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많은 법정공휴일이 주말휴일과 겹쳐 실제휴일이 적었고,
정부의 체감경기침체의 조기탈피와 맞물려 대체휴일지정 논의도 있었다.
휴일이 많으면 소비규모가 클 것이라는 단순한 논리는
연차수당의 불지급, 빈부격차 등으로 긍정적효과가 있었는 지는 별론으로 하고,
3일간의 연휴(성탄절,토,일요일)를, 마냥 무료하게 보낼 수 없어
평소에 생각해 둔 근세사 역사현장 서대문형무소를 둘러 보기로 했다.
2,3일전부터 일기예보에 오후부터 60%의 확률로 2cm정도 눈이 온다고 예고되었지만
실내를 둘러보는 시간이 많을 것으로 생각되어 선택하였다.
전철 3호선 독립문 5번출구로 나오면 왼쪽 오르막길의 역사관을 바로 만날 수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 이듯, 걸음을 옴기는 것이 중요한 데 행동전 발심이 더 중요하다 하겠다
입장료는 성인기준 1,500원이고 , 동절기에는 아침 9시반부터 늦은 5시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일요일 오후 1시, 2시에는 문화재 설명사가 직접 설명해 주므로,
전문가가 아닌 한 시간을 맞추어 이 도움을 활용함이 더 리얼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서대문구청에서 발행한 Leaflet에 의하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조국 독립을 위해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순국하신 애국선열들의 넋을 기리고
선열들의 자주 독립정신을 되새겨 보는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소개되어 있다.
위 사진에서 붉은 벽돌건물의 왼편이 매표소이고, 맨 오른쪽이 답사후 나오는 곳이다.
역사관건물에 다른 출구가 있는지 모르지만, 과거의 감옥소를 한번 둘러보는 셈이 된다.
입장료를 내고 매표소로 들어가면,
각국의 언어로 표시된 관람안내도를 받게 되고
혼자서 가더라도 동선이 쉽도록 표시되어 있다.
사진은 사형집행장 말고는 허용된다.
중앙사, 제 12옥사 앞에 당시의 취사장이 원형, 복원되고 있다.
서대문 형무소는 1987년 11월까지 있었지만, 해방이전이 주요한 관심거리이고,
그 이후는 주로 시범사국의 수용기관이었다고 생각하면 편리한 이해가 될 것이다.
10.26사태 등 주요 시국사범사건의 형집행이 시행된 것도 이 곳 이라 한다..
취사장에서 발굴된 솥으로 이러한 솥에서 음식도 하고 빨래도 했다고 한다.
통상의 솥과는 달리 깊이가 다소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수용생활이 끔찍하였다 하여도 빨래는 같은 솥에 하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안중근의사, 유관순열사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의사'는 행동으로 저항했던 분이고, '열사'는 그 의지를 꺾지 않은 분이라고 한다
서대문 형무소는 수용자의 성격을 불문하고
본래의 기능(감옥 등)을 마칠 때 까지 79년간 6가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한다.
크게 감옥-형무소-교도소-구치소의 이름으로 변경 되었는 바,
세월따라 표현이 많이 순화 발전된 느낌이다.
연혁에서 서대문감옥으로의 변경은
일본의 강제합병이후 애국지사의 수용공간확장 필요에 의하여
1912년 9월에 마포구 공덕동에 경성감옥을 신축하면서 개칭되었다 한다.
옥사 출입문으로 3중시건이 되어있고 문짝아래 구멍으로 식사가 배급되었다 한다.
밀랍으로 당시의 수감생활을 재현한 모습인데,
일반죄수 같으면 뉘우치고, 새로운 사회생활을 위한 다짐의 장 이었겠지만
이 곳에서 옥고를 치르신 애국선열들은 더욱 그 의지를 견고히 하였다 한다.
침울한 역사의 현장답사길에 날씨마저 우울함을 건네고 있다.
화사한 날에 답사하였더라면, 나이에 밀려 먼발치서 설명듣는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순국선열들의 수감생활을 직접 체험하는 공작사로 가는 길이다.
경쟁력있는 코리아의 주부답게 어린이를 데리고 답사하는 모습이 자랑스럽다.
위 아래 사진들은 순국선열들이 임시 구금실과 고문실에서 어려움을 겪은 모습들이다.
문화재 설명사의 말을 빌지 않더래도,
일제강점 시대 일본인 전부가 다 이렇게 모질고 구제불능의 인간이었다고는 생각하지 말잔다.
'G20' 개최를 유치할 만큼, 교양선진국답게 말이다.
서대문 형무소의 영어표현이 ' Seodaemun Prison History Hall " 이라서
글 제목에 'SPHH'를 괄호병기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