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식의 계절
한수재(시인, 본지 편집위원)
이름을 가리고 읽으면 누구의 글인지 구별할 수 없는 시집들이 광고판 제목을 달고 진열돼있지만, 사람들은 그 광고판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분량의 자리마저 시는 소설에 경쟁력을 잃었다. 시집 진열대가 점점 좁아지고 구석으로 밀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회가 복잡해지고 분화되고 다양해지면서 삶의 허기를 채우는 일은 점점 더 까다로워지고 있다. 독자들의 입맛을 사로잡지 못하는 지금의 시에서 빠진 것이 무엇일까. 출판사나 잡지사의 이익을 무시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렇게 입이 닳도록 말하고 들었던 돈도 안 되는 시에서 쓰는 사람이나 파는 사람들이 놓친 것과 독자들이 이미 읽었어야 했던 언어들은 어디에 박혀 있는 것일까.
서점에 그나마 얼굴마담처럼 진열돼있는 시집들에서 그만의 언어와 개성을 찾는다는 것은 큰 기대가 되어버렸다. 인간은 각자 개성이 다르고 그 안에서 자란 언어의 성장 배경도 다를 것인데 세상에 던져지는 시는 공장에서 찍어내는 상자 규격처럼 쓰는 공식이라도 있는 듯, 다 비슷하다. 한 철 입으면 갈아입는 백화점 전광판 모델과 큰 차이점을 찾아볼 수 없다. 독자들이 편식할 수밖에 없는 시의 부재는 출판과 잡지, 대형서점이 자본의 구조 속에서 그들만의 잔치로 구축해온 안타까운 문학적 환경도 있겠지만 그 환경에 스스로 먹잇감이 된 시인 자신에게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안전한 언어에 맞춰 불순하고 불온하고 불안정한 자신을 제단, 가공하고, 간혹 들려오는 괜찮지 않은 심장의 괴성을 소음처럼 외면하며, 나여야만 하는 고유의 것들을 거세하면서 남들처럼 잘 쓰고 싶은 쓰기를 연습한다면, 시를 위한 시, 쓰기 위한 쓰기의 한계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진실에 대한 불편함과 배설에 대한 두려움, 결점과 콤플렉스, 그 많은 욕구와 날것의 욕망을 다 지워버린다면 대체 시인에게 뭐가 남는단 말인가. 자신을 형성하고 있는 거북하고 불편한 재료에 값을 매길 수 없는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는 시인뿐이다. 이렇게 써도 저렇게 써도 어차피 안 팔리고, 알려지지 않는다면 무슨 계산이 남아 있어서 나를 지워가며 다른 사람처럼 쓰려고 하는가. 거절에 익숙해질수록 위축되고, 위축될수록 출판사와 잡지사의 입맛에, 혹은 그 많은 문학상에 혈안이 되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는 간다. 어느 시인이 한 문학상을 타기 위해 2년 넘게 고생하며 가슴앓이 했다는 소리를 듣고 시인이란 호칭이 낱장처럼 가볍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다. 2년 뒤에 시인은 원하던 문학상을 탔다. 이름도 제법 알려졌다. 그다음 해에 전혀 다른 기관에서 수상한 작품상이 한 해 전 문학상과 어투가 비슷해서 같은 사람인가 확인해보니 다른 사람이었다. 결국 나는 두 시인의 이름을 기억할 수 없었다. 한 사람이 썼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표현과 문장들이었다. 표절이란 이야기가 아니다. 그 언어에서 누가 뭐라고 해도 특별했을 유일한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시대마다 문학적 흐름이 있고, 그 흐름은 비슷한 유형의 글들을 쓰게 하지만, 시는 유행이 될 수 있어도 존재는 유행이 될 수 없다. 내 글의 문제점과 요즘 시의 흐름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공부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겠으나, 잘 쓰지 않아도 스스로 괜찮은 쓰기, 내 글에 내가 흡족할 수 있는 쓰기여야 할 것이다. 쓰기에 대한 욕심이 타인과의 비교에서 오는 경쟁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이해와 설득이 되어야 하며 그 심사의 기준 또한 심사위원도 독자도 출판사도 아닌 시인, 자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쓰는 사람은 넘쳐나지만, 시인도, 시도 없는 요즘, 자기에 미쳐있는, 언어와 문장에서만큼은 눈치도, 배려도 없는, 이기적인 나만을 위한 쓰기, 진짜 자신의 이야기를 가진 진짜 글쟁이들이, 장르적인 시들이, 그렇게 이름을 얻은 시들이 누군가의 허기와 갈증을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가끔 육체가 단호해질 때가 있다. 그런 때는 늘 먹던 음식들을 삼킬 수가 없다. 몸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몸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간파하는 것이 중요해질 때, 정신과 마음을 지배하는 신전의 육체 앞에 한없이 작아지곤 한다. 내 몸을 알아가는 만큼 읽히는 나 자신을 가만히 관찰할 때의 차분한 흥분을 설명할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늘 쓰던 쓰기를 멈추고 늘 읽던 읽기를 멈추는 쓰기의 식이장애는 시인에게는 더 없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시인이 단호해졌으면 하는 계절,
아무것도 쓰지 않은 시인의 백지가 신의 거울인 듯….
시는 생각도 하지 않고,
시인이 편식했으면, 아니 쓰기의 식이장애를 얻었으면 하는 (염병의) 계절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