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비 올라 입지 좋은 재건축도 유찰… “공공 늘려 공급난 대비를”
[치솟는 아파트 공사비-분양가]
금융비용 상승-부동산PF 경색에, 재건축 수의계약-시공권 포기 속출
업계 출혈경쟁 회피 분위기 팽배
“공공택지 등 다른 공급기반 필요”
18일 최근 시공사 선정 과정에서 2회 유찰 끝에 대우건설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한 신정4구역 일대 모습. 신정뉴타운 중심부에 있는 곳으로 지상 23층, 1660채 단지로 재건축할 예정이다.
#1. 서울 양천구 신정4구역 재건축 조합은 최근 2차례 유찰 끝에 대우건설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정했다. 신정4구역은 신정뉴타운의 중심지로, 목동 핵심 생활권에 맞닿아 있고 단지 규모만 1660채가 넘는다. 그런데도 지난달 진행된 1, 2차 입찰에서 대우건설만 응찰해 연속 유찰된 것이다. 2번 연속 유찰되면 조합은 시공사를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해 수의계약을 맺을 수 있다.
#2. 광진구 중곡동 중곡아파트 공공재건축조합은 최근 총공사비를 기존 956억 원에서 34% 이상 올린 1283억 원으로 다시 시공사 선정 입찰 공고를 냈다. 3.3㎡ 당 공사비는 650만 원에서 800만 원으로 올랐다. 지난해 8월 입찰 공고를 냈지만 한 곳도 입찰하지 않아 유찰되자 서울시와 계획을 검토한 뒤 공사비를 대폭 인상한 것. 조합 관계자는 “공사비 인상 뒤 열린 12일 현장설명회에는 건설사 12곳이 참여했다”고 설명했다.
● 시공사 못 찾는 서울 정비사업장
원자재값 인상과 대출금리 상승 등으로 공사비가 급등하면서 알짜 사업지로 여겨지는 서울 주요 입지 대규모 정비사업조차 유찰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불투명한 주택 경기로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연장이 어려워지고 이자 부담이 커지자 시공사가 시공권을 포기하는 일까지 발생한다. 서울 도심주택 주요 공급원인 정비사업이 지연돼 중장기 주택 공급이 부족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공공분양 후보지를 찾는 등 주택 수급 불안을 사전에 차단해야 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13일 정비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중랑구 중화동 중화3재개발구역 주민대표회는 시공사인 라온건설을 시공사 지위에서 해지했다. 해당 사업을 위한 사업자금 명목으로 빌린 540억 원에 대한 월 이자 약 3억 원을 내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라온건설은 지난해 시공능력평가 149위 건설사다.
라온건설 측은 “2020년 이후 토지비 마련을 위해 빌린 브릿지론을 네 번 연장했는데 그사이 금융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불어났다”며 “인허가 등 사업 추진 가능성도 불투명해 시공 사업권을 유지하는 실익이 없다고 봤다”고 말했다. 중화3구역 관계자는 “3.3㎡당 공사비가 원래 490만 원이었는데 610만 원까지 올려 시공사를 다시 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소규모 단지가 아닌 대단지 재건축에서도 시공사를 찾지 못해 애를 먹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중구 신당동 신당8구역 재개발 조합은 올해 2월 두 차례 유찰 끝에 포스코이엔씨를 시공사로 선정했다. 건설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말까지 대우건설이 입찰을 검토했지만 최종 응찰을 포기하며 수주전이 벌어지지 않은 것이다.
● 수익성 떨어지자 “출혈경쟁 피하자”
서울 정비사업은 한때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릴 정도로 건설사들의 주요 먹을거리였다. 막대한 마케팅 비용을 들여 홍보 요원을 투입하는 등 수주전을 벌이기도 했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최근 공사비가 급격히 인상되고, 금리 인상으로 금융비용이 늘어나며 정비사업 수익성이 낮아지자 ‘출혈경쟁을 피하자’는 분위기”라며 “다른 건설사가 먼저 들어가 공을 들인 사업장이라면 굳이 입찰해 경쟁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일부 대형 건설사의 경우 지난해 잇달아 역대 최대 도시정비사업 수주액을 기록하며 ‘먹을거리’가 충분해 신규 수주가 급하지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최근에는 사업성이 확실하다는 판단이 설 때만 수주에 나서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며 “기존에 수주한 사업장을 원활히 진척시키는 게 더 급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서울시가 신속통합기획 등으로 압구정, 여의도 등 핵심 지역 정비사업 속도를 높이면서 향후 이 같은 대형 사업장 수주에 대비해 여력을 아껴두는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선별 수주’가 리스크를 줄인다는 의미가 있지만, 지역에 따라 주택 공급이 지연되고 불필요한 갈등을 낳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특히 서울은 신규 택지 찾기가 쉽지 않아 신규 주택 공급을 정비사업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태희 건설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과거 건설사들이 사업성에 한계가 있거나 다른 건설사가 점찍어둔 현장이더라도 수주전에 뛰어들었던 것과는 분위기가 달라졌다”며 “소규모 재건축 등 사업성이 낮은 곳은 사업이 지연되면서 조합 내 갈등이 생기거나 신규 주택 공급 속도가 늦춰질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송인호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정보센터 소장은 “민간 건설사들이 주택 공급이 위축될 때 리스크 관리에 나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며 “정부가 섣불리 개입해 부작용을 야기하는 것보다는 상황을 꾸준히 모니터링하는 한편 공공택지 등 다른 곳에서 공급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축복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