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8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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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나르치소(Narcissus)
성 펠릭스(Felix)
축일 3월 18일
성 나르키수스(또는 나르치소) 주교와
그의 부제인 성 펠릭스(Felix)는 에스파냐에서
순교했다는 정도밖에 알려지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그들은 독일이나 스위스로
탈출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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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살바토르(Salvator)
축일 3월 18일
호르타의 성 살바토르는 에스파냐의 제로나 교구의
산타 콜롬바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매우 가난했는데, 설상가상으로 그는
아기 때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거리를 헤매다가
바르셀로나(Barcelona)에서 신기료장수가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20세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수도자가 되려는 열망으로
가득하여 작은 형제회 회원이 되고자 하였다.
작은 형제회에 들어가서 처음에는 수도원 부엌일을
담당하였는데, 그의 덕이 급속도로 성장하여
토르토사(Tortosa)의 예수 마리아 은둔소로 갔다.
여기서 그 누구보다도 엄격한 생활을 하였는데,
맹인과 벙어리 그리고 불구자들이 그에게 오면
항상 치유를 받는 기적이 일어나곤 하였다.
그는 항상 맨발로 다녔고, 매일 편태를 했으며,
깊고 엄격한 단식을 끊임없이 계속했다.
그는 특히 성모 마리아와 성 바오로(Paulus) 신심이
투철했는데, 수차례에 걸쳐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하였다.
그는 47세의 일기로 선종하였으나,
생전에 이미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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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셀모(Anselm)
축일 3월 18일
이탈리아 만투아(Mantua) 태생인
성 안셀무스(Anselmus, 또는 안셀모)는 삼촌인
알렉산데르 2세(Alexander II) 교황에 의하여
1073년 루카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안셀무스는 즉시 황제의 서임권 논쟁에 적극 가담하였고,
헨리 4세 황제가 주는 주교직의 상징 접수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그는 클루니악 수도원으로
은퇴해야 했고, 그곳에서 베네딕토회 수도자가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ius VII)로부터
소환 받은 그는 엄격한 생활이 결여된 사람들을
조정하는 일을 보았다.
1079년에 그는 카노사(Canossa)로 은퇴하여
마틸다 백작 부인의 영적 지도자로 지내면서
수도자 개혁운동에 헌신하였으며, 평신도 서임권을
둘러싼 문제를 해결하려는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투쟁을
적극 지원하여 맹활약하였다. 그레고리우스의 사후
빅토르 3세(Victor III)가 그를 교황청 시찰자로
임명하여 롬바르디아(Lombardia)의 여러 지역을
관리하게 하였다. 그는 만투아에서 운명하였다.
그의 성덕과 성서 지식 그리고 해박한 학식은
높이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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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알렉산데르(Alexander)
축일 3월 18일
소아시아 카파도키아(Cappadocia) 태생인
성 알렉산데르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수학하였는데,
그의 동료 학생 가운데 오리게네스(Origenes)가
있었다. 알렉산데르는 그의 고향의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세베루스 황제의 박해 때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고, 천신만고 끝에 석방되어
예루살렘 순례 길에 오르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212년에 교계 사상 처음으로 부주교가 되었다.
그는 망명 중인 오리게네스에게 피신처를 제공하고
오리게네스의 서품식에 참석하였는데, 이 때문에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데메트리우스 주교로부터
견책을 받았다. 그는 예루살렘에 도서관과 학교를
세웠으며,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때에는
카이사레아(Caesarea)에서 옥에 갇혔다가
그곳에서 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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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에두아르도(Edward)
축일 3월 18일
영국의 국왕 에드가(Edgar)의 아들인
성 에두아르두스(Eduardus, 또는 에두아르도)는 962년에
태어났다. 영국의 왕인 에드가가 죽었을 때
에두아르두스와 그의 이복동생 에텔레드(Aethelred)
사이에 왕위 계승권을 두고 논쟁이 있었으나,
결국 13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얼마 후
성 에두아르두스는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는
양어머니 엘프리다(Elfrida)의 명령으로
도르셋셔(Dorcetshire)의 코프(Corfe)에서 무참하게
살해되어 웨어햄(Wareham)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성 에두아르두스는 그가 평소에 베푼 선정과
뛰어난 신앙심으로 인하여 성인으로 또 순교자로서
늘 공경을 받아왔다. 그는 단순한 생활을 했고
또 순교자에게 어울리는 모범적인 삶을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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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에우카르피오(Eucarpius)
성 트로피무스(Trophimus)
축일 3월 18일
성 에우카르피우스(또는 에우카르피오)와
성 트로피무스(Trophimus)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중에 순교하였다. 그들은 원래 니코메디아
(오늘날의 터키 북서부 이즈미트 Izmit)에 주둔하던
이교도 출신 로마 군인이었다.
어느 날 그리스도인들을 추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수색하는 도중 개종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니코메디아에서 산채로 화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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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치릴로(Cyril)
축일 3월 18일
그리스도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듯한
성 키릴루스(Cyrillus, 또는 치릴로)는 예루살렘에서
자라고 교육받았으며, 성 막시무스(Maximus)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다. 키릴루스는 수년 동안 예비신자
교육에 전념하다가 349년경에 예루살렘의 주교
막시무스를 승계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대한
교계적인 관할권을 주장하던 카이사레아(Caesarea)의
아리우스파(Arianism) 주교이던 아카키우스에 의하여
그의 주교좌에서 쫓겨났다.
또 다른 이유는 키릴루스가 아리우스파에 반대하는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재산을 매각하여
기근의 희생자들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키릴루스는 타르수스(Tarsus)로 갔으나 2년 후
셀레우키아 공의회(Council of Seleukeia)에서 다시
복직되었다. 그러나 그는 재차 아카키우스의 음모에
의하여 황제 콘스탄티우스로부터 축출되었다가,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다시 복직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는 367년에 3차
유배되었으나, 발렌스 황제가 율리아누스의 통치 기간에
있었던 모든 종교인들을 사면함으로써 석방되어
다시 주교좌로 돌아왔다.
또 다음 해에는 안티오키아 공의회
(Council of Antiochia)가 니사(Nyssa)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를 팔레스티나(Palestina)로
파견하여 그가 역설하던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로
인한 잡음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이 용어는
니케아(Nicaea) 신경의 기본 용어이다.
그레고리우스는 예루살렘 주교좌는 파벌주의와
아리우스주의로 뒤엉켜 있고 또 윤리적으로 타락해
있다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키릴루스의 신앙과
그 주교좌는 올바르다는 판결을 내렸다. 키릴루스와
그레고리우스는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Council of Constantinople)에 참석하였고, 여기서
키릴루스는 니케아 신경과 ‘호모우시오스’
용어 수정 작업을 수락하였다.
사실 키릴루스는 성서학자이자 뛰어난 설교가였으며,
347년의 사순절 동안 사용한 그의 “교리서”는
세례 준비자에게 명쾌한 교리 해설이 되었으며,
4세기의 팔레스티나 전례를 자세히 보여주는 유명한
교리서였다. 역사가인 소크라테스와 소조멘은
키릴루스는 철저한 아리우스주의 반대자였고,
그의 정통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기술하였다.
그는 1882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하여
교회학자로 선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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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크리스티아노(Christian)
축일 3월 18일
성 크리스티아누스(Christianus, 또는 크리스티아노)에
대해서는 아일랜드에 세운 첫 번째 시토회 수도원의
원장이란 사실 외에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는 실정이다.
너무도 많은 이야기가 전해오므로 어느 것이 사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것이 그 주된 이유이다.
어떤 전설에 의하면 그는 북아일랜드 얼스터(Ulster)
지방의 뱅거(Bangor)에서 태어났고 성 말라키(Malachy)의
제자로서 공부하였다. 그는 고위 성직자를 수행하여
로마(Rome)를 방문하였다가 그길로 프랑스 클레르보
(Clairvaux)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는 클레르보의
네 성인 중의 한 명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가 아일랜드로 돌아 올 때 성 말라키는 시토회를
그의 지방에 도입하였는데, 크리스티아누스는 이에
적극 가담하여 수도회의 참다운 정신을 뿌리박는데
큰 공헌을 했으며, 나중에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그는 리즈모어(Lismore)의 주교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자세한 것은 확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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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리그디아노(Frigdianus)
축일 3월 18일
이탈리아에서 프레디아노(Frediano)라 불리는
성 프리그디아누스(또는 프리그디아노)는 북아일랜드
얼스터(Ulster) 지방 왕의 아들로서 아일랜드에서
교육을 받고 사제가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를
순례하던 중에 루카를 지나다가 몬테 피사노
(Monte Pisano)의 은둔소에 마음이 이끌려 스스로
정착하였다. 그가 주교로 간택된 이유는 그의 높은
성덕 때문이었다. 교황 요한 2세(Joannes II)까지
동원되어 은수생활을 중지하고 교회를 위해
더 많은 활동을 하도록 요구하였다고 한다.
7년 동안 평화스럽게 주교직을 수행하던 중에
랑고바르드족(Langobard)의 침략을 받고 주교좌가
불탔다. 그 후 그는 이를 재건하였다.
그는 모든 이들에게 애정을 표시하였고, 남루한 옷을
입고 다녔을 뿐만 아니라 고통 받는 이와 병자들을
직접 치료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은수생활을 잊은 적이 없었고 기회가 오면 즉시
돌아갈 자세로 살았다. 그는 성직자로 살았으나
생활은 은수자의 엄격한 생활이었다.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의 “대화집” 속에는
그에 의한 기적들이 기록되어 있다.
임종이 다가 온 줄 알아차린 그는 주변에 있던
자기 수도자들을 불러서 함께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바치면서 마치 잠을 자는 듯 고요하게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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