의 온 힘과 정신을 다해 몰두하는 사람만이 진정 탁월한 사람이다." 이번 세미나를 통해 저의 전 존재를 걸 수 있는 분명한 목적을 깨닫고 싶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늘 염두에 두고 제게 주신 소명에 온전히 미칠 때 기능적으로 탁월한 사람이 아닌, 존재적으로 탁월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다시 한 번 이 말씀을 묵상합니다.
본문 23절입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결국, 우리의 인생은 여기에서 갈라지는 것 같습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가? 아니면 우상을 숭배하며 사는가?
[래디컬]이라는 책에서 가장 멋있는 말이 이 문장입니다.
“죽음이 상급이 되는 순간, 삶은 급진적이 된다.”
죽음을 상급으로 보기 시작할 때 우리 신앙이 급진적이 된다는 점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영원한 집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믿는 것이 열쇠입니다. 세상의 욕망과 세상의 사고, 세상이 주는 쾌락, 세상의 꿈, 세상의 이상, 세상의 가치, 세상의 야심, 세상의 찬사에서 자유로운 인생을 소망한다면 이 땅이 아닌 다른 세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지금 어디서 살든지 우리의 시선은 더 멋진 나라, 곧 하늘나라에 고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믿으며 허무하게 사는 것 같지만, 결코 허무하지 않은 인생을 살 수 있으며 부귀와 영화를 누린 것 같지만, 가치 없는 인생을 살다간 사람들이 있는 것이죠.
결국, 신앙의 본질을 묻습니다.
“당신은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를 믿는가? 아니면 썩어질 우상을 숭배하며 살아가는가?”
어리석은 자
우리가 본문을 통해 조금 더 다루어 보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어리석은 자”란 어떤 의미인가 하는 것이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어리석은 바보란, 말썽을 일으키거나 어리석은 결정을 하는 사람, 사리분별을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기록된 헬라와 히브리 문화권에서 어리석은 자는 훨씬 심각한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히브리적 사고에서 어리석은 자란, 최고의 지성을 소유했으면서 불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헬라적 사고에서 사도 바울이 사용하는 단어는 ‘moros’라는 말인데, 이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창조자를 찾지 못하게 왜곡하는 것입니다. 즉 피조물이 창조주 대신 숭배를 받는 것입니다.
찰스 스윈돌은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이 부분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인간은 선물을 통해 충족감을 얻기 위해 선물을 주는 사람보다는 선물 자체를 추구하는 고지적인 습관이 있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인들은 매년 나일 강이 범람해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어준 덕택에 비옥한 나일 삼각주 지역에서 번영을 구가했다. 그들은 곡식이 성장하는 데 태양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흙, 강, 해를 만드신 이에게 감사하지 않고 해와 강 자체를 숭배했다. 그들은 해와 강의 기원을 설명하는 잘 꾸며진 신화를 만들어 냈고, 그것들을 의인화시켜서 그 순환의 이유를 설명했다. 그리고 그들은 해와 강이 생사를 주관하는 힘을 가졌다고 상상했기 때문에 제물로 이 피조물을 매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대인들인 이와 같은 미신을 재미있어하면서 멸시하지만, 그들 역시 선물을 주는 자와 선물을 혼동하기 일쑤이다. 그들은 월급이 그들의 필요를 공급해 줄 것이라 기대하면서 성실하게 생업에 종사하고, 직업의 제단에 결혼과 자녀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기도 한다. 그들 또한 빵이 아니라 그것을 제공하시는 하나님이 그들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신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다.”
앞에서 소개했던 [한동대에서 만난 하나님]에 나오는 이야기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이 학생이 채플시간에 정말 뜨겁게 찬양하는 한 형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저 형은 저렇게 열정적으로 찬양하고, 열정적으로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수 있을까?’ 어느 날 그 형의 간증을 듣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 호주에서 영어를 익히고 공부를 할 때, 학비를 대기가 쉽지 않아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시드니에서 신혼부부들이 오면 자전거로 길 안내를 해 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와서 자전거를 태워 달라고 하더랍니다. 가자는 대로 다 태워줬는데 그 젊은이가 내리자마자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이 형이 화가 났습니다. 자신이 한국인이어서 무시당하는 것은 아닌지, 막 쫓아가면서 경찰을 불러달라고 외치면서 뛰어가는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그런 생각을 주셨다고 합니다.
“네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열심히 소리 지른 적이 언제였느냐? 네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열정적으로 뛰었던 적이 언제였느냐?”
그 사건이 그 형의 인생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는 한 번도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열정적으로 기도해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이렇게 열정적으로 살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때부터 이 형은 찬양하고 기도할 때 열정적으로 찬양하기 시작했고 부르짖어 기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에 가장 진지하게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본질적으로 숭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구하는 가장 시급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이 우선순위가 올바로 될 때, 우리의 삶이 복음적이 됩니다.
복음적 삶은 여러분을 무척 급진적으로 만들어줄 것이며, 여러분의 삶을 무척 겸손하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주어진 축복이 어느 날 숭배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고 나간다면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인생이 될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
로마서 1:18-32 / 피영민 목사
서 론
로마서의 전체적인 주제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입니다.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대 주제를 자세히 다루기 위해 여러 가지 소 주제를 가지고 내용을 전개해 나가고 있습니다.
로마서의 내용상 구분되는 첫 번째 부분이 1~3장까지인데, 그 요지는 “왜 인간은 하나님의 의가 꼭 필요한 존재인가?”입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의가 왜 필요한지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왜 필요한가하면 인간에게는 천국에 들어갈 만한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의가 없는 대신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인간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온 의가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설교자가 사람의 죄 문제와 죄에 대한 책임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그렇게 즐겁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고,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기 때문에 기분 좋고 나쁨의 상관없이 증거해야 하고, 성도는 영적인 편식을 하지 말고 성경의 모든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로마서 1장 18절로부터 3장 20절까지는 한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죄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죄와 죄책에 관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앞서 인간에게 왜 복음이 필요한지를 사실적인 언어로 논증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전도자와 설교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데 너무 마음이 급한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가 왜 필요한지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전도법 ‘4영리’만 봐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와 같이 성급하게 복음을 증거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왜 내게 필요한지 알지 못한 채, 의사의 진단 없는 처방처럼 뜬 구름 잡는 식으로 복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질병으로 죽게 된 사람에게 좋은 약이 있으니 먹으라고 한다면 먹지 않을 환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왜 이 약을 먹지 않으면 안 되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줘야 하는 것이 의사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앞서 모든 인간이 처한 죄의 심각성을 적나라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장의 내용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구절은 1장 18절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 2, 3장의 내용은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왜 나타날까요?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 때문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진노는 누구를 향한 것일까요? 1장 19절 이하에 보면 이방인들 중 부도덕한 자들에게 나타나고, 2장 전반부는 도덕적인 사람들에게도 나타나고, 후반부에는 종교적인 사람 유대인들에게도 나타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고 모두 불의하고 부도덕하고 종교에 관심이 있든 없든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의가 없는 존재들이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로마서 1장 18~32절의 본문을 중심으로 네 가지 주제로 나누어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Ⅰ. 자연 상태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
구원받지 못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으며,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사라집니다. 18절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죄에 대하여 철저히 반대편에 계신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죄와 어울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죄와 죄인에 대해서 거룩한 분노, 맹렬한 분노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왜 죄인들에 대해서 분노하시느냐며 인간들을 향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조롱합니다. 도덕적으로 철저하게 중립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는 타인이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칭찬하지 않을 것이고 감동도 받지 않을 것입니다. 또 길거리에서 이웃이 강도에게 매를 맞고 피를 흘리며 돈을 빼앗기고 더 나아가 살해를 당한다 할지라도 개입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을뿐더러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죄에 대해 분노하지 않고 악을 보고도 바라만 보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죄를 보고도 분노하지 않으시는 분이 되셔야 합니까? 앞뒤가 맞지 않는 말입니다. 하물며 사람도 죄를 보고 분노하지 않으면 그를 불의한 자요 겁쟁이라고 손가락질하면서, 하나님이 죄를 보고 분노하시는 것을 왜 잘못된 일이라고 말합니까? 죄와 죄인을 보고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불신자들에게 맹렬한 분노를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이 인간이 처한 가장 심각한 현실입니다. 궁수가 활시위를 당기고 있듯이 분노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침례 요한은 목수가 도끼날을 잘 갈아서 나무뿌리를 찍으려고 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이렇게 맹렬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꼭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로부터 죄인들을 구원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고 돕고 복지 사업도 많이 해야 하지만, 이런 것들은 교회의 가장 본질적인 사명이 아닙니다.
교회의 주된 사역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하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영원한 형벌을 받을 자들에게 구세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줘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책임입니다.
Ⅱ.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을 향해 진노하시는 이유
하나님이 죄인에 대해 진노하시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18절).
첫 번째, ‘경건치 않음’(Ungodliness)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내 인생을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건방지고 교만한 생각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내 인생에 간섭하지 마세요.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믿으려면 차라리 내 주먹, 내 지갑을 믿겠습니다!”와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경건치 않은 사람입니다.
경건치 않은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21~2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Do not honor God). 하나님을 명예롭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Do not thank God). 하나님이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셨는데, 단 한 마디 감사치 않고, 천 원짜리 한 장 감사헌금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것입니다(Do not worship God). 사람 동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경배하고 예배합니다. 아주 불경건한 짓입니다.
아무리 건전한 시민이고, 능력 있는 직장인이고, 자비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예배하지 않는 사람은 경건치 않은 사람입니다. 불경건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언제 화살이 날아올지, 언제 도끼에 찍히게 될지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불의’(Wickedness)입니다. 불의에 대해서는 24~32절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불의에 관해 두 가지로 강조하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성적인 삶의 왜곡현상입니다. 성적인 관계라 하면 인간으로서 가장 가깝고 친밀한 사이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를 왜곡하여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남자와 여자가 순리대로 살지 않고 남자가 남자와, 여자는 여자와 더불어 동성애를 추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오늘날 서울에도 동성애에 관한 홍보가 홍수처럼 밀려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너무 많이 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갈수록 반감이 무뎌집니다. 동성애가 만연해져 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찜질방에서 남자는 남자들끼리, 여자는 여자들끼리 동성애를 한다고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비슷하게 변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동성애자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은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연애를 많이 한다고 합니다. 며칠 전 신문 기사를 보니,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콜라텍이라는 곳에서 춤을 추고, 어두운 곳을 찾아다니며 별짓을 다한다고 합니다.
동성애나 성적인 왜곡 현상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은 단순한 연약함이나 질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명명백백합니다. 서로 몸을 욕되게 하는 더러움이고, 부끄러운 욕심이고, 순리가 아니라 역리(易理)이며, 상당한 보응을 받을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에 해당하는 형벌을 받을 일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인터넷에서 일평생 동성애자로 살다가 잘못된 인생을 살았노라며 후회한다는 사람의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 인생에 상당한 보응을 받게 된 것입니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사랑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동성애자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 중에는 동성애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11절에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록 동성애자가 있었지만, 그들도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동성애는 죄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피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모두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함을 받아 의인이 되었습니다. 죄인이 죄 짓는 것을 권리라고 주장할 수 없듯이, 동성애자도 역시 동성애를 권리라고 주장하고 옹호하는 것은 상당한 보응을 받을 일이고, 하나님의 진노를 당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인간 공동체를 파괴하는 죄악들입니다. 28~32절에는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파괴함으로써 인간사회를 더럽고 불행한 사회로 만드는 죄악들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 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인간 사이에 지켜야 할 예절이라는 것이 있고 존중해야 할 것도 있는데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사기, 살인, 언쟁, 시기, 악독, 수군수군하고 비방하는 것과 같은 것들은 전부 인간 사이의 정상적인 관계를 파괴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를 어둡고 지저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매, 무정, 무자비, 부모를 거역하고 돌보지 않고 내팽개쳐 두는 것은 가정과 이웃을 파괴하는 죄악들입니다. 이로 인해 인간관계가 파괴됩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 가정, 교회, 사회 등 모든 것을 파괴하는 불의한 것들입니다. 얼마 전 신문에 보니, 아이를 학교에 입학시킬 나이가 되었는데, 19명의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행방을 알지 못한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주기마다 예방주사를 맞고, 먹어야 할 것을 먹고, 때가 되면 학교도 다녀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불의입니다. 이런 일들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없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불의는 ‘성적 범죄’와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경건치 않은 삶은 하나님 없이 살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불의한 삶이 되고, 불의는 인간 사회를 더럽히기 때문에 공동체를 파괴하고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Ⅲ. 하나님의 진노는 정당하다.
하나님은 당신이 만든 피조물에게 왜 진노하실까요? 피조물의 불경건과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정당하다고 볼 수 있을까요? 대답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셔도 그 진노는 정당한 진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갖지 못했고, 읽어본 적도 없을 뿐더러, 설교를 듣지도 못했고, 목사도 없고, 교회도 없는 사회 속에 살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이 맹렬한 진노를 갖는 것이 정당한 것이냐?”고 많은 사람들이 물어봅니다. 그러면서 꼭 물어보는 것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되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바울은 19~20절에 이렇게 답변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피조세계를 보면 누구라도 이 세상은 고도의 지성을 가진 설계자가 만든 것임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별들이 부딪혀서 지구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증거도 없고, 실험도 안 되는 것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왜 과학이라고 합니까? 그것은 과학이 아닙니다. 별들이 부딪혀서 우연히 태양이 그 자리에 있게 되었고, 달도 그렇게 되어 이 지구가 사람이 살기에 적당한 온도가 되어 사람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주장을 믿을 수 있습니까?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구든 피조세계를 보면 이 세상을 만든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주가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계시를 ‘일반계시’(General Revelation)라고 합니다. 그러나 일반 계시는 구원의 진리를 깨닫기에 부족합니다. 그래서 성경이라는 ‘특별계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계시만으로도 하나님의 존재를 알기에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이 그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진리를 싫어하고, 불의로 진리를 누르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면 입을 다물라 하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면 듣기 싫다고 하면서 귀를 닫고 진리를 싫어하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최후 심판의 날에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이 없었고, 복음을 듣지 못했고, 교회도 없었다고 할지라도 핑계 댈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누가 지었느냐?”라고만 물으셔도 유구무언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이 “너는 죄를 행치 않았느냐? 네가 행한 것이 죄인 줄 알지 못했느냐?”고 물으셔도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핑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일반계시의 기능은 사람으로 하여금 핑계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몰랐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의 죄와 악에 대해 진노하시는 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악에 대해 진노하지 않으시는 것이 불공정한 것입니다. 진노는 정당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영혼 속에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스스로 죄를 지었다고 하는 사실들이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Ⅳ. 하나님의 진노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나님의 진노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18절에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질병이나 사망과 같은 방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병들어 가고 죽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참으로 비참한 일입니다. 부모님들이 병상에 누워계시고, 돌아가시고 하면 마음이 찢어집니다. 밥맛이 없어지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길은 모든 인간이 가야 하는 길입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르는 일들은 피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짐승과 다릅니다. 짐승은 죽음과 동시에 끝이지만, 인간은 원래 영생하는 존재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서 그 죗값으로 인간에게 사망이라는 것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사망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우리는 그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생명의 부활로 나아가 사망을 이기게 될 줄 믿습니다. 인간의 사망은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임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수난을 당하신 것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면 당신의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그 진노를 다 쏟으셨겠습니까? 죄를 사랑하시면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수난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냅니다.
장래에 다가올 최후 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날을 정해 놓으시고 그 때에 심판할 권세를 자기에게 맡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마음대로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최후 심판의 날에는 그 죄에 대해서 하나도 남김없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바울이 지금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진노는 이런 방식의 진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세상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진노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24절에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고, 26절에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28절에도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어 버려두셨다”는 표현이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진노는 ‘방치’ 또는 ‘방임’과 같은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제가 공군장교로 복무할 때, 사병 중에 군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말썽을 부리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는데, 그들의 부모에게 전화를 해서 상담을 해 보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이고, 그 자식은 우리가 버린 자식입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군대에서 사고를 치든지 말든지 우리 집에는 전화 하지 말라고 말을 하곤 했습니다.
부모에게 버림을 받으니까 군대 와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주변 병사들을 괴롭히고, 사고를 일으키는 주범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들의 삶 속에 이미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제멋대로 살겠다고 하니까 “네 멋대로 살겠느냐? 살아봐라. 네 욕심대로 살겠느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어 버려두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버려두시는 삶은 어떻게 될까요? 결국 지옥과 같은 삶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버려두실 궁극적인 장소가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살면서 갖가지 범죄를 저지르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지만 다 지옥이라는 곳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방탕한 삶의 끝은 지옥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은 곧 지옥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지옥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노는 지금도 하늘로 좇아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결 론
물론 죄인들은 현세에서도 죄에 대한 형벌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의 말씀을 읽고 듣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심각하게 숙고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삶은 불경건과 불의로 점철되어 있지는 않은가? 내 인생은 하나님이 버려두신 인생인가?”라고 질문해 봐야 합니다. 이 문제가 제일 중요한 문제입니다.
돈의 많고 적음과 권력의 유무는 두 번째 문제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인가 아닌가? 나는 과연 하나님의 의를 입어 천국에 들어갈 존재인가?”라고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직까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감사치도 않고 예배하지도 않는 존재라 한다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받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믿음 이외에 다른 것은 필요치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진노가 제거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진노를 거두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죄인을 향한 진노를 모두 쏟으셨기 때문에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노를 거두시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옷처럼 입혀 주십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가장 시급히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것은 노력하고 공부하고 고생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의를 받은 사람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현세에서도 사랑받고 내세에서도 사랑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의 사랑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받고 천국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알면서
문기태 목사
여러분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하겠습니다. 칼 바르트와 부르너가 불꽃튀는 논쟁을 벌였던 그 문제인데
'과연 인간이 계시의 말씀 없이도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성경은 뭐라고 답변합니까? 두 가지 사실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못을 박습니다. 먼저 19절을 보면 사람은 마음속에 타고난 본능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미개한 종족이라 할지라도 신을 찾는 종교의 씨앗은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 2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창조물 위에 자기의 영광을 보여줄 만한 명백한 표적을 새겨 놓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찬송에도 있지 않습니까? 하늘에 가득찬 영광의 하나님 온 땅에 충만한 존귀하신 하나님...
한마디로 우주 만물속에 들어와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찬 그의 궁정에 들어와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몰라서 못 믿었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20절) 말해 주는 이가 없어서 하나님을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에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못하고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경건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의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윌버 채프만이라는 우명한 전도자이자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 교회에 어떤 교인이 13세때 가출한 아들을 찾으러 매일 돌아 다녔습니다. 이곳 저곳을 찾아 헤메던 중 드디어 18년만에 우연히 필라델피아 역전에서 그 아들을 발견했습니다. 그 역전에서 막 나오려는 데 어떤 남루한 옷차림의 청년이 초점 없는 눈으로 구걸을 하였습니다. "25센트만 주세요." 하는데 보니까 단번에 자기 아들인 것을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야 너 톰이지, 나는 네 애비다." 그러나 이 청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초점없는 눈동자도 "아저씨, 25센트만 주세요."하며 계속 구걸을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덥석 끌어 안으며 소리쳤습니다. "야 이놈아 25센트가 문제냐, 내가 네 아버지야, 너는 나의 아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내 집과 내 돈 그리고 나의 농장이 다 네 것이야. 내 생명조차도 네 것이란다. 나의 모든 것이 다 네 것이야. 가자 집으로 그리고 나와 함께 살자."
오늘도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 방황하고 있습니다. 마약중독자처럼 세상의 쾌락에 취해 진정한 아름다운 것은 보지 못한채 그리고 아버지를 잊은채 25센트 동전을 구걸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 돌아가면 모든 좋은 것을 값없이 은혜로 받아 누릴 수 있는데 아버지의 초청에 응답을 주저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러분 아직도 방황하는이가 있다면 즉시 아버지의 품으로 우리 영혼의 가정으로 돌아갑시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까?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참으로 다행입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불신하며 방자하게 행동하며 불경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확신하며 하나님을 인정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러나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합당한 대접을 해 드리고 있는 것일까요? 성경은 계속 지적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드리기는 커녕 감사를 드리지 않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않는건 왜 일까요?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부패한 마음속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뿌리가 올바르게 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착각하지만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떠나서 자유롭게 살까를 궁리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상관없이 내 욕심을 만족시키며 살까를 궁리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허망한 생각과 미련한 마음에 끌려서 살아가기 때문인데 그 배후에는 어둠의 세력의 영향이 큽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라는 우상을 숭배하고 있습니다(23-26).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고 창조주 하나님 대신에 피조물을 숭배하고 섬기며 살아갑니다.
우상숭배에는 몇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섬기기에 편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예배와 선한 생활, 윤리적인 책임을 강조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철저한 경배와 순종을 요구하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것입니다(28절).
둘째, 마음의 정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입니다. 정욕이라함은 `쾌락을 추구하는 노력, 특히 금지된 쾌락에 대한 격렬한 욕망'을 뜻합니다. 23절과 25절에서는 우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정욕에 대한 언급이 그 사이에 들어가 잇는 것도 정욕이 우상의 밑바탕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상이란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자신을 올려 놓는 행위인 것입니다. 미국에서 급속도로 번지고 있는 뉴에이지 운동도 그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상숭배가 하나님을 가장 진노케 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23절). 즉 하나님의 영광을 나의 영광으로 바꿔치기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치 않는 마음이며 심지어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사드락과 메삭, 아벳느고는 생명을 걸고 우상숭배를 거부했고 우리 한국교회의 믿음의 선배들도 생명바쳐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우리도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추겨 세우는 똑같은 우상숭배의 죄를 범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삶이 얼마나 허망하며 비참한 것인가를 생각하면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자신을 엄밀하고 돌아보고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안다고 하는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를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잊지 않고 마음을 다하여 감사를 드리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혹 여러분은 머리로 하나님을 아는 것에만 그칠 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도 별 관심이 없고,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일에도 소극적이며 무감각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을 인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감사하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부러워할 때가 있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힘껏 자신을 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될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대접해 드리면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방법으로 은혜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하고 최선의 찬양을 드릴 때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예배를 통하여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진실한 사랑을 표현하고 우리의 영이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감사한 마음을 열납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기쁘시게 하는 것인데 어떤 이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예배를 드리기 보다는 빨리 끝내기 위해 예배를 드리는 것 같습니다. 교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예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짧은 예배입니다. 정말 예배다운 예배는 예배시간의 길이가 문제되지 않고 '오늘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이 열납하신 예배가 되었느냐? 그렇지 못하냐?'에 촛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충분히 사랑을 고백하고 마음이 하나님께로 집중되는 예배를 드리십니까?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느껴지며 하나님이 다가오셔서 지치고 상처받고 무거운 마음을 어루만지심을 경험하십니까? 우리의 영을 향해 친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며 예배를 통하여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고 있습니까? 우리 앞에 하늘문이 활짝 열려지고 위로부터 부어지는 놀라운 선물이 우리의 심령을 만족케하며 정말 '여기가 좋사오니'라는 고백과 함께 예배가 끝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여러분을 사로잡습니까? 예배를 드리고 나면 감동과 감격에 젖어 행복해지고 다음 예배 시간이 기다려지며 그 기다림의 시간이 지루하여 견딜 수 없어 하십니까?
저는 우리 교회의 예배가 형식이나 의무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으로 발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예배시간마다 눈물이 흐르고, 회개의 고백과 사랑의 고백이 이어지고, 마음이 마구 뜨거워져서 새로운 삶을 결단하고, 사람마다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역사가 넘쳐나는 것을 보기를 원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소원하십니까? 그러려면 다른 것 없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 하나님께서 부어 주십니다. 여러분이 창조주 하나님 그리고 구원의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준비하여 드리시면 됩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하고 고백하며 표현하는데 하나님께 우리의 예배를 외면하실 것 같습니까?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여러분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신 것이 언제입니까? 정말 하나님을 안다면 감사하지 않고는 못 견딥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며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감사가 넘칠 수 밖에 없습니다. 입만 열면 '주님 감사합니다'의 연발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넘쳐도 늘 부족하게 느껴지고 아무리 많은 은혜를 받아도 불평과 원망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래전 한 집에 욕심많은 노인과 마음씨 착한 머슴이 살고 있었다 동이트자 땔감을 구하기 위해 산으로 향하는 머슴의 모습을 지켜보던 주인이 "저녀석이 산에가서 빈둥거리며 놀기만할지도 모르니 오늘은 뒤를 한번 밟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산중턱쯤 머슴을 좇던 주인이 숨이차고 다리가 아파 걸을수가 없었습니다.도저히 더 이상은 않되겠다고 생각하고 발길을 뒤로 돌리려는데 갑자기 곰한마리가 나타나 기겁을 하고 달아나려했지만 몇발자국 가지못해 넘어지고 말았습니다.눈앞에서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바라보는 곰을 보는 순간 빌고 또 빌었습니다.
"목숨만 건질 수 있게해 주신다면 어떤 욕심도 부리지 않겠다고---"이게 웬일인가? "퍽"하는 소리와 함께 곰이 기우뚱하며 쓰러졌습니다.정신을 차리고보니 언제 달려왔는지 하인이 곰의 등을 도끼로 후려치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에 곰은 죽었고 머슴과 주인은 다리를 절며 마을로 내러왔습니다. 얼마 지나지않아 몸이 회복된 주인은 환한 얼굴로 그 곰의 가죽을 벗기고 그 가죽을 갖고 장으로 나갔습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그의 얼굴은 빛이 그리 밝지 못했습니다. 주인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머슴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이놈아 도끼자국때문에 채 반값도 못받지 않았느냐?"
이것이 바로 오늘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고도 감사치않고 사는 우리 인생들의 배은망덕한 모습이 아닐까요?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감사치도 아니하고...' 하나님이 이상하게 여기십니다. 분명 은혜를 많이 베풀어주었는데 감사의 인사가 없으니 당연히 섭섭해 하십니다. 특히 예배를 드리겠다고 나아왔는데 감사한 마음은 표현되지 않고 있습니다. 받은 은혜를 잊고 불평과 원망이 가득한 마음을 가지고 찬양을 하고 있으니 받으실리가 없습니다. 기도에도 찬양에도 봉사에도 헌금에도 감사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형식적으로 흐르고 약화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서운해 하십니다. 더 큰 은혜를 준비하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께서 안타까와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예배에 감사의 고백이 풍성하게 하십시다.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시 100:4)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하나님을 우주의 주인답게 대접해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몹시 섭섭해 하십니다. 하나님을 외면하여 인정하지 않고 섬기지 않는다면 속상해하십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최고의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면 역시 하나님께서 섭섭해 하십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며 진정한 감사를 드리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서운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최선을 베푸셨습니다.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희생시키며 생명과 사랑 등 온갖 선물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해드리는 일에 적극적인 성도가 됩시다. 하나님께 최고의 예배를 드리면서 그 얼굴과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진실한 감사를 드리기를 힘씁시다.
핑계할 수 없는 불신앙
이규현 목사
우리는 구원을 얻기 이전의 인간의 상태가 어떠했는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16~17절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의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지만, 하나님의 의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로마서의 핵심입니다. 이어서 18절에서는 인간이 어떤 상태에서 구원을 얻게 되었는지를 말씀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공의로운 분입니다. 그래서 죄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공의와 사랑은 공존하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에 대해 징벌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나타났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져낸 것을 말합니다. 구원의 반대편에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조금도 간과하지 않으시고 다루십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곳곳에 나타납니다. 노아의 홍수를 비롯해서 한 개인과 국가의 몰락과 저주를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죄는 나쁜 것이지만 하나님이 특별히 진노하시는 죄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거부하는 죄입니다. 모든 불법과 경건하지 않은 죄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18절을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 가운데 끊임없이 제기되는 화두는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 입니다. 신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시도들이 역사 속에 늘 있었습니다. 요즘에도 무신론자들의 기독교에 대한 저항이 거셉니다. 그런 책들도 범람하고 있습니다. 최근 리처드 독킨스라는 사람은 신을 ‘만들어진 신’이라고 했습니다. 굉장히 많이 팔린 책이지만 학문적인 근거가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불가지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애매한 태도를 취합니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는 태도입니다. 또한, 무신론자들은 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부정합니다. 칼 막스는 기독교를 아편이라고 했고, 니체는 아버지가 목사였지만 무신론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무신론자 중에는 광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부인하며 열을 내기도 합니다. 신의 존재에 대해 적개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911테러 사건으로 이슬람에 대해 분노를 느끼다가 점점 신의 존재에 대해 부정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무신론자들은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고 신이 있다면 증명해 보여달라고 합니다. 보여주면 믿겠다고도 합니다. 그들은 신자들을 향해 거짓된 환상에 병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볼 것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현대 과학의 힘으로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할 증거를 댈 수가 없습니다. 과학은 한계를 가지고 있어서 또 다른 이론에 뒤집어집니다. 과학이 모든 것을 아는 것 같지만 모르는 것,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것, 확정되지 않은 이론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우주가 얼마나 큰지도 잴 수가 없습니다. 별들이 얼마나 많은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과학자들이 만든 천체 망원경의 단계까지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이 하나님을 증명할 수 있고, 성경을 과학으로 풀 수 있을까요?
성경은 과학을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목적으로 쓰였습니다. 성경을 과학적이지 않다고 한다면 성경이 쓰여진 목적을 놓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탁월한 과학자 중에는 크리스천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우주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이나 미국의 NASA 본부에도 크리스천들이 많습니다. 이성적인 실험을 통해 확인한 사람들 중에 믿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과학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할 수가 없고 더욱더 명확하게 하나님의 세계에 접근해가고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천문학자인 케플러는 “과학자는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에 대한 관찰자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과학의 세계로 들어갈수록 하나님을 만나게 되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발견해간다는 것입니다. 무신론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을 믿는 하나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근거가 중요합니다. 어설픈 자기 확신을 가지고 불신앙에 빠져있다면 그것은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단편적인 자기 지식과 경험으로 자기 영혼의 문제에서 자칫 영혼을 잃어버리는 큰 도박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고 말합니다. 19~20절에서 하나님의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핑계하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믿을 수 있는 증거들을 만물에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육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만물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아주 명확하고 분명하게 드러내셨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고화질 TV처럼 아주 선명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특별 계시인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을 주셔서 직접적으로 당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신 것이지만,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읽지 않아도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신성과 지혜와 능력을 드러내셔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창조의 세계는 하나님의 작품이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깃들어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온 우주 만물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하나님은 창조주’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도 전부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 충만하십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작은 꽃에도 하나님의 신성과 아름다운 성품이 깃들어져 있습니다. 아름다운 꽃의 자태와 향기 속에 하나님의 지혜가 깃들여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것도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없습니다. 시편의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13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시 139:13~14)」 사람의 인체도 기묘합니다. 몸 안에 수많은 세포와 신비로움이 있습니다. 요즘에 컴퓨터와 인터넷 시스템은 놀랍습니다. 이런 것을 만들어낸 사람도 똑똑하지만, 이런 사람을 만든 분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여행을 가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감탄할 때 그 속에는 “하나님, 어찌 이런 것을 만드셨습니까? 대단하십니다.”하며 그 광경에 압도당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인간이 타락함으로 우둔해져서 잘 보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도록 드러내신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는 것입니다. 21절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에 대한 성경의 진단입니다. 충분히 하나님을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합니다. 그 마음 안에는 의도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자 하는 저항의 심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에 대해서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따지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분명히 봤는데도 불구하고 보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악의입니다. 의도적으로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핑계하지 못하도록 분명히 계시하시고 드러내셔서 온 우주 안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악의인 것입니다. 믿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음의 태도가 닫혀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연예인이 아이비리그를 졸업했는데 그 사실을 믿지 않고 허위라고 주장하는 안티 팬들의 태도에 졸업증명서와 사진으로 증명했습니다. 그런데도 믿지 않아 그 연예인이 상처를 입고 활동을 중단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악의적 감정을 갖고 있다면 위험합니다. 어떤 사람을 향해 싫은 마음이 생기면 그 사람의 모든 말이 안 좋게 들리고, 왜곡시켜서 듣습니다. 이런 것이 악의적인 것입니다. 무신론자들도 성경이 과학적이지 않고 비이성적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성을 지으셨고, 이성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문제는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이성으로 하나님의 영역까지 전부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다는 태도입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한계가 있습니다. 박사도 그 전공분야 외에는 잘 모릅니다.
문제는 죄성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싫은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은 마음은 죄인의 특성입니다. 누가 나를 간섭하고, 구속하고, 제한하여 틀 속에 몰아가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여기에는 창세기에서 시작된 인간의 교만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인정하기 싫은 것입니다. 인간의 고집입니다. 하나님이 싫으면 죽을 때까지 싫은 것입니다.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틈만 나면 하나님을 반역합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경험한 기적들은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시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날마다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반역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목이 곧고 완악한 백성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웬만하면 머리를 숙이지 않습니다.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은 죄의 본성인 것입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우리 안에 있는 반항심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그 사랑과 은혜 속에서 살아왔음에도 순간순간 오리발을 내밀고,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고, 내 능력으로 살아온 것처럼 착각하면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듯한 태도로 살았던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핑계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대목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 내가 하나님을 알고도 모른 척 한 것을 밝혀야 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마음의 문을 열면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 그 영광의 광채에 눈이 멀 정도로 압도될 것입니다. 그것을 부인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나 어리석음에 빠지는 사람들을 향해 바울은 단호하게 경고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의 한가운데서, 어디에서도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고도 못 본 척 피하지 말고 그분에게 합당한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그러면 창조주에 대한 마땅한 반응은 어떤 것입니까?
21절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반대로 생각하면 첫 번째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찬양하는 것이 마땅한 반응일 것입니다.
공산주의의 비극에 대해서 어떤 분이 표현하기를 ‘공산주의자들은 감사를 모른다. 감사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믿는 자들은 좋은 것이 있으면 당연히 감사로 반응합니다. 감사는 감사의 조건을 베푼 대상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은 무신론자이니까 감사를 못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정신이 깊이 뿌리 박힌 서구사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Thank you’입니다. 여기에서 인생이 바뀌는 것입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행복이 있을까요? 어떤 것이 주어졌기 때문에 만족과 행복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로 반응할 줄 아는 것만 나에게 행복이고 만족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주부가 아침 식탁을 마련했을 때, 아내에게 고맙다고 하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한 농부의 손길,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신 분인 하나님께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 감사가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그런데 진화론자들은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우연이 없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를 만드셨을 뿐 아니라 운행하시고 계시며, 모든 역사가 종결할 때까지 관리하십니다. 지구는 태양계를 돌고 있고, 이 우주에는 어마어마한 유성들이 돌고 있습니다. 유성 하나가 이 지구에 부딪힌다면 지구는 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 우주의 수많은 별들을 막대하나 없이 다 띄워놓고 운행하고 계십니다. 지구가 공중에 떠있어 어마어마한 속도로 돌고 있는데 그 소리를 우리가 듣지 못하고 삽니다. 태양과 달과 모든 별들이 오묘한 섭리 속에 있습니다. 지구의 70%가 물로 덮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먹이십니다. 결혼도 섭리입니다. 세상은 우연히 만났다가 우연히 헤어진다고 하지만, 우리는 섭리 속에서 만납니다. 섭리 속에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열리는 순간 우리가 여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있다는 것을 깨달아 놀랍게 여겨질 것입니다. 여기에 마땅한 반응이 “하나님께 감사”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찬송을 돌리는 것이 마땅한 우리의 반응입니다. 25절 하반절에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이시로다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드리는 것,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올려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십니다. 창조주 위에 어떤 것도 올려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질서의 파괴가 일어나면서 재앙이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주의 영광을 누구에게도 빼앗겨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이 창조주 위에 피조물의 온갖 것을 올려놓습니다.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내가 피조물이란 것을 인정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인권이 굉장히 강조되는 시대입니다. 인권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밀어버리고 인권만 강조되는 것을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인간이 왕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위험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권은 불의함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높여야 합니다. 인간이 중심이 아니고 하나님이 중심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구원이지만, 구원을 이루실 하나님의 목적은 당신의 영광을 높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기록한 근본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에 눈이 뜨이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게 되고, 그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려드릴 때 우리 삶에 질서가 생기고 하나님의 축복을 회복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는 남편이 머리지만, 그리스도 위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 아래에 굴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가 귀하지만, 하나님 위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자녀가 우상이 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는 일이 없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마땅한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온 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 앞에 압도당하고,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신앙이 회복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핑계할 수 없다
로마서 1:18-23 / 황광민 목사
들어가는 이야기
얼마전 등나무 밑에서 동네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중의 한 분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처럼 하나님도, 예수님도 모르는 사람들은 구원받았습니까 못 받았습니까?"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구원받을런지 아닌지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당신, 지금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당신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구원받을 것이고 거역하면 심판을 받습니다. 그것만은 분명합니다." 이렇게 대답했더니 명대답이라고 하면서 좋아했습니다.
이 문제는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합니다. 오래 전에 살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될까? 공로가 많으니 구원해 주실까? 이런 질문에 대하여 오늘 봉독한 본문은 귀한 대답을 줍니다. 본문은 자연계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특수계시만 주시지 않고 자연계시도 주셨습니다. 이 자연계시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분하시든 핑계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봉독한 본문을 중심 하여 <핑계할 수 없다>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연계시
먼저 하나님의 자연계시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19-20절을 함께 봉독하십시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기로부터 그의 보이지 않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이는 하나님의 자연계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선 19절의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은 특별계시에 의하지 않고도 자연인에게 알려진 신적 지식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은 존재한다는 것, 하나님은 좋으시다 는 것, 그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는 것 등입니다. 이런 것을 인간의 본성 속에 넣어 주셨습니다.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도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인간은 이성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었으나 그 이성의 타락으로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고 했습니다. 또 칼 바르트는 "성서 외에 하나님을 아는 길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에밀 브룬너는 "사람은 타락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이, 그런 신성이 사람에게 남아 있다"며 자연계시의 가능성을 상당부분 인정하였습니다. 이 본문 말씀은 1943년부터 브룬너와 바르타가 서로 논문을 써서 변론했던 자연신앙 논쟁의 중점이 되었던 부분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자연계시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고 했고, 또 "창세기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타락한 인간이 이 자연계시를 얼마나 활용할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계시가 전부는 아니지만 특수계시로 인해 자연계시를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연계시를 분명 언급한 이상 자연계시를 인정하고 잘 활용해야 하겠습니다.
특히 자연 피조물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은 놀랍습니다. 교부 터툴리안은 자연계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자연계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있습니다. 자연계에는 아름다움과 신비가 있습니다. 놀라운 질서와 조화가 있습니다. 이런 것이 우연이겠습니까? 정확한 설계로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솜씨입니다.
<창조는 과학적인 사실인가?> 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내용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태양으로부터 지구의 거리는 지구에서 사람이 살기에 가장 적합한 온도를 유지하도록 떨어져 있다." 태양의 표면의 온도는 섭씨 1000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현재 지구와의 거리가 9,300만 마일이나 되니까 이 정도지 조금만 더 가까웠다면 모두 타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반대로 조금만 더 멀었더라도 모두 얼어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 지구가 태양의 주변을 도는데 꼿꼿하게 서서 도는 것이 아닙니다. 지구는 23.5도쯤 기울어져서 돌고 있습니다. 그렇게 회전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태양이 북반구에 가까워지고, 어떤 때는 남반구에 가까워집니다. 그래서 봄, 여름, 가을, 겨울도 만들어 줍니다. 매일 겨울이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매일 여름이면 또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러니 지구가 23.5도 기울어져 깊은 생각에 잠긴 여인처럼 고개를 갸우뚱하고 돌고 있는 것이 우연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보입니다.
스티븐 호킹 박사는 천체물리학자입니다. 그는 신체부자유자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현대의 아인슈타인이라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는 현대 물리학자들이 주장하는 빅뱅(Big Bang), 즉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큰 폭발로 우주가 생겨났다는 가능성을 일축합니다. 그는 머리 속에서 50페이지 분량의 방정식을 계산하는 천재입니다. 그런데 우주의 기원에 종교적 암시가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프레드 호일(Fred Hoyle)은 별들 속에 이산화탄소가 형성되지만 산소로 바뀌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발견하고 무신론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원자가 0.5%만 바뀌어도 생명체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발견하고는 우주의 모든 것을 계산하는 슈퍼지성(Super calculating intellect)이 있다고 결론도 내렸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과학자의 눈으로 보는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정확하게 계산하고 정교하게 설계한 하나님의 피조물의 세계에서 신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비가 가득합니다. 발견하는 이들은 무신론을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주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어리석은 자
그러나 세상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신비를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또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되 예배드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상을 숭배합니다. 이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사람들입니다.
첫째,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첫째 부류는 하나님을 우습게 생각하는 불경건한 사람입니다. 불경건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시기 싫어하며 그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14:1)."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계십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불신자들이 있을 뿐입니다. 아버지 없는 자식이 있습니까? 오직 아버지의 은혜를 모르고 내게는 아버지가 없다고 떠드는 미련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둘째로,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치도 아니하는 사람들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시치도 아니하며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느끼면서도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어리석음입니다. 도지사만 만나도 고개를 숙이고 굽신거리는 것이 보통 아닙니까? 하물며 천지를 지으시고 섭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면서도 경배하지 않는 것은 불경입니다.
셋째,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거절하고 우상숭배하는 사람들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quot; 고 하였습니다. 피조물 속에는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이 나타나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기에 신비스럽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거절하고 피조물을 신성시해서야 되겠습니까? 자전거를 사주신 부모님을 제쳐놓고 자전거만 좋아서 못사는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계 어디를 가든 우상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상이 많은 것은 사람들에게 종교성, 즉 신성에 대한 느낌이 있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리 야만족이라도, 아무리 야수적인 종족이라도 하나님이 있다는 믿음조차 없는 민족은 없다. 비천한 동물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사람들도 약간의 종교성은 가지고 있다. 식인쓸俑?그들 나름대로의 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배의 대상을 바로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천지를 만들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피조물을 섬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우상숭배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을 손에 놓으려는 욕망입니다. 사람이 신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우상을 세우고 경배합니다. 우상숭배란 자신을 신에게 드리고 섬기는데 목적이 있지 않고 자기의 목적 때문에 신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의 목적은 이기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상숭배자를 어리석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
이처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 속에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이 나타나 있습니다. 또 인간의 본성 속에도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 하나님을 알면서도 경배하지 않는 사람, 또 이기적인 목적 때문에 하나님 대신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진노라는 말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혈기 내는 하나님으로 표현하는 것이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인류를 영원히 죽이는 지옥을 설계하실 수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지옥이 있더라도 교도소같이 잠시 가두는 곳이지 종국에는 모두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성격을 깊이 깨닫지 못한 결과입니다. 성경은 신구약 공히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일차적 의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요 친자식이 아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을 하나님의 부성적 사랑의 표현입니다. 엄위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즈음 아이들에게는 엄위하신 아버지의 사랑이 실감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엄마만큼도 야단치지 못하는 아버지들이 너무 많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이 현세적 심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인류에게는 최후의 심판이 있습니다. 현세적 심판의 영원한 미래의 심판의 전주곡입니다. 이 현재 심판이 피크에 이르러 최후의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현재의 심판은 영원한 심판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현재의 심판은 미래의 심판을 피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우상숭배를 하면 영원한 심판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신학자 중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가장 많이 이야기한 사람은 마틴 루터입니다. 그가 쓴 창세기 주석이나 로마서 주석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의 죄악 위에 그대로 떨어집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무섭게 나타납니다. 그의 글 곳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운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너무 가벼이 보지 말아야 합니다. 현세의 심판이든 미래의 심판이든 가벼이 보다가는 큰 코 다칩니다. 세계 제 1차 대전이 터지기 전의 신학적 상황은 형편없었습니다. 구원 문제는 제쳐놓고 윤리문제만 다뤘습니다. 영혼구원보다 사회구원이 우선 이었습니다. 성경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교회는 타락하고 무능해지고 세속화되었습니다. 그때 전쟁이 터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제야 교회가 정신을 차렸습니다. 신학자들도 정신을 차렸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이 물러가고 다시 정통주의 신학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이성, 지혜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듯이 떠들어대던 소리가 쏙 들어갔습니다. 모두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진노아래서 새로이 신학적 각성을 했었습니다.
석교가족 여러분!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 핑계할 수도 없습니다. 특별계시가 없었다고 항변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우리는 핑계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없었더라도, 예수를 몰랐더라고 핑계할 수도 없습니다. 섬기는 길만이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길만이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만을 섬기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은총을 받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창조의 신비
김태복 목사
이제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오늘이 초복인지 더 무더운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가정들이 대도시를 떠나 시원한 산이나 강, 혹은 바다를 향해 떠나기 시작하고 다음 주부터 본격적인 휴가철을 맞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의 가정들도 이번 여름 동안 나름대로 나들이나 휴가 계획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비록 남들처럼 휴가를 다녀오거나 야외로 나들이를 다녀온다 할지라도 무의미하게 보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자연에 나가서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신비를 바라보면서 찬양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산 계곡을 흐르는 맑은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혹은 새벽 바닷가에 장엄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자녀들과 찬양을 하거나 대화를 하면 일생 그 귀한 시간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의 자녀들이나 손주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무엇이라고 답변해 줄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몇 가지로 배울 수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살아 계심은 자연 만물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본문 20절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 자연 만물은 너무나 신비하고 정교하여서 언제나 경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크게는 온 우주를 바라보면서 지구의 크기보다 수천 배나 큰 수천 만 억의 별들이 질서를 지키고 운행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엄청난 큰 덩어리임에도 정확히 24시간 동안 한 번씩 자전(自轉)합니다. 25시간 걸린 적도 없고 23시간 덜 도는 법도 없습니다. 그렇게 자전하면서 태양을 일 년 365일에 한번 돌고 달은 지구를 한 달에 한번 정확히 돕니다. 시계는 틀리는 적이 있으나 이러한 우주의 질서는 수 천 년 동안 아주 정확히 돕니다. 이러한 현상을 우연히 되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소리인 것입니다.
또한 지구가 엄청난 속도로 돌아감에도 지구 위에 있는 인간은 아무 흔들림 없이 고요하게 살수가 있고 밤에는 인간이 지구의 밑에 거꾸로 서 있음에도 전혀 그런 느낌을 받지 않고 사는 것도 신비 중의 하나입니다. 또한 물에 대해서 말해 보고자 합니다. 요즈음 우리는 물들이 너무 오염되어서 물의 중요성에 대해서 깊이 깨닫습니다. 온 생물은 햇빛, 공기가 없으면 살 수 없듯이 절대 필요한 것이 바로 물입니다. 장기 금식자들은 음식은 안 먹어도 반드시 물은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물을 어떻게 공급하십니까? 너무나 신비합니다. 이 땅에 사는 생물들에게 물을 골고루 공급하려면 먼저 물을 공중으로 끌어 올려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수증기로 만들어 1초당 1,600톤의 물을 공중으로 끌어올리십니다. 이 물을 공중에서 한꺼번에 땅에 부으면 노아 홍수처럼 생물들은 멸망하고 맙니다. 하나님은 그 물을 비라고 하는 방식을 통해서 모든 자연에 적당한 양을 골고루 뿌려 주십니다. 이때에 공중에 있는 수증기를 물방울이 되게 하는 데 먼지를 이용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왜 벗개불을 만드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죄를 회개하라고 겁을 주시기 위해 만드셨습니까? 아닙니다. 번갯불은 공기 속에 들어 있는 질소를 분리하게 하게한 후, 비가 올 때 그 질소가 빗물에 녹아져 비료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조사한 반에 의하면, 번개에 의해서 연간 10억 톤의 질산이 생성된다고 합니다. 이처럼 먼지와 번개도 쓸데없는 줄 알았더니 다 필요하니 너무나 신비합니다.
또한 물은 온도가 섭씨 4도가 될 때가 가장 무겁지만 얼음이 되면 가벼워져서 물위에 뜹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창조 신비가 보입니다. 만약에 얼음이 대단히 무겁게 되어 물에 갈아 앉게 되면 호수나 강이 어는 대로 점점 갈아 앉아 그 밑에 있는 고기나 생물이 다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얼음이 물위에 뜨므로 겨울 동안 보온 덮개 역할을 하여 생물을 얼지 않게 만들어 주십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나무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세쿼이어 나무인데 얼마나 큰지 높이가 90미터로 25층의 높이입니다. 그런데 ‘그 높은 곳에 어떻게 수도관도 없이 물이 올라갈까?’ 궁금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는 놀랍습니다. 그 높은 곳까지 물을 올리는데 잎이 수분을 증발할 때 발생하는 흡인력에 의해서 물을 힘껏 빨아올리게 되고 또 물 분자 사이에는 응집력이 있어서 뿌리로부터 잎가지의 긴 물기둥이 형성되어 끌어 올리게 하는 것입니다.
보통 이 정도의 높이 올리려면 엄청난 물 펌프가 필요하고 그 소리도 대단하지만 나무는 아무 소리 없이 아무리 60층 높이의 나무라도 물을 공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텔레비전에서 「동물의 왕국」을 보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솜씨에 앞에 입을 벌릴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박쥐는 눈이 보이지 않는 동물이지만 어두운 동굴에서도 아무런 문제없이 살 수 있습니다. 이 이유는 초능력 음파탐지기가 있어서 초음파를 쏘아 보내고 물체로부터 반사되어 되돌아오는 반향음을 통해서 먹이도 잡아먹고 혹은 날아다니는 것입니다.
얼룩말이나 펭귄의 새끼들은 태어나자마자 어미의 냄새나 무늬를 통해서 구분하고 그 어미만 따라 다닙니다. 또한 철새들을 보십시오. 북극 제비갈매기는 북극권에 살다가 늦여름에는 남극으로 날아가는 데 1년에 35,400 킬로를 여행을 합니다. 강남 갔던 제비는 나침반도 없고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지만 초행길에도 정확히 갔다가 때가 되면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로만 설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연어라는 고기는 강에서 태어나 바다로 갔다가 거기에서 몇 년을 보내고 자기들의 태어난 강으로 정확히 돌아와 산란을 합니다. 고래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동물인데 큰 것은 150톤으로 성인 남자의 2,000명의 무게가 됩니다. 이 고래들은 물속에서 새끼를 낳아서 개나 소처럼 젖을 먹여 키웁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새끼의 주둥이를 특별 제작하셔서 젖을 먹을 때 바닷물이 섞이지 않게 되어 있고 새끼의 숨길인 기도(氣道)도 식도 위까지 길게 나와서 젖이 기도를 통해 허파에 들어가지 않게 설계하신 것입니다.
고기 중에는 물총고기라는 것이 있는데 물밑에서 물 밖 풀 위에 있는 작은 벌레를 쏘아서 떨어뜨리어 잡아먹습니다. 놀라운 것은 물을 쏠 때 물로 인한 굴절의 오차까지 계산하여 정확히 쏜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그 머리에 오차계산 프로그램을 입력했다고 하는 설명 외에는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왜 파리 같은 해충을 만드셨을까?’라고 의문을 품을지 몰라도 파리는 청소부입니다.
누가 산이나 들에다가 큰 것을 실례해 놓거나 쥐의 시체가 있으면 파리가 와서 구더기를 낳아서 완전히 물로 만들어 놓아서 땅에 배어 들어가 비료가 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연의 신비를 이야기하려면 끝이 없습니다. 우리가 자연에 나가서 만물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모든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이번 나들이나 휴가를 갈 때 온 가족과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신비한 세계를 만나시는 기회가 되십시오. 저 여름날 저녁 하늘에 그려진 붉은 노을이 질 때 하나님의 놀라운 미술 작품을 보십시오. 그리고 바다의 파도소리와 나뭇잎의 살랑거림, 새들의 지저귐과 풀벌레들의 연주를 통해서 하나님의 오묘하신 연주를 듣는 시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인간 속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19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저희 속’이란 인간을 가르칩니다. 세상 만물 중에 가장 뛰어난 신비가 바로 인간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최첨단 과학 시대로써 너무나 놀라운 첨단 기계가 많습니다. 컴퓨터의 능력이 얼마나 놀라운지 텔레비전이나 세탁기, 청소기, 항공기, 자동차, 가스 오분 등 모든 기계가 이제는 컴퓨터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컴퓨터도 말을 인식함으로 컴퓨터를 잘 모르는 사람도 말만 해도 컴퓨터가 입력하여 문장으로 만들어 주기 시작합니다. 영어를 못해도 컴퓨터가 통역을 해주는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또한 앞으로 는 모든 사람들이 핸드폰을 가진 것처럼 가정마다 최성능의 로봇을 소유함으로 요리나 세탁, 자동차도 운전해 주고 심지어는 아이나 환자까지 보살펴 주는 날이 온다고 합니다. 이처럼 최고도의 과학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 과학이 발달해도 아직도 하나님의 창조 능력에 비하면 천만 분의 일도 못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은 얼마나 뛰어난 창조물인지, 사람의 뇌는 컴퓨터 백만 대 분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러므로 앞으로 인간의 뇌 만한 능력을 소유한 로봇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지금 과학이 상당히 발달했지만, 아직도 인간 심장이나 콩팥도 발명하지 못할 뿐 아니라, 머리카락 하나도 못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드신 심장 하나만 보더라도 너무나 신비스럽습니다. 우리의 심장은 일생 동안 쉬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 몸의 혈관의 길이가 10,000리로 우리나라의 길이보다 세 배입니다. 이 광대한 혈관 조직에다가 심장은 하루 103,680번 고동을 하면서 매일 1만 5천 리터의 피를 공급합니다. 그러나 심장이 과로하지 않는 것은 1초당 15분의 4초씩 휴식을 취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하루 평균으로 환산해 보면 약 6시간이요, 평균수명을 80세로 따져 보면 약 19년의 휴식을 취하는 셈이라고 합니다.
눈은 약 30만개의 회로로 대뇌와 연결이 되어 있는 데 우리가 꽃을 볼 때 수천 개의 개별 회로가 작동하여 우리 대뇌에서 꽃송이마다의 크기와 모양, 각종 색상을 구별하여 낼 수 있는 시간이 백만분의 3초라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컴퓨터의 눈이라고 할 수 있는 센서는 이제 겨우 천 원짜리나 만 원짜리를 구별하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피아노는 키보드가 88개 있으나 우리의 귀는 1,500개의 키보드가 있어서 모든 소리를 구분해 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코, 입, 오장육부 등을 설명하면 한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물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은 인간입니다. 또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의 일부를 주셨기 때문에, 동물은 3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자기의 생활에 전혀 개선을 하지 못하나 인간은 끝없이 환경이나 기구들을 편리하도록 발전시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속에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여러분은 자신의 모든 것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배워야 합니다. 내 눈, 코, 손 발, 심지어는 머리 터럭 하나, 손톱을 보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배우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이 세상은 어떻게 생겨졌으며 또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전혀 알 수가 없었으나 성경을 통해서 모든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세계를 알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기에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과 인간의 신비를 통해서 하나님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지만 성경을 통해서 너무나 확실하게 하나님을 알고 체험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때로 우리 청소년들이나 지식층에서는 성경은 비과학적이라고 하고 진화론을 과학적이라고 믿으면서 막연히 진화론이 가르치는 대로 자연과 인간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진화론이 오히려 비과학적이요, 성경이 오히려 과학적이라는 주장이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과학자들로 구성된 창조과학회에서 출간한 「진화는 과학적 사실인가?」라는 책과 「창조는 과학적 사실인가?」라는 책자를 보면 진화론의 잘못된 부분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고 대신 성경이 얼마나 과학적인 가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내용을 이 짧은 시간에 다 말할 수는 없고 간단히 두어 가지만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진화론에서 원숭이가 진화해서 인간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가장 강하게 증거로 삼고 있는 것은 화석인데, 원숭이와 사람 사이에 중간형태 생물체에 대한 화석을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던 중간형태의 화석들은 최근 과학적으로 면밀히 검토한 결과 원숭이 류가 아니고 사람이라고 판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원숭이들은 수 천 년 동안 살아오면서 자기들의 주거 환경이나 기구를 개선한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또한 진화론자들은 인간이 지구상에서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 50만 년 전이라고 하는 데 인구통계학으로 따지면 한 부부가 자손을 퍼트리면 5천년 동안 약2,000명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 계산으로 따지면 50만년이 되면 천문학적인 숫자가 되어 지금쯤은 이 지구상에서 전혀 살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계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노아 홍수가 대략 계산하기를 주전 2,500년경이라고 하면 인구 배가 속도가 약 160년의 한 번씩이라고 할 수 있으며 지금의 인구수와 같다는 계산이 나온다고 창조과학자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이 놀라운 책이라는 사실은 능력의 책이라는 점입니다. 그 성경을 읽고 그 성경을 배울 때에 수많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변화를 받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여기 선 저요, 여러분입니다. 미국의 20대 대통령 가필드가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에 자기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성경을 꺼내더니 입회하는 대심원장에게 말하기를 “아무쪼록 이 성경을 선서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이것은 내가 집을 나올 때 내 어머니가 내게 준 것입니다.”
“나의 소년의 한때는 큰 기선의 심부름꾼으로 지내야 하는 큰 불행의 날들이 있었고 한 때는 방탕할 때도 있었으나 이 성경을 열심히 읽으므로 변화를 받아 오늘 이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라고 술회했습니다. 또한 법률가 출신으로 뒤에 유명한 부흥사가 되었던 촬스 피니는 성경을 연구하는 중에 그리스도를 알고 후에는 목사가 되었으며 더 나가서는 능력 있는 부흥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의 전기를 쓴 분은 말하기를 ‘촬스 피니의 교과서는 성경이었고 성경은 그의 교사였다.’고 했습니다.
아울러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책으로 그 약속을 믿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 그에게 나아가 구하는 자에게는 기도의 응답으로 채워 주는 것을 체험함으로 성경은 생명과 능력의 책임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만약에 성경이 없었다면 목회 일을 벌써 집어치웠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 목회자는 일주일 동안 얼마나 설교를 많이 하는지. 어느 때는 심방까지 계산하면 일주일에 20번-30번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없다면 도대체 무슨 설교를 할 것입니까? 한 일 년 동안은 이 소리, 저 교훈으로 설교를 할 수는 있을지 모르나 나중에는 설교하는 저도 지쳐서 그만 둘 것이요, 듣는 교인들도 지겨워서 다 떠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무리 설교를 해도 능력의 책이라 역사가 나타납니다. 생명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일생 동안 그 말씀을 바탕으로 설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도 하나님이 살아 계심에 대해서 회의가 있는 분은 자연의 신비와 인간의 신비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성경을 깊이 읽고 연구하고 그 말씀대로 믿고 행해 보십시오. 어느 날부터 강하게 임하시는 은혜와 능력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모든 인간들에게 주셨음에도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본문 18절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라고 했습니다.
더욱이나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를 우상으로 섬기는 것은 더욱 무서운 진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23절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은 모세의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알면서 거역할 때 자기의 장자 뿐 아니라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고라가 하나님의 기적을 많이 체험했음에도 모세를 반역할 때 땅이 갈라져 죽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대신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으로 섬길 때에 하루에 3천명이 죽는 저주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의 존재를 알려 주었음에도 믿지 않다가 지옥에 떨어지는 저주를 받아도 아무도 핑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과 생물을 우리 인간들에게 맡기시고 잘 다스리라고 맡기셨건만 자연과 환경을 파괴하는 것이 또 하나의 범죄와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는 오염된 대기도 정화할 수 있는 자정능력을 자연에게 주셨습니다. 나뭇잎들은 탄산가스를 마시고 산소를 뿜어냅니다. 그리고 물도 자정능력이 있어서 하천에 유기물이 유입되는 경우에도 물속에 사는 세균들이 분해하여 무기물로 만들어 하천을 깨끗하게 보존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수은이나 카드뮴 등과 같은 독성이 강한 폐기물들을 마구 버리므로 물도 공기도 모든 산천도 병들게 됨으로 죽음의 땅과 공기, 물이 되고 있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부터가 자연을 보호하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그럼에도 때로 산에 가보면 기도를 열심히 하고 돌아가는 기독교인들이 더 많은 쓰레기를 버리고 가는 것을 보고 화가 치밀고는 합니다. 아마, 장마 때에 공장의 독한 폐기물을 몰래 버리는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을 줄 압니다. 너무나 부끄러운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이번 여름 동안 나들이를 가거나 휴가를 가질 때 그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체험하고 또는 최고의 걸작품인 인간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할 뿐 아니라 성경을 명상하고 믿음으로 더 큰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는 기간이 되시고 더 나가서는 환경 보호에 앞장서는 기회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