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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시 여행] 간밤에 우던 여울, ‘원호’ 유허비 및 관란정........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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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시 여행] 간밤에 우던 여울, ‘원호’ 유허비 및 관란정........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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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제천 여행기를 쓰기 시작하다가 먼저 몽골. 코타키나발루 등, 다른 여행기에 밀려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야 제천 여행기로 돌아와서 다시 쓰기 시작하는 관계로 여행기 시기가 조금 밀렸답니다. 아무튼 시기적으로
몇달 밀리긴 했지만 그렇게 이해를 해 주시고 4개월 전으로 다시 돌아가 유랑자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제천 여행
기를 이어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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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랑살랑 꽃바람에 피어난 봄꽃들이 만개하여 내뿜는 향기로 다가온 하루의 시작이다. 초조한 감정의 바람에 긴
가뭄으로 메말랐던 대지는 근래 잦은 봄비로 생기를 되찾았다. 본시 봄이란 뿌연 도시 미세먼지와 켜켜이 쌓여온
황사바람이 반갑지 않은 계절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흐린 회색 구름 아래, 바람이 불던 날에 환
하게 피어있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은 계절의 여왕으로 부르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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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오르다 보면 왼편에 문화 유적지처럼 꾸며진 묘를 만나볼 수 있는데, 위 공간은 문화 유적지는 아니고 제
천 지역에 거주하는 봉산 지씨(鳳山 智氏)의 후손들이 조상들의 얼을 기리기 위해 세운 영모전(永慕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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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변에 설치된 안내 표지석 뒷면에는 유허비의 내용중에서 한구절의 시를 옮겨 놓았는데 그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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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우던 여울 슬피울어 지나가다
이제와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도다
저 물이 거슬러 흐르고져 나도울어 보내도다
사모친 원한의 장강토목 베노나
갈대꽃과 단풍은 차가와서 우수수 분명 날니라
이곳은 귀양온곳 댤밤에 혼백은 어디에서 노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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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요즘 연일 정치권과 경제는 시끄럽고 난장판이다 못해 개판인 미처 돌아가는 세상이다. 너무도 중요한 시
기라며 소리치는 지도자들은 속된 말로 국민을 속이는 거짓말 정책과 방향 설정으로 한국의 미래를 어둡게 할 뿐
만 아니라. 뉴 라이트, 친일파들이 득세를 하며 정권 깊숙이 파고드는 어지러운 세상 참으로 답답할 뿐이다. 진정
대한민국의 현재는 국운의 갈림길에서 방향을 잃고 흔들리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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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는 국제사회에서 고립되는 모습이 자주 보이고 앞길을 예측할 수 없음에 안타까움만 더 크다. 우리 사
회는 지나간 일들을 끄집어내어 털거나 지난 정부의 일들을 파헤쳐 과거를 청산하는 일에 너무도 많은 시간들을
낭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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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
단종 복위 음모가 발각되어 1456년 6월 7일 승지 성삼문, 형조참판 박팽년, 직제학 이개, 중구원동지사 유응부는
작형으로 처형당하였고, 예조참판 하위지는 참살 당하였으며,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
살하는 등 70여 명이 모반 혐의로 화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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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육신
원호와 뜻을 같이하는 어계 조려, 도촌 이수형, 도의의 등 3명이 토실이 있었던 주천면의 요선정에서 “죽으려 하
여도 죽어야 할 책임은 없으나 사는 것이 죽는 이만 못하다.”하며 함께 절개를 지킬 것을 약속하고 석벽에 글씨를
쓰고 맹서한 것을 제명록이라 하며 생육신은 세조가 왕권을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등 여섯 충신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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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란정에서 바라보면 얼마 안떨어진 곳에 영월 한반도지형이 나오며, 이 물길은 단종이 있던 청령포로 흘러가
는데, 원호 선생은 여기에 채소, 과일 등을 표주박에 담아 물에 띄웠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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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일본과 중국은 국수주의에 빠지면서도 국민들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기위하여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는데 유
독 한국의 사정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지금이 너무도 중요한 통일로 가는 과정의 골든타임
이라는데도 불구하고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은 저만치 멀어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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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는 정치권! 권모술수가 판을 치고 아집과 배신이 판을 치는 이 어지러운 나라 대한민국!
진정 五美四惡[오미사악]을 실천할 인재가 지금의 여당엔 단 1명도 없단 말인가? 권력의 중심에서 무엇을 얻어
처먹겠다고 이 난리들인지, 이 답답함 속에 마음을 달래기 위해 오늘 유랑자는 初心[초심]을 잃지 않고 正道[정도]
와 淸廉[청렴]길을 걸으며 [義理]의리를 지켰던 한 사내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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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美四惡[오미사악]:"어떻게 해야 정치에 종사할 수 있습니까?~공자 가라사대 다섯 가지 미덕을 높이고 네 가
지 악행을 물리치면 정치에 종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 가지 미덕이란~ "군자는 은혜를 베풀지 만 낭비하지
않으며, 백성을 부리지만 원망하게 하지 않으며, 원하지만 탐내지 않으며, 장엄하지만 교만하지 않으며, 위엄이
있지만 사납지 않다.
" 그럼 "네 가지 악행이란" 공자가 말했다. ~ "죄 지은 사람을 가르치지 않고 보자마자 죽이는 것을 잔학이라 하
고, 먼저 깨우치지 않고 갑자기 성과를 바라는 것을 난폭이라 하며, 명령을 게을리 하고는 기한을 재촉하는 것을
적 해라 하고, 사람들에게 당연히 줘야 할 것을 가지고 인색하게 구는 것을 유사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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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위에 소나무가 있는 바위가 원호가 단종의 승하를 애통해하며 곡을 했다는 아이고 바위, 아래 물가에
있는 바위가 단종에게 과실과 산나물을 채취해 글월과 함께 함지박에 넣어 강물에 띄워 보냈다던 함지박 바위,
함지박에 넣어 강물에 흘려보내면 청령포의 노산대 밑에 머물러 있어 단종이 받아보고 빈 함지박이 다시 강물을
거슬러 올라와 원호가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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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6대 국왕! 비운의 소년 군주인 단종이 魯山君[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안치되었을 때 생육신 중 한
사람인 호는 觀瀾[관란]이요, 이름은 元虜[원호]이다. 그는 단종을 추모하며 주천강과 평창강이 만나서 西江[서강]
을 이루는 강기슭 솔미산[해발 388m] 언덕 위에서 초가를 짓고 동쪽(영월) 청령포를 바라보면서 조석으로 눈물을
흘리며 望排[망배] 하였다고 알려진 관란정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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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란정은 송학면 장곡리에 위치한 영월 西江[서강]가 전망 좋은 벼랑 언덕위 송림에 싸여있는 정자를 말함이다.
비운의 왕 단종을 추억하게 만드는 곳, 觀瀾亭[관란정]은 정치판의 소용돌이에서 16세의 어린 단종이 겪었던 유
배와 일편단심 충신들의 얼이 서린 관란정을 찾는 유랑자의 마음이 왼지 알싸하다 못해 애닲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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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허비각의 앞쪽에는 2014년에 새롭게 세워진 관란원호선생유고비[觀瀾元昊先生遺稿碑]가 자리 잡고 있다.
비에는 원호가 지은 [탄세사(嘆世詞)]라는 제목의 한시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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歎 世 詞 (탄세사):~ 유허비에 새겨져 있는 시
瞻彼東岡松葉滄滄(첨피동강송엽창창): 저 멀리 동쪽 언덕을 바라보니 솔잎 새파랗게 우거졌네.
采之擣之療我飢腸(채지도지요아기장): 그 솔잎 따다 찧어서 주린 이내 창자 채워나 볼까
目渺渺兮天一方(목묘묘혜천일방): 눈은 가물가물 하늘 저 멀리 보이는데
懷黯黯兮雲五光(회암암혜운오광) : 마음은 어둡고 침침하며 구름은 하늘을 가득히 덮었구나
嗟夷齊邈焉寡儔兮(차이제막언과주혜) : 백이숙제 높은 절개 뉘가 있어 짝이 되리
空摘翠於首陽(공적취어수양) : 수양산에 고사리 캐던 일을 알랴
世皆忘義徇祿兮(세개망의순록혜아) : 세상사람 모두가 義를 저버리고 祿을 따르니
我 獨潔身而徜徉(독결신이상양) : 나 홀로 몸을 더럽히지 않고 깨끗하게 헤맨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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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호, <탄세사(嘆世詞)> -
[탄세사]는 원호가 벼슬길에 올라 집현전대제학으로 재작할 당시 조선 제5대 임금인 문종(文宗, 재위
1450~1452)이 세상을 떠나고 어린 단종이 왕위를 계승하자 조정에 수양대군을 비롯하여 왕권을 넘보는 세력들
이 생겨나며 '의를 저버리고 녹을 따르는' 무리들이 득세하는 상황을 '구름이 하늘을 가득히 덮은' 모습으로 묘사
하며 탄식하며 지은 노래라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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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내용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굳은 절의로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먹으며 결국 굶어 죽은 만고의
사표가 되었던 중국 은나라 때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같은 심 심정을 인용하며 '세상에 몸을 더럽히지 않고
깨끗하게 헤맨'다고 언급하며 단종에 대한 굳은 절개를 지켜가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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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봄 개나리 진달래 꽃길을 따라 소나무 향 짙은 울창한 숲길을 悠悠自適[유유자적] 슬로시티를 만끽하며
천천히 걸어본다. 그렇게 신선한 공기를 가슴 가득 담아내다보면 저만치 땅과 하늘이 맞닿는 인피니티 같은 지평
선에 정자가 하나 보이는데. 마치 조선시대 문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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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숲길을 지나 정자에 올라서면 눈앞에는 탁 트인 영월 분지와 푸른 한반도의 모습이 펼쳐지는데 거침없는
조망! 그야말로 이 답답한 세상에 속이 뻥 뚫리는 듯한 現象[현상]이 눈앞에 다가온다. 단종 임금을 향한 원호의
깊은 충성심과 그리움을 느낄 수 있는 장소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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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란정의 바로 앞쪽에는 2017년에 한국문인협회 여강시가회라는 단체에서 세운 시비가 위치하고 있다. 시비
에는 조선 후기 김천택의 가곡집인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원호의 작품이라고 되어 있는 유허비에 있는 두 편
의 시가 작품이 새겨져 있다. 그 중에서 맨 위쪽에 새겨져 있는 <간밤에 우던 여흘 ~ >로 시작하는 시조 작품은 일
반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꽤나 유명한 작품으로 오늘날 중 · 고등학교 국어, 문학 교육과정에서도 다루
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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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우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나가다.
이제 와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도다.
저물어 거슬러 흐르고자 나도 울어 보내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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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진 원한의 장강 토목 베노나.
갈대꽃과 단풍은 차가워서 우수수 분명 날리라.
이곳은 귀양 온 곳 달밤에 혼백은 어디에서 노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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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
지난밤에 울며 흐르던 여울물이 슬프게 울면서 지나갔구나.
이제야 생각해 보니 임이 울어 보내는 소리였도다.
저 물이 거슬러 흐른다면 나도 울며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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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瀾亭[관란정] 현판 글씨 내용
崇貞紀元後四壬戌[숭정기원후사임술], 全城後人李信魯寫[전성후인이신려사], 栢枰居申嶠岳刊[백평거신교악간]
숭정기원후 네 번째 임술년에 전성 이씨 신노가 베끼고 백평에 사는 신교악에 새기다.
1862(철종 13년)에 다시 현판을 걸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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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호는 역사적으로는 조선 제4대 임금으로서 오늘날 한반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聖君[성군]으로 평가받는 世宗
[세종, 재위 1418~1450]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으나,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재위
1455~1468]이 端宗[단종, 재위 1452~1455]의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원주에
내려와 은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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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치악산 기슭에 토담집을 짓고 낮에는 망왕봉에 올라 단종의 만수무강을 빌었으며, 밤에는 단종을 사모하는
자세를 취하며 지낼 즈음, 뒷켠 상왕으로 물러앉은 단종임금을 위해 복위운동을 하려던 금성대군이 경북 영주 순
흥에서 사사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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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瀾亭重修記[관란정 중수기]:~觀瀾亭[관란정] 현판을 보면 白沙[백사] 李恒福[이항복]이 정자에 올랐던 기록
이 있는데 1618년 이전에 이미 관란정의 존재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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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도왔던 도호부민들과 함께, 숱한 사람들이 소수서원내의 "敬[경]"字[자]밑에서 수창된 비극은 자그마치 4km
까지 피가 흘러 "피끝마을"이라는 동네의 유래가 만들어 졌던 사실을 유랑자가 순흥 여행 때 직접 눈으로 확인했
던 事項[사항]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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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집현전 출신들의 유학자가 참여한 복위계획에는 소위 사육신이라 불리는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
성원, 유응부가 중심이 되어 세조 2년(1456년)에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세조를 살해할
것을 모의 하였으나, 세조임금의 공신이 된 한명회가 낌새를 눈치 채고서, 연회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자, 처음
모의를 함께했던 김질이 불안을 느껴, 장인인 정창손에게 알리면서 계획은 실패하고 모두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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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瀾忠節與松柏長靑[관란충절여송백장청]:관란(觀瀾 원호(元昊))의 충절은 소나무 측백나무처럼 오래도록 푸르다.◀
운자(韻字) 춘(春) 신(新) 신(晨) 빈(濱) 빈(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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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瀾忠節亘千春[관란충절긍천춘]:관란의 충절은 일천년에 걸쳐서
長與柏松靑色新[장여백송청색신]:길이 송백과 함께 푸른 빛이 새롭네
嘆世隱居恒谷澗[탄세은거항곡간]:세상을 한탄하며 항상 시내 골짜기에 숨어 살며
戀君望拜每朝晨[연군망배매조신]:임금님 그리워 매일 새벽아침 바라보며 절을 하네
哀心願在西山側[애심원재서산측]:속마음 원함은 서산 곁에 있으나
夢想終歸冷(泠)浦濱[몽상종귀냉(령)포빈]:꿈에도 끝내 청령포 물가에 돌아가기를 생각하네
生六臣稱東史載[생육신칭동사재]:생육신이라 칭하며 동사에 실려
偉名不朽永彬彬[위명불후영빈빈]:훌륭한 이름 불후하여 길이 빛나네.
[제천 관광 해설협회 ‘유‘해설사님 과 충북학 연구소의 자문을 받은 ▲시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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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瀾忠節亘千春(관란충절긍천춘): 관란 선생의 충절은 천년토록 변함없어
長與栢松靑色新(장여백송청색신): 길이 송백과 더불어 푸르른 빛 새롭네
嘆世隱居恒谷澗(탄세은거항곡간): 세상 한탄하며 늘 산골짜기에 은거하며
戀君望拜每朝晨(연군망배매조신): 임금 그리며 매일 아침 망배례 하였네
衷心願在西山側(충심원재서산측): 충심으로 수양산 곁에 있길 바라더니
夢想終歸冷浦濱(몽상종귀령포빈): 꿈속에 마침내 청령포 물가로 돌아갔네
生六臣稱東史載(생육신칭동사재): 생육신의 칭송 우리 역사에 실려 있으니
偉名不朽永彬彬(위명불후영빈빈): 훌륭한 명성 변함없이 영원히 빛나리라
((한국고전번역원의 자문을 받은 ▲시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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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제4회 성균관전국한시지상백일장 수상자 발표에 방안(榜眼) 3인 중 1인이 이창경(李昌京, 영주)이라고
확인 됩니다. 東史[동사] :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일컫는 말
※ 참고사항
생육신 원호의 호는 觀瀾[관란]으로 관란정 물가에서 단종임금이 계신 청령포를 향하여 망배하는 뜻을 기린 장원
시문으로. 청령포(淸泠浦)는 강원도 영월에 있는 단종의 유배지이다. 꿈속에서 마침내 청령포로 돌아간다는 말은
평소 꿈에 단종을 뵙는다는 말과 죽어서 단종을 만난다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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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호유허비는 조선 후기 영, 정조 시절의 대학자였던 홍양호(洪良浩, 1724~1802)가 글을 지어 세운 것이라고
하며, 비문에는 원호가 보여준 지극한 지조와 절개의 모습을 기리는 '탄세사'란 내용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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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허비는 영·정조때 대학자 이계 홍양호(1724∼1802)가 세웠는데, 일반적인 비문과 달리 붉은색 글씨로 새겨
있으며 기초 석을 별도로 만들지 않고 자연석 위에 비석을 조성하여 세웠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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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忠臣觀瀾元先生遺墟碑[조선충신관란원선생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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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건이후 단종은 노산군으로 신분이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길 에 오른다. 유배 4개월 만에 1457년 10월24일에
16세 나이로 사약을 받자 영월 묘소 앞에 가서 廬幕[여막]을 짓고 3년 상을 치른 生六臣[생육신] 중 한사람이다.
그는 다시 서강 관란정으로 돌아가서 아침저녁으로 단종을 향한 예를 올렸다 한다. 그 후 세조가 불렀으나 정치
엔 나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여생을 마쳤으며 정조 8년(1784년)에 시호를 내려 정간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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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으로는 오늘날 몽유록계 소설의 정석을 확립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元生夢遊錄[원생몽유록]의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원호는 계유정난 이후에는 벼슬 생활을 접고 평생을 숨어 산탓에 그의 행적이 남아
있는 곳이 거의 전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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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원호가 고향에 숨어 살던 당시 원호의 손자인 元叔康,[원숙강 ?~1469]이 벼슬길에 올라 조선의 역사를 기
록하는 사관으로 활약하던 중 1469년[예종 1]에 당시 또 다른 사관으로 있던 閔粹[민수, ?~?]라는 인물이 선왕인
世祖實錄[세조실록] 편찬의 기초 자료로 쓰일 사초를 당시 세조를 따르던 다른 대신들의 눈치를 보며 고쳐 쓴 사
실이 발각되어 벌어진 이른바 '閔粹史獄[민수사옥]' 사건에 연루되어 참형을 당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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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의 이러한 참혹한 죽음을 지켜본 원호는 세상의 비정함에 다시 한 번 절망하여 그동안 자신이 쓰고 모아 둔
모든 저술을 불태워 버려 오늘날 그가 쓴 글도 전하는 것이 거의 없는 상황이다.
그러한 와중에 오늘날 원호의 삶과 문학의 흔적이 남아 있는 대표적인 공간으로 볼 수 있는 장소로는 오늘 유랑
자가 방문했던 제천시에 위치한 원호유허비 및 관란정이란 장소와 원주시에 마련된 원호의 묘역을 들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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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시 관란(觀瀾[관란]이란 “흐르는 물을 바라본다. 라는 뜻이 내포되어있다. 아마도 언덕아래 눈물과 함께 청령포
로 흐르는 서강을 두고 하는 뜻일 게다. 먼저 관란정에 도착을 하면 서강 가에 바람불면 금방 날라 갈 것만 같은
아담한 관란정과 원호의 유허비가 방문객을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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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허비는 홍양호(1724~1802)가 글을 지어 세웠다. 원호는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자는 자허, 호는 무황, 관란이며
본관은 원주이다. ‘관란정‘은 백사 이항복이 원호가 단종을 위해 예를 올리던 곳인 관란정에 올라 당시를 회상하
며 그 충절을 기린 한시이다. 관란정을 보며 임금을 향한 충심을 끝까지 지켰다는 점에서 사육신이나 생육신의 충
절을 기린 전형적인 작품이다. 칠언 절구로, 기구에서는 관란정 에서의 감회를, 승구에서는 원호의 자취를 노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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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구와 결구에서는 시상을 전환하여 관란정을 세운 의미인 ‘붉은 丹忠[충심]’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백사 이항복의 시 '觀瀾亭[관란정]'
偶到憑欄感舊深[우도빙란감구심]:우연히 이르러 난간에 기대 보니 옛 감회 깊어라
先生當日每登臨[선생당일매등림]:선생은 그 당시 매일 올랐었네.
此亭不爲逍遙建[차정불위소요건]:이 정자 소요하려 세운 것이 아니니
泣血丹忠貫古今[읍혈단충관고금]피눈물 흘리던 붉은 충심 고금을 꿰뚫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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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瀾亭[관란정] 현판을 보면 白沙[백사] 李恒福[이항복]이 정자에 올랐던 기록이 있는데 1618년 이전에 이미 관란
정의 존재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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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름(연복자, 코리언 바나나): [한자명:목통. 통초.임하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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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각 안의 유허비 내용 중 표지석 뒤에 새겨진 시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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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우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나가다.
이제와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도다.
저 물이 거슬러 흐르 고져, 나도 울어 보내도다.
사모 친 원한이 장강토록 베누나.
갈대꽃과 단풍은 차가워서 우수수 분명 날니라.
이곳은 귀양 온 곳 달밤에 혼백은 어디에서 노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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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시는 1457년 10월 24일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에게 사약을 전어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통한 심정
을 가눌 길이 없어 읊었던 시조이다. 1617년 병조참의 용계 김지남이 영월을 순시할 때 아이들이 노랫가락으로
부르던 것을 듣고 한시를 지어 후세에 알려지게 된 시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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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남송 마을의 입구 부근에는 거대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설치된 안내문의 설명에 의하면 이 느
티나무는 지금으로부터 약 560여 년 전에 원호가 단종의 삼년상을 치르고 원주 내남송 마을에 은둔해있던 당시
원호가 직접 심은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 대한 직접적인 역사적 기록이 전하는 것은 아니라서 이 안내문의 설명
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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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1459년 9월 어느 날 원호 선생께서 꿈속에 단종과 육신(六臣) 최덕지를 모시고 요선정 강가에서 시를 짖고 화답
하는 꿈을 꾸었는데 그 뒤에 느낀바 있어 글을 적은 것이 원생몽유록 이며 ,단종의 슬픔과 신하의 충절을 표현 하
였으니 그곳의 지명이 토실(土室)이라 불려오고 있는곳은 지금의 영월군 주천면 에서 법흥사 계곡입구의 요순정
이 있는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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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란정 절벽으로 보면 툭 튀어나온 데크 조망 터가 하나 있는데 강 건너 한반도 지형이 보이고, 우측으로 보면 서
강 가에 아이고 바위와 함지박 보내던 바위를 볼 수 있다. 넓적한 함지박을 보내던 바위는 어린 임금의 원통함을
달래주기 위해 부인과 함께 채소를 길러 산나물과 함께 과일을 준비하고 나뭇잎에 글을 적어 커다란 함지박에 담
아서 강물에 띄우면, 그 함지박은 굽이치는 서강의 물길을 따라 단종이 자주 오르내리던 청령포 노산대 밑에 머
물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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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이 원호가 보낸 글을 읽고 나면 빈 함지박은 또 다시 여울 살을 따라 강물을 거슬러 관란정으로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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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육신 관란 원호묘역은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판부면 서곡리의 내남송 마을이라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원
호의 묘가 이곳에 마련된 것을 두고 일각에서는 원호가 생전에 이곳 원주 내남송 마을 인근을 생활 근거지로 하
고 있었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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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원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작인 [원생몽유록]에 나온 시 몇수를 소개해 본다.
▣ <원생몽유록> 원문에 나온 시
恨入長江咽不流:(한입장강인부류) 원한 맺힌 강물은 막혀서 흐르지 않는데,
荻花楓葉冷颼颼:(적화풍엽랭수수) 갈대꽃과 단풍잎에 찬바람만 나부끼네.
分明認是長沙岸:(분명인시장사안) 이곳은 분명히 장사(長沙)의 언덕이 분명한데.
月白英靈何處遊:(월백영령하처유) 달 밝은 밤 영령(英靈-단종과 사유신의 넋)은
어디에서 노니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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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팽년(朴彭年)은 이렇게 읊었다.
深恨才非可託孤(심한재비가탁고) 너무도 한 스럽네, 내 재간 어린 임금 맡을 감이 못되니,
國亡臣辱更捐軀(국망신욕갱연구) 나라 망하고 신하 욕되므로, 다시 제 몸을 버렸었네.
如今俯仰慚天地(여금부앙참천지) 이제 와서 천지간(天地間)에 부끄럼이 많으니,
悔不當年早自圖(회부당년조자도) 그해에 일찍 죽지 못한 것이 후회되기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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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삼문(成三問)은 이렇게 읊었다.
受命先朝荷寵隆(수명선조하총륭) 선왕(先王)께 분부 받고 후한 은총 입었으니,
臨危肯惜殞微躬(림위긍석운미궁) 위급한 때 몸 바친 것 무엇이 아까우리.
可憐死去名猶烈(가련사거명유열) 가엾게도 죽은 후에 이름만은 빛났구나,
成仁取義父子同(성인취의부자동) 성인(成仁) 취의(取義)함이 부자(父子)가 한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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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위지(河緯地)은 이렇게 읊었다.
壯節寧爲爵祿淫(장절녕위작록음) 씩씩한 절개 어찌 작록(爵祿-벼슬과 녹봉)에게 유혹되리,
含章猶抱採薇心(함장유포채미심) 마음에 품은 뜻 백이․숙제 따르려고.
殘軀一死何能說(잔구일사하능설) 이 몸 한번 죽음이야 말한들 무엇 하리,
痛哭當年帝在郴(통곡당년제재침) 통곡할 손 당년에 의제(義帝)가 침(郴)에 계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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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란정 우측아래 부분에 돌출되어있는 바위는 주변의 경관이 뛰어난 곳으로 유명하고 원호가 단종의 승하를 애
통해 하며 이 바위에서 곡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아이고, 바위라고 한다.
원호는 단종이 사약을 받고 죽은 뒤에는 항상 단종이 있는 장릉을 향하여 동쪽을 향해 앉고 누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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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지극정성으로 단종을 향한 충절을 기리고자 현종 11년(1845년)에 초막을 짓고 단을 쌓아 정성을 드렸던
그 자리에 후손들과 유림들이 원호의 충의를 길이 앙모하기 위하여 헌종 11년(1845) 그 자리에 정자를 세우고 원
호의 호를 따라 관란정이라 하고 유허비를 세웠으며, 1941년 개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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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영월 신씨) 묘가 위에, 남편(원호 선생) 묘가 아래에 위치한 소위 ‘역장’의 형태는 당시 풍수지리 등에 따라
유행했던 부부 묘지 형태를 원형 그대로 보여주는 귀한 자료로 꼽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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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개(李塏)는 이렇게 읊었다.
微臣自有膽輪囷(미신자유담륜균) 소신(小臣)에게 스스로 쓸개가 있나니,
那忍偸生見喪淪(나인투생견상륜) 어찌 차마 목숨 아껴 나라 망함을 보리오.
將死一詩言也善(장사일시언야선) 죽는 날 한 수(首)의 시 그 말은 옳았나니,
可能慚愧二心人(가능참괴이심인) 두 마음 가진 사람 부끄럽게 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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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성원(柳誠源)은 이렇게 읊었다.
哀哀當日志何如(애애당일지하여) 아아, 그날 내 마음 어떠했던가?
死已爭論死後譽(사이쟁론사후예) 죽고 나면 어찌 뒷날의 명예를 논하리.
最是千秋難洒恥(최시천추난쇄치) 천추(千秋)에 씻지 못할 가장 큰 수치는,
集賢殿草賞功書(집현전초상공서) 집현전서 일찍이 상공교시(賞功敎書) 초(草)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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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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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도 길게 한수 읊었다.
擧目山河異昔時(거목산하이석시) 강산(江山)을 쳐다보니 옛 모양이 아닌데,
新亭共作楚囚悲(신정공작초수비) 이곳에 우리들 함께 초수(楚囚)의 슬픔을 하소하네.
心驚興亡腸猶裂(심경흥망장유렬) 마음이 흥망(興亡)에 놀랐으니 창자는 찢어지는 듯,
憤切忠邪涕自乘(분절충사체자승) 분통(憤痛)이 충․사(忠․邪)에 터지니 눈물이 절로 쏟아지네.
栗里淸風元亮老(율리청풍원량로) 율리(栗里) 맑은 바람 속엔 연명(淵明)이 늙게 되고,
首陽寒月伯夷飢(수양한월백이기) 수양산 찬 달빛아래 백이가 굶주렸네.
一編靑史堪傳後(일편청사감전후) 한 편(編) 역사나마 후세에 잘 전해진다면,
千載應爲善惡師(천재응위선악사) 몇 천 년을 두고 응당 선․악(善․惡)의 모범이 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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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육신 관란 원호의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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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구조는 전면 2칸, 측면 2칸의 목조 기와집의 팔작지붕인데, 축대가 헐고 마루판이 파괴되어 1971년에 보수
하여 오늘에 이르러 지방 사적으로 지정받은 곳이기도 하다. 관란 원호는 1397년(태조5년) 4월9일 강원도 원주
시 개운동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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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임금의 스승이기도 했던 조부 운곡 원천석, 병조참판에 추증된 아버지 원헌의 둘째 아들로서, 어려서부터 道
學君子[도학군자]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로, 15세 때에 4서3경을 통달할 정도였으며, 한시와 산문을 즐기는 문학
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고,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하는 자는 충신이 될 자격이 없다며 유학의 근본인 충효사상을
실천하는 효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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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란정 찾아가기◀
*주소: 충북 제천시 송학면 장곡리 산 14-2
*주차: 도로변이나 관란정 앞까지 차 진입가능
*애완동물: 동반가능
*유모차/휠체어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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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호선생 묘 찾아가기
*주소: 강원도 원주시 판부면 서곡리 산72
*주차: 도로변이나 묘소 앞까지 차 진입가능
*애완동물: 동반가능
*유모차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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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관란정 찾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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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주 원호선생 묘 찾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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