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청빈, 은총의 길이자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
부유할수록 ‘낮은 자리’는 멀어져
교회가 낮은 곳에 가지 않으면 정의·공정 이야기할 자격 잃어
2017년 4월 29일 남수단 리멘제 난민촌에서 한 소녀가 밥을 먹고 있다.CNS 자료사진
구세주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자기가 가난한 사람임을 알면서 동시에 누구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소중한 존재임을 체험하는 사람에게는 가난이란 단지 벗어나야 할 질곡이며 타파해야 할 죄악만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게 되는 행복을 맛보게 되리라. 이런 마음의 가난은 자연스럽게 이웃에 대한 관심, 배려, 개방, 연민, 연대성으로 나아가게 되리라.
(구요비 주교, 노동자신문 칼럼 ‘쇳소리’ 1995년 12월 5일자)
■ 함께 해결해야 할 빈곤
가난을 겪어 보셨습니까? 어떠셨나요? 한마디로 비참합니다. 강제된 가난만큼 괴롭고 슬픈 것은 없습니다. 행복도 돈으로 살 수 없겠으나 가난 역시 행복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부유함은 행복을 가져오고, 가난은 불행을 가져온다는 통찰이 더 현실적입니다. 카뮈는 가난한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정신적 허영이라고까지 이야기합니다.
최근 대선 후보들이 겪은 가난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가난을 겪어 봤으니 사회적 약자들의 처지를 잘 안다는 이야기일까요? 부디 그렇게 되길 빕니다! 강제되고 대물림되며 그로 인해 차별과 억압이 발생하는 현실의 가난은 함께 힘을 모아 해결해야 할 공동의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희망은 주님의 가난한 사람들과 겸손한 사람들이 가지게 될 것”이고(64항) “가난한 이와 이웃의 불행을 도와줄 준비와 열의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952항),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언제나 가난한 이들을 사랑해왔다”고 합니다.(2444항)
■ 교회의 길, 가난
가난과 관련된 교회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교회는 가난과 순명과 봉사의 길, 죽음에 이르는 자기희생의 길을 가야 한다”고 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852항) 우리 신앙을 되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가톨릭교회는 가난의 길을 가야 할까요? 자본과 재력이 있어야 건물도 짓고 이웃사랑이나 더 많은 사업을 할 수 있을 텐데요?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몇몇 사업체나 법인을 차려서 그런 재원을 조달하면 좋지 않을까요? 그런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우선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낮은 자리에 머무름’입니다. 부유해지면 가난한 자리를 멀리하게 됩니다. 여유가 있으면 낮은 자리와 현장은 선택할 수 있는 많은 것들 중 하나에 불과해집니다. 또한 교회가 낮은 곳으로 가지 못하면 이는 예언자적 소명, 즉 정의와 공정을 이야기할 자격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난은 교회의 길입니다.
■ 이 시대의 더 절박한 가난은 무엇일까?
번영의 유혹과 가난의 비참함을 동시에 마주하며 신앙공동체가 가난을 선택한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오랜 역사는 재물을 버리고 하느님을 섬기던 이들의 청빈 속에서 흘러왔습니다. 얼마 전 선종하신 정진석 추기경님을 비롯해 많은 수도자들과 사제들, 교우들이 그랬습니다. 복음의 기쁨은 세속적 번영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난과 청빈에서 샘솟습니다. 그 기쁨은 아래로 흐르는 물처럼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 스며들어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총이 됩니다.(로마 10,12)
가난과 청빈은 은총이 흐르는 길이자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또한 세상에 주님의 길을 내려는 이들이 선택하는 신비로운 삶입니다. 독자들과 사회교리를 같이 고민하며 점점 드는 확신은 그리스도인의 사회 참여는 복음의 기쁨으로 함께 증거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기쁨만이 진정한 사랑과 믿음, 희망을 선물하고 올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문득, 풍요롭기 그지없는 이 시대에 숨겨진 가난은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알고도 그분을 모르는 것처럼 사는 삶이 아닐까요? 그래서 자유와 기쁨의 길을 알고도 여전히 어두운 곳을 방황하는 완고한 삶이 아닐까요?
“과거 2000년 역사와 지난 세기의 역사는 그리스도교 진리를 위하여 순교한 사람들, 곧 복음에 토대를 둔 믿음, 바람, 사랑을 증언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순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일치한 사람의 증언이며,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는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피를 흘리는 최상의 형태로 표현된다.”(「간추린 사회교리」 570항)
이주형 신부 (서울대교구 사목국 성서못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