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외교 중심에는 대한민국은 자유민주공화국이다
한미일공조의 시대이다
북중러의 세력화로 한반도가 위기이다
한중외교는 중국이 친중 위정척사, 숭중사대
중국의 역사(동북공정), 영토(서해공정)에 이은 문화공정의 음모
萬折必東 崇中事大 망상에 사로 잡힌 청와대, 문빠, 대깨문들
잘못 된 역사가 반복 되면 슬프다
역사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
역사에 죄를 짓지 말라
역사의 중심의 자유민주주의이다
외교는 국민복리, 국익, 국민과 나라, 나라의 미래를 먼저 생각하라
한국의 근현대사 외교
1876년 강화도 조약 수치(1853년 일본 개항, 1868 명치유신,
1866 한국 개항 요구 쇄국정책 일본보다 150년 뒤짐)
1882년 조미조약으로 개항
조선말 흔들리는 역사
1905년 을사보호조약
1910년 한일합방 주권을 잃는 수치
300만명이 세계 낭인으로 망명
1919년 3.1 독립운동 70만명이 죽었고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망명 임시정부 수립
한국의 현대사
1945년 해방, 신탁통치국가
이념 투쟁으로 남북이 나누어지는 슬픈 역사
1948년 반쪽 정부 수립
1950년 민족상잔 6.25로 500만명이 죽었다
1876년 불행한 강화도조약을 맺고
1882년 조미조약
1905년 을사보호조약
1910년 한일합방의 불운 (건국 1392 임란 1592 망국 1910)
1945년 해방을 하였지만, 이념으로 나뉘고, 신탁통치를 하였다
1948.8.15. 정부수립
나라 잃은 한국은이 1000만명 유랑인이 되었다
한국인은 정신차리고, 깨어나야 한다
한·일 외교(1876 강화도 조약) 150년
1876년 강화도 조약 수치
1905년 을사보호조약
1910년 한일합방, 주권을 잃는 수치
1943년 한국은 카이로선언문에 적힌 대로 ‘노예 상태’로 36년을 지냈다.
일본은 1951년 3월 27일 강화회의 초안을 받자마자 미국에 의견서를 전달했다.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인된 강화조약은 한국을 대만과 함께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난 지역’으로 분류했다.
식민지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받고,
사과와 법적 배상을 받으려던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1965년 6월 22일 13년8개월 만에 박정희는 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 협정으로 타결 됐다.
국민들의 엄청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제개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한일회담을 추진했다.
그 결과 일본정부로부터 유·무상 경협차관을 받아 공단건설, 경부고속도로, 포스코, 한전, KT&G
과기대, 포스코, 공대 설립, 방위산업, 교육헌장 등
기간산업(基幹産業)에 투자하여 오늘의 경제발전 기틀을 만들었다.
산업화 시대를 열어 G7이 되었다
1998년 한일 간에 소모적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여
'김대중 오부치 공동선언'을 했고, 일본총리는'식민통치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죄'를 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 이후 50여 차례 반복된 일본의 사과 했다,
노무현정부 또한 일본에 배상을 받을 수 있는지 검토했지만
1965년 체결한 한일협정과 '김대중 오부치 선언'등으로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과 정치적 해법은 완결되었다
2011년 이명박 대통령의 방일 이후
2012년 8월 10일 우리나라 대통령으론 처음으로 독도를 방문했다.
문재인은 죽창가로 '사과하라, 배상하라' 요구
2018년 대법원 판결은 일본에 ‘65년 체제’를 뒤흔드는 쇼크였던 것이다.
우리 대법원의 배상 판결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당시 맺은 한일의정서와
합리적 판결이라고 보기 어렵다. (죽창가)
'위안부 문제와 천황사과’요구 할 것인가
2023년 윤석열 대통령은 12년 만에 한일 셔틀외교는 부활하게 된다.
한·일은 문명사적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한일 미래로 나가자
일본은 동북아 안보를 함께해야 할 비중 있는 우방인데, 죽창가만 부를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한·미수교
조미수교 (1882년) 140년
한·미 동맹(1953년) 70주년…믿음이 강화돼야 할 시간
1882년 미국과 수교조약
“양국은 영원히 화평우호를 지키되 타국이 불공경모(不公輕侮)하게 되면
일차 조지(照知, 통지)를 거친 뒤에 필수상조(相助)하여 그 우의를 표시한다”
(1905.9.19 루스벨트 엘리스 방한 ‘Korea’s fight for freedom’
1905.9.19. 1945.신탁통치 48.12.15 유엔승인
50년 1월 애치슨 라인(투르먼),
1953년 혈맹동맹 we go together-미군 철수 하면 한국은 무너진다)
“확고부동의 신뢰에도 우리는 1910년 일본의 한국병합,
1945년 한반도의 양분 등 과거 두 번씩이나 미국에 배신을 당했다”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역시 미군 철군이 거론되자
“평화를 지키려면 독자 핵무기가 필요하다”
“파리를 지키기 위해 뉴욕을 희생할 수 있겠느냐”
독자 핵무장을 추진했다
1979년 김영삼은‘민주주의 미국’이었다.
“미국은 이란의 전철을 밟지 말라. 주한미군을 내정간섭으로 볼 수 없다면,
한국 민주화를 위한 압력 역시 내정간섭으로 볼 수 없다.
국민과 유리된 정권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다수 국민 중 선택하라”
냉전이 최고조이던 레이건 정권이 전두환 신군부의 5·18 학살과 정권 탈취를 방임하자
‘민주주의 십자군’으로서 미국의 정체성엔 의문이 확산되기도 했었다.
2003년 첫 방미 당시 효순·미선양 사건 직후 노무현 대통령의 등장도 동맹엔 긴장 요소였다.
“53년 전 미군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난 지금 정치범 수용소에 있을지도 모른다”
“반미면 어떠냐 유의 얘기는 않으셔야 대화가 진행된다”
“지금은 나가계시는 게 좋겠다”
이라크 파병, 한·미 FTA로 자신의 말을 입증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영혼과 가슴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미국이 성금을 모아 보내준 돈으로 인하공대를 세우다
대한민국의 자부심과 자존심으로 긍지로 살았다
“대통령 8년 재임 중 자다 깜짝 놀라 일어난 것은 그때가 유일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3년 6월 18일 거제도 반공포로를 전격 석방한 데 대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당시 미국 대통령의 회고다.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면도하던 중 이 소식을 듣고 역시 놀라서 얼굴을 베였다고 한다.
6·25전쟁 발발 뒤 이 대통령의 지상 목표는 한반도에서 공산주의를 몰아내는 것이었다.
우방국인 미국과 ‘살벌한 투쟁’을 벌인 것은 역설적이다.
전사자가 늘어나자 미국 내에선 발을 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고,
1951년 7월 휴전 협상이 시작됐다.
이대로 전쟁이 끝나면 미군은 철수할 것이고,
적화통일은 시간문제라고 본 이 대통령으로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대통령의 ‘휴전 결사반대, 북진통일’ 결의를 받아 든 미국은
이 대통령 제거를 위한 ‘에버레디 작전(Operation Everready)’까지 세웠다.
이 대통령은 휴전을 설득하기 위해 경무대를 방문한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과 면담하는 내내 권총을 붙잡고 있었다고 한다.
책상 위에는 ‘북진 통일’이라는 혈서들이 쌓여 있었다.
이 대통령이 ‘단독 북진’까지 흘리며 노린 것은
미국이 휴전 대가로 한국의 안보를 확고하게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고 휴전 협상에 가속도를 내자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극약 처방을 내렸다.
백악관에 “미국이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주지 않으면 싸우다 죽을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까지 보내자 미국은 한 발 물러섰다.
1953년 10월 1일 미군 주둔과 유사시 자동 개입을 명시한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로
한·미 동맹이 시작된 것은 순전히 이 대통령의 분투(奮鬪) 결과였다.
한·미 동맹 70주년
1953년 한미수교 (1882년 조미수교 140년)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한·미동맹 강화를 위해 다양한 현안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지만,
정부가 바뀌어도 핵심 의제인 북한과의 관계, 경제 안보는 빠지지 않고 논의됐다.
그러나 양국 정부의 대북 강경-온건 노선 전략에 따라 한·미 정상회담은 냉·온탕을 오갔다.
역대 가장 많은 한·미 정상회담을 열었던 대통령은 이명박 전 대통령으로 11회에 달한다.
문재인(10회), 김대중(9회), 김영삼(8회), 노무현(8회), 노태우(7회), 박정희(6회),
박근혜(6회), 이승만(2회) 전 대통령 순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5월 2일~5월4일 (바이든, 윤석열) 방미는 역대 대통령 중 7번째 국빈방문이며,
의회 연설도 7번째였다.
윤 대통령(2023) 이전엔 이승만(1954), 박정희(1965), 노태우(1991), 김영삼(1995),
김대중(1998), 이명박(2011) 전 대통령이 국빈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이승만,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은 방미 중
미 상·하원 합동 연설을 실시했다.
한국을 국빈방문한 미국 대통령은 1960년 아이젠하워를 시작으로
도널드 트럼프(2017)까지 총 7명이다.
아이젠하워, 린든 존슨, 로널드 레이건, 조지 부시, 빌 클린턴, 트럼프 등 6명의
미국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국회에서 연설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외교 중심엔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이다
2022년 외교(3회)
6월 스페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참석
9월 영국·미국·캐나다 순방,
11월 캄보디아(아세안+3)·인도네시아(G20 정상회의) 순방
2023년 외교 (7월말 현재 7회)
1월엔 아랍에미리트(UAE)를 국빈 방문
3월 16~3월17 윤석열 대통령 일본(기시다) 방문
4월 미국을 국빈 방문해 ‘워싱턴 선언’을 발표 (핵공동 선언)
5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계기로 일본 히로시마(한미일 정상회담)
5월 2일~5월4일 (바이든, 윤석열)
5월 7~8 기시다 총리 방한
5월 19~21 일본 한국, 미국, 일본 3국 정상회담(윤석열, 바이든, 기시다)
5월 21일 한독 정상회담 숄츠 총리
7월 프랑스·베트남 방문이다.
프랑스 파리에선 국제박람회기구(BIE) 4차 경쟁 프레젠테이션(PT)
베트남은 국빈 자격으로 방문해 보 반 트엉 주석과 정상회담
8월 18일 한미일 정상 회담
한국의 위상이 높아 졌다
4월 워싱턴 선언, 한국이 핵무기 보유국이 되게 미국이 노력
7/15한국어 유엔 공식 언어로 채택(영어, 프랑스어, 중국어, 스페인, 러시아, 아랍어
한국어(한국의 위상이 높아졌다)
7/19 독도는 한국 땅 인정
7/18 한국, 4대 방산수출국 되면 매출 29.7조원, 고용 6만9천명(미,러, 프, 중현 9위)
외교의 중심엔
지도자의 가슴엔
‘대한민국은 자유민주공화국이다’
민주주의는 대중지성을 필요로 하며, 엘리트의 도덕적 권위를 기반으로 한다.
국민복리, 국익 우선, 한국의 미래로 자부심과 지존감으로 외교를 추진하여야 한다
한국이 세계의 중심이 되기 위해 외교를 국익, 국민복리, 나라의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역사를 두러워하라.
역사 앞에 죄를 짓지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