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木馬)와 숙녀(淑女)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生涯)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庭園)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女流作家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意識)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시작(詩作)』 7호, 1955.10)
[어휘풀이]
-버지니아 울프(182~1941) : 프루스트, 조이스와 함께 심리주의파를 대표하는 작가. ‘의식의 흐름의 기법’이라는 독특한 작풍으로 당시 영국 문단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 이 작가는 템즈강에 투신자살하여 비극적 생애를 끝마침. 주요 작품으로 여성주의 문『자기만의 방』학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평론 『자기만의 방』과 소설 『델러웨이 부인』, 『세월』, 『등대로』 등이 있음.
-페시미즘 : 염세주의(pessimism)
[작품해설]
김수영, 김경린 등과 함께 5인 공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한 박인환은 1930년대 김기림, 김광균을 중심으로 한 모더니즘을 계승한 1950년애 후기 모더니즘의 대표적 시인이다. 후기 모더니즘은 김수영을 제외하고는 뚜렷한 이념적 중심이나 이론 체계가 없어 1930년대 모더니즘의 발전적 계승이 아니라는 비판을 받고 있으나, 1950년대라는 전후(戰後)의 황폐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청록파적 경향에 반발하여 전통적 서정 세계를 부정하고 새로운 모색을 꾀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 시는 시어나 시구가 지니는 각각의 의미를 분석하거나 그것들의 의미 상황을 추적하면 무엇을 뜻하는지 선뜻 이해되지 않는데, 그것은 초현실주의적 방법인 우연성에 의한 시어의 자유분방한 표현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인환의 이러한 언어 감각이 이 작품을 ‘분위기’로 느끼게 하는 주된 요인이며, 허무적이고 감상적인 정조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전후문학은 6.25의 비극적 체험과 삶의 의미에 대한 회의, 가치의 전도(顚倒)와 혼란, 문명화, 도시화에 따른 비인간화 현상의 심화 등으로 인해 개인주의적·감상적·허무적 경향을 띠게 되는데, 이 작품에서 나타난 허무 의식과 센티멘탈리즘 역시 정후의 정신적 황폐함과 불안 의식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야야 할 것이다.
이 작품은 모든 떠나가는 것들에 대한 애상(哀想)을 노래하고 있다. 1행에서 11행까지 계속 ‘떠났다’, ‘부서진다’, ‘떨어진다’, ‘죽고’, ‘버릴 때’, ‘보이지 않는다’가 연속되는 것에 시적 자아가 마주선 허무와 절망을 읽을 수 있다. ‘목마’는 내면세계를 의식의 흐름이라는 수법으로 철저히 추구한 영국 여류 소설가인 ‘버지니아 울프’의 비극적 생애와 불안과 절망의 시대적 슬픔을 표상하며, ‘숙녀’는 바로 ‘버지니아 울프’를 가리킨다.
12행부터 25행까지 시적 자아는 작별해야 한다는 등 무엇을 ‘해야 한다’고 반복하고 있지만, 그것은 결단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절망적 현실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체념에 가깝다.
26행에서 끝 행까지는 인생에 대한 통찰을 보임으로써 체념적 상황에 대해 반성하기도 하지만, 그가 삶에 대해 갖고 있는 애상적 태도를 극복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절망적 현실을 인정하고, 그 속에 안주함으로써 삶의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허무주의자의 나약한 모습일 뿐이다.
‘정원 앞에서 자라던 소녀’에서 ‘목마를 탄 숙녀’로, 다시 ‘늙은 여류 작가’로 변모하면서 허무와 불안의식을 견디지 못하고 ‘템즈강’에 투신 자살한 ‘버지니아 울프’의 비극적 생채처럼, 인생 항로의 좌표를 잃고 살아가던 박인환, ‘상심(傷心)한 별’과 ‘불이 보이지 않는 등대’와 같은 절망과 비애 속에서 ‘한잔의 술을 마시며’ 고통을 극복하려 했지만, 결국 ‘술병이 바람에 스러지는’ 비극적 정황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3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짧은 생애를 통해 문학과 술을 벗하여 끈기 있게 현대 문명의 위기와 불안 의식을 세련된 감각과 높은 지성으로 노래한 그는 ‘우수(憂愁)의 시인’으로 불리며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작가소개]
박인환(朴寅煥)
1926년 강원도 인제 출생
평양의학전문학교 입학. 해방을 맞으면서 학업 중단
1946년 『국제신문』에 시 「거리」를 발표하여 등단
1949년 김수영, 김경린, 양병식, 임호권과 함께 공동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발간
1955년 시집 『박인환시선집』 발간
1956년 사망
시집 : 『박인환시선집』(1955) 『목마와 숙녀』(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