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트렌트공의회
대체로 개신교의 종교개혁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가톨릭의 반종교 개혁운동은 1540년대의 트렌트회의(Council of Trent)의 교리확정을 통하여 가톨릭 정통주의로 굳어졌다. 이 트렌트회의의 교리선언은 1870년의 제 1차 바티칸공의회(the first Council)를 거쳐 제 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년) 이전까지 가톨릭의 신학전통을 주도하게 될 것이었다. 반종교개혁은 어떤 의미에서는 개신교의 종교개혁을 의식하며 진행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가톨릭의 개혁은 요한 23세가 그 이전의 전통을 쇄신한 제 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트렌트공의회에 나타난 교황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는 당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추구하고 있던 절대 왕정의 중앙 집권체제와 충돌하였고 민족주의와 갈등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같은 가톨릭을 믿으면서도 교황 중심으로부터 이탈하려는 여러 움직임이 있었다. 한편, 가톨릭의 지나친 반개신교적 흐름은 오히려 가톨릭내의 개신교적 신학사상을 자극하기도 하였다.
2. 갈리칸이즘(Galicanism)
개신교의 종교개혁에 대하여 교황이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트렌트회의는 다시 가톨릭교회에 대한 교황의 권위와 위엄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민족주의와 절대군주체제가 점차 강화되면서 유럽의 민족주의자들과 여러 왕들은 가톨릭신자이면서도 교황 중심의 중앙집권체제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것이 가장 현저하게 나타난 곳은 프랑스였다. 이 프랑스 가톨릭의 독립적 움직임을 '갈리칸이즘'이라고 한다. 갈리칸이즘이란 말은 고대 프랑스 지방을 나타내는 'Gaul'에서 유래하였다. 이에 반하여 교황의 권위를 옹호하는 무리들은 ultramontanes라고 불린다. 이것은 '산 너머'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교황이 알프스산 너머까지 그의 권위를 갖는다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다.
일찍이 중세 말엽 교황청이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겨지는 등 프랑스의 지배 아래에 있을 때에 프랑스의 왕들은 교황으로부터 프랑스교회의 자율권을 확보하였다. 프랑스가 트렌트회의의 중앙집권적 교령들에 반대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른 '갈리칸교회의 옛 자유'라는 전통 때문이었다. 교황의 중앙집권화에 반대하는 프랑스인들 가운데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출발한 이들도 있었고, 교회의 권위가 교황의 독점물이 아니라 감독들에 있다는 주장에 근거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찌되었든 프랑스는 트렌트회의의 교리선언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헨리 4세가 거듭되는 협상 끝에 트렌트회의의 선포에 동의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국회는 그것을 절대적으로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헨리 4세가 암살당한 지 5년 만인 1615년에 이르러서야 그동안 프랑스 당국에 의하여 수용되지 않았던 트렌트회의의 선포가 ultramontanes계열의 프랑스 교직자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졌다. 갈리칸의 자유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여기서도 트렌트회의의 교리선포가 프랑스에서 타당성을 갖느냐 하는 문제를 프랑스 사람 스스로 결정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3. 페브로니안이즘(Febronianism)
프랑스에 갈리칸이즘이 있었다면 독일에는 페브로니안이즘이 있었다. 독일의 가톨릭은 18세기 계몽주의에 영향받으면서 교화의 권위에 대하여 거부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페브로니안이즘이란 말은 1763년 독일 트리에르(Trier)의 부주교 혼트하임(Johann Nikolaus von Hontheim)이 '교회의 지위와 로마 교황의 정당한 권세'(The State of Church and the Legitimate Power of the Roman Pontiff)를 페브로니우스(Justin Febronius)라는 가명으로 출판함으로써 유래하였다.
페브로니안이즘은 교회를 믿는 자들의 공동체이고 이 교회의 대표인 감독들이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교회의 최고의 권위는 교황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교회의(a council of bishops)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중세 말의 공의회주의(Councilianism)와 1962년의 제 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에 가까운 것이다. 교황 클레멘트 13세는 이 작품을 정죄하였지만 이 책의 사상은 널리 유포되었다. 어떤 이들은 이 사상에서 공의회를 통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통합을 생각하기도 하였고, 어떤 이들은 이 사상이 자신들의 민족주의와 어울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넓은 교구를 관할하는 감독들은 로마 주도의 개혁에 반대하려는 수단으로 이것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4. 조셉피즘(Josephism)
페브로니안이즘이 비엔나의 황실에서는 다른 특징을 띠고 나타났다. 학문을 숭상하며 자유주의를 선호하는 황제 요셉 2세(1765-1790년)는 자신의 영토 안에서 여러 가지 개혁을 계획하였다. 그는 이러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교회의 지지를 원했으나 고답적이고 반지성적이며, 반개혁적이며 비관용적인 트렌트회의에서 이것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교역자의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너무 전통에 집착하는 수도원을 폐쇄하고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였다. 이렇게 그는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방향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렇게 되자 다른 영주들도 황제의 모범을 따르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1764년에 페브로니안이즘을 정죄한 로마 교황청을 1794년에 조셉피즘 역시 정죄하였다.
이즈음에 예수회(Jesuits)가 해체되었다. 예수회가 교황청의 비관용정책을 강력히 수행한 것이 30년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여러 나라에서 크게 불신을 당하였다. 또한 예수회가 식민지 무역에 종사하는 것과 정치적으로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 특히 이성주의자들의 미움을 샀다. 더욱이 18세기의 절대 군주들은 교황청의 군대와 같은 예수회를 용납하기 힘들었다. 특히 프랑스의 부르봉(Bourbon)왕가는 그의 강력한 경쟁자인 합스부르크(Hapsburg)가를 일관성있게 지지해 온 예수회에 대하여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부르봉가가 세력을 얻고 합스부르크가가 기우는 상황에서 예수회는 아주 어려운 처지에 처하게 된 것이다. 1758년 예수회는 포르투갈의 요셉 1세에 대한 암살기도의 혐의를 받고 다음해에 포르투갈 본국과 식민지에서 추방당하고 재산도 몰수당했다. 프랑스에서는 예수회가 1764년에 억압을 받았다. 3년 후에 스페인의 찰스 3세는 스페인의 영역에서 예수회를 축출하였다. 나폴리(Naples)의 페르디난트 4세도 그의 아버지 찰스 3세의 뒤를 따랐다. 드디어 부르봉 왕가는 전세계에서 예수회를 제거하려는 시도를 감행했다. 1769년, 로마 주재 부르봉 대사들은 예수회의 해체를 요구하는 합동결의문을 교황에게 제출하였다. 결국 1773년 교황 클레멘트 14세는 예수회의 해체를 명령하였다. 이상에서 보듯이 트렌트공의회가 교황의 중앙집권체제를 주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갈리칸이즘, 페브로니안이즘, 조셉피즘 및 예수회의 해체를 통하여 교황의 권력과 권위가 오히려 약화되었던 것이다.
5. 얀센이즘(Jansenism)
트렌트회의는 루터와 칼빈의 은총론과 예정론을 정죄한 나머지 어거스틴의 은총의 신학을 거부하는 경향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거스틴의 은총의 신학을 부활시키려는 가톨릭 내부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것은 루터와 칼빈의 은총의 신학으로의 반작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세는 제베르크(Seeberg)의 말대로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라기보다는 반어거스틴주의(Semi-Augustinianism)를 지향했다. 그러므로 9세기경 고트살크(Gottschalk)는 극단적인 어거스틴주의로 나가다가 정죄되었다. 따라서 어거스틴주의를 따르는 17세기의 얀센이즘 역시 벽에 부딪힐 것이 당연했다.
16세기 말 스페인의 살라망카대학의 예수회는 몰리나(Luis de Molina)의 지도 아래 예정론을 예지론에 근거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현재 수행되어지는 인간의 행위(공로)르 하나님이 미리 예지하신다는 내용이다. 이에 대하여 당시 유력한 신학자였던 도미니칸의 바네즈(Domingo Banez)는 이 주장이 어거스틴신학에 모순되므로 정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양측은 모두 스페인의 종교재판소에 서로를 고발하였다. 예수회는 도미니칸을 칼빈주의라고 비난하였고, 도미니칸은 예수회를 펠라기우스주의라고 하였다. 결국 종교재판소는 이 문제를 교황에게 넘겼고 교황은 오랜 망설임 끝에 양측의 고소가 틀렸다고 하면서 서로에 대한 공격을 자제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와 비슷한 신학 논쟁이 벨기에의 루벵대학에서도 일어나서 파문을 크게 일으켰다. 바이우스(Michael Baius)가 어거스틴을 따라 죄악에 물든 의지가 결코 선을 행할 수 없다고 주장하자 이에 대하여 교황 비오 5세가 바이우스의 작품들로부터 79개의 명제를 뽑아 정죄한 것이다.(1567년) 바이우스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한다고 해놓고도 계속해서 비슷한 내용의 교리를 가르쳤다. 이에 한 예수회의 신학자가 바이우스를 공격하자 루벵 대학의 교수회는 이 예수회 신학자를 펠라기우스주의자라고 낙인찍어 버렸다. 다시 여러 교황이 계속해서 어거스틴주의를 억누르려 하였지만 바이우스의 신학은 루벵대학에서 더욱 확산되었다. 그래서 이로부터 60년이 지난 1640년에 바이우스의 신학은 얀세니우스(Cornelius Jansenius)의 작품 속에 다시 등장하였다. 그의 사후에 출판된 '어거스틴'은 바로 어거스틴의 은혜와 예정론에 대한 연구서였다. 그런데 얀세니우스가 어거스틴에게서 찾아낸 것이 칼빈의 신학에 매우 유사하였기 때문에 교황 우르반 7세는 1643년에 이를 정죄하고 말았다. 17세기는 이와 같이 정통주의의 시대답게 신학적 주장을 정죄하는 일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논쟁이 이것으로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에서 셍시랑(Saint-Cyran)으로 더 잘 알려진 듀베르지에(Jean Duvergier)와 Port-Royal수도원의 수녀들에 의하여 얀센이즘의 봉화가 올려진 것이다. 이 수도원은 성안젤리크(Mother Angelique)의 지도 아래 경건과 개혁의 중심지였고, 셍시랑은 이 얀센이즘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다. 한때 리쉘리위는 이 같은 개혁자들의 신앙적 열심이 그의 정치적 계획을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셍시랑을 투옥하였다. 셍시랑은 이미 죽은 친구 얀세니우스의 주장이 정죄되던 1643년에 풀려 나서 이 운동의 투사가 되었다. 그리고 Port-Royal 수도원은 이 운동의 본부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 얀센이즘은 은총과 예정에 대한 교리라기보다는 열정적인 신앙 개혁운동을 대표하였다. 하나의 행위가 올바르다는 개연성만 있으면-이 개연성이 아무리 희박한 것일지라도-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있다는 예수회의 개연론(probabilism)이 얀세니우스주의자들에게는 도덕적 무관심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엄격한 훈련을 제안하였고, 그 결과 Port-Royal수도원의 수녀들은 '천사처럼 순결하고 악마처럼 교만하다'고 전해지게 되었다.
셍시랑은 풀려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지만 앙젤리크의 형제인 아르놀(Antonie Arnauld)과 철학자 파스칼(Blaise Pascal)이 이 정신을 계승했다. 어려서부터 물리학과 수학에 천재성을 보이던 파스칼은 죽기 8년 전인 31세 때에 얀센이즘으로 개종하였다. 이 개종을 그에게 있어서 심오한 종교적 체험이었고 그의 여생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다. 소르본느대학의 교수회가 아르놀을 정죄했을 때, 파스칼은 Provincial Letters의 첫 장을 출판했다. 이것은 한 시골 사람이 파리의 예수회 사람들에게 보낸 해학과 기지가 넘치는 편지였다. 이것은 널리 읽히게 되면서 금서목록에 들어갔다. 한동안 파리의 지식인과 귀족 사이에 얀센니우스주의자가 되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다.
그러다가 루이 14세 때 얀센이즘에 대한 반작용이 일어났다. 루이 14세는 이 같은 종교적 열심이 소종파주의를 낳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교직자들의 총회 역시 이 운동을 정죄했고 Port-Royal수도원의 수녀들은 해산되었다. 루이 14세가 그의 갈리칸이즘에도 불구하고 교황 알렉산더 3세의 지지를 요청해야 하는 상황에서 교황은 모든 교역자에게 얀센이즘을 거부할 것을 명령하였다. 알렉산더 3세의 후계자 때 잠시 관용적인 정책이 펼쳐졌다. 수녀들이 Port-Royal 수도원에 돌아오는 것이 허락되었으며, 아르놀을 추기경으로 삼으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다시 아르놀을 추방당하여 죽었고, 루이 14세는 점점 비관용적이게 되었으며, 교황 클레멘트 11세도 다시 정죄를 되풀이했다. 1709년, 경찰은 수도원을 차지하면서 나이많은 수녀들을 쫓아 버렸다. 그래도 사람들이 떼를 지어 수도원 묘지를 순례하자 무덤들은 파헤쳐져서 개들의 먹이가 되었다고 한다. 클레멘트 11세는 1713년에 교령"Unigenitus"를 내려 얀센이즘을 확정적으로 정죄하였다.
하지만 훗날에도 얀센이즘은 계속 살아 남았고 심지어 성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얀센이즘은 얀센니우스의 가르침과도, 셍시랑과 앙젤리크의 개혁 열정과도, 파스칼의 심오한 종교성과도 거의 무관하게 되었다. 얀센이즘이 갈리칸이즘에 가까운 정치적이고 지성적인 운동으로 변한 것이다. 하급교직자들은 상급교직자의 풍요로움에 항거하는 수단으로, 민족주의자들은 로마가 프랑스에 간섭하는 것을 반대하기위한 수단으로, 합리주의자들은 교리적 권위주의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이 운동에 가담하였다. 결국 얀센이즘은 사라졌다. 그러나 이것은 정죄와 박해 때문이 아니라 그 사상의 본질이 퇴색되었기 때문에 사라진 것이다.
6. 정적주의(Quietism)
가톨릭 안에서 일아난 또 다른 중요한 논쟁은 정적주의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1675년 스페인의 몰리노스(Miguel de Molenos)가 출판한 Spiritual Guide에서 유래한다. 몰리노스는 어떤 사람에게는 성자로 어떤 사람에게는 엉터리 학자로 불렸다. 그의 Spiritual Guide와 Treatise on Daily Communion은 큰 논쟁을 일으켰다. 이것을 읽고 어떤 사람은 그를 이단이라했고, 어떤 사람은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적 경건의 최고의 형태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몰리노스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전적 수동성을 주장하였다. 신앙인은 단순히 사라져야 하고, 죽어야 하고, 하나님 안으로 몰입되어야 한다. 어떤 형태의 행동주의(Activism)도 -그것이 몸의 행동이든 영혼의 행동이든-거부되어야 한다. 명상은 순전히 영적이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인성을 포함하여 물리적이거나 가시적인 어떤 수단과도 상관없다. 금욕적 훈련도 다른 형태의 행동주의이기 때문에 배격한다. 영혼이 신적인 것에 대한 명상에 빠질 때 영혼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게 된다. 심지어 이웃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러한 가르침은 큰 반대에 부딪혔다. 먼저 이것은 기독교 교부들의 가르침이라기보다는 회교의 신비주의에 유사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 이 몰리니즘은 교회의 중요성과 그 권위를 무시하고 정치적, 사회적 참여를 일체 거부하는 은둔주의(Privatism)라고 비난받았다. 종교재판소도 처음에 몰리노스를 지지하다가 이 가르침이 신자의 도덕성을 해이하게 할 것이라는 고해신부들의 항의를 받았다. 이때 몰리노스가 그의 추종자에게 도덕적 방종을 부추키며 여성과 스캔들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1685년, 몰리노스와 몇 명의 그의 제자가 교황청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그는 종교재판정에서 그 어떤 억지 고발에도 자신을 변명하지 않았다. 이 침묵은 그의 예찬론자에게는 정적주의의 실천으로 여겨졌고, 고발자에게는 유죄를 증명하는 것으로 주장되었다. 몰리노스는 종교재판관의 명령에 따라 그의 주장을 겸손히 철회하였다. 이것은 그의 신념인 정적주의에 충실한 지표로 여겨졌다. 많은 이가 그의 사형을 주장하였지만 교황 인노센트11세는 그를 정적주의의 순교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 11년의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했다.
정적주의는 이제 프랑스로 침투해 들어갔다. 남편을 사별한 기용(Madame Guyon)과 그녀의 고해신부인 라콩베(Lacombe)가 이것을 받아들였다. 이 두 사람은 환상과 체험을 경험한 심오한 종교적 성향의 인물이었다. 주위에 사람들이 모이지 이 둘은 이들의 생활을 지도했다. 기용의 A Short and Simple Means of Prayer는 그녀의 명성을 프랑스 전역에 떨치게 했다. 그후 두 사람은 파리로 이사가서 그들을 예찬하는 여성 귀족들과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기용의 가르침은 몰리노스의 가르침을 더 과격한 방향으로 전개한 것이었기 때문에 혐의를 모면할 수 없었다. 급기야 그녀는 하나님께 산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진실로 혐오하는 죄를 범해야 할 때가 있을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라콩베와의 친밀한 관계와 연루되어 악성 루머를 불러일으켰다. 파리의 대주교는 라콩베를 투옥하고 기용을 수도원에 연금시켰다. 라콩베는 감옥을 전전하다가 정신이상으로 숨졌고, 기용은 왕의 측근의 호의로 풀려 났다.
젊은 감독 페네롱(Francois Fenelon)이 기용을 만난 것이 바로 이즈음이었다. 그는 그녀의 가르침에 동의했지만 그녀만큼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지는 않았다. 마침내 페네롱과 당대의 유력한 프랑스의 신학자 보슈에(Jacques Benigne Bossuet) 사이에 정적주의를 둘러싸고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은 보슈에가 왕의 지지를 받았고 페네롱이 평판 좋은 경건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오래 끌게 되었다. 루이 14세의 압력으로 교황 인노센트 12세는 페네롱의 주장 중 일부를 배격할 것에 동의했지만 교황은 그것이 오류로 인도할 수도 있다는 조심스러운 내용으로 판결하였다. 이러한 교황의 결정에 대하여 페네롱이 아주 겸손하게 순종하였기 때문에 보슈에는 대중들에게 공연히 훌륭한 동료를 욕보인 교만한 사람으로 낙인찍혔다. 그후 페네롱은 Cambray의 주교직을 맡으면서 그의 모든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아주 훌륭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그는 위고(Victor Hugo)의 Les Miserables의 주인공(Monseigneur Myriel)의 모델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트렌트공의회의 교리선언은 이론상으로 교황의 중앙집권화를 강화시켰고, 교리문제에 있어서 가톨릭의 정통주의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위에서 보듯이 17세기와 18세기 초의 갈리칸이즘, 페브로니안이즘, 조셉피즘, 얀센이즘, 정적주의 등은 교황의 중앙집권화에 대한 항거인 동시에 가톨릭 정통주의에 대한 반대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톨릭은 약화되었고 그 결과 프랑스혁명의 도전에 제대로 응전할 수 없었다. 이처럼 17세기와 18세기 초반에 교권주의와 교리주의의 붕괴를 알리는 여러 징후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이 시대는 곧바로 계몽주의의 18세기로 이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