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들 ‘법안 품앗이 발의’ 남발… 1명당 797건 공동발의
입법 실적 채우기 위해 이름 빌려줘
본인 법안 숙지못해 본회의 기권도
법안 폭증에 가결률은 9.4% 그쳐
21대 국회 들어 의원 한 명당 공동발의한 법안이 평균 797건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의원들이 법안 내용도 모른 채 이름을 빌려주는 ‘공동발의 품앗이’가 남발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훈구 기자
21대 국회 들어 의원 한 명당 공동발의한 법안이 평균 797건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21대 국회 임기 시작 후 지난 3년간 공동발의한 법안 개수가 1000건이 넘는 의원도 전체 299명 중 93명(약 31%)이었다. 의원들이 입법 실적 채우기를 위해 법안 내용도 모른 채 서로 이름만 빌려주는 ‘품앗이 발의’를 남발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18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1대 국회 임기가 시작한 2020년 5월 30일부터 지난달 31일까지 전체 의원들이 법안 공동발의자로 참여한 건수는 평균 797건이었다. 이는 평균 66건에 그친 대표발의 건수를 크게 웃도는 수치다.
가장 많은 법안을 공동발의한 의원은 더불어민주당 오영환 의원(초선)으로, 이 기간 총 2771건의 법안에 이름을 올린 것으로 나타났다. 하루 평균 2.5건의 법안을 공동발의한 셈이다. 오 의원 외에도 민주당 출신 무소속 양정숙 의원(초선)과 민주당 김정호(재선) 이용빈(초선) 민형배(초선) 의원 등 5명이 총 2000건이 넘는 법안의 공동발의에 참여했다.
공동발의가 남발되면서 정작 국회 본회의 때 자신이 공동발의한 법안에 기권하는 황당한 사례도 빈번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동아일보가 공동발의 건수 상위 10명 의원이 발의한 법안을 전수조사한 결과 이 중 4명이 본인이 공동발의에 참여한 법안에 기권했던 적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한 의원은 “표결 과정에서 실수했다”라고 했다.
공동발의가 남발되면서 전체 법안의 발의 개수는 크게 늘어났지만, 가결률율은 점점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16대 국회 때 2507건이었던 발의건수는 20대 국회 때 2만4141건으로 늘었다. 반면 16대 국회에서 37.7%였던 법안 가결률은 꾸준히 하락해 20대 국회 때는 13.2%, 21대 국회에서는 9.4%에 그쳤다.
공동발의 법안 1000건 넘는 의원 93명… 이름 올린것 잊고 기권도
‘법안 품앗이 발의’ 남발
“내용 보지 말고 도장만 찍어달라”
보좌진들, 실적 채우려 서로 돕기
‘법안 품질 향상’ 본래 목적 사라져… 전문가 “공동발의 참여기준 높여야”
“‘공발(공동발의)’ 좀 부탁드립니다. 내용도 보지 말고 그냥 도장 찍어주시면 됩니다.”
이달 초 더불어민주당 보좌진이 모인 한 단체채팅방에는 법안 파일과 함께 이 같은 메시지가 올라왔다. 해당 메시지를 올린 A 의원실 관계자는 “나중에 다른 의원실에도 ‘공발’이 필요한 법안이 있다면 우리도 돕겠다”며 ‘공동발의 품앗이’를 촉구했다. 실제 이 법안은 1주일 뒤 대표 발의자인 A 의원을 포함한 10명의 참여로 발의에 성공했다. 국회법상 법안을 발의하려면 대표 발의자를 포함해 10명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 본인이 발의한 법안 못 알아보고 기권
공동발의 제도는 법안을 발의하기 전 동료 의원들에게 먼저 동의를 구해 입법 기준선을 높이고 법안의 품질을 향상시키자는 취지로 도입됐다. 하지만 의원들이 법안 내용도 보지 않고 서로 도장 찍어주기를 이어가면서 사실상 무의미해진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복수의 정치권 관계자는 “비쟁점 법안의 경우 법안 내용에 관계없이 친한 보좌진들이 모인 단체채팅방 등을 통해 서로 발의를 돕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특히 같은 국회 상임위원회 소속 의원실끼리, 또는 인근 지역구끼리 공동발의 도장을 찍어주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실제 공동발의 상위 10명 중 8명이 초선이었고, 민주당 의원이 8명이었다. 같은 정당 소속 의원들끼리 서로 도장을 찍어주는 경우가 많다 보니 167석 거대 야당인 민주당 의원들이 상위권에 이름을 올린 것으로 보인다. 야권 관계자는 “아직 이름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 초선 의원들로선 법안 발의 건수를 앞세워 의정 활동을 홍보하는 경우가 많다”며 “평소 ‘공발 네트워크’를 잘 관리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특히 국회종합입법시스템을 통한 전자입법이 활성화하면서 공동발의의 ‘허들’이 더욱 낮아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16대 국회 때 총 2507건이던 발의 법률 건수는 17대 국회 때 3배에 가까운 7489건으로 늘었고, 이후로도 18대 1만3913건, 19대 1만7822건, 20대 2만4141건 등 회기마다 폭발적으로 늘었다. 21대 국회는 아직 임기가 1년가량 남았지만 이달 18일 기준 이미 2만2046건이 발의된 상태라 이 속도대로면 20대 국회 발의 건수를 크게 웃돌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20대와 21대 국회를 거친 한 보좌진은 “버튼 하나만 누르면 전자 공동발의가 가능해지면서 공동발의가 더 남발되는 것이 사실”이라며 “보좌진들이 직접 법안을 들고 의원실을 찾아다니면서 공동발의 도장을 받던 과정마저 생략됐다”고 했다.
법안 발의에 수천 번씩 이름을 빌려주다 보니 자신이 이름을 올린 법안을 알아보지 못해 본회의 표결에서 기권하는 일도 적지 않다. 공동발의 건수 상위 10위에 이름을 올린 민주당 출신 무소속 양정숙 의원과 민주당 민형배 신정훈 의원, 국민의힘 김용판 의원은 자신이 공동발의에 참여한 법안에 최소 1번 이상 기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한 의원 측은 “주요 법안이 아니면 모든 법안들을 기억하기는 사실 어려워 잘못 투표한 것 같다”고 했다. 또 다른 의원은 “투표하는 과정에서 기기 조작에 실수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전문가 “공동발의 기준 높여야”
전문가들 사이에선 늘어난 법안 발의의 양만큼 질이 보장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과 함께 무분별한 양적 증가로 인한 행정 낭비가 이어지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실제 16대 국회에서 37.7%였던 법안 가결률은 17대 25.5%, 18대 16.9%, 19대 15.7%, 20대 13.2%, 21대 9.4%로 법안 발의 건수와 반대로 회기마다 줄어들고 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법안을 무분별하게 발의하면 필요한 법안이 심사도 받지 못하고 폐기되는 경우가 생길 수밖에 없다”며 “의원들이 공동발의에 참여하는 기준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공동발의도 엄연한 입법 활동인 만큼 의원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반드시 필요한 법안의 발의에만 참여해야 한다는 것.
홍완식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입법 성과를 내기 위해 기존에 나왔던 법안을 베껴 내는 ‘표절 법안’도 줄이어 발의되곤 한다”며 “졸속 법안을 줄이기 위해 입법 적정성 등을 따져보는 입법 영향 분석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했다.
김은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