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도에 신학교를 졸업후 40년이 지났다. 대다수가 30대초에 졸업했으니 이제 70전후가 되었고, 사회생활을 하다가 중간에 입학하신 분들의 경우는 이미 별세하신 분들도 상당수가 된다. 내 자신의 지나온 40년중 20년은 담임목회로, 나머지는 중국에서 15년 그리고 귀국후 5년을 보낸셈이다. 선교사로 활동하는 동문들 중에서 가까운 일본의 박광용목사와 블라디보스톡의 최응규목사도 참석하여 다른 동문들보다 더욱 반가웠다. 아프리카 기니에서 활동하던 앙드레손 선교사는 현재 기니의 정국이 불안해 비자를 못받아 한국에서 무한대기 상태라 자주 만나는 편이다.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동문들도 있고 드물지만 여성동문들 중에도 가정문제가 원만치 못한 분들도 있어 마음이 안쓰럽다. 특히 청주에서 목회하는 박영숙전도사는 재학중에는 별로 친분도 없었음에도 나를 잘 기억하고 있었고 먼저 반갑게 인사를 하여 더욱 반가웠다. 청주가 기장교회가 많은 지역이고 본인도 기장출신이라 졸업후 한동안 기장교단에서 목회하며 결혼도 했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서로 갈라서고 혼자 목회를 한다고 하였다.
극동방송 3회 복음성가경연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했던 전재경 동문은 본교단에서는 여성안수가 안돼 타교단에서 안수를 받고 찬양사역자로 활동한다고 하였다. 그녀 역시 연상의 후배와 결혼했으나 도무지 가정경제에 무책임한 남편과 더이상 가정을 유지할 수 없어 이혼을 하고 혼자 아들을 키웠다고 하였다.
재학중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 역시 내가 중국에 거주하는 관계로 만남의 기회가 멀어지다보니 서로 왕래가 끊기게 되었고 오늘 모처럼의 해후를 하였지만 역시나 서로의 교제범위가 제한되다보니 그냥 인사정도로 헤어지게 된다. 친구는 그냥 친하게 지내는 정도가 답이라 생각한다. 친구의 관계가 너무 깊어지면 의존을 하게되고 그러면 예수와 동행하기 보다는 친구와 동행이 되기 싶상이다. 돌아오는 길에 아내와의 잡담으로 인터체인지를 미리 들어서는 실수를 했으나 다행이 전화위복으로 진입로 압구에 있는 면허시험장에 들러 아내의 면허증을 갱신할 수 있었다.
오후시간은 마늘밭을 지키기 위해 농막에서 지내다가 저녁늦게 귀가하며 하루를 마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