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부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정신병원에 수용된 뒤, 고아원에서 자라 16세가 되어 고아원에서 골라준 상대와 억지로 결혼하는 등 마릴린 먼로의 불행한 배경은 이제 웬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스토리다. 이후 그녀는 군수품 생산라인에서 일하면서 사진 모델이 되어 할리우드에 입성하게 되었다.
영화와 많은 사진으로 남아 있는 먼로의 모습은 지금 봐도 매력적이다. 그러나 불행한 사생활과 마약 중독, 케네디와의 염문 일색인 일생과 매혹적인 이미지 뒤에 가려진 것 중 첫 번째는 순수한 배우로서의 그녀의 재능이며 두 번째는 많은 여성학자와 사회학자들이 지적한 대로 2차대전과 한국 전쟁에 휘말리고 있던 미국이 요구한 마릴린 먼로의 스타성이다.
초기의 마릴린 먼로 모습. 이 사진을 보면 나중에 코를 성형한 걸 알 수 있다
여기서 연기력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잠깐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대중이 흔히 ‘누구누구는 연기를 잘한다’고 인지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얄팍한 기준이다. 로버트 드 니로처럼 툭하면 몸무게를 늘렸다 줄였다 하면서 캐릭터를 장악해 관객을 놀라게 하는 것도 물론 연기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가령, 관객으로 하여금 스크린 속에 존재하는 저 악당이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정말 실존하는 악당처럼 느끼게 하는 것도 상당한 재능을 요구한다. 물론 그 영화가 형편없는 상업영화라 할지라도 말이다.
첫 번째로 말하자면 결코 먼로는 할리우드의 시덥잖은 멍청한 금발 미녀가 아니다.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 그녀는 발군의 코미디 실력을 보여준다. 1959년 토니 커티스 감독 하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1953년 <나이아가라>로 스타가 된 뒤 마릴린 먼로가 그저 성공을 만끽하며 놀고만 있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고 있다. 멍청하고 순진할 것이라는 대중의 예단 뒤에서 그녀가 자신에게 어울리는 미소와 걸음걸이를 만들어내기 위해 몇 년을 거울 앞에서 연습하고 액터 스쿨에서 가장 성실한 학생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녀는 대중에게 자연인 마릴린 먼로가 스크린에 보이는 대로 멍청하고 순진한 백치미녀일 것이라고 믿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결코 재능과 머리 없이 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마돈나가 그랬던 것처럼 먼로는 머리를 백금색으로 염색한 이후부터 경력이 잘 풀리기 시작했다
뒷이야기를 상세히 살펴보면 마릴린 먼로는 순진하고 착한 성격이었지만 대중과의 이미지 게임에서 승리를 거둘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었다. 스타가 된 직후 누드 사진으로 협박을 받자 전당포에 저당잡힌 차를 찾아오기 위헤 50달러가 필요했다며 스스로 사진을 공개해버렸다. 대중과 미디어는 즉시 그녀를 동정했고 먼로는 입지전적인 인물로 자신을 포장하는 데 성공했다. 오히려 누드 사진 논란은 먼로를 더 유명하게 만들어 주었다.
또한 그녀는 지적 욕구가 강한 노력파였다. 야간 미술 대학에 등록하고 촬영장에 프루스트의 책을 들고 다녔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같은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 말하자 기자가 짓궂게 ‘도스토예프스키의 철자가 어떻게 되는지는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나는 내가 말하는 이름의 철자가 어떻게 되는지 하나도 몰라요’라고 천연스럽게 대답했다.
정말 먼로가 자기 이름 철자도 몰라서 그렇게 대답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답변은 대중과 기자가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한 결과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많은 사회학자와 여성학자들은 청교도적 성윤리와 10년이 넘도록 계속된 전시 체제로 억눌려온 미국이 성적 욕구와 죄의식을 투영시킬 대상을 필요로 했다고 지적한다. 그 가장 적합한 대상이 마릴린 먼로였다는 것이다. 그녀는 성적 매력의 절정이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성과 세계에 대해 전혀 무지하며 상대방이 어떠한 요구를 해 와도 어린아이처럼 순순히 따라와줄 것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마릴린 먼로로 인해 당시 매카시즘에 휩싸인 미국은 자신들의 억눌린 욕망을 안전하게 배설한 뒤 그녀를 갖다 버릴 수 있었다.
자연인 마릴린 먼로 또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먼로가 한 말은 무척 기억에 남는다.
"사람들은 나를 사람이 아니라 무슨 거울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봐요. 그들은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음란한 생각을 보는 것이죠. 그들은 나를 음란하다고 몰아붙이면서 자신들은 결백한 척하지만, 그들은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알려 하지 않죠. 그 대신 나라는 사람을 마음대로 지어냅니다. 나는 그들과 시비를 가릴 생각은 없어요. 그들은 내가 아닌 그 누군가를 무척 좋아하는 듯하니까. 지금껏 살면서 내가 바란 것이라곤, 사람들한테 친절하게 대하고 그들도 나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야 공평한 거래지요, 그리고 나는 여자예요. 한 남자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요.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과 똑같이. 나는 정말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어요."
어느 사회학자의 비유처럼 미국은 마릴린 먼로로 인해 사춘기를 끝낸다. 1962년 그녀가 사망한 해는 미국이 베트남전에 개입한지 1년 후였다. 이후 전세계를 휩쓴 반전 운동으로 미국 사회또한 변화를 겪게 되고, 여성들이 좀더 사회활동영역을 넓혀나감에 따라 마릴린 먼로 같은 노골적인 백치미녀 이미지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마릴린 먼로가 그러한 진보를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의미만으로 그녀가 치러야 했던 희생은 너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