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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특기는 멍하게 시간보내기다. 물론 아무 생각없이 앉아있는 건 아니다. 처음에는 진지한 고민으로 시작하는데, 거기에 온갖 상황의 변수들이 겹치고 극단적인 낙관주의 혹은 비관주의 적인 결말을 상상하며 끊임없이 선택지를 덧붙여 나가다 문득 시계를 보며 삼십분이 지나가 있고, 결론은 제자리로 돌아오고. 이런 식이다. 시간은 시간대로 낭비하고 머리는 머리대로 아프고... 철.저.한. 낭비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부턴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않으련다. 생각만 한다고 뭐가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지금껏 멍하니 보낸 시간들을 조각조각 모으면 최소한 1년 6개월 정도는 될거다. 알 수 없는 미래를 내다보려 애쓰며 모든 경우의 수에 대한 대비책을 일일이 마련해 보겠다고 발버둥치는 헛된 짓은 이젠 진짜 그만. 그래, 내겐 ‘준비’ 강박증이 있었다, 조금 전까진. 하지만 오늘 이후로는 없다. 걱정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에 충실하자. 그러다보면 하루하루가 행복해 지고, 결국은 인생이 행복해지는 거다. 모든 것에 대비할 수는 없다. 완벽주의로만 살려다간 생각지 못한 일이 닥치면 더 당황하게 된다. 어깨에 힘을 빼고 이 순간을 알차게 즐기자. 조금만 더 유연해지자.
저녁이 되니 또 불안과 회의가 밀려온다. 나는 언제나 말뿐이다. 말, 말, 말.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모를 허울좋은 말만 늘어놓고 내 자신을 속이고. 비참하다. 오늘도 아무것도 한 게 없다. 난 제정신이 아니다. 어떻게 오년 십년 후의 일들에 대한 계획만 머릿속에서 굴리며 귀중한 하루를 통째로 내버릴 수 있는거지? 벌써 몇 년째 이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난 정말 병신이다. 살 가치도 없다. 벌레같다. 죽고싶다. 아픈 건 무서우니까 그냥 연기처럼 조용히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이렇게 허황된 공상으로 시간을 죽이는 이유가 뭘까? 현재 아무것도 없는 내 모습을 직면하기 두려워서? 시도할 용기가 없기 때문에? 그럼 아무 생각말고 뭐 한가지라도 시작해 보면 어떨까? 예를 들어 지금 하려고 하는 원고도, 스토리 전체를 완벽하게 파악한 뒤 시작하려 들면 언제까지 백지만 바라보고 있어야 할 뿐이다.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장면이라도 그려봐야겠다. 너무 헛생각만 하며 열올렸더니 정말로 열이 심하게 나고 머리도 아프고 속도 쓰리다. 정신차리자. 나를 믿자. 다시 다독여 일으키자. 난 할 수 있다. 지금 불평을 털어놓는 와중에도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바꿔보려고 노력하는 내 모습을 난 보고 있다. 난 괜찮다. 난 회복하고 있다.
나는 매일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나는 매일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나는 매일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나는 내 자신을 사랑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나는 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
나는 내 자신에게 솔직히 대하고 있다.
나는 세상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나는 오늘 하루도 충실히 보내고 있다.
나는 꿈을 이룰 수 있는 충분한 재능이 있다.
나는 꿈을 이룰 수 있는 충분한 재능이 있다.
나는 좋은 친구들을 갖고 있다.
나는 누가 나를 버려도 내 자신을 버리지 않고 돌봐주고 있다.
나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
나는 나를 믿고 있다.
나는 매일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