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 13년 계유(1813) 11월 7일(경오)
13-11-07[09] 경상도 유학(幼學) 서응규(徐應奎) 등 382인이 상소하여 고(故) 별제(別提) 전치원(全致遠) 집안 3대에게 시호를 하사하는 은전을 내려 주기를 청한 데 대해, 비답을 내렸다.
○ 상소의 대략에,
“초계(草溪)의 고 별제 전치원은 어려서부터 효도하고 우애하였으며 품행이 순수하였고, 장성해서는 문정공(文貞公) 조식(曺植)의 문하에 종유(從遊)하여 의리(義理)의 의논에 침잠하고, 예법(禮法)의 터전에서 노닐었습니다.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 문정공 김우옹(金宇顒)은 그를 공경하고 존중하였으며, 문간공(文簡公) 정온(鄭蘊)은 ‘탁계(濯溪)의 학문이 순정하고 조예(造詣)가 지극한 경지는 진실로 남보다 크게 뛰어난 점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탁계는 전치원의 호입니다. 선묘조(宣廟朝)에 그의 학문과 덕행으로 천거하여 별제에 제수하고 여러 번 초빙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그 아들인 별제 전우(全雨)는 순수한 성품과 훌륭한 행실이 있어서 한 시대의 뜻을 같이한 선비인 문간공 정온, 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 이호민(李好閔), 참판 이민성(李民宬), 진흥군(晉興君) 강신(姜紳)이 모두 그와 종유하고 추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작은 정자 하나를 지어 수족당(睡足堂)이라고 편액을 걸었으니 이는 와룡선생(臥龍先生)의 뜻과 일에 격세(隔世)의 감회가 있어서입니다.
전우의 아들 전형(全滎)은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었고 경솔하게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문장공(文莊公) 정경세(鄭經世)와 부제학 이준(李埈)의 문하에서 노닐었으며 《주역》과 〈홍범(洪範)〉 등 여러 서적에 이르러서도 정밀하게 연구하고 묵묵히 이해하였습니다. 그 뒤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한 뒤로 필법(筆法)이 더욱 공교해져서 문강공(文康公) 김세렴(金世濂)이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갈 때 전형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선발하였습니다. 바다를 건너자 왜인들이 모여들어 전형에게 글을 써 주기를 청하였는데 전형이 한번 붓을 휘둘러 1만 축(軸)을 써 주니 왜인들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오늘 다시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를 보게 될 줄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돌아갈 때가 되자 왜인들이 백은(白銀) 한 자루를 몰래 하인에게 주었는데 배가 바다 어귀에 머물 때 하인이 이 사실을 고하니 전형이 즉시 백은을 바닷물에 던져 버리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왜인들이 그 바다를 투은(投銀)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의 사신이 그곳에 이르면 번번이 그곳을 가리키며 전두암(全斗巖)이라고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두암은 전형의 호입니다. 복명하자 성조(聖祖)께서는 이를 가상하게 여겨 이르기를 ‘그대가 왜인의 나라에서 나를 영화롭게 해 주었다.’라고 하셨습니다. 김세렴이 추천해서 벼슬에 제수하려 하자 전형이 ‘남아로 태어나 사방을 경략할 원대한 뜻으로 우리나라 만 리의 경관을 유람하고 싶은데 이런 일로 관직을 꾀하는 것은 대장부가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 전치원은 이미 66세였지만 서울을 지킬 수 없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아들 전우 및 조카 전제(全霽)를 불러 놓고 눈물을 훔치며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은 집안이니 의리상 임금을 위해 적과 싸우다 죽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전우와 전제가 옷깃을 여미고 ‘신하는 임금을 위해 죽고 자식은 어버이를 위해 죽는 것이 직분입니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검을 차고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달포 동안에 수만 명의 사람이 모여들자 낙동강 상류와 하류에서 강을 건너려는 왜적을 차단하여 적의 예봉을 꺾으니 군대의 사기가 이에 크게 진작되었습니다. 또 일찍이 황강(黃江)과 낙동강 사이에서 갑자기 적병에게 사면으로 포위된 일이 있는데 앞장서서 말에 뛰어올라 적의 진영을 드나들며 500여 명을 격살(擊殺)하였습니다. 이 일이 임금에게 보고되자 사근 찰방(沙斤察訪)에 제수하였지만 또 연로(年老)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병신년(1596, 선조29)에 진중(陣中)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적은 《용사록(龍蛇錄)》과 본군(本郡)의 《군지(郡誌)》에 실려 있습니다. 숭정(崇禎) 경진년(1640, 인조18)에 사림(士林)에서 그의 탁월한 행적을 추모(追慕)하여 사당을 세워 제사를 받들었습니다.
전우는 아버지를 따라 창의(倡義)하여 충익공(忠翼公) 곽재우(郭再佑), 문충공(文忠公) 김성일(金誠一)과 서로 호응하고, 부자가 진영을 나누어 상황에 따라 위기에 대응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막(沙幕)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왜적들이 강을 뒤덮으며 몰려오는데 강을 절반 정도 건넜을 때 공격하여 1000여 명을 죽이고 물에 빠져 죽은 자도 1000여 명이었습니다. 그러자 대가(大駕)가 용만(龍灣)에 있었는데도 글로써 은총을 내려 주기를 ‘전우 등이 합심하여 의병을 일으켜 많은 사람을 얻었으므로 내가 가상히 여겨 사축서 별제(司畜署別提)에 제수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난리 중에 부친상을 당하자 전공(前功)을 감추고 은거하면서 생을 마쳤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현감 전제는 성품이 본래 효성스럽고 우애하고 행실이 또 돈독하고 친절하였으며 비상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치원을 따라 창의하였고 곽재우와 마음과 힘을 함께하며 매번 선봉이 되어 사졸(士卒)보다 앞장서서 싸웠습니다. 정암진(鼎巖津)과 박진(泊津)의 전투에서 왜놈을 베어 죽이거나 사로잡은 것이 더욱 많았고, 고령(高靈)의 도로를 온전하게 보전하고,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쌓는 일을 감독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그의 공적(功績)을 가상히 여겨 영산 현감(靈山縣監)에 제수하였습니다. 정유년(1597)에 명나라 군사와 합심하여 먼저 나아가 독전(督戰)하였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한창 치열할 때 적에게 붙은 이사종(李士宗)과 그 무리가 뒤에서 틈을 노리다가 칼로 찔러서 군중(軍中)에서 순절(殉節)하였습니다. 그래서 참지(參知) 배대유(裵大維)가 상소하여 그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원수를 갚아 주었습니다. 그 실제 사적은 녹권(錄券)과 《읍지(邑誌)》 및 《창의록(倡義錄)》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체로 전씨(全氏) 집안에서 3대에 걸쳐 4인이 학문을 근본으로 하고 공적이 드러났는데 창의하여 충의(忠義)로운 의사(義士)들을 거느리고 영남을 수복하기도 하고,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우기도 하여 성상의 장려해 주시는 은혜를 입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덕행과 충의는 아버지가 전하고 아들이 이어받았으니 지난 역사를 찾아보아도 견줄 자가 드뭅니다. 그런데도 홀로 표창하는 반열에서 누락되었으니 이것이 세월이 오래될수록 여론이 더욱 억울해하는 이유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치원, 전우, 전제, 전형에게 특별히 관작과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시행해 주소서.”
하여, 비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은 묘당으로 하여금 내게 물어 처리하게 하겠다. 그대들은 물러가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주-D001] 와룡선생(臥龍先生) :
와룡은 ‘누워 있는 용’이란 뜻으로, 촉한(蜀漢)의 승상 제갈량(諸葛亮)을 당시 사람들이 이렇게 불렀다.
[주-D002] 부제학 :
원문은 ‘副學’이다. 《승정원일기》 이날 기사에 근거하여 ‘副’ 뒤에 ‘提’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03] 숭정(崇禎) :
원문은 ‘萬曆’이다. 《탁계선생문집(濯溪先生文集)》 권1 〈연보(年譜)〉에 근거하여 ‘崇禎’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