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례 벼리-------------------------------------------------------------------1 1. 머리말---------------------------------------------------------------2 2. 한겨레 씨와 이름의 역사------------------------------------------------2 2.1 한겨레 씨(姓)의 역사-------------------------------------------------2 2.1.1 한겨레는 씨(姓)를 언제부터 써 왔나-----------------------------------2 2.1.2 씨(姓)는 어떻게 널리 쓰였나-----------------------------------------5 2.2 한겨레 이름의 역사---------------------------------------------------6 2.2.1 이름을 어떻게 써 왔나----------------------------------------------6 2.2.2 한겨레 이름의 역사-------------------------------------------------7 2.2.2.1 한말을 한자로 적은 때--------------------------------------------8 2.2.2.2 한말을 한글로 적은 때--------------------------------------------9 2.2.3 한말글 이름으로 나아 온 흐름----------------------------------------11 2.2.3.1 고운 이름에서 한글 이름으로 나아가기-------------------------------11 2.2.3.2 한글 이름에서 한말글 이름으로 나아가기-----------------------------12 3. 한말글 이름 짓기의 실태와 전망------------------------------------------12 3.1 한말글 이름 짓기가 지닌 뜻--------------------------------------------13 3.2 초, 중등 학생의 한말글 이름 짓기 실태-----------------------------------15 3.3 초, 중등 학생의 한말글 이름 짓기 실태 분석------------------------------17 4. 맺음말 --------------------------------------------------------------17 살펴본 글 |
벼리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사물, 또는 하려는 일을 생각할 때 무엇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이 이름이다. 사람들은 그 이름을 부를수록 운명이 함께 흥하기도 하고 쇠할 수 있다. 이처럼 이름은 이룸이며 이룸은 이름 탓이 크다. 이제 21세기 한겨레 삶을 알차고 새롭게 가꾸려는 처지에서 보면 ‘한말글 이름’이 어떻게 씌어왔는지 되짚어 볼 때다. 그래서 먼저『삼국사기』를 비롯해 이제까지의 ‘주요 문헌’ 에 나타난 한겨레 씨의 역사와 한겨레 이름의 역사를 살폈다. 그 결과 씨는 세 나라 시기 때부터 쓰였고, 널리 쓰이기는 고려 문종 때로 보았다. 이름은 한말을 한자로 적은 것과 한말을 한글로 적은 때로 나누어 보았는데, 한말을 한자로 적은 때는 신분 사회 영향으로 한말 이름이 거친 말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한말을 한글로 적게 된 요즘은 민주 사회에서 스스로 개성을 살리며 한말 이름이 알차고 풍부한 모습으로 뜻이 바르고 부르기 쉬우며 맑은 소리를 살리고 있다.
한말글 이름의 오늘날 실제 쓰임새를 한정된 실태 조사 자료에 근거하여 살펴보았다. 이후 크게 보완할 부분이다. 무엇보다 ‘한말글’은 딴나라말이나 들온말 한자말이 아닌, 순수한 우리 ‘토박이말’과 ‘한글’을 아울러 한 낱말로 합친 말이다. 또 한겨레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한겨레말’을 뜻하기도 한다.
우리는 굳이 ‘ 한말글 이름으로 부르려는 노력에 주목한다. 이제까지 ‘고운 이름’이나 ‘우리말 이름’, ‘한글 이름’, ‘토박이말 이름’ 따위로 부르던 이름들을 통틀어 새롭게 뜻매김할 필요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바탕에서 한말글 이름을 널리 부려 쓰는 우리 사회가 되도록 이끄는 방안을 이제라도 찾아야 할 것이다.
핵심어: 한말글, 이름, 고운 이름, 토박이말 이름
1. 머리말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사물, 또는 하려는 일을 생각할 때 무엇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이 이름이다. 사람들은 그 이름을 부를수록 운명이 함께 흥하기도 하고 쇠할 수 있다. 이처럼 이름은 이룸이며 이룸은 이름 탓이 크다. 이제 21세기 한겨레 삶을 알차고 새롭게 가꾸려는 처지에서 보면 한말글 이름은 이제까지 어떻게 씌어왔는지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 글은 『삼국사기』를 비롯해 이제까지의 ‘주요 문헌’ 에 나타난 ‘한말글 이름’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앞선 연구로는 삼국 시대 민중들의 광범위한 이름짓기의 연구는 최범훈님(1976)이 있고,김영황(1978/1989)도 세밀하게 연구하였다.
아울러 한말글 이름이 오늘날 어떻게 씌어지고 있는지를 아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현대의 복잡한 사회 생활 속에서 한말글 이름이 지닌 가치를 겨레 스스로가 잘 알고, 이를 널리 펼수 있도록 이끄는 일이 왜 필요한지를 아는 일은 끊임없는 실태의 분석에서 그 방향을 찾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아직은 실태 분석이 매우 미흡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이런 뜻에서 한말글 이름에 관한 좀더 체계 있고 종합스런 연구의 필요성은 절실한 것이다. 아무쪼록 이 연구로 비롯하여 우리 모두가 ‘한말글 이름 짓기’의 실제 모습을 알차게 가꾸는 길에 더욱 힘차게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2. 한말글 이름의 역사
2.1 한겨레 씨(姓)의 역사
2.1.1 씨(姓)를 언제부터 써 왔나
흔히 말해 온 대로 친족 공동체였던 사회에서는 씨(姓)란 것이 있었을까? 이에 대한 답은 그렇지 않다.
(1) “그 풍속은 산천을 소중하게 여기며 산천에는 각기 부분이 있어 서로 넘나들거나 상관하지 않으며, 성끼리는 혼인하지 않는다.(其俗重山川 山川 名有部分 不得妄相入 同姓不婚)” , 삼국지 위지 예전
(1)에서 ‘동성(同姓)’은 당시 우리 토박이 사회에서 일정한 무리 안에서는 혼인을 하지 않는 풍습을 보고 일정한 집단을 가리킨 것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씨(姓)는 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나라가 나타나면서 집단 공동의 조상신보다는, 지배자 중심의 홀로스런 ‘가계 전승’과 ‘핏줄 의식’이 더욱 강조되며 나타났다고 본다. 엄밀히 말해서 ‘씨족’이라기보다 ‘친족’이라 할 것이고, 아마도 좀더 발달된 연맹 사회에서 씨족 간의 구분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라 하겠다.
그러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나라에서 씨(성/姓)가 과연 어떻게 씌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고구려(高句麗)의 경우를 살펴보자. 고구려는 시조 주몽(朱蒙), 곧 동명성왕이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고 여기서 고씨(高氏)를 자기 성(姓)으로 한 보기가 있다.2)
(1)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고씨요 휘(휘)는 주몽(주몽)[또는 추모나 상해(중모?)라고도 씀]이다.
[삼국사기 권 제13 고구려 본기 제1 시조 동명성왕 유리왕 조]
그리고 이미 1대 동명성왕이나 2대 유리왕 때 다음과 같은 기록(記錄)에서 보듯이 사성(賜姓)을 하였으므로 필요에 따라 씨(姓)를 썼다고 할 수 있다.3)
(2) ① 주몽이 묻기를, “그대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며,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인가?”라고 하였다. 삼베 옷을 입은 자가 “이름은 재사再思요” 하고, 목면 옷을 입은 자는 “이름은 무골無骨이요.”라고 하였으며, 마름 옷을 입은 자는 “이름은 묵거黙居요.”라고 각각 대답하면서 성은 말하지 않았다. 주몽이 재사(再思)에게는 극(克)씨를, 무골(武骨)에게는 중실씨(仲室氏)를, 묵거(默居)에게는 소실씨(小室氏)를 성으로 내려주고....
② 9월에 (유리)왕(瑠璃王)이 국내(國內:尉那巖)에 가서 지세를 살펴보고 돌아오는 길에 사물택(沙勿澤)이란 곳에 이르러 한 장부가 택상의 돌 위에 앉은 것을 보았다는 (그가)왕에게 말하기를, 왕의 신(臣)이 되고 싶다고 하였다. 왕은 허락하고 그에게 사물이란 이름과 위씨(位氏)란 성(姓)을 내렸다. 우씨(于氏)
또 3대 대무신왕 때도 낙씨(絡氏), 부정씨(負鼎氏), 대실씨(大室氏) 등의 씨(姓)를 내렸다.
(3) ① 그때 홀연히 한 장부가 나타나 말하기를, “이 솥은 우리 집의 것으로, 나의 누이가 잃은 것을 지금 왕이 얻었다.”하고 짊어지고 따라가기를 청하니 (왕이) 성을 내려 부정씨(負鼎)라 하였다.
② 왕은 그의 등에 낙문(絡文)이 있으므로 낙씨(絡氏)란 성을 내렸다.
③ 왕이 듣고 말하기를, “발소(勃素)가 위엄을 부리지 않고 능히 지혜로써 악인을 징계하였으니 가위 능란하다.” 하고 성을 내려 대실씨라 하였다.
이밖에도 고구려 조정에서 씨(姓)를 내려주었다는 기록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표1> 고구려 조정에서 내린 씨(姓)
제3대 대무신왕(大武神王) |
좌보(左輔) 벼슬을 한 을두지( 乙豆支)와 우보(右輔) 벼슬을 한 송옥구(松屋句) |
제6대 태조왕(太祖王) |
좌보(左輔) 목도루(穆度婁)와 우보(右輔) 고복장(高福章), |
제8대 신대왕(新大王) |
국상(國相) 명림답부(明臨答夫), |
제10대 산상왕(山上王) |
을파소(乙巴素), |
제11대 동천왕(東川王) |
국상(國相) 고우루(高優婁), 명림어수(明臨於漱), |
제14대 봉상왕(烽上王) |
북부소형(北部小兄), 고노자(高奴子), 음우(陰友), 창조리(倉租利), |
제25대 보장왕(寶藏王) |
을지문덕(乙支文德), 연개소문(淵蓋蘇文) |
또한 왕비(王妃)나 왕모(王母)의 성(姓)으로 예(禮), 송(松), 우(于), 연(緣), 주씨(周氏) 등이 나온다.
송서(漢書)에 따르면 장수왕 때에 장수왕 이름을 고연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고구려 왕실의 성을 고씨로 기록한 바 있다.4) 장수왕이 사신으로 보낸 고익(高翼), 마루(馬婁), 손수(孫漱), 고구(高仇), 동등(蕫謄) 등의 이름에도 모두 성을 부려썼다.5)
(4) ㄱ.장수왕의 휘는 거련(巨連)이며, 광개토왕의 원자이니,...
ㄴ. 원년에 왕이 장사 고익(高翼))을 동진에 보내어 국서를 전하고....
ㄷ. 26년 ... 왕은 남으로 온 홍(弘))을 보내지 않으려고 장수 손수(孫漱), 고구(高仇) 등을 시켜 홍을 북풍에서 죽이고 그의 자손 10여 명까지도 죽였다. (삼국사기 권 제18 고구려 본기 제6)
그래서 고구려는 장수왕(413-490)부터 성을 쓴 것으로 기록에서 추정한다. 6)
다음으로 백제의 경우는 어떠한지 알아보자. 백제(百濟)의 성씨(姓氏)로는 여(餘), 사(沙), 연(燕), 협, 해(解), 진(眞), 국(國), 목(木) 등의 팔족(八族)과 왕(王), 장(張), 사마(司馬), 수미(首彌), 고이(古爾), 흑치(黑齒) 등이 있고, 왕실(王室)의 성(姓)인, 여(餘)를 쓴 사람이 가장 많았다. 7)
이밖에 온조(溫祚)를 따라 남하하여 백제 건국에 공을 세우고 십제공신(十濟功臣)이 되었다는 전섭(全聶)과 마려(馬黎)를 원조(元祖)로 하는 전씨(全氏)와 마씨(馬氏)가 있다. 개루왕(蓋婁王)때 인물인 도미(都彌)를 선계(先系)로 하는 성주 도씨(星州 都氏)가 있으며, 백제(百濟)가 망하자 당(唐)나라로 망명(亡命)하여 당 고종(高宗)으로부터 서씨로 사성(賜姓)받고 웅진(熊津) 도독이 되어 귀국했다는 부여융(扶餘隆)을 시조(始祖)로 하는 부여 서씨(扶餘 徐氏)가 있다. 이 외에 백제(百濟) 8대성과 같은 성(姓)으로 진(眞), 연(燕), 국씨(國氏)가 현재도 있기는 하나 그 연원(淵源)이 분명치 않다. 백제(百濟)는 근초고왕(近肖古王346~375) 시대(時代)부터 성(姓)을 쓴 것으로 기록(記錄)에서 추정(推定)한다.
한편 신라 시대, 박(朴), 석(昔), 김(金) 삼성의 전설이 전해 오며, 유리왕 9년(32)에 육부(六部)의 촌장에게 각각 이(李), 정(鄭), 손(孫), 최(崔) , 배(裵), 설(薛)씨의 성을 사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의 "북제서"에는 진흥왕(540~576)을 금진흥(金眞興)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김(金)씨라는 성을 사용 한 것으로 나타난다. 비문에 나타나 있는 내용을 볼 때 인명에 성을 사용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소속부명(촌명)과 이름만 쓴 것을 보면 우리 선조는 성보다 본(村名)을 먼저 썼다고 볼 수 있다. 7세기 이전 건립된 신라 진흥왕의 네곳의 순수비, 신라 진지왕 3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술오작비, 진평왕시대에 건립된 경주 남산의 신성비 이상의 예를 들어 추정해보면, 신라는 진흥왕시대(540~576)부터 성을 쓴 것으로 기록에서 추정한다.
<표2> 세 나라가 써 온 씨의 목록
고구려 |
백제 |
신라 |
고(高), 을(乙), 예(芮), 송(松), 목(穆), 간, 주(舟), 마(馬), 손(孫), 동(董), 채, 연(淵), 명림(明臨), 을지(乙支) |
여(餘)사(沙)·연(燕)·해(解)·진(眞)·국(國)·목(木)·묘(苗)·백씨, 흘(屹氏) |
박(朴), 석(昔), 김(金) 이(李), 정(鄭), 손(孫), 최(崔) ,배(裵), 설(薛) |
이와 같이 삼국은 고대 부족국가 시대부터 성을 쓴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결국 고구려는 장수왕시대(413~490)부터, 백제는 근초고왕시대(346~375)부터, 신라는 진흥왕시대(540~576)부터 성을 쓴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도 성을 쓴 사람보다는 없는 사람이 더 많았고, 주로 중국에 왕래한 사신들과 유학자와 장보고와 같이 무역을 한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였으며, 일반민중은 신라 말기까지 성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백제(百濟)의 성씨(姓氏)들과 고구려(高句麗)의 성씨(姓氏)들이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 들어서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는 이들 성씨(姓氏)들이 백제(百濟)가 신라(新羅)에 패망(敗亡)함으로써 성씨(姓氏)를 사용(使用)하지 못했거나 혹은 정치적(政治的)으로 사회적(社會的)인 특권(特權)이 주어지는 부분(部分)에 한해서만 허용(許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現在) 오늘날 우리가 사용(使用)하는 성씨(姓氏) 중에서 백제(百濟)에 연원(淵源)을 두는 성씨(姓氏)도 극히 드물다.
2.1.2 씨(姓)는 어떻게 널리 쓰였나
우리나라 성씨의 체계는 어떻게 확립되었나?
먼저 고려의 태조 왕건이 성을 하사한 것을 들 수 있다. 왕건은 개국 공신들과 지방 토호세력들을 통합 관장하기 위하여 전국의 군·현 개편작업과 함께 성을 하사하였다. 그래서 고려 초기부터 귀족 관료들은 거의 성을 쓰게 되었다.
다음으로 고려 문종9년(1044)에 성이 없는 사람은 과거 급제할 수 없다는 봉미제도를 시행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이때까지도 성을 쓰지 않은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법령으로 우리나라의 성이 보편화되어 일반민중이 성을 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문종 이후의 사람을 시조로 하는 성씨가 많아졌다. 8)
기록에 따르면 한국 역사에서 평민들이 성씨를 부려쓰게 된 것은 12세기 이후의 일로 보인다. 그러다가 14-15세기에 이르러서야 그것이 사회적 관습으로 정착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변천은 고려시대에 작성된 금석문을 비롯하여, 14세기의 고려 호적, 15세기에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 및 같은 시기의 실록 기사에서 확인된다.9)
그런데, 조선 초기 성은 양민에게까지도 보편화되었으나 노비와 천민계급 등은 조선 후기인 17세기까지도 성을 쓸 수가 없었다. 현재 전하고 있는 16-17세기의 호적에서 확인되는 사실이지만, 그 당시에는 성씨를 부려쓰지 못한 노비들이 전체 인구 가운데 30-40%나 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다음은 기록에 나타난 성씨의 수효이다.
<표3> 우리나라 씨(姓)의 수
|
|
|
|
1486년(성종) |
|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
277성, |
영조(21대) |
이의현(李宜顯) 편 |
『도곡총설(陶谷叢說)』 |
298성, |
1908년(고종) |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496성2) |
1930년 |
|
국세조사 |
250성, |
1960년 |
|
국세조사 |
258성 |
그러나, 1909년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어느 누구라도 성과 본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되었다. 이제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성을 취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를 기회로 성이 없던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을 담당한 동(洞)서기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 주기도 하고, 머슴의 경우 자기 주인의 성과 본관을 따르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문집안의 성씨를 모방하여 성을 정하였다. 그러므로 성씨의 종류수가 더욱 늘어났다. 따라서 1930년 국세조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성씨가 많아졌다.
그런데, 1939년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의 일환으로 창씨개명이 강요되었다. 이 제도가 실시된 때는 흔히 우리나라 성씨 역사의 가장 큰 수난기로 이야기한다. 당시 강제로 우리 고유의 성씨를 버리게 하고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라는 요구에 80%나 따르게 되었다. 10)
다행히 1945년 해방을 맞이하였고, 1946년 10월 23 일 미군정이 공포한 조선 성명 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에 따라 성과 이름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최근의 조사인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274개의 성씨로 보고되었다. 이후에도 국제화 시대를 맞아 외국인의 귀화 등으로 새로운 성씨와 본관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2.2 한겨레 이름의 역사
2.2.1 이름을 어떻게 써 왔나
이름에는 신분제도 반영되었다. 물론 한자 문화가 본격적으로 침투하기 전에는 계층에 관계없이 한글 이름을 지었지만 고려 이후 지배 계층은 한자식, 여자를 포함한 피지배 계층은 한말 이름을 짓는 역사가 비롯되었다. 한자가 인간 차별의 수단이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자식 이름이 그런 잣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배 계층의 한자식 이름은 이른바 입신양명의 대상으로 사회적 효용성을 띤 것이었지만 피지배 계층의 이름은 지배 계층의 편의를 위해 적당히 붙여진 이름이었다. 굳이 사회적 효용성을 찾는다면 군역을 비롯한 나라 일에 동원된 공노비들의 이름이 그런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여자들의 경우는 지배 계층의 부인들조차 대부분의 피지배 계층과 다를 바가 없었는데, 뿌리 깊은 남녀 차별이 이름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11)
2.2.2 한겨레 이름의 역사
삼국 병합 이후 경덕왕(742-765재위) 때는 문물 제도가 급속히 한화(漢化)되었다. 이 무렵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기 위해 굴욕 외교를 펴면서 병합 신라 이전부터 관리들의 옷입는 제도까지 바뀌었을 정도이니 문화 침투가 심했고, 757년 9주(州)·5소경(小京)·117군(郡)·293현(縣)의 고유 지명을, 759년 관직명을 당나라 식으로 고친 데서 보듯이 말글살이는 크게 ‘나됨’을 잃게 되었다.
(5)
옛 주이름 |
고친 이름 |
영속 |
주치 | |||
주수 |
소경 |
군수 |
현수 | |||
사벌주 |
상주 |
1 |
|
10 |
30 |
상주 |
삽량주 |
양주 |
1 |
김해 |
12 |
34 |
양산 |
청주 |
강주 |
1 |
|
11 |
27 |
진주 |
한산주 |
한주 |
1 |
중원(충주) |
27 |
46 |
광주 |
수약주 |
삭주 |
1 |
북원(원주) |
11 |
27 |
춘천 |
웅천주 |
웅주 |
1 |
서원(청주) |
13 |
29 |
공주 |
하서주 |
명주 |
1 |
|
9 |
25 |
강릉 |
완산주 |
전주 |
1 |
남원 |
10 |
31 |
전주 |
무진주 |
무주 |
1 |
|
14 |
44 |
광주 |
|
|
9 |
5 |
117 |
293 |
|
하지만 한말글 이름 짓기의 처지에서 보면 신라 경덕왕 때부터 문물 제도가 한화했다고 모든 지배 계층의 이름이 한자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12) 당나라를 넘나드는 지식인 계층(6두품)과 사대 문화에 일찍 물든 일부 귀족만이 한자식 이름을 지었다가 고려로 오면서 일반화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계층이 한글 이름으로 짓던 시기를 폭넓게 후삼국 시대까지로 잡고, 경덕왕 때부터 고려 초까지는 지배 계층의 이름이 한자식으로 되어 가는 과도기로 설정할 수 있다.
다음으로 고려를 세운 왕건이 귀족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서 성을 부여했다는, 이른바 ‘사성’ 제도의 실시와 또 고려 초기부터 실시된 과거 제도 등으로 국문학(향가 따위)이 쇠퇴하고 한문학이 융성해지는 흐름 때문이다. 성의 부여와 함께 한자식 이름이 본격화되었다는 설은 객관적 설득력이 있다. 왜냐하면 이름의 역사를 종합해 볼 때 성이 있으면 한자식, 성이 없으면 한말글 이름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한말글 이름의 흐름을 어떻게 풀이할 수 있을까? 당장은 한말을 한자로 적은 때와 한말을 한글로 적은 때로 가를 수 있겠다. 그래서 한말을 한글로 적은 때가 곧 한말글 이름의 뚜렷한 한말글 이름의 역사라 할 수 있다.
2.2.2.1 한말을 한자로 적은 때
금석문, 『삼국사기』『삼국유사』등의 자료와 기존의 여러 연구를 종합하면 고구려의 ‘주몽(활 잘 쏘는 사람)’, ‘연개소문’, ‘을지문덕’, 백제의 24대 동성왕 때까지의 왕 이름, 신라의 ‘박혁거세(밝은 분, 밝은 누리)’, ‘유리니사금(이가 많은 분)’, ‘탈해(알을 토한 분)’, ‘거칠부(거칠마로 : 용감한 분)’, ‘원효(비롯)’ 등이 나타난다. 이들은 우리 글자가 없었기 때문에 향찰 따위의 차자 표기로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여기서 지배 계층의 대부분이 한글 이름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다른 계층도 한글 이름을 썼다고 추정하는 데 별 무리가 없다고 본다. 요컨대, 입말을 글말로 적게 하던 한자 빌어 적기(차자) 덕분으로 어느 정도는 복원이 가능하다. 13)
그런데, 김영황님은 사람 이름의 특징을 의미 구조상 아래와 같이 분류했다.
(6) 사람 이름의 의미 구조상 특징
ㄱ. 형제 사이를 구별하기 위하여 출생 순서에 따라 이름을 달리 짓거나 비교하여 달리 짓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 서히(善兮) : ‘셋째 아이’라는 뜻, 미시히(未斯欣) : ‘밑의 아이’라는 뜻
아히(阿海), 아지(阿之) : 두 딸을 구별하기 위하여 큰딸을 ‘아히’로, 작은딸을 ‘아지’로 하였다.
ㄴ.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염원을 반영하여 이름을 짓기도 하였습니다.
예) 고비(姑比) : 딸이 곱게 자라나라고 하여 ‘고비’라 하였다. 기리(吉伊) : 딸이 곱게 살라고 ‘기리’라고 함.
ㄷ. 어떤 사명이나 직무를 반영하여 이름을 짓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 수리(首露) : 우두머리라는 뜻에서 ‘수리’라고 하였다.
다음으로 세 나라의 사람 이름을 종합하여 다음과 같은 도표로 제시하였다.
<표4> 고구려․백제․신라의 사람 이름
째 (번) |
구조상 유형 |
고 구 려 |
백 제 |
신 라 |
1
2 3 4 5 6 7 8 9 |
-이
-우 -이(용언) -리(용언) -ㅁ(용언) -지 -둥 -보 -나 |
마리, 누리, 수리
부루, 미루, 해루 발기 불그리 오롬 웃지, 웃도지 잇둥 실보 소나, 웃나 |
마리
기루, 해루 고비
오롬 도지 맛둥 웃보 |
마리, 누리, 수리, 아지, 아호리 아루, 해루 고비, 거리, 거미 고보리 오롬, 나 밋지, 구리지, 누리지 뱀등 웃보 |
10 11 12 13 14 |
-도 -쇠 -불 -한 -마로 |
웃도 웃쇠, 개쇠 웃불, 새불
|
웃도, 새도, 굿도 웃쇠, 굿쇠 새불
|
웃도, 새도, 굿도 웃쇠, 굿쇠, 누리쇠 웃불, 새불 마리한 누리마로, 잇기마로 |
이상의 연구 결과를 종합해 볼 때 삼국이 순우리말로 이름을 짓는 전통을 함께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위와 같은 추정(재구)은 좀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신라의 봉건 사대주의 계층을 중심으로 시작된 한자어로 이름 바꾸기는 고려에 와서 일반화되었고 조선 말까지 이어졌다. 고려 시대에는 주자학 등 중국의 학문과 과거 제도 등의 문물 제도가 많이 들어와 더욱 이러한 현상이 심화되었다. 그러나 상류 계층만 제외하고 대부분의 민중들은 한글로 이름을 지었다. 결국 이 시기는 지배 계층에 한자식 이름이 확고히 자리잡는 한편 피지배 계층의 한글 이름 가치는 상대적으로 낮아지는 시기입니다. 14)
고려 시대의 사람 이름에 관한 연구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우리 글자가 없었던 시기였고 자료의 한계와 연구자의 부족 등을 이유로 들 수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성이 일반화되면서 상류 계층은 한자식, 하류 계층은 한글 이름을 지었다는 사실이다. 한글 이름의 증거로서 최범훈, 남풍현, 서정수 세 분이 연구한 결과를 가나다 차례로 내보이면 다음과 같다. 이들은 물론 차자 표기를 통해 복원한 것이다.
<표6> 고려 시대의 사람 이름
최범훈(1977) |
가히돝 |
그물이 |
금쇠 |
나근내 |
난쇠 |
되가히 |
돌이 |
남풍현:(1981) |
막쇠 |
만흠이 |
범쇠 |
복장이 |
부쇠 |
가히 |
사월이 |
서정수:(1993) |
살자기 |
쇠돌이 |
얼돌 |
터릿가히 |
|
|
|
조선 시대로 넘어오면 한글 창제에도 불구하고 이름짓는 방식은 거의 변화가 없다. 다만 한글로 인하여 좀더 정확히 그 시대 이름을 엿볼 수 있다는 장점만이 있을 뿐이다15).
일제는 1896년 ‘호구조사규칙급세칙’ 등을 거쳐 1910년 ‘민적부’를 작성하였다. 성이 없이 이름만으로 부르던 많은 민중들에게 한자식 성을 부여하여 민적부에 올리는 작업을 했다. 이에 한자식 이름이 급속히 확대되었다. 또한 1922년 조선 총독부령으로 시행된 조선호적부에 의해 대부분의 여자 이름이 일본식으로 바뀌는 수난까지 겪게 되었다.
2.2.2 한말을 한글로 적은 때
한글 이름을 엿볼 수 있는 다음 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최범훈(1996)에서 살핀 논의를 간단히 정리해 보고자 한다.
<표7> 조선 조의 한글 이름을 살필 수 있는 자료
김수온 |
1449 |
사리영응기(舍利靈應記) |
47명의 사람 이름이 성(한자)과 함께 한글 이름(서로 다른 이름 : 40명)으로 나와 있음 |
|
1596 |
진관관병편오책(鎭管官兵編俉冊) |
성씨가 있는 병정 이름 856명, 성씨가 없는 남자 노비 이름 816명 |
|
1617 |
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絳行實) |
효자 이름 1,212명, 열녀 이름 796명, 충신 이름 99명 이중 하층민(노인, 천인) 289명 |
|
1687 |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佛說大報父母恩重經言解) |
21명의 이름이 한글로 표기되어 있음 |
|
1745 |
노비보(奴婢譜) |
노비의 족보로 76가구 200여 명의 노비 상황 기록 |
<표7>의 문헌과 기타 여러 문헌을 바탕으로 고유 인명을 작명관에 따라 분류한 최범훈(1976, 1977)의 연구 결과에서 주요 이름만을(차자 표기 대조는 빼고) 사람 이름을 주제별 특성에 따라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표8> 주제별 특성에 따라 분류한 사람 이름
|
|
|
동물류 |
가축류 |
강아지, 삽사리, 수캐, 송아지, 도야지, 망아지, 나귀, 당나귀, 노새 |
짐승류 |
호랑이, 곰이, 광이, 사슴이, 너굴이, 여우, 원숭이, 담비 | |
조 류 |
부헝이, 두루미, 까마귀, 제비, 오리, 꾸꾸기, 물닭 | |
어 류 |
송사리, 미꾸리 | |
기 타 |
두꺼비, 거북이, 메뚜기, 귀뚜라미, 방개, 지내, 진득이, 개구리, 벌이, 지렁이, 굼벙이 | |
식물류 |
|
밤이, 밤톨이, 도토리, 포도, 대추, 고추, 호박 |
용모 |
안색 |
가물이, 감바회, 거묵이, 곱쇠, 곱단이, 입분이, 어엿비, 예쁜이, 이쁜이, 오목이, 험상이, 납작이, 공돌이, 복술이, 몽고리, 몽실이 |
신체 특징 |
가마, 점백이, 눈서비, 감직이, 육손이, 바독이, 언챙이, 억박이, 볼떡이, 혹불이, 쟛달이, 조꼬만이, 꼬맹이 | |
성격류 |
선호(善好)류 |
얌전이, 음전이, 어진이, 똑똑이, 착한이 |
증오류 |
모질이, 어둔이, 멀동이, 어리숭이, 노랭이, 더펄이, 밉돌이 | |
장소류 |
지명 |
가평개, 강경화, 청주쇠, 창녕네, 회령네 |
위치 |
사랑이, 마당쇠, 부엌이, 뒤간이, 안방네, 새집아기, 개천이, 골목이 | |
시간류 |
|
보롬이, 반달이, 그믐쇠, 밤네, 해도지, 단오개, 환갑이 |
기구류 |
금속제 |
방울이, 고두쇠, 가외, 장돌이, 자물쇠, 독기쇠, 고장쇠 |
목제류 |
몽둥이, 몽치, 옷독이, 고리개, 팽이, 지게, 방망이 | |
고제(藁製 |
볏집 따위로 만든 것)류 : 덕석이, 봉태기, 방석이, 멱석이, 오쟁이 | |
석제류 |
맷돌이, 돌공이, 옹기돌이 | |
기타 |
박아지, 제기, 박이, 귀개, 고팽이 | |
암석류 |
|
바회, 방우, 돌멩이, 돌매, 돌적이, 돌무덕, 돌덩이 |
기원류 |
|
붓두례, 붓돌이, 죽지만, 고만이, 엇절이, 오죽이, 인제두, 나시오, 설마, |
|
섭섭이, 서운이, 분통이, 씨돌이, 씨종이 | |
똥 불알 |
|
개똥이, 똥개, 개불이, 개조지, 쇠똥이, 쇠불이, 말똥이, 말불이, 금이, 방구 |
민속류 |
|
미륵이, 미륵네, 조왕돌, 점불이, 국사동이 |
십간 수자 사계류 |
갑금이, 을돌이, 무길이, 백돌이, 만가히, 억가히, 동지쇠 |
<표8>의 이름들을 보면 짓는 방법의 좋고 나쁨을 떠나 한글 이름을 천대하였음을 볼 수 있다. 사실은 한글 이름을 천대하였다기보다 그 이름을 쓴 사람들을 천대한 것이다. 한글 이름이라고 해서 무조건 반가워할 수 없는 것은 위의 이름들에서 사회적 효용성(인격체를 나타내는 이름)을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여기서 우리는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던 민중들의 삶을 엿볼 수 있으며 상대적으로 한자식 이름의 모순된 역사적 위상을 찾을 수 있다.16)
2.2.3 한말글 이름으로 나아온 흐름
광복은 되었지만 그것은 온전한 광복이 되지 못하고 곧바로 분단으로 이어졌다. 또한 남한 사회에서는 친일파가 제거되기는커녕 오히려 버젓이 지배․기득권층이 되어 사회 전반의 권력을 장악하니 일제 치하의 모순은 새로운 모순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말과 글의 모순이 제대로 바로잡힐 리가 없다. 일제 치하에서 일제의 문화 침략 논리에 의도적으로 또는 무지 때문에 말려들었던 지식인들에 의해 국한문 혼용 등의 모순이 거의 그대로 이어졌다. 크게 개선될 리 없었으나 두 가지 면에서 특기할 만한 일이 있었다. 17)
첫째는 광복 후 최초로 민간에서 개인별로 노력한 일을 들 수 있다. 바로 한글 이름으로 호적에 올린 일이 있었다. 1984년 8월15일 한글이름펴기 모임에서 ‘한글 이름 알림 잔치’를 열고 이날 기념패를 받은 이는 최참도(1946.3.4생)님이다. 한편으로 오늘날 매우 알려진 음악가인 ‘금(김)난새(뛰어난 새, 나는 새)’는 아버지인 금수현(김수현)에 의해 1947년 9월 25일에 호적에 올려졌다. 그래서 한말글 이름으로는 금난새가 처음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한글 이름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면서 재판을 통해 한자식 이름을 한글 이름으로 바꾸어 호적을 바로잡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 중 최초는 밝(박)한샘으로 1979년에, 최고령은 최햇빛으로 1985년(당시 75세)에 이름을 바꾸었다. 최연소는 김슬옹으로 1983년(당시 21세)에 개명하였다.
둘째는 한말글 운동 단체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모순을 바로잡으려는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우리말 이름과 관련하여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단체로 들 수 있는 것은 서울대 국어 운동 학생회를 비롯한 대학생 국어 운동 학생회들이 있고, 또 한글 이름 펴기 모임이 있다.18)
2.2.3.1 고운 이름에서 한글 이름으로 나아가기
1967년 5월, 서울대학교 국어운동학생회가 처음 행사를 가지며 붙였던 이름은 '고운 이름 뽑기'였다.20) 이때는 한글이름이 법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다시 말하면 호적에 오를 수 없는 것으로 지레 짐작하고, 비록 한자로 표기한 이름일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예쁜 토박이말이라면 찾아서 기리려 했다. 그런데 행사를 하는 과정에서 '금 난새' 남매 이름 들이 호적에 한글로 올라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그때 함께 뽑혔던 '민 달래'는 '달래'란 토박이말에 한자를 붙인 이름이었다. 그러니까 그때는 관련 공무원(호적 담당)이 무심코 한글 이름을 받아 주면 한글 이름이 되었지만, 한글 이름은 절대 안 된다고 지레 판단한 대부분의 공무원은 한글 이름을 받아 주지 않았던 때였다.
이 대회에서 상 탄 이를 중심으로 1976년 ‘고운 이름 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 모임은 1976년 한글날에 ‘백만 사람 한글 이름 갖기’ 운동을 벌였습니다. 이러한 운동 역량을 바탕으로 1977년에는 모임 이름을 ‘한글 이름 펴기 모임’으로 바꾸고 본격적인 사회 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이 모임은 방송 출연을 비롯하여 1978년 이름본 2,000부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활발히 활동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서울대 고운 이름 자랑하기 대회를 처음으로 기획하여 한글 이름의 가치를 널리 알리는 데 크게 이바지한 이얄라(이봉원)와 한글 이름 펴기 모임 초대 으뜸빛인 밝한샘, 같은 모임의 으뜸빛으로 활동한 배우리 그리고 양한길, 밝덩굴 등 여러 분의 뛰어난 업적이 있었다. 그리고 1984년에는 배우리가 ‘고운 이름 한글 이름’이라는 한글 이름 전문책을 펴내었다. 또 밝한샘님은 1988년에 주로 한글 이름을 지키기 위한 투쟁 기록을 담은 책 ‘밝을나라’ 를 펴냈다.21)
2.2.3.2 한글 이름에서 한말글 이름으로 나아가기
광복을 계기로 우리말로 짓고 한글로만 적는 한말글이름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기에, 이때를 한말글 이름 펴기 운동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여전히 한자이름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한말글 이름 지어쓰기가 본격적인 국민 운동으로 일어난 것은 전자 통신과 인터넷 시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말과 한글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이 두 낱말을 하나로 합쳐 '한말글'로 부르게 되면서, '한글 이름'도 자연히 '한말글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한글 이름이라고 내세우는 것들 가운데는, 기독교의 세례명을 포함해서 외국어가 분명한 이름도 있고, 또 한말(우리말)이름은 분명한데, 한자로 적기도 하는 (호적에도 한자로 올리고) 이름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글로 호적에 올린 이름이면서 토박이 우리말로 지은 이름이 확실한 경우에만 한말글 이름이라고 부른다22)
3. 한말글 이름의 실태와 전망
우리는 오늘날 사회의 흐름에 걸맞게 한말글 이름을 부려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한말글 이름짓기가 지닌 뜻을 좀더 뚜렷이 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초, 중등학생의 이름에서 보이는 한말글 이름짓기의 실태를 살펴보고 이를 분석하면서 문제점과 바람직한 풀이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3.1 한말글 이름짓기가 지닌 뜻
왜 한말글 이름을 지어야 하는가?
밝덩굴(1994: 90-98))은 왜 한글이름이 좋은지를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7) ㄱ. 부르는 소리가 부드러워 좋다.
ㄴ. 쓰기가 쉬워서 좋다.
ㄷ. 머리에 떠올림이 빨라서 좋다.
ㄹ. 뜻이 있어 좋다.
ㅁ. 줄여 다듬은 말로 지을 수 있어 좋다
ㅂ. 두 자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스러우니 좋다
ㅅ. 여러 가지 돌림말로 지을 수 있어 좋다
ㅇ. 창의력을 요구한다.
(7ㄱ)은 ‘한아름, 이시내, 조예소라, 송봉우리’의 보기를 들 수 있다. 이것은 한자말 이름인 ‘김철진, 박명오’ 처럼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이름과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이름이 소리와 전혀 무관하게 음양오행만 맞으면 갖다 붙여 놓았기 때문이다.
(7ㄴ)은 입학원서에서 이름을 쓸 때, 이다래, 금나루, 은버들로 쓰는 것과 김철웅, 이영순, 오상희와 같이 한자말 이름을 쓸 경우에 어느 것이 쓰기가 쉬운 것인지를 생각해 보면 된다.
(7ㄷ)은 ‘이 듬직’과 같은 한말글 이름이 취직 시험이나 각종 선발에서 그 이름이 빨리 머리에 떠올라서 유리한 경우를 들 수 있다.
(7ㄹ)은 윤새라(소리), 오새봄(분위기), 이버들네(모양새), 정귀염(뜻깊은 생각을 가진이름)에서 보듯이 맑은 이름, 밝은 이름, 고운 이름, 뜻가진 이름이 다 ‘뜻새김’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이름들은 차범구(車範九),한춘선(韓春善),이쌍례(李雙禮)에서 보듯이 ‘아홉 번 모범을 보여준다(?)’와 같은 억지 풀이가 나오지 않는다. 그리나, 훤나래, 꽃답이, 온누리에서 보듯이, 소리가 맑고 밝으며 고우면서 뜻을 머금고 있는 것이 한말글 이름인 것이다.
(7ㅁ)은 한말의 보람 중의 하나인 ‘줄기 합치기’를 살린 방식을 말한다. 차달(찬달), 예슬(예쁘고, 슬기스럽게), 훤눌(훤한 누리), 난새(나는 새), 봄들(봄의 들), 어지니(어진이)
(7ㅂ)은 이제까지 한자말 이름짓기에서 두 자 틀 위주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자유스럽게 별(한 자), 바다(두 자), 보리나(세 자), 푸른나래(네 자)로 지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7ㅅ)은 ‘꽃이-꽃술-꽃대’처럼 앞 글자나 ‘예다니-고우니-가으니’처럼 끝 글자를 돌림자로 하거나 아롱-다롱, 한샘-새미-미나-나니처럼 돌림말로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위에서 밝힌 여러 가지 방식의 한말글 이름짓기가 주어진 틀에 꿰맞추기 방식이 아니고 한겨레가 이름을 지으면서 좀더 깊이 생각하는 버릇을 일깨우게 되어 창의력을 기를 수 있다고 본다.
한편 김슬옹외(2002, 19-21)에서도 ‘한글이름짓기’가 지닌 뜻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8) ㄱ. 어버이의 사랑을 바로 담을 수 있다.
ㄴ. 어버이가 뜻하는 여러 가지 뜻을 담을 수 있다.
ㄷ. 여러 가지 소리 느낌을 담을 수 있다.
ㄹ. 개성을 살리며 남녀 평등의 이념을 담을 수 있다.
ㅁ. 민족의 주체성을 세우는 기초가 된다.
ㅂ. 통일 조국 말글살이의 기초를 이룩한다.
ㅅ. 동명이인을 줄이는 방안이 된다.
ㅇ. 토박이말의 활용 가치를 높일 수 있다.
ㅈ. 두 자 이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 보면 한말글 이름 짓기가 지닌 뜻은 한자말 이름 짓기에 견주어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좋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더나음의 관점이다. 뜻담기나, 소리느낌담기, 쓰기 쉬움, 머리에 떠올림이 빠른 점, 두 자의 틀이나 정해진 돌림글자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벗어나는 보기에서 알 수 있듯이 한말글 이름 짓기는 한자말 이름 짓기보다 훨씬 더나음을 내세울 수 있다.
둘째, 나됨살리기(정체성)의 개성을 살려 남녀 평등의 이념을 담기도 하고 나아가 겨레됨을 내세우고, 한겨레의 하나된 말글살이의 터전이 되다는 것이다.
셋째, 겨레슬기 기르기의 관점이다. 한말글 이름 짓기는 애초에 창의력을 요구한다. 어버이의 사랑을 스스로 지어서 담을 수 있다는 것이나 줄기 합치기 방식과 같은 겨레말 만들기 방식을 되살리면서 토박이말의 활용 가치를 높이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제 이상의 관점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더나음의 관점에서는 다시 짓는 동기의 다양화, 짓기 위한 낱말 재료의 다양화, 짓기 방법의 다양화의 하위 틀이 나타난다.
(9) ㄱ. 설, 설애, 설이 - 설날에 태어났다 하여/봄애, 봄이, 보메나 - 봄에 태어났다 하여
ㄴ. 서울나 - 서울에서 태어났다 하여/빛고을 - 광주에서 태어났다 하여
ㄷ. 고운 - 곱게 생겼다고 하여
ㄹ. 힘찬- 힘차게 자라라고/슬기알찬 - 슬기롭고 알차게 자라라고
ㅁ. 나라네 - 강산처럼 영원한 사람이 되라고/ 보름 - 보름달처럼 꽉 찬 사람이 되라고
ㅂ. 머루, 버들, 보리, 솔참/미르, 비도리, 비두리, 나마리, 노고지리
ㅅ. 보람, 믿음, 사랑
ㅇ. 가득찬, 가람샘, 가람고요, 가람슬기, 가온들찬빛, 밝은빛누리예,가까스로어든노미,빛솔여울에든가오름, 차고나온노미새미나
ㅈ. 맑은, 고든, 나래, 미루, 한, 리라, 잔디랑, 이루, 훤츨, 그레, 든솔, 다솔, 돋나, 건웃음, 솔다운, 든해솔, 새힘찬, 누비예, 미루안, 새아라, 차란, 슬아라, 다롱별, 조은새, 노파라, 나래울, 달래울
먼저 짓는 동기의 다양화란 면에서 보면 (9ㄱ-ㄷ)은 차례로 태어난 때나 곳, 생김새와 같은 구체적 동기가 담긴 것의 보기이다. (9ㄹ-ㅁ)은 차례로 추상적 동기를 직접 나타낸 것과 비유하여 나타낸 것의 보기들이다.
다음으로 짓기 위한 낱말 재료의 다양화란 면에서 보면 (9ㅂ-ㅅ)과 같이 식물 이름, 동물 이름 등의 구체적 이름으로부터 추상 이름씨까지 폭이 넓다.
그리고 짓기 방법의 다양화란 면에서 보면 (9ㅇ-ㅈ)과 같이 몇 글자로 지을 것인가와 삼아짓기, 따와짓기, 븥여짓기, 합쳐짓기, 그밖과 같은 방법으로 짓기의 보기가 있다.
둘째, 나됨살리기(정체성)의 관점에서 보면 한말글 이름 짓기는 풍부한 나날말, 고장말, 옛말 등을 활용해서 부모의 사랑을 바로 담아낼 수 있는 방식이다. 또 닫힌 돌림자를 중심으로 하는 족보 중심의 한자말 이름 짓기 방식에서 필요하면 열린 한말글 돌림자를 쓸 수도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정치나 경제의 모순을 푸는 일과 함께 그 바탕인 말글 모순을 알고, 이를 바로잡으며 나됨을 살리게 된다. 아울러 한말글 이름 짓기는 한말글과 한자식 이름을 같이 쓰고 있으되, 한자식 이름은 절대로 한자로 적지 않는 북녘과 함께 한겨레됨을 나타내고 겨레됨을 내세우며 하나된 말글살이의 터전이라 생각한다.
셋째, 겨레슬기 기르기의 관점이다. 한말글 이름 짓기는 애초에 창의력을 요구한다. 어버이 스스로 아이의 앞날을 그리며 꿈을 담을 때, 여러 가지 짓기 방식을 찾을 수 있게 된다. 더욱이 줄기 합치기 방식과 같은 겨레말 만들기 방식을 되살리면서 토박이말의 활용 가치를 높이는 쪽으로 나아가므로 한말글 이름 짓기는 겨레 슬기를 기르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고 본다.
3.2 초, 중등 학생의 한말글 이름 짓기 실태
먼저 부천시 오정초등학교를 대상으로 2007년 4월에 조사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한말글 이름의 비율이 전체 7%에 그치고 있는데, 주로 두 글자인 이름인 것으로 보아 한말글 이름짓기가 지닌 숨은 힘이 아직까지는 제대로 나타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에 딸린 여러 문제를 풀어나가는 일은 현직에 있는 분들의 도움이 필요한 때이다.
<표9> 부천 오정 초등학교 한글 이름 죽보기
1학년(2000) |
2학년(1999) |
3학년(1998) |
4학년(1997) |
5학년(1996) |
6학년(1995) | ||||||||||||
가은, 기쁨,나리, , 다솔 다솜, 미르, 미리, , 사라 슬희 미리 찬슬, 하늘 하늘 한별, ,한솔, 한이 하람 , 하늘, 하늘 |
가람, 두리주리, 나라, 바다, 시온, 솔,슬,솔, 시온 우리, 하나, 해나, 한나, 한빈, 한새, 하늘 |
보람, 보미, 솔휘, 나라, 유리, 지나, 이슬, 쥬리, 다윗, 슬찬, 다솜, 나라, 솔, 예솔, 미리, 유리, 주이, 하나, 힘찬, 한나 |
사무엘, 예슬, 다빈, 보림, 지나. 초롱, 다미, 아린, 지나, 하늘, 한솔, 한나예슬, 송이, 예리, 아름. 가람, 미나, 한별 |
한솔, 유나, 아름, 단비, 유나, 시은, 소라, 다미, 가을, 은별슬아, 한빛, 슬기, 슬기, 나라, 이슬, 슬아, 나라, 예슬삭, 하늘, 다슬 |
요한, 다슬, 누리, 아름, 슬기, 자람, 진슬, 시라, 아라, 다슬, 예솔, 다솔, 나리, 아람, 다비해람, 보라, 누리, 이슬, 예슬, 유리, 예슬, 한솔, 밝음, 예나, 슬기, 소라, 은별솔, 유리, 다슬, 솔비 | ||||||||||||
남 |
151 |
|
남 |
135 |
|
남 |
161 |
|
남 |
149 |
|
남 |
169 |
|
남 |
191 |
|
여 |
139 |
|
여 |
151 |
|
여 |
147 |
|
여 |
163 |
|
여 |
148 |
|
여 |
164 |
|
계 |
290 |
19 |
계 |
286 |
17 |
계 |
308 |
20 |
계 |
312 |
19 |
계 |
317 |
22 |
계 |
355 |
32 |
비율 |
6.5% |
비율 |
5.9% |
비율 |
6.5% |
비율 |
6.1% |
비율 |
6.9% |
비율 |
9.0% | ||||||
재적 수 전체 남 956명, 여912명 계 1,868명129명 6.9% |
다음으로 전북 익산시 남성여자중학교에서 올해 4월에 조사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표10> 남성여자 중학교 한글 이름 죽보기
학년별 |
1학년(1994) |
2학년(1993) |
3학년(1992) |
|
|
|
|
전체/한말글 학생 수 |
/58 |
478/53 |
487/76 |
학년별 비율 |
16.48% |
15.54 |
19.90% |
전체/한말글 학생 수 |
187명 (17.40%) |
여학생들만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라서 학년 별로 고르게 나타나며 전체 평균이 17.4%에 이르고 있다.
마지막으로 일반계 인문고등학교인 서울 광양고등학교에서 2006년 11월 조사한 결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남학생과 여학생의 나이는 수효는 남학생이 훨씬 더 많은데, 한말글 이름은 여학생들의 비중이 6배에서 15배까지 이를 정도로 그 차이가 꽤나 높다. 이것은 아직까지도 ‘사내아이 기림(남아선호)’이 잘 드러나고 있는 사례가 아닌가 한다.
<표11> 광양고등학교 한글 이름 죽보기
학년 |
1학년(1990) |
2학년(1989) |
3학년(1988) | |||||
|
이한솔, 유다솔,김든솔, 서다찬, 서무돌 * 김강산, 백베드로, 최소망 |
이가을, 조아라,최아리,금잔디,윤누리,한미리,강이슬,김별아미,이푸른, 이해별,이해솔,최슬기,김다은,김보라,김예은,박가람,송다은,신보람 *한나, 소한나, 김솔지,최보람 |
김이삭, 유미루 |
남고은,송슬기,왕고은,윤슬기,이초롱,강한별,임이랑,모소라,백자람,이다솔,김아름,박우리 |
최한솔, 김초롱, 이하늘, 강한별, 김두람, 이해든나라 |
이새봄,이슬기,김슬기,윤이레,조아람,최예슬,조안나,김보람,박하얀,윤보람,이슬기,전아름,김기림,강사비나(?),변새아,한솔 | ||
학년 전체/한말글 학생 수 |
513/32 |
478/14 |
487/22 | |||||
전체 비율 |
6.5% |
6.2% |
2.9% |
4.5% | ||||
남녀 구분 학생 수 |
남자 |
여자 |
남학생 |
여학생 |
남학생 |
여학생 |
남학생 |
여학생 |
1.5% |
11.5% |
344 |
169 |
340 |
138 |
348 |
139 | |
한말글 이름 학생 |
8 |
24 |
2 |
12 |
6 |
16 | ||
비율 |
2.3% |
14.2% |
0.6% |
8.7% |
1.7% |
11.5% |
3.3 초, 중등 학생 한말글 이름 짓기의 실태 분석
3.2에서 든 자료는 아직 표집 단계의 가장 초보 수준에 그친다. 하지만 이 자료를 통한 ‘표본 통계’ 처리를 한다고 보고, 거칠게나마 이들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그 분석의 틀은 대체로 3.1에서 든 한말글 이름 짓기 관점들이 어떻게 녹아나 있는지를 분석의 잣대로 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더나음의 관점이다. 뜻담기나, 소리느낌담기, 쓰기 쉬움, 머리에 떠올림이 빠른 점, 두 자의 틀이나 정해진 돌림글자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벗어나는 보기에서 알 수 있듯이 한말글 이름 짓기는 한자말 이름 짓기보다 훨씬 더나음을 내세울 수 있다.
둘째, 나됨살리기(정체성)의 개성을 살려 남녀 평등의 이념을 담기도 하고 나아가 겨레됨을 내세우고, 한겨레의 하나된 말글살이의 터전이 되다는 것이다.
셋째, 겨레슬기 기르기의 관점이다. 한말글 이름 짓기는 애초에 창의력을 요구한다. 어버이의 사랑을 스스로 지어서 담을 수 있다는 것이나 줄기 합치기 방식과 같은 겨레말 만들기 방식을 되살리면서 토박이말의 활용 가치를 높이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
4. 맺음말
이름이라 하면, 한 개인에겐 자신을 드러내는 표상이며 가장 친근하고도 소중한 재산이자, 평생의 말글살이를 시작하는 첫 낱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말글"은 외국어나 외래어, 한자어가 아닌, 순수한 우리 '토박이말'과 '한글'을 한 낱말로 합친 말이다. 이에 따라 "한말글 이름"이라 하면, 지금까지 '고운 이름', '우리말 이름', '한글 이름', '토박이 이름' 따위로 불리던 이름들을 통틀어 새롭게 뜻매김한 것이다.
따라서 "한말글 이름 가족"도 한말글 이름을 가진 이나 그 이름을 지어 준 이와 그 식구 그리고 자신이 운영하는 업소 이름을 한말글로 지은 이와 그 식구, 한말글로 이름 지은 단체의 구성원, 나아가 한말글을 사랑하는 모든 이를 통틀어 일컫는다고 하겠다. 한말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자연히 한말글을 사랑하게 되고, 한말글을 사랑하는 사람은 또한 모든 종류의 이름을 되도록이면 한말글로 지으려고 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이 겨레의 배달 문화는 더욱 찬란히 꽃피고 영구히 이어질 것이며, 다른 나라 사람들로부터도 주체 의식이 있는 문화 국민이란 칭송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와 함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오늘날 한말글 이름의 실제 모습은 어떠하며 앞으로 한말글 이름을 지니고 살아갈 사람들의 삶의 모습도 어떠한지를 좀더 면밀하게 다룬 다음 이를 바탕으로 교육과 언론 및 정책을 펼쳐 나가는 근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한말글 이름의 역사는 오랜 세월 동안 우리 겨레와 함께 이어왔다. 그런데, 20세기 전반기 일제 식민지 시대를 혹독히 겪으면서 너무나 소중한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빼앗기고 잃어버렸다. 이에 한말글이름 짓기는 단순한 한글 쓰기를 주장하는 좁은 운동에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반만 년 우리의 역사 속에서 잃어버린 나됨을 찾는 지름길이며 겨레슬기를 기르는 바탕스런 문화 활동이다. 이제 우리는 ‘한말글 이름짓기’가 지닌 뜻을 새롭게 갈닦아 나가야 할 때라 생각한다. 그리고 한물결이 크게 일렁이는 시대 변화 흐름 속에서 한말글 운동을 펼쳐 온 분들을 중심으로 민간에서부터 온 겨레가 슬기롭게 이 문제를 함께 다루며 바람직한 모습으로 풀어 나가야 할 것이다.
살펴본 글
1. 옛 문헌 자료
김부식(1215), 삼국사기,
김수온(1449), 사리영웅기
(1596), 진관관병편오책
(1617), 동국신속삼강행실
(1687),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
(1745), 노비보
2. 누리그물찾기 자료
한국의 100대 성(1985) ,벽진 이씨 누리집 등
다음(daum) 블로그, 뿌리를 찿아서,
다음 카페, 50대 이상의 멋과 여유로움
세계백과 엔싸이버,
단기고사, 천부경 등
3. 단행본(사전 제외)
강헌규․신용호(1990), 『한국인의 자․호 연구』, 계명문화사
김슬옹(2000가), 『그걸 말이라고 하니』, 다른우리
김슬옹(2000나), 『말을 번지르르하게 하는 저놈을 매우 쳐라』, 다른우리
김영황(1989), 『조선민족어발전력사연구』, 과학․백과사전출판사
김윤학 외(1988), 『가게․물건․상호․상품 이름 연구』, 과학사
김종택(1992), 『국어 어휘론』, 탑출판사
리의도(1993), 『오늘의 국어, 무엇이 문제인가』, 어문각
리익선 엮음(1974), 『단어만들기 연구』, 사회과학출판사<탑출판사(1990)의 북한어학자료총서 402에 의함>
밝덩굴(1994), 『샘이 나는 한글 이름』, 토담
밝한샘(1988), 『밝을나라』, 아름나라
배우리(1984), 『고운이름 한글이름』, 해냄
정 준(1958), 『실증성명학 해설』, 보학사
최완호․문영호(1980), 『조선어어휘론연구』, 과학․백과사전출판사, <탑출판사(1990)의 북한어학자료총서 407에 의함>
한글물결(1994),『한글이름을 온누리에』, 일신서적출판사
4. 정기간행물/ 논문
김두루한(2004). 「한국말 ‘새말 만들기’ 양상 연구」. 한글학회 겨울 학술연구발표회
김수열(2006). 「한국말의 줄기 합치기와 새말 만들기」. 박사학위 논문. 서울: 상명대
김슬옹(2004), 한글이름(인명)의 새로운 범주화와 사회적 의미, 사회언어학 12권 2호(2004.12), 한국사회언어학회.
남풍현(1991), 한국인의 이름의 변천, 새국어생활, 제1권제1호, 국립국어연구원
밝덩굴(1982), ‘우리말 이름짓기의 보기와 바람’, 새국어교육 35-36
서정수(1993가), 우리의 이름과 정보화 사회, 한글새소식 246호, 한글학회
서정수(1993나), 「우리 이름의 변천 과정」, 한글새소식 247호, 한글학회
이강로(1996), 고구려, 백제, 마을․벼슬 이름의 어원적 의미
이수건(1999), 족보와 양반의식, 한국사 시민강좌 제24집, 일조각
이장희(2000), 관명의 통시적 고찰,
최범훈(1976), 「한자차용 고유인명 표기체계 연구-금석문․고문서를 중심으로」, 박사학위 논문, 서울: 동국대
최범훈(1997), 「한자차용 표기체계 연구」, 동국대학교 한국학연구소
5. 이름에 관한 사전류
김슬옹외(2002), 『뜻 깊은 큰 소리 한글이름』, 다른우리
김영륜(1974),『한국서화가인명사서』, 예술춘추사
이두희(1988), 『한국인명자호사전』, 계명문화사
조선총독부중추원(1937), 『조선인명사서』
한국인명대사전편집실(1980), 『한국인명대사전』, 신구문화사
한국인명약전편집실(1968), 『한국인명약전』, 보연각
첫댓글 재미있네요. 우리 집도 모두 한글이름입니다. 큰딸 보름, 둘째딸 해니, 그리고 아들 산해, 다음 쌍둥이 솔닮 별닮, 그리고 애들의 사촌 다솜, 애들의 조카 희뫼, 수비, 흰샘 이 제가 지어준 이름이지요. 그리고 우리 카페 회원의 따님 한봄이가 있군요.
좋은자료를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