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319
8월18일 [연중 제 20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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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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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G5ioTPhndms
[서울대교구 신현학 에라스토(답십리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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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청빈 서약에도 불구하고 전혀 가난하지 않음을 가슴치며...>
복음서를 읽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권고 말씀이 너무 과하다 싶은 생각이 들때가 종종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너무 가혹한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착한 부자 청년은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나름 재물을 많이 축척하신 분들 중에 부자 청년처럼 실망하고 계시는 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말씀 전후 맥락을 살펴볼 때, 너무 슬퍼하거나 실망하지 않으셔도 될 듯 싶습니다. 울며 가슴치면서 예수님이나 교회 공동체를 떠나가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만일 배우자와 여러 명의 성장기 자녀들, 연로하신 부모님의 생계까지 책임지고 계신 가장께서, 예수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즉각적 행동으로 옮긴다면 큰일 날 일입니다.
본인이야 가장으로서의 힘겨운 십자가나 속세의 질긴 인연들 훌훌 털어버리고, 한 마리 어여쁜 나비처럼ㅜ훨훨 날아가 버리면 마음이 홀가분해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남게 될 가족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겠습니다.
가장으로서 그보다 더 무책임한 모습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그런 모습은 오히려 복음에 정면으로 반하는 일이며, 한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예의나 품위를 저버리는 악덕이 될 것입니다.
오히려 한 가정의 가장은 정직하고 양심적인 방법으로, 최선을 다해서 재물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불투명한 시대 앞에서, 돌발 상황에 대비해서 안정적 재정 확보를 위해 뛰고 또 뛰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한 그리스도인 가장으로서 취해야 할 바람직한 삶의 태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문제는 ‘과도함’ ‘지나침’에 있습니다. 뭐든 적당해야 합니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진리를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재물에 목숨을 걸며, 재물을 하느님 위치로 격상시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자신이 그토록 애써 쌓아 올린 재물이라는 탑에 깔려 제 명도 못 챙기는 사람 참 많습니다.
평생 한눈 한번 안 팔고 기를 쓰고 쌓아 올린 천문학적 액수의 재물을 제대로 한번 써보지도 못한채, 억울해서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하는 사람들, 한 마디로 열심히 죽쒀서 개주는 사람들 참 많이 봤습니다.
넉넉해졌다면 주변도 한 번씩 돌아보면 좋겠습니까? 재물의 결핍으로 인해 하루하루, 아슬아슬, 삶과 죽음의 기로를 넘나드는 이웃들을 위해 관대히 나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자세야말로 제자됨의 모습이고, 완전한 자 되는 지름길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라고 외치며, 돈을 자신의 인생 여정 안에서 최고로 높은 위치에 올려놓았던 지닌 삶을 가슴 치며, 늦었지만 돈보다 더 가치있는 대상들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사람, 다른 무엇에 앞서 좋으신 주님과 신앙을 자신의 인생에 있어 최우선권을 부여하는 사람은 이미 완전한 자 되는 길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 인생사와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주변 환경을 찬찬히 한번 살펴볼 일입니다. 과연 돈보다 더 우위에 있는 대상, 돈과는 비교가 안 되는 특별한 것이 무엇인지 유심히 한번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없을 것 같지만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 대상들을 찾아내고, 그 대상들에 더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더 깊이 사랑하는 노력, 그것이 배금주의와 황금만능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좋은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황금만능주의에 흠뻑 젖어 살아가는 한 유다 청년과,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향해서, 참으로 듣기 거북한 쓴소리를 건네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외면하지 말고 귀담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내 자리에서 주님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여러 수녀회들을 방문해보면, 아프리카보다 더 혹독한 대한민국의 여름을 에어컨 없이 구식 선풍기 하나에 의지하며 살아가시는 수녀님들이 참 많습니다. 청빈 서원을 했지만, 결코 가난하지 않고, 너무나 안락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들도 크게 가슴 치며 오늘 우리의 청빈 생활을 진지하게 점검하고 성찰해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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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5ql9GaVIm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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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의 목적>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계명만 잘 지키면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실천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러 옵니다. 예수님은 결국 계명은 이웃 사랑으로 이어져야 한다면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은 못 하겠다며 슬픈 얼굴로 돌아갑니다. 왜 이웃 사랑의 계명은 잘 지킨다고 하면서 실천은 이토록 어려울까요? 운동선수가 경기장에서 잘 못 뛴다면 그건 평소에 연습을 안 해서 그렇습니다.
1973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16살 소년이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납치범들은 소년의 할아버지에게 1,7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220억 원에 달하는 거액의 몸값을 요구합니다. 소년의 할아버지는 누구였을까요? 바로 당시 세계 최고의 부자, 석유왕 J. 폴 게티였습니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과연 할아버지는 사랑하는 손자를 위해 돈을 낼 것인가?
모두의 예상을 깨고 게티는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내가 한 푼이라도 주면, 나머지 열네 명의 손주들도 똑같이 납치될 것이다.”라는 냉정한 이유였습니다. 몇 달 뒤, 소년의 잘린 귀가 신문사로 배달됩니다. “할아버지, 제발 저희를 버리지 마세요.”라고 쓴 손자의 애절한 편지와 함께였습니다. 그런데도 게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편지를 찢습니다. 결국 아이 아버지에게 마지못해 세금 감면이 가능한 일부 금액만 ‘빌려주고’, 나중에 아들에게 이자까지 받아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충격적인 이야기 앞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한 사람이 어떻게 이토록 냉혹해질 수 있을까요? 왜 그는 세상 모든 것을 가졌으면서도, 자신의 피붙이인 손자와 그 아버지를 위해서는 단 한 푼도 선뜻 내어놓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을까요? 그 답은 간단합니다. 그에게는 ‘포기하는 연습’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폴 게티에게는 종교적 배경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감리교 신자였고, 어머니는 독실한 크리스천 사이언스 신자였습니다. 어머니는 평생을 검소하게 살며 아들에게 자선과 신앙의 중요성을 가르치려 했습니다. 하지만 게티는 부모의 신앙을 물려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사업수완만을 물려받아 스스로의 힘으로 더 큰 부를 이뤘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주신 ‘근원’, 즉 자신을 낳아준 부모와 그들이 믿었던 하느님께 감사하며 작은 것이라도 되돌려 드리는 ‘봉헌의 연습’을 할 기회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이 봉헌의 연습이 우리가 매일, 혹은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예배’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 게티와는 정반대의 삶을 산 사람들이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어린이병원에는 지금도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리는 ‘붕어빵 부부’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습니다. 김동현, 원강희 부부는 희귀병을 앓던 아들 민우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10년이 넘게 매일같이 붕어빵을 팔았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들은 하늘나라로 떠났고, 아들을 위해 모았던 3천만 원은 주인을 잃었습니다. 아들에게 더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게 된 순간, 그들의 봉헌은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들을 향해 매일같이 바치던 그 사랑의 ‘연습’은 부부의 영혼에 깊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들을 위해 모았던 돈 전액을, 아들의 이름으로 다른 희귀병 아이들을 위해 기부했습니다. 아들 한 사람에게 향했던 사랑의 봉헌은, 방향을 바꾸어 이 세상의 모든 아픈 아이들을 향한 더 큰 사랑의 강물이 되었습니다. 하루 만 원씩 매년 365만 원을 15년 이상 기부한 붕어빵 아저씨도 있습니다.
예배는 이와 같습니다. 이 부모는 아이를 생각하며 언제나 자신들의 아이가 되어준 것에 대해 감사해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아이의 치료비를 위해 돈을 모은 것은 그 아이에게 봉헌하는 연습을 한 것입니다.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을 때는 더 쉽게 자신들의 아이에게 해 주었을 것을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그런 꾸준한데 바뀌지 않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이 어쩌면 J. 폴 게티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예배가 없는데 나눌 수 있는 존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 ‘봉헌의 연습’을 하는 거룩한 장소가 바로 우리가 지금 드리는 ‘예배’, 곧 미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예배는 “영과 진리 안에서”(요한 4,24) 드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영과 진리'는 바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은총과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은총과 말씀은 우리 마음에 자연스러운 ‘감사’를 솟아오르게 합니다. 그리고 이 감사는, “제가 받은 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오니, 주님께 기꺼이 돌려드립니다”라는 봉헌의 열망으로 이어지고, 이 연습이 이웃에게로 자연스럽게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내가 무언가를 청하는 것이 아닌 이웃 사랑을 위한 연습을 하는 장으로 삼아야 합니다.
거창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십일조 정도는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을 넘으면 이제 쉽게 이웃 사랑으로 실천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웃 사랑의 실천, 곧 짐승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은 항상 선악과 다음에 성취됩니다. 예배, 곧 전례의 목적은 봉헌하는 연습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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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년에 마사지 의자를 한 대 마련했습니다. 뉴욕에 있을 때 유용하게 사용했습니다. 피곤할 때 그 의자에 앉아 몸의 긴장을 풀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전원은 잘 들어오는데 리모컨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되는가 싶다가 안 되고, 눌러도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저는 전원 문제라 생각하고 그 이야기를 수리 기사에게 했습니다. 하지만 원인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문제는 겉이 아니라 ‘리모컨의 선’즉 보이지 않는 접촉 불량이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저는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삶도, 신앙도, 때로는 ‘전원이 들어오는지’만 확인하듯 겉만 살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미사를 드리고, 기도하고, 계명을 지킨다고 말하지만, 정작 내 마음 깊은 곳의 ‘접촉 불량’은 외면합니다. 고장 난 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말하지 못하면서, 문제는 늘 밖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순간 저는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미사도 드리고, 기도도 하고, 십계명을 잘 지킨다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전원은 잘 들어오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정작 내 마음 깊은 곳, 내면의 리모컨은 고장 난 채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연결이 끊긴 채, 형식적인 신앙을 살고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겉은 온전해 보이지만 내면은 단절된, 그런 상태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부자 청년도 그랬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율법을 잘 지켜온 모범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겉모습 넘어, 마음속 진짜 문제를 꿰뚫어 보셨습니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라오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한 재산 포기를 넘어, 청년의 내면에 있는 집착과 두려움을 직면하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다 되어 있는 것 같았지만, 그의 신앙 리모컨은 하느님께 제대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슬퍼하며 떠납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접촉 불량’의 상태로 살아갑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내려놓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합니다. 기도는 하지만 믿지 않고, 미사는 오지만 변화는 거부합니다. 겉으로는 전원이 켜져 있는 것처럼 보여도, 하느님과 연결된 마음의 리모컨은 고장 난 채일 수 있습니다. 성경 속 이스라엘 백성도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나라를 잃고 유배의 삶을 살게 되었을 때, 그들은 외세의 침략 탓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말합니다. “문제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신앙의 불성실 때문입니다.” 참된 회복은 언제나 내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은 겉모습의 개선이나 노력 이전에, 마음 깊은 곳에서의 진실한 회개와 순종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따르지 못하는 이유는 종종 외부의 조건들 때문이 아닙니다. 나이, 건강, 가족, 상황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 이면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내려놓을 용기, 따를 결단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기고, 오늘 하루를 감사함으로 살아가라.” 하느님을 따르는 일은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의 결단에서 시작됩니다.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지금 내 신앙의 리모컨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하느님과의 연결이 살아 있는가?” “혹시 겉모습만 남아 있고, 내면은 이미 단절된 상태는 아닌가?” 오늘 하루, 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은 겉이 아니라 속입니다. 하느님과 깊은 만남, 진실한 대화, 내려놓음에서 시작되는 믿음의 삶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말하지 못한 고통과 두려움을 들으시고, 치유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숨기지 않고, 외면하지 않고, 고백하고 맡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주님,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천일보다 귀하다는 말씀을 기억하며, 오늘도 나의 영혼이 진심으로 당신을 따르기를 원합니다.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주님을 향하는 믿음을 살게 하소서. 두려움이 아니라 감사로 하루를 시작하게 하소서. 슬퍼하며 떠나는 부자 청년이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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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번 주간에 독서로 판관기를 읽습니다. 구약 성경은 오경과 예언서와 성문서로 나뉘고, 예언서는 다시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로 나뉩니다. 전기 예언서에서 여호수아기 다음이 판관기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비교적 덜 알려진 열두 지파의 생활상을 간접적으로 그리는 판관기는 시기상 이집트 해방부터 가나안 땅 정착을 거쳐 왕정 출현까지를 다룹니다.
판관기의 신학은 무엇일까요? 이 책은 개별 판관들 시대의 전통과 그들에 관한 전설과 자료로만 구성되지 않고, 하나로 이어집니다. 곧 ‘죄-벌-회개-구원’의 논리 구조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알 같은 우상을 숭배하며 ‘죄악’에 빠지고, 이는 하느님의 ‘징벌’을 불러옵니다. 어려움에 놓인 이스라엘의 ‘회개’는 판관으로 표현된 ‘구원자’의 파견을 부릅니다. 이는 왕정이 나타날 때까지 이스라엘 전체에 적용된 기본적 신학입니다.
그렇지만 판관기는 어떠한 역사적 연대도 직접적이거나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단순한 역사의 기록으로 볼 수 없지만, 판관기는 이스라엘 역사의 다른 사료와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판관기가 전하는 전통들은 기원전 1200년에서 1020년 사이에 있던 것으로 짐작될 뿐입니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주인공들은 흠 없는 인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부도덕한 모습이나 당시의 현실은 독자에게 충격과 거부감을 일으킵니다. 판관들의 인간적으로 부족하고 나약한 모습에서 하느님 백성에게 주님의 영을 받는 임금이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은 다양한 은사와 주님의 영을 충분히 받게 될 기름부음받은이로서, 곧 메시아의 출현을 예고합니다. 구약의 메시아를 향한 기대는 마침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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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9,16-22: 하느님 나라와 부자 젊은이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16절) 돈 많은 젊은이가 예수께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청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 계명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18~19절) 젊은이는 그 계명들을 지켜왔다고 말한다. 그는 그것 외에 영원한 생명을 위해 또 다른 것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에게 더 큰 계명이 주어진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21절)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그것을 잃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다. 율법을 따르면서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는 슬퍼하며 떠나갔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젊은이는 이 말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22절) 그는 재산을 아주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어려서부터 계명들을 잘 지켜왔다고 했지만, 그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던지 아직은 미성숙한 사람이었다. 젊은이의 비극은 그 자신의 재물을 가지고 이웃에게 봉사하기보다는 그 재물에 더 아까워하고 마음이 집착되어 있다. 당연히 예수께 등을 보이지 않을 수 없으며, 무엇인가 둘 중의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데, 결국 재물을 포기할 수 없을 때, 오늘 복음의 젊은이처럼 슬픈 얼굴로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오늘 복음에서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판다는 것은 포기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즉, 악을 끊고 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그분을 본받고 그분이 가신 길을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를 닮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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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단 하나의 길>
마태오 19,16-22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
그때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길>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8,21)
믿음의
하느님께
갈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불신하는
벗에게
믿음이 되는 것
희망의
하느님께
갈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절망하는
벗에게
희망이 되는 것
사랑의
하느님께
갈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미워하는
벗에게
사랑이 되는 것
기쁨의
하느님께
갈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슬퍼하는
벗에게
기쁨이 되는 것
살림의
하느님께
갈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죽어가는
벗에게
살림이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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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쓰레기는 쓰레기일 뿐... 아까워하지 말고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19,16-22)
1) 이 이야기에 나오는 ‘부유한 젊은이’를, 루카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와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자신이 소유한 재산으로 자기 혼자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길’ 생각만 했습니다.(루카 12,19) 그는 내세에 대해서도,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나오는 ‘부유한 젊은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고 있었고, 그 생명을 얻기 위해서 십계명들을 잘 지키고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와는 완전히 다른, ‘경건한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르 10,21) 예수님께서 그의 지향과 노력을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2) 그런데 그는 자신의 노력에 뭔가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그의 부족한 점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집착’과 ‘탐욕’은 죄이지만, ‘애착심’은 죄는 아니고, 구원을 받는 데에 크게 방해가 되는 ‘걸림돌’입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라는 예수님 말씀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끊어버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재물에서 완전히 마음이 벗어나는 것, 또는 재물을 아까워하는 마음을 마음속에서 모두 제거하는 것.>
예수님 말씀은 ‘가장 큰 계명’에 연결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하느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글자 그대로 ‘모든 것’입니다.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다른 것이 들어가면 안 됩니다. 이것을 수학 공식처럼 표현하면, “나 – 하느님 = 0”입니다.>
그 ‘부유한 젊은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많은 재물 때문에,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자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재물 때문에 하느님을 향한 ‘일편단심’이 되지 못하고, 마음이 갈라져 있었던 것입니다.
3) ‘버림’에 대하여,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했던 유명한 말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필리 3,7-9ㄱ.11) ‘쓰레기’는 ‘쓰레기’일 뿐입니다. 너무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다가 그 ‘쓰레기’가 큰 걸림돌이 되어버리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간에, 버려야 할 것을 버리는 것은 ‘신앙인의 지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재물에 대해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1티모 6,7-10ㄱ)
<‘공수래공수거’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특히 장례를 치를 때에는 누구나 그것을 생생하게 실감합니다. 그런데도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립니다.>
4)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라는 말씀은,
ㅡ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십계명을 아무리 잘 지켜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영원한 생명만을 추구해도, 예수님 없이는 안 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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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나를 옭아매는 것>
주머니에 돈을 넣고 다니면 흐뭇합니다. 언제든지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쓰지 않아도 든든합니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불안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생깁니다. 저는 주머니에 돈을 넣고 다닙니다. 평상시에는 아무 생각이 없다가도 간혹 주머니에 돈이 없는 것을 알게 되면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주머니를 비워놓던 사람은 그런 것에 자유롭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답을 알려 주셨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19, 21) 그러나 젊은이는 답을 얻었으면서도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답을 얻었으면 그대로 해야 합니다. 답을 얻었으면서도 그대로 하지 않아 하늘의 보화를 차지하지 못하는 것은 본인의 책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면서 길을 알려 주시고 동행하여 주시지만, 본인이 거부하는 데는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 부자에게는 돈이 전부입니다. 그의 재산은 곧 목숨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은 단순히 자선을 베풀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죽이라는 말씀입니다.재산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이 있으니 문제입니다.
사람 나고 돈 났다는 것을 알지만 돈에 매이는 것이 사람입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아프리카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돕는 젊은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돈 때문에 형제 부모도 없는 사람처럼 싸우는 사람들의 추한 모습을!
주목할 것은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이라는 말씀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공로를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공로로 구원을 얻지 않고 주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총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재물로부터의 자유를 갖는 것이기도 하지만 주님을 우선으로 선택하라는 요구입니다. 학식도 명예도 권력도 재물에 속합니다. 그러한 것을 지니면 지닐수록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마음을 빼앗길 수 있는 것은 다 재물로 볼 수 있습니다. 훌훌 털어버리고 먼저 따름으로써 주님께서 주시는 더 큰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그리고 항상! 주님”을 앞세울 수 있는 은총이 함께 하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5) 버림으로써 얻는 신비에 눈뜨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이라는 것은 또 다른 무엇으로부터의 옭아 매여 있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만을 갈망하여 세상 것에 자유로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는 아가에 대한 강론에서 “사랑은 그 자체로 만족을 줍니다. 사랑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닌 그 자체로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공로도 되고 상급도 됩니다.
사랑은 그 자체 말고는 다른 이유나 열매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열매는 사랑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합니다.
사랑은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참된 사랑이라면 자신의 시초로 되돌아가고 자신의 기원으로 돌아서며 자신의 원천으로 되 흘러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항상 자신의 물줄기를 받아야 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주님에게서 모든 것이 솟아납니다. 주님을 오롯이 사랑한다면 무엇이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포기할 수 있고, 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하면 하늘의 보화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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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비결을 묻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아는 사람이 주님께 가까이 옵니다. 오늘 복음은 가진 것이 많지만 자기 생명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고 이를 해결하고 싶은 어떤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다가가 무엇을 청합니까?
오늘 복음의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청합니다. 올바른 이스라엘 사람은, 다시 말하여 올바른 신앙인은 필요한 온갖 것을 하느님께 선물로 받는다는 것을 압니다. “땅”(시편 135[134],12)과 ‘율법’(119[118],111 참조), ‘축복’과 ‘약속’(히브 6, 14-15 참조) 그리고 ‘하느님 나라’(마태 25,34 참조)를 받은 사람입니다. 무엇보다도 그와 우리는 하느님께 “생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착한 행실의 대가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그분의 선물입니다.
그가 계명을 다 지켜 왔다고 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오늘 복음의 어떤 사람은 이름이 없습니다. 이것은 그 “어떤 사람”이 바로 ‘우리 모두’라는 것을 표현하고자 복음사가가 고른 말입니다. 이상적인 신자는 하느님께서 주신 좋은 것을 형제들과 함께 나누는 사람입니다. 복음에서 부자 청년은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의 현존과 그분의 말씀이 효과를 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안락하고 안전한 삶을 보장하여 주는 재물을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부를 선택하는 대신 슬퍼하며 떠나간 사람, 그는 앞으로 더 슬프고 힘들 것입니다. 진정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마음가짐은 어떠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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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전수홍 안드레아 신부님]
<부자 청년>
오늘 복음에서는 한 부자 젊은이가 자신의 재물 때문에 구원에서 멀어져간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젊은이는 예수를 찾아와서 "제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슨 선행을 해야 합니까"하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여러 가지 계명을 들면서 이 계명들을 잘 지키라고 답하십니다
그러자 부자 젊은이는 "그런 것은 다 지켰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하고 의기양양해서 다시 묻습니다. 아마 나름대로는 이 젊은이가 윤리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충실하게 살았던 인물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예수의 마지막 대답은 결정적입니다.
"당신이 완전해 지려거든 가서 당신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시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시오"라고 청빈에 대한 확고한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아마 예수께서는 그이가 부자였음을 이미 알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이에 부자는 갈등합니다. 그리고 근심하면서 예수를 떠나갑니다.
이 내용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점을 시사합니다. 내가 가진 여분의 것도 남에게 주는 것이 아까운데 가진 것 모두를 주라니, 어찌보면 예수의 요구는 너무 무리한 요구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 요구는 예수를 따르는 우리 신앙인들에 대한 실존적인 결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말은 신앙인라고 하면서 적당한 세속과의 타협을 바라고 세속과 양다리를 걸치면서 자신에게 이득이 되면 기꺼이 신앙을 버릴 수도 있는, 그래서 신앙이 마치 요술도깨비 방망이나 악세사리같은 도구가 되어버린 인간들에게 참된 신앙의 길을 살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얄팍한 계산법과는 다르게 주어집니다.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일상에서 일어나는 순간적인 선택들인 작은 일에서부터 자신을 비우는 일을 과감하게 실행할 때, 우리 자신도 모르는 방법으로 반드시 더 큰 은총이 주어짐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점과 관련해서 한 예화가 생각납니다. 어떤 이가 천당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3가지의 의문을 지닙니다.
첫째가 나같은 인간이 어떻게 천당엘 왔을까 였습니다. 다음으로 가진 의문이 저런 인물이 어떻게 천당엘 왔을까 였습니다. 세 번째로 가진 의문이 그 사람이 왜 천당엘 못 왔을까 였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의 눈과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판단하는 것은 마치 개미가 인간을 판단하는 것보다도 더 어리석은 일입니다.
형제 자매여러분, 신유박해가 있은 지 200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선조 신앙인들도 당시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만 보이고 사악한 사람들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준 불굴의 신심과 피를 흘려 순교하기까지 그리스도를 증거하려 했던 용기는 200년이 지난 오늘날 성인이라는 월계관을 받게 되어 온 세상사람들로부터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진정 그들은 오늘 복음의 부자 청년과는 달리 가진 것을 모두 포기했습니다. 그들이 흘린 피와 신앙에 대한 불굴의 정신은 단지 일회적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면면히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박해의 목적은 신앙을 버리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버리고 있습니까? 현대에는 무슨 박해가 있기에 그리합니까?
칼을 들이대는 물리적인 박해는 아니지만 교묘하게 다가오는 현대적 박해에 대한 현대적 의미의 순교는 어떤 것인지 오늘 이 강론을 통해 묵상해 봅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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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판관 시대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주 우상을 섬겼습니다. 주님의 계명에 순종한 조상들의 모범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우상 숭배는 하느님을 섬기겠다는 약속에 대한 배반이므로 다른 신을 섬기는 불륜으로 여겨졌습니다.
이것은 신약 시대에 더욱 심화되어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콜로 3,5) 하고 명시하였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불륜과 욕정, 나쁜 욕망과 탐욕을 섬기지 말고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 청년은 가진 것이 많아 하늘 나라의 보물 곧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예수님 곁을 떠납니다. 우리는 자기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지 못한 부자 청년의 모습을 보고 ‘재물과 탐욕’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재물 자체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그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혀 살게 됩니다.
자칫하면 자신의 선행과 재산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장사꾼이 될 수 있습니다. 유다 라삐들은 율법을 온전히 지킬 때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은 율법을 외면적인 삶에서 잘 지킬 수 있지만, 내면의 탐욕을 완전히 없앨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율법을 잘 지키며 윤리적으로 결함이 없는 삶’이 완전한 삶이 아님을 부자 청년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포기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완덕의 길에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성 비오 10세 교황처럼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쇄신”하면서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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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덩치 큰 사람들도 자기 덩치에 맞지 않게 두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벌레입니다. 이 벌레보다 엄청나게 큰 몸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벌레 한 마리 나타나면 황급히 도망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커다란 거미를 보여 주고는 “이 징그러운 거미가 당신에게 뛰어오를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거미 근처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사실 거미는 벼룩처럼 뛰어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뛰어오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 귀여운 거미는 가만히 있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았고 가까이 다가가서 보려고 했습니다.
어떤 이름표를 다느냐에 따라 생각과 행동이 바뀔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실험이었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이름표를 붙이곤 합니다. ‘돈 없이는 살 수 없어, 돈이 최고야, 일등을 해야 해,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해.’ 등의 이름표로 삶 안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름표를 주님께서 원하실까요? 이런 이름표가 잘못되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 청년 이야기를 오늘 복음에서 봅니다. 한 젊은이가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곧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는 이미 율법을 지키는 신앙인이었지만, 더 완전한 길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율법 준수만으로는 완전한 평화와 만족을 얻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삶의 관심사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이름표에 의지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께 의지하는 이름표를 달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슬퍼하며 떠나가게 됩니다. 재물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표에는 ‘재물’이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던 것이지요.
이름표에 주님의 뜻이 가득 담긴 사랑이 적혀 있어야 했습니다. 사랑이 적혀 있지 않다면,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주님을 제대로 따른다고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이름표에 적혀 있는 것이 지금 우리가 의지하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디에 의지하고 있습니까? 재물인가요? 아니면 주님인가요? 세상의 것들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시는 주님 말씀을 기쁘게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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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존재적 전환>
오늘 우리는 참으로 중요한 질문을 해 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오늘 복음에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하는 질문은 루카복음(10,25)에서는 율법학자가 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 19,16)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마태 19,17) 생명을 얻는 길이 ‘계명을 지키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곧 ‘주님께 속한 사람’이 생명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의 길은 ‘행위’를 하는 데 달려 있기보다 ‘존재’가 되는 데에 달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러한 뜻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마태 19,20) 하고, 다시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이 말씀은 잘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자칫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자신이 가진 재산을 팔라”, “그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 그리고 “당신께로 오라”, “그리고 당신을 따르라”는 네 가지 행동의 실행으로 알아듣기 쉽습니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더 깊은 차원의 말씀입니다. 곧 네 가지의 ‘행동의 전환’을 말씀하기보다, 그렇게 행동하게 하는 ‘존재의 전환’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니 이 문장의 핵심은 뒤 구절에 있습니다. 뒤 구절은 당신께로 와서 당신을 따르는 존재, 곧 ‘당신께 속한 사람’, ‘당신의 소유’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 부자 청년은 자기 자신에게 속해 있었고, 그래서 자신의 행위를 쥐락펴락하는 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자기의 재물에 속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따르고 재물을 따랐던 것입니다. 곧 자신이라는 우상, 재물이라는 우상을 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 속한 사람’,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존재적 전환’을 요청받은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말씀이 그 부자 청년을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를 가리고 있는 껍데기의 옷이 발가벗겨지고, 자신의 실상이 드러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마태 19,22) 그렇습니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 곧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무슨 위대한 행위를 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소유’, ‘주님께 속한 존재’가 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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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21)
주님!
주님께서는 저의 허울을 벗기십니다.
제 자신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으면서도 타인을 위해서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이기심의 옷을 벗기십니다.
이제는 이기심과 자애심을 버리고 가진 것을 다 나누게 하소서.
나아가, 낮은 이를 섬기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던 당신을 위하여 하고, 당신께 찬미와 영광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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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전보다 완전해졌는가?>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오늘 주님 말씀은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다른 두 복음은 오늘 주인공을 그저 어느 부자라고 하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오복음만 부자가 젊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젊은이에게 완전한 자가 되려면 이렇게 하라고, 곧 포기-나눔-따름을 완전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저는 이제 젊은이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복음의 젊은이와 비교해서 그리고 저의 젊었을 때와 비교해서 완전해졌는가? 완전해지는 것까지는 하지 못했을지라도 좀 나아지기는 했는가? 묵상했습니다.
첫째 포기 면에서 나는 완전해졌는가?
옛날과 비교하여 외형적으로는 제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물론 옛날이나 지금이나 소유 욕심 차원에서 소유하지 않고, 필요하기에 소유하고 있는데 언제든 포기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신감 때문인지 아니면 자기합리화 때문인지 전에 비해 저는 필요를 엄격히 제한하지 않고 있고 그래서 더 많이 소유하고 있으며 완전 면에서 오히려 퇴보했습니다.
둘째 나눔 면에서 나는 완전해졌는가? 앞서 포기 면에서 저는 전보다 퇴보했다고 했는데 제가 더 많이 소유하게 된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곧 저는 내가 가지고 있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누겠다는 생각으로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나눌 수 있는 제 것이 제게 어디 있습니까? 다 여러분이 주신 것이고 그것을 돌리는 것이요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제게 주신 것이고 그것을 돌리고 나누는 것이지요.
이 면에서 저는 옛날보다 완전해졌는지 분명치 않지만 나아진 것은 분명하고 적어도 자유로워진 것 같습니다.
셋째 따름 면에서 완전해졌는가? 앞서 봤듯이 포기 실천과 나눔 실천 면에서 주님을 잘 따랐다고 할 수 없고, 나아졌다고도 할 수 없지만 더 문제는 인격적인 따름입니다.
이 얘기는 이런 뜻입니다. 제가 이 세상 사는 동안 주님을 닮고 주님께서 실천하신 것을 따라서 실천하는 것도 따름이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절실한 것은 실천을 따라서 하는 정도가 아니라 주님을 떨어지지 않고 따라가 마침내 아버지 하느님께 가는 따름이지요.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을 따름도 중요하지만
주님을 따라서 저세상에 가는 것이 이제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내가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많은 것처럼 살려고 합니다. 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 죽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오늘 이렇게 제 얘기하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너무 제 얘기를 한 것 같아 죄송한데 그래도 시간이 없으니 이렇게 끝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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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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