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다닐 때 내 친구네 형의 방을 처음 들어간 적이 있었다.
방 한쪽 벽이 온통 책이었다.
‘삼중당문고’와 ‘을유문고’였다. 그날부터 거기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을 한두 권씩 빌려 읽기 시작했다.
서너 달 동안 내가 주로 본 책은 한국 소설과 수필들이었다. 내 또래 장정일은 아예 ‘삼중당문고’라는 제목의 꽤 긴 시를 쓰기도 했다.
“150원 했던 삼중당 문고/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두터운 교과서 사이에 끼워 읽었던 삼중당 문고/
특히 수학 시간마다 꺼내 읽은 아슬한 삼중당 문고”
열다섯 살 이후 그는 늘 이 문고판 책의 언저리에 있었다.
대학 신입생 때 지도교수가 불러서 가봤더니 ‘범우문고’ 책 목록을 펼쳐 보였다.
세 권을 정해 읽으라는 것이었다. 조금 가소로웠다. 그 목록 중에 읽고 싶은 책은 고등학교 때 거의 다 읽은 터였다.
1970년대 이후 출판사들은 판형이 작고 두께가 얇은 문고판을 시리즈로 기획해 독서 시장에 내놓았다.
문고판의 원조는 서양의 ‘페이퍼백’(Paperback)이다.
이것은 양장본을 출간한 다음에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 대중용 책을 다시 펴내는 것. 장정이나 표지를 화려하게 할 필요가 없었다.
소장의 가치보다는 가방이나 주머니에 넣어두었다가 언제 어느 때라도 꺼내 읽을 수 있는 실용적인 책이 문고판이다.
출판사로서는 종이를 절감할 수 있었고, 독자는 저가의 좋은 책을 입맛에 따라 선택할 수 있었다. 한때 문고판은 인문학적인 교양을 공급하던 우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