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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예술? 좌익문화진영의 '거지근성'이 빚은 언어유희
깨시민·진정성·사람이 먼저다…비인기 예술장르 '무상복지' 꿈꿔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문화예술 vs. 문화산업의 승자는?
‘순수예술’과 ‘상업예술’. 예술 분야에 대해 딱히 관심이 없는 대중일 지라도 이와 같은 구분은 쉽게 들어봤을 법하다. 그리고 그 산물을 가리키는 단어의 차이도 어느 정도는 익숙할 듯싶다. ‘순수예술’의 산물은 ‘작품’이지만, ‘상업예술’의 산물은 ‘상품’이라 불린다는 것을.
사실 이 같은 구분은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술과 산업의 만남을 적극적으로 주도한 1990년대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부턴 지극히 노골적인 형태로 그 구분이 이뤄져 왔고, 갈등도 빚어져 왔다. 그리고 그와 같은 갈등은 당연히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당장 이런 기사를 한 번 살펴보자.
“최근 국립극장을 민영화하려는 정부의 계획에 대해 찬반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중략) 국립극장을 민영화해서 자본과 예술의 상관관계를 부각시키려는 정부 정책은 그간 국립극장을 통해 예술의 순수성을 지켜 나가려던 수많은 예술인들의 열의를 반영하지 못해 안타깝다. 국립극장은 문화 향유를 통해 이상 사회를 건설하려는 민중들의 소박하면서도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는 곳이다. 그곳은 공연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는 곳이다. (중략) 그런데 국립극장을 민영화하려는 현재의 정책은 배우들에게 대중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해 버린다. 무대에 오르는 작품이 예술성을 드러내기보다는 상업성에 치우칠 때 대중은 작품을 외면하게 된다.”
- 한겨레 2008년 5월15일자 칼럼 ‘예술성을 갉아먹을 국립극장 민영화 정책’ 중
8년 전 기사, 너무 오래된 기사 아니냐고? 그럴 수도 있다. ‘순수예술’이란 단어를 통해 검색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은 이 ‘순수예술’이란 단어가 ‘기초예술’이란 단어로 바뀌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등의 본질은 여전하다. 다음과 같은 ‘최신’ 기사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왜 인기 있는 영화를 더 많은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것이 문제가 되고, 더 인기 있는 학과에 지원을 늘리는 것이 문제가 되는가? 그것은 바로 기초예술의 중요성과 문화 다양성과 관련이 있다.
나라마다 시대마다 추구하거나 공유하는 시대정신이 다르고, 사람마다 선호하는 문화의 장르와 형태도 다르다. 문화 다양성을 보장하는 것은 새롭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탄생하게 하고, 더 풍부한 문화 콘텐츠를 생산하여 질 높은 문화생활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문화의 근간이 되는 것이 음악, 미술, 무용과 같은 기초예술이다. 여기에 문학, 영화 등 보다 대중적인 장르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인기 있는 영화 하나, 취업이 잘 되는 학과 하나에만 지원이 집중되면 결코 문화예술은 발전할 수 없다. 순수 기초예술문화가 더 깊게 뿌리내리도록 하고, 이를 통해 다양한 목소리가 표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문화융성일 것이다.”
- 부산일보 2016년 2월16일자 칼럼 ‘기초예술, 문화적 다양성의 뿌리’ 중
좌익진영은 어찌됐건 하다가 안 풀리면 언어 프레임을 새로 바꿔 새로운 포지셔닝으로 빈틈을 찾아 치고 들어온다. 고급에서 순수로, 순수에서 다시 기초로. 그 외에도 많다. 좌익은 진보로, 좌익 성향 시민은 깨어있는 시민으로, 민중민주는 사람이 먼저다로. 다른 테크닉도 많다. 결과의 참패는 '진정성'이란 단어로 물타기하고 넘어간다./사진=연합뉴스
‘기초예술’은 ‘순수예술’을 전략적으로 대체시킨 단어일 뿐
자, 이제 저 ‘기초예술’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 살펴보자. 일반대중 입장에선 극히 낯설 수 있지만, 의외로 해당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의 경우 ‘순수예술’ 대신 저 단어를 사용하도록 독려되고 있기까지 한 단어이니 말이다.
사실 ‘기초예술’은 이미 10년도 넘게 전부터 사용되던 단어다. 그 시초쯤으로 여겨지는 대목을 통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아보자.
“이러한 현실에서 순수예술이 위축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에 따라 지난 4월에는 순수예술로 분류되던 문학과 미술, 음악, 연극, 무용, 전통예술 등의 장르가 순수예술이라는 단어를 던져 버리고 기초예술이라는 단어로 통일하면서 기초예술을 살리자는 취지에서 ‘기초예술연대’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 ‘대학미술교육과 21세기 사회’(2004, 대학미술협의회) 중
아주 노골적인 선언이다. 그저 이전까지 ‘순수예술’이라 불리던 개념을 이제는 ‘기초예술’로 이름만 바꿔 밀고 나가겠다는 것이다. 늦은 아침과 이른 점심 차이다. 같은 때 같은 걸 먹지만, 불리는 이름만 다르다. 그럼 여기서, 좀 더 근본적으로, 이제 ‘기초예술’로 이름만 바뀐 ‘순수예술’이란 애초 어떤 의미였는지부터 생각해보기로 하자.
우리가 ‘순수예술’이라 부르는 개념을 영어론 Fine Art라 부른다. ‘순수예술’이라면 당연 Pure Art라 해야 할 텐데, 정작 Pure Art는 추상미술을 가리키는 단어다. Fine Art는 실질적으로 ‘고급예술’ 정도 의미다. 근래 식도락 붐과 함께 자주 사용되는 단어인 Fine Dining이 ‘순수식당’이 아니라 ‘고급식당’이란 의미로 쓰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다.
현재 우리는 ‘순수예술’에 들어가는 장르로서 문학과 미술, 음악, 연극, 무용, 전통예술 등을 꼽는다. 여기서 ‘순수예술로서의 문학’에 ‘해리 포터’ 같은 것이 들어가는 건 아니고, 마찬가지로 ‘순수예술로서의 음악’이라고 해서 소녀시대가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순수예술’로 번역된 Fine Art는 이와는 개념이 다르다.
Fine Art에 대립되는 개념은 Applied Art, 즉 ‘응용미술’이다. 별 게 아니라, 그냥 실용적 목적을 띤 공예나 장식미술 등을 가리키던 말이다. 현대에 와선 같은 개념이 ‘디자인’ ‘디자이너’ 등의 단어로 정착됐다. Fine Art는 그저 그런 것들과는 다르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쓰였던 개념일 뿐이다. 거기다 지금 Fine Art란 단어는 저렇게 장르 구분으로만 가둬놓지도 않는다. 영화도 포함되고, 현대음악이라 불리는 형태도 포함된다.
그럼 저 Fine Art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순수예술’이란 결국 그 의미가 하나밖에 안 남는다. ‘현재’ 시장에서 주류가 아닌 방향을 의도한 예술작품 정도를 가리키는 표현이라 보면 된다. 글로벌 스탠다드로는 ‘비인기종목’이 아니라 ‘비인기형식’ 정도로 보면 되겠다. 비인기예술, 혹은 고전예술. 그뿐이다. 물론 이 장르들도 다 당대에는 지금 ‘해리 포터’나 소녀시대처럼 잘 나가는 아이템들이었다. 그렇게 세상은 바뀌어가고, 사람도 바뀌어가고, 모든 것이 바뀌어가는 것이다.
‘순수예술’로서는 더 이상 공적자본을 타낼 ‘명분’을 얻을 수 없게 된 현실
그런데 저렇게 개념 자체가 좀 미묘한 ‘고급예술’이 어쩌다 ‘순수예술’이 되고, 또 10년 전부턴 ‘기초예술’로 둔갑하게 됐나. 알고 보면 참 유치한 얘기다. 단순히 시대흐름을 타고 시장에서 도태됐다는 현실에서 벗어나, ‘시장과 관련 없이 유지돼야만 하는 명분’을 얻어내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라는 거다.
이러이러한 것들은 순수한 거다. 그럼 그 반대인 안 순수한 건? 시장에서 먹히는 것, 자본주의 구조에 적응한 것, 소위 ‘팔리는 것’. 그렇게 반자본주의 도그마에 기대 자본주의 대척점에 선 기제로서 깃발을 끌어올리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게 바로 ‘순수예술’이란 단어였단 얘기다.
그리고 물론, 그 진정한 목적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생존방식에 반기를 든 만큼 이 장르(혹은 형식)들은 시장에서 승부를 볼 게 아니라 공적 개념 등에서 지원해주거나 자본가들이 세금조로 먹여 살려줘야 한다는, 이른바 ‘거지근성’이 중심이 된다. 순수하지 않은 건 나쁜 것이고 순수한 건 좋은 것인데, 순수한 게 사라지고 그렇지 않은 것만 살아남는다면 그건 ‘사회정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선과 악의 신화적 대립구도를 적용해버린 셈이다.
그럼 ‘기초예술’은? 저 ‘순수미술’의 ‘거지근성’이 더 이상 먹히지 않게 된 환경에서 탄생된 궁여지책에 불과하다. 예술을 놓고 시장논리를 들이댄다는 것 자체가 품위 없고 추잡하다고 항변하며 예술본위적 순수성을 부르짖을 수 있었던 시대가 이미 지나버렸기 때문이다. 시장 내에서 모든 게 통폐합되고, 그에 대부분이 동의를 한 환경이 마련된 탓에 등장한 개념이란 것이다. 그렇게 ‘순수예술’의 본래 모습이 ‘그저 비인기종목일 뿐’이었단 점이 드러나 버리게 되니, 여기서부턴 전략을 확 뒤바꿔버린 것이다.
‘기초’. 대단한 개념이다. 이게 정확히 무슨 뜻이냐 하면, 지금 시장에서 잘 나가는 영화 등 각종 장르들, 그러니까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주류로 이동된 장르들의 ‘기초’가 되는 게 우리(문학, 미술, 음악, 연극, 무용, 전통예술 등) 들이란 얘기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잘 나가는 장르들을 낳게 한 ‘기초’가 바로 우리들이므로, 저 인기장르들의 성공에는 우리들의 지분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공적 개념으로부터 지원도 당연하다는 설파이자, 나아가 지원이 되지 않으면 지금 인기 있는 장르들도 곧 무너질 것이라는 협박이기도 하다. 다음 실례를 살펴보자.
“‘연극은 기초예술’이라는 박철민은 “영화나 방송이 산업의 영역 안으로 들어갔다면, 연극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초가 튼튼해야 제반 예술이 발전합니다. 정책적으로 산업이 메우지 못하는 기초예술의 틈이 지원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현재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다 현실적으로 보다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집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라고 덧붙였다.”
- 아주경제 2015년 6월23일자 기사 박철민, 김운하·판영진 사망 소식에 “기초예술에 대한 관심과 정책적 뒷받침이 제고되길” 중
당연히 말이 안 된다. 한국연극이 저 정도 발언이 나올 만큼 세계적 수준과 권위가 있어 한국영화가 세계국제영화제에서 상을 휩쓸고, 한국TV드라마가 급속도로 해외수출실적이 올라간 것이 아니다. 본래 예술의 흐름이란 건 인류의 진화과정이나 매한가지로 진행된다. 어느 한 장르가 잘 나가다 도태되고 또 새로운 장르가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 도태되는 장르에 모여 있던, 또는 그쪽을 희망하던 인재들이 새 장르로 쏠려 새롭게 마련된 환경에 적응하며 생존을 이어나가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대고 ‘기초’를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어색한 일인 것이다.
‘예술혼’의 핵심은 애초 ‘시장’의 탄생에 의해 얻어질 수 있었다
이렇듯 애초 거론할 필요조차 없는 ‘기초예술’, 또는 ‘순수예술’에 대한 얘긴 여기서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여기서 정작 중요히 여겨야 될 점은, 저와 같은 다수 문화예술진영의 끝없는 ‘거지근성’, 그리고 특히 그 ‘거지근성’을 정당화시켜주는 발 빠른 프레임 전략 차원이다. 애초 ‘돈’은 나쁜 것이고 ‘순수’하지 않은 것이니 예술과 같은 고매함을 추구하는 바탕으로 적합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예술혼’을 망쳐버리고 있다는 식 프레임, 지난 수 십 년, 아니 수 백 년 간 사용돼온 고정 프레임의 차용 말이다.
그럼 이 같은 예술사 한 대목을 생각해보면 어떨까?
“17세기 미술시장이 가장 활기를 띠었던 곳은 네덜란드이다. 해상무역을 장악하며 ‘네덜란드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의류, 목재, 소금, 와인, 꽃을 수출하며 곡물거래나 조선업, 증권거래, 출판, 어업 등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데카르트는 암스테르담을 두고 “나를 제외하고 모두가 사업가인 굉장한 도시”라고 칭했다. (중략) 미술시장은 상업화, 전문화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선계약 후작품 제작을 하거나 소수의 후원자의 재정적 지원에 의존하던 것과는 달리 불특정 다수의 소비자를 위해 작품을 만들었다.
이러한 근대사회의 성장은 예술생산이 예술가의 주관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는 토양을 마련했다. 미술가는 기술자인 장인에서 전문직업인으로 상승하여 예술가 대접을 받게 되었다.”
- 곽은경 자유경제원 시장경제실장, 자유주의예술포럼 발제문 '시장경제로 본 예술' 중
이게 무슨 얘긴가 하면, 예술가들이 그리도 소리 높여 외쳐대는 창작의 자유, 즉 ‘예술혼’의 핵심이라는 게 애초 ‘시장’의 탄생에 의한 것이었단 얘기다. 이전까지 예술가란 그냥 남의 돈 받고 그대로 원하는 걸 만들어주는 기술자에 더 가까웠다. 자기 초상화를 그리건, 종교적 찬양가를 만들건, 정치적 목적의 대하서사시를 쓰건, 그야말로 ‘남’의 시각과 요구에 의해 작품을 만들어주는 작업형태다.
그러다 자유시장 개념이 들어서고 나서야 자신의 주관대로 작품을 만든 뒤 전시회를 열어 시장을 개방해놓고 이를 원하는 사람에게 팔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됐단 얘기다. 그런데 그로부터 300~400년 지난 대한민국에선, 저 ‘창작의 자유’ ‘예술혼’을 떠들어대는 사람일수록 시장논리를 부정하고 공적 개념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아야만 자신이 원하는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할 수 있다고 소리쳐대고 있다.
애초 ‘자유’라는 개념은 온전히 ‘시장’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시장’에서 벗어나는 순간 ‘자유’도 붕괴된다. 그러면서 저 봉건주의 시절과 똑같은 일이 반복되게 된다. 그리고 저런 식 공적 개념의 예술계 직접지원을 주장하는 건 볼 것도 없이 좌익정치진영, 또는 그와 맞닿아 있는 진영이다. 자신들 사상적 지향점인 공적 개념 역할의 무한정 확대와 정확히 일치하는 노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이 주장해 그들의 힘으로 통과시키고 그 예산을 집행할 권리까지 상당부분 쥐게 된다.
그럼 그 다음부턴? 좌익정치진영은 정확히 저 17세기 시장 폭발 이전 네덜란드의 권문세족이 된다.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의 작품들, 자신들과 밀접한 예술가들에게 ‘작품을 주문’하는 형태가 된단 얘기다. 예산을 받는 건 절대다수가 좌익 성향 작품을 지향하는 작가들이 된다. 반대로, 공적 개념으로부터 돈을 받으려면 절대적으로 좌익 성향의 작품기획을 내놓던가, 좌익인사들과 인맥을 잘 쌓아놓는 방법밖에 남질 않게 된다.
이게 진짜 ‘자유로운 예술혼’이 맞는 건가?
프레임 장난에 넘어가지 않고 올바른 프레임을 부여하는 방법
사회주의란 근본적으로 봉건주의다. 계급주의이며, 엘리트주의이고, 권위주의다. 예컨대 지금은 피터 셰퍼의 희곡 <아마데우스>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어울리는 상황이다.
“‘피가로의 결혼’을 보다 황제가 한 번밖에 하품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지. 황제가 3번 하품하면 그 오페라는 그날 바로 문을 닫아. 두 번 하품하면 일주일 정도 상연되는데, 한 번 하품하면 그래도 9번은 상연할 수 있거든.”
그럼에도 그렇게 돈 받고 주문 생산해 줘가며 살고 싶다면 그것도 또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다만 그렇게들 봉건주의적 하수인으로 살면서 자유가 어쩌느니 하는 얘긴 분명한 언어도단이다.
다시 ‘기초예술’로 돌아가 보면, 적어도 저 고급예술인지 순수예술인지 기초예술인지 하는 얘길 꺼내며 말도 안 되는 보호논리를 펼쳐대는 이들을 지지하는 않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저들의 프레임인 ‘기초예술’이란 단어를 그대로 쓰는 것 역시 문제가 있는 태도란 점을 인지해둘 필요가 있다.
좌익진영은 어찌됐건 하다가 안 풀리면 언어 프레임을 새로 바꿔 새로운 포지셔닝으로 빈틈을 찾아 치고 들어온다. 고급에서 순수로, 순수에서 다시 기초로. 그 외에도 많다. 좌익은 진보로, 좌익 성향 시민은 깨어있는 시민으로, 민중민주는 사람이 먼저다로. 다른 테크닉도 많다. 결과의 참패는 ‘진정성’이란 단어로 물타기하고 넘어가고, ‘세력화’란 단어가 패거리주의를 연상시키니 ‘힘화’라는 또 어디 듣도 보도 못한 신기한 단어를 들고 온다.
“상대방의 주장을 부정하는 흔한 실수를 저지르지 마라. 대신에 프레임을 재구성하라. 프레임은 사실을 이긴다. 언제나 프레임을 재구성하라. (중략) 프레임에 대해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이것 하나는 기억하라. ‘일단 내 프레임이 논의에 받아들여지면, 내가 말하는 모든 것은 그냥 상식이 된다.’ 왜? 이미 받아들여진 진부한 프레임 안에서 사고하는 것이 바로 상식이기 때문이다.”
- 조지 레이코프 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중
지금으로부터라도, 그저 ‘파인아트’라고만 불러두든지, 아니면 더 노골적으로, 이렇게 해보자.
“그러니까 비인기 예술장르의 복지에 대한 부분은 말이죠…”라고.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