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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의 여자
새해 벽두 광복로 입구 B살롱에서 가진 문학동아리 신년회 뒤풀이. 뜻밖에도 난 이곳에서 청마 유치환의 여자에 관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문학하는 사람이라면 청마가 5천통이나 되는 연서로 플라토닉 사랑을 불태웠던 정운 이영도 시조시인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런데 이날 뒤풀이 참석자 중에서는 생전의 청마에겐 정운 말고도 반희정 등 몇몇 여자가 더 있었다는 말을 전했다. 청마의 여자에 관한 얘기를 듣노라니 연전에 찾았던 정운의 생가가 떠올랐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푹푹 찌는 폭염에도 문학기행은 예정대로 진행되어 일행은 정운의 생가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 그랬지만 생가 대문은 굳게 잠겼고 적막감마저 감돌아 방문자들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말았다. 철문 손잡이는 녹슬었고 마당엔 잡초마저 무성하여 황성옛터를 방불케 했다. 경주에서 열린 ‘전국수필의 날’ 행사를 마치고 다음날 귀로에 들렀던 터라 생가를 들어서지 못한 아쉬움은 다소 덜한 편이었다.
정운은 당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조시인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청마의 여자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찻길에서 생가로 꺾어드는 골목 담벼락엔 짙은 초록색 넝쿨에 매달린 화사한 능소화가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에 몸살이라도 앓듯 작열하는 태양을 향해 농염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다시 찾지 않는 임금을 오매불망 그리다가 애절한 유언을 남기고 쓸쓸히 세상을 등진 궁녀 소화의 전설을 간직한 꽃이라 더욱 애잔한 느낌이 들었다.
생가에서 가까운 곳 길가에 정운과 그녀의 오빠인 이호우 시조시인의 시비공원이 마련되어 있어 남매가 남긴 문학의 발자취를 더듬을 수 있었다. 미모와 재색을 고루 갖춘 정운은 스물한 살에 출가하여 딸 하나를 낳았다. 하지만 스물아홉 젊은 나이에 폐결핵 남편을 잃고 홀로 살다가 광복되던 해 가을 통영여중 가사교사로 부임하면서 청마와의 운명적인 만남은 시작된다. 청마는 일본의 주일학교에서 만난 여자와 결혼한 후에도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서른이 되어서야 고향인 통영의 여중학교 국어교사가 된다.
청마는 정운의 미모와 요조숙녀다운 자태를 만나자 첫눈에 반해버리고 만다. 일제하의 방황과 고독에 지쳐있었지만 남보다 피가 뜨거운 서른여덟 살의 청마는 스물아홉의 청상과부 정운을 만나자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불길이 치솟아 올랐던 것이다. 정운은 교사생활을 하면서도 중앙동 우체국 부근 언니의 가게 안에서 부업으로 수예점을 운영했다. 청마와 정운은 점차 서로 깊이 빠져들지만 현실은 둘 사이의 사랑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건널 수 없는 강을 사이에 놓고 두 연인은 편지로 다리를 놓기 시작한다.
그 다리는 어쩌면 건너기 위한 다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건널 수 없는 강만 있는 게 아니라 건널 수 없는 다리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 두 사람이었다. 청마는 부인이 마련해준 집필실 '영산장'에서 연애편지를 쓴 뒤 걸어 나와 수예점에 있는 정운을 한동안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바로 옆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다. 주위의 이목이 있으니 바로 옆에 두고도 만나지 못하고 편지만 보내야 했던 청마는 얼마나 가슴을 태웠을까. 그 편지를 받아든 정운의 마음은 또한 어떠했을까. 편지는 첫 만남 후 청마가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숨지기 전까지 계속된다.
청마가 세상을 등진 1967년 바로 그해 정운은 청마로부터 받은 연서를 모아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서간집을 펴냈고 이 책은 바로 베스트셀러가 된다.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2만5천부가 팔렸다. 청마가 작고한지 한 달 만에 정운이 책을 펴낸 것을 두고 여기저기서 청마를 이용해 책을 팔아먹는다는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다. 이에 대해 정운은 자신이 먼저 서간집을 내지 않으면 다른 여자들이 낼지 모르기 때문에 서둘러낸 것이라고 해명했다. 정운에게 중요한 것은 청마의 가장 소중한 사랑은 자신이었다는 것을 세상으로부터 확인받는 일이었다.
그래서 책의 인세는 후일 ‘정운문학상’의 기금으로 적립되었다. 물론 이 부분은 죽을 때까지 간디와의 사랑을 발설하지 않았던 간디의 연인 미라와 비교되기도 하지만 어느 쪽이 옳은지를 따질 일은 못된다. 모두에서 밝힌 대로 정운은 청마가 자신에게만 마음을 준 것이 아니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청마는 생전에 “일평생 한 여자만 마주보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따분한 노릇인가”, “나는 실상 교육자가 될 자격이 없어”라는 농담을 자주 했다.
그러고 그는 자신의 산문집 <구름을 그리다>에서 여성은 단순한 섹스의 대상이 아닌 그 이상의 존재라고 말한다. 고독한 밤의 항해에서 아득히 빛나는 등댓불과 같은 존재, 자신의 인생에서 항상 얻지 못한 어떤 갈구의 응답인 존재로 마치 성모 마리아를 통해서 천주에 이르듯이 구원에 이르는 통로역할을 하는 게 여자라고 바라본 것이다. 서로 만난 후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에게 뜨거운 사랑의 편지를 보내기를 3년, 마침내 정운의 마음도 움직여 이들의 플라토닉 사랑이 시작된다.
하지만 더 이상의 선을 넘을 수 없었던 것은 유교적 가풍의 규범을 깨뜨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청마가 기혼자여서 두 사람의 사랑은 거북하고 안타까운 것이었다.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사랑이었기에 청마의 가슴 속에 싹튼 연정의 조각은 가슴 저미는 쓰라림으로 남았다. 엄연한 불륜임에도 정운을 향한 사랑을 거두어 달라는 말 한마디 못했던 청마의 본처는 그토록 목숨 같은 사랑인데 어찌하겠느냐고 담담하게 말했다지 않던가.
당시 보수적인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청마와 여인들이 정신적이 아닌 육체적 관계를 맺었다면 엄청난 비난에 직면하고 사회적으로 매장되고 말았을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육체가 배제된 정신적 사랑만을 했다는 이유로 이들의 사랑이 지고지순하고 아름다운 것이라 미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시대는 육체적 순결만큼이나 정신적 순결이 소중하다고 떠받들어지는 시대가 아닌가. 청마 부인에게는 결코 청마가 정신의 순결을 지킨 것이 못된다.
정운의 입장에서도 반희정과 청마가 맺었던 관계를 생각하면 결코 순결이 지켜진 것이 아니긴 마찬가지다. 정신적 사랑을 비난하거나 정신적 순결만은 꼭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정신적 사랑은 무조건 고결하다고 칭송하면서 육체적 사랑은 더럽다고 손가락질하는 이 사회의 이중적 태도가 문제인 것이다. 육체적 순결만 지키면 수백, 수천 명과 정신적 사랑을 나누어도 순결한 사랑이란 말인가. 사람은 때로 정신적 사랑만 추구할 수도 있고 육체적 사랑만을 탐닉할 수도 있다.
또 정신과 육체가 온전히 하나 되는 사랑을 이룰 수도 있다. 어느 누가 어떤 사랑은 옳고 어떤 사랑은 그르다고 재단할 수 없는 노릇이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체적 사랑보다 정신적 사랑이 순결하다는 편견도 이제 사라져야 한다. 청마의 시 <행복>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눈앞의 사랑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 받는 사랑보다 주는 사랑으로 위안을 삼았다. 제약이 있는 사랑이기에 더욱 진한 감동을 안겨주는지도 모른다.
청마는 통영여중 교무실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정운을 마주치지만 닿지 않는 인연이 안타까워 연서로 그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보이는 우체국 창가에서 길 건너 정운의 이층집을 바라보며 편지를 썼다. 통영 앞바다에서 바위를 때리고 있는 청마의 시 <그리움>은 정운에게 바친 사랑의 절규였다. 유교적 가풍의 규범을 깨뜨릴 수 없는 정운은 마음의 빗장을 굳게 걸고 청마의 사랑이 들어설 틈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청마는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를 쓰고 시를 쓰면서 장년기 제2청춘을 아름답게 엮어나갔다. 날마다 배달되는 편지와 사랑의 시편들에 빙산처럼 까딱 않던 정운의 마음이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정운의 시를 펼치면 왜 매몰차게 청마를 거절할 수 없었으며 그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을 거둘 때까지 숱한 세월의 격랑 속에서 안타까운 만남과 이별을 거듭하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나누었던가를 알 수 있다. 청마의 끈질긴 구애에 마음을 움직인 정운이지만 어디까지나 마음으로만 사랑해야 했던 그녀가 청마를 잃은 마음을 <무제>란 시로 남겼다.
오면 민망하고 / 아니 오면 서글프고 /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울여 기다리며 /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 정작 마주 앉으면 / 말은 도로 없어지고 / 서로 야윈 가슴 먼 창만 바라다가 / 그대로 일어서 가면 / 하염없이 보내니라 또 다른 <황혼에 서서>란 시다. 산이여 / 목메인 듯 / 지긋이 숨죽이고 / 바다를 굽어보는 / 먼 침묵은 / 어쩌지 못할 너 목숨의 / 아픈 견딤이랴 / 너는 가고 / 애모는 바다처럼 저무는데 / 그 달래임 같은 / 물결 같은 내 소리 / 세월은 덧없어도 / 한결 같은 나의 정 /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서 있는데 / 손 한 번 흔들지 못한 채 돌아선 하늘과 땅 / 애모는 사리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위 시를 읊을 때마다 그 애절하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이 눈물겨운 것은 청마와 정운의 20년에 걸친 플라토닉 사랑이 이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에게는 전설과도 같을 것이고 사랑은 미완성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는 교훈을 줄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두 연인은 들판에 홀로 서서 배달부가 오기를 마냥 기다리기도 하고 때론 대여섯 시간 버스를 타고 부산까지 가서는 단지 수십 분 얼굴만 마주보고 통영으로 되돌아오기도 했다. 청마가 보낸 편지 중에 6·25동란 이전 것은 안타깝게도 모두 불타버렸다. 청마는 1908년 거제에서 출생해서 통영에서 자랐다.
23세 때인 1931년 문예월간에 시 <정적>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섰고 문학청년들과 어울려 술 마시기에 골몰하자 그의 아내는 신학 공부를 권유했다. 그는 아내의 말을 거절하고 시 쓰기에만 전념했다. 가족을 이끌고 평양으로 이주해서 사진관을 경영하다가 다시 부산에서 화신연쇄점에 근무하기도 했으나 통영 협성상업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교육자의 길을 걷는다. 일제의 검속대상에 몰리면서 잠시 만주로 나가 형의 농장 일을 돕다가 광복되던 해에 37세의 나이로 통영에 돌아와서 부인은 유치원을 경영하고 윤이상과 김춘수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조직하고 통영여중에서 교편을 잡는다.
한국동란 때는 종군문인으로 참가하여 당시의 체험을 <보병과 더불어>라는 종군시집으로 펴냈다. 청마는 한국시인협회 초대회장을 지냈고 통영남망공원 경주 불국사와 부산 에덴공원에 시비가 있으며 통영 정양동에 청마문학관이 있다. 정운은 남편의 죽음 뒤에 정신적 기둥이었던 청마의 돌연사로 큰 좌절을 겪은 뒤 부산에서 서울로 옮겨 살았으나 1976년 뇌출혈로 삶을 마감하는데 기이하게도 청마가 이승에서 누린 나이와 같은 59세였다.
첫댓글 청마와 정운의 로고스적 사랑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만약 두사람이 에로틱한 사랑을 했더라면 이렇게 여운이 남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고문님 수필을 통해서 이 두사람이 다시 만나네요. 글을 낳는 사람들은 글로 사랑도 나눌 수 있으니 좋겠습니다.
졸작인 이 글을 본 박옥위 시조시인께서 '정운 생가'를 청도군에서 대대적으로 손질하여 지역의 대표적인 문화시설로 만드는 중이라는 소식을 알려왔습니다. 그러면서 국내 문학상 중에서 상금 2천만원은 적지 않은 편인데 앞서 그 상을 받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박 테레사 작가님, 건필을 빕니다. 장 위원장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