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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080404b창세기32장b20080404b 울산강의-창세기 32장
(강의:이근호 목사)
이 야곱이란 사람이 32장에 보면 겁을 내요. 뭐냐 하면, 에서가 따라와서 자기를 죽인다는 거예요. 야곱이란 사람에게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죽음의 공포가 항상 뒤집어써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형한테 맞아 죽게 돼있습니다. 형이 올까 싶어서 형한테 갖다 바칠 예물을 미리 빼놔요. 형이 온다는 소식 듣고 이 예물을 받으시고 화를 좀 누그려 뜨리시길 바랍니다. 하고 한편으로 그렇게 하고 또 지는 그것도 모자라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뭐라고 기도하느냐 하면, 19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다시 은혜주면 다시 돌아간다 했잖아요. 그런데 지금 에서가 형이 날 죽이려고 옵니다. 11절에 보면 제가 너무나 두렵습니다. 두려워서 내 처자를 칠까 겁냅니다. 제가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뤄지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합니다.
이것은 바로 야곱 안에 뭐가 들어있다? 죽음의 기억이 계속 야곱 안에 들어있어요. 야곱 속에 야곱을 뜯어보면 죽음이 칭칭 뱀처럼 똬리를 틀고 죽음이라는 게 칭칭 감고 있어요. 그 야곱이 뭐냐? 우리 자신들이에요. 우리 자신의 뚜껑을 들어보면 우리 속에는 뭐가 감겨 있느냐 하면, 죽음에서부터 도망치기 위한 모든 수작들이 우리 몸이 칭칭 감고 이것이 자아를 형성합니다. 나라는 걸 형성해요.
전에 이야기했지요. 프랑스빵은 겹겹이 주름져 있지요. 우리 인간도 뜯어보면 하나둘씩 주름이 있는데 주름이 뭐냐? 안 되질라고 애썼던 그것이 층층이 이루어서 자아를 이룹니다. 기어이 살아보려고.
그런데 여기 일 번이 진정한 죽음이 무엇이냐? 참 이런 말하기가 제가 어려워요. 이해될까? 야곱에게 죽음이 찾아오는 게 아닙니다. 야곱 자체가 죽음의 열매에요. 이근호란 인간에게 죽음이 오는 것이 아니고, 죽음의 솜씨가 이근호라니까요. 우리가 죽을 때 죽는 게 아닙니다. 지금 점점 죽어가고 있어요. 죽음이 나의 왕이에요. 이근호가 이근호를 쥐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죽으면 안 돼. 죽음이 저를 쥐고 있는 거예요.
친구, 의리, 사랑 지가 굶어 죽어보세요. 친구가 어디 있어요. 교회가 어디 있어요. 밥 먹고 살기 어려운데 무슨 교회를 나옵니까? 하나님, 예수? 아니에요. 전부다 살만 하니까 교회 나오는 거예요. 한국교회 부흥되었어요? 한국교회 뭐하는 동네인지 압니까? 죽은 시체들이 모여서 살려달라고 비는 데가 교회에요. 혹시 살려 줄까봐. 커피 마시고 금요철야하면 혹시 살려 줄까 싶어서. 사는 속도를 행운이 와서 더 감해지도록.
그래서 목사 설교에서 이것만 챙깁니다. 여러분, 이렇게 해보시면 반드시 더 잘 살고 오래 삽니다. 그것만 챙겨. 딴 소리 절대 안 챙겨요. 예수고 성령이고 다 비껴갑니다. 안 듣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사는데 지장이 없겠습니까? 몸이 건강하고 어떻게 사는데 지장이 없겠습니까? 그 자체가 뭐냐? 그 자체가 이미 죽어있다는 뜻이에요. 자기가.
야곱이 이미 죽어있는 인간이에요. 죽어있으니까 형이, 타자가, 자기의 다수가 겁이 나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뭐냐? 그 죽음 속에 있는 야곱을, 그 다수 속에 있는 야곱을 생명이 있는 하나로 인도하는 걸 그걸 뭐라 했습니까? 그게 바로 신앙생활이라 했지요.
두 번째가 뭐냐? 저주의 경계를 넘어야 돼요. 야곱의 힘으로 안 됩니다. 야곱은 기껏해야 죽는 게 무서워요. 이것밖에 안 돼요. 얼마나 죽는 게 무서웠던지 자기한테 다가온 하나님의 천사를 자기를 죽이려고 온 사람인 줄 오해했어요. 이거는 야곱의 본성입니다. 사람이 자기 방어에 자기 자신에 아주 몰두하면 얼른거리기만 해도 적으로 간주합니다.
일산에서 그랬고, 안양도 그랬지요. 어린여자아이를 성폭행하는 그 분위기가 되니까 집에 있던 부모들이 휴대폰 쳐서 학교 파할 때는 전부다 애 데려갑니다. 그 분위기 자체가 죽음의 분위기에요. 집에 있는 죽어갈 엄마가 학교 간 죽어갈 지 새끼를 같이 해서 죽음으로부터 방어하려고 하는 거예요. 경찰은 뭐하느냐 하죠. 곡물 값 올라가고 기름값 올라갈 때 여기서 우리는 뭘 느끼느냐? 두려움을 느낀다는 말은 잘하면 살겠다는 게 아니라 이미 죽음으로 푹 잠겼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아담이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음에 빠져서 죽음이 왕 노릇한다. 사망이 오히려 왕 노릇한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성령은 성경에 있는 말을 실감나게 하는 게 성령입니다. 진짜 내가 매일같이 살아가는 게 안 되질라고 살아가는구나. 라고 하는 게 로마서 5장에 실감나게 만들어요. 우리로 하여금.
교회와도 죽음의 공포는 풀리지 않고, 교회를 나가도 죽음의 공포는 떨어지지 않고. 휙휙 뱀이 죽음이라는 뱀이 아침 눈 뜨고 저녁 갈 때까지 내 몸을 휙휙 감고 아주 목을 꼭 조이고 있는 거예요. 한시라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없게 만들어요. 그래서 누가 오면 바짝 긴장하죠. 그게 야곱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죽음이 무엇인가? 야곱을 통해서 알아야 돼요. 성경 아니면 죽음이라는 걸 알 수가 없어요. 우선 세상적으로 보면 죽음이 뭐냐? 이겁니다. 논리가 이런 논리인데 이 논리를 잘 들어보세요.
자아라는 것, 자기라는 것, 과거의 기억의 층이 만들어낸 이미지. 나라는 것은 과거에 누적된 층이 만들어낸 지금의 이미지에요. 서울대학 나왔다. 그럼 나는 서울대학 나온 자아에요. 나는 재산이 한 10억 있다. 10억이 있는 자아에요. 니는 5억? 나보다 반 밖에 안 되네. 너는 나보다 재산이 반 밖에 안 돼. 할 때 상대방과 비교할 때 뭐로 비교합니까? 과거로부터 내려온 내 머리 속에 있는 기억과 저 사람의 기억과 비교하면서 니는 너고, 나는 나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돼요.
그래서 연예인들이 나이 많은 걸 그렇게 무서워해요. 왜냐하면 자기의 기억 층에 뭐냐 하면, 나는 예뻤다, 팬들이 많다, CF에 잘 나온다. 지금은 나이 많다. 쭈글쭈글 못생겼다. 팬들 다 떨어졌다. 그러니까 수술하자. 아직 탱탱하단 소리 듣고 다시 드라마 뛰자. 방금 이야기한 전체가 자아라는 거예요. 자아라 하는 것은 뜯어보면 기억이 누적된 걸 자아라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게 죽는 순간이 오게 되면, 자기가 죽어버리니까 듣는 거 정지하잖아요. 죽는 순간이 되면 제일 난처한 게 기억이 없어지면 뭐가 없어져요? 자아가 없어지니까 자아가 없어지면 뭐도 없어지느냐 하면, 내가 죽는다는 사실도 내가 죽는다는 그 주인공 자체가 없어져버려요. 죽음 자체가 없어져요. 참 말 어렵게 한다.
죽는 순간이 되면 죽음 자체가 없어져요. 죽는 것이 두려울 때가 언제 두려우냐 하면, 아직도 살아있으니까 죽는 게 두렵지요. 자아가 살아있으니까 죽으면 안 돼, 죽으면 안 돼. 하지만 죽는 순간이 오게 되면 죽는 게 무섭다는 자아마저 기억이 정지되니까 기억이 사라지니까 이것도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진짜 안갭니다.
안개가 있으면 이 안개 축축하네. 이거 황사 아니냐? 안개가 있으니까 이리 따지고 저리 다지지만 안개가 없는 순간에는 방금 뭐 있었는데, 없네. 잊어진 존재가 없는 존재가 돼버려요. 그럼 어떤 사람이 목사님, 과거는 있었잖아요. 하는데 사람의 존재가 허무한 게 성경의 시편에 나옵니다. 과거에 아무리 오래 살았던 이 세상에 구십을 살았던 백세를 살았던 간에 어떤 순간이 없어지면 과거의 살았던 것도 없어지는 것과 동시에 다 사라져버려요.
내가 있는 순간이 없는 순간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 어려워요. 뭐냐 하면, 니가 있다고 하나? 사실은 없는 거다. 하는 거예요. 그 없는 거라고 시편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림자’라 하거든요. 성경에서 인생을 뭐라고 하느냐? 인생은 이렇습니다. 시편에 보면, 그대로 할게요. “인생은 헛것이요 그림자 같으니라” 돼있거든요.
여러분, 그림자가 어느 정도 헛것인지 알아요? 제가 움직여 볼게요. 여기 물병이 있고 비타500 있는데 제가 움직이면 가만있는데 위에 뭐가 덮이지요. 그분 그림자가 덮이지요. 그림자가 덮이면 물병이 화냅니까? 비타500이 어떤 영향을 받습니까? 이게 껍데기 정도가 아니라 얇은 껍데기, 그림자니까 얇은 껍데기라고 보면, 얇은 껍데기가 지나가도 아무 영향 없지요. 아무 신경 안 쓰지요. 우리 인생이 그렇다 이 말이에요. 살아있을 때는 인상이 가지만 죽고 나면 그냥 그림자처럼 그런 사람도 있었지. 옛날 내가 어떤 남자하고 산 건 기억나는데. 그러니까 애가 생겼지.
죽은 남편을 기억한다는 것은 죽은 남편을 기억하는 게 아니고, 죽은 남편 가운데서 나와 관련된 것만 골라서 내가 재편집해서 내 기억 속에 집어넣은 거예요. 그것도 내가 죽으면 죽은 남편도 같이 사라져버립니다. 이걸 성경에서 뭐냐? 안개니라. 또는 인간은 헛것이고 그림자 같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니가 평소에 의미 있다고 연결시킨 연결들이 관계들이 죽고 나면 다 무의미했음을 알아라 이 말이죠.
그러면 대안이 뭡니까? 죽음이 뭐냐? 야곱이 지금 창세기 32장에서 애쓰고 열심히 기도하고 붙들고 한 모든 게 뭡니까? 뭘 몰랐어요? 본인이 안개며 그림자인 줄 모르고 하나의 실체처럼 계속 굴지요. 그래서 대부분 목사들이 뭡니까? 얍복 강가에서 예수 믿고 야곱처럼 붙들고 기도하면 복 받는다고. 이거는 반대로 가르쳐요.
붙들어도 붙든 이유가 뭐 때문에 붙듭니까? 안 되질라고 붙들잖아요. 안 죽으려고 붙드는 자체가 이미 붙든 자체가 죽음이 만든 현상이라니까요. 그림자가 붙들어봐야 주님 끄덕도 안합니다. 그림자인데. 우리가 그림자 덮이면 이게 어디서 시비 거노? 이렇게 합니까? 지나가소. 이렇게 하면 끝나지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분명히 중고등학교 때 싸웠을 거예요. 그 싸웠던 친구, 지금 삼십 년, 사십 년 지나 만나보세요. 그 싸웠던 것 감정 없어졌습니다. 그때는 저놈 안 죽이면 나도 학교 안 온다. 그렇게 심각했던 것이 한 사십 년 지나 보니까 아이고,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공부도 안 하고 노는 애들처럼 침 뱉어가면서 먹어주는 줄 알고. 꺼덕꺼덕 나팔바지 입고 돌아다니지만 나팔바지든 뭐든 간에 그것도 아~무. 속에는 섞어서 해골인데 위에다 나팔바지 걸쳐봐야 뭐 합니까?
그런데 젊은애들은 자기가 죽는 걸 모르고, 생생하게 살았다고 보니까 나팔바지에다 뭘 걸치네. 실체인 줄 알고, 뭐 된 줄 알고 그렇게 노는 거예요. 나이 구십 넘은 할머니 목욕탕 가도 보도 안합니다. 젊은애들 목욕탕 가면 들여다보려고 하지만 나이 구십 넘은 할머니들 목욕탕 가면 애들 안 봅니다. 쭈글쭈글한 육체 보면 밥맛없지 뭐하려고 봅니까?
야곱이 자꾸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 이삭의 하나님, 절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하나님이 야곱을 도와준 적 없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목표로 하지, 야곱이 아닙니다. 야곱은 다수에요. 이스라엘은 하나입니다. 참 이스라엘이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보고 뭐라 했습니까? 너는 참 이스라엘이다. 나다나엘이 되면 안 돼요. 나다나엘에서 뭐로 바뀌어야 됩니까? 이스라엘로 돼야 구원받는 거예요.
천국은 이스라엘만 가는 곳이지 나다나엘이 가는 곳이 아니에요. 이근호가 가는 곳이 아닙니다. 이스라엘만 가는 데에요. 그리스도의 몸이 되서 가야 되지 내 몸 되서 가는 데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써 장미 한 송이만 들어가요. 우리는 가시가 되서 들어가죠. 몸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그렇지요. 모든지 하나지요. 소망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그리스도도 하나요. 전부다 하나다 이 말이죠.
여기서 야곱은 야곱의 죽음을 그는 어디서 알게 되었습니까? 에서를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까? 몰라요. 에서를 보면 더욱더 살아야겠다는 집념만 강하죠. 내가 살아야겠다. 32장 내용이 그거에요. 내가 형한테 져선 안 된다. 왜? 난 축복받을 사람이니까. 하나님이요, 저를 도와주세요. 저를 도와주시는 것이 하나님께 도움 됩니다. 저가 살아야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든지 국가와 민족,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든지 내가 살아야 되겠습니다. 이게 야곱이에요. 그 자체가 되질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자체가 인개인 줄 모르고 살아야겠습니다. 바로 그 인간을 하나님은 죽이려고 하십니다. 왜? 그게 죽음이기 때문에.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자기가 죽음인 것을 알게 된 것은 다른 사람이 에서가 와서가 아니라 누가 와서 그렇습니까? 하나님 사자가 와서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신약에 보면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걸 상세히 이야기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때 십자가 졌거든 누가 널 꾀더냐? 갈라디아 사람들아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든. 십자가라 하는 것은 우리의 관이거든요. 우리의 최후의 모습, 우리의 진실한 본질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버림받았지요. 왜 버림받았습니까? 죄가 있기 때문이죠. 그 죄는 어디서 나온 죄입니까? 예수님이 죄 진 적 없는데 왜 죄가 있었습니까? 그 죄는 어디서 가져온 죄에요? 나에서 가져온 죄 아닙니까? 예수님을 날 대신해서 현재 내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를 하나님 앞에서 비쳐볼 때 십자가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우리는 버림받아야 될 인간인 것을 십자가에서 유일하게 알게 됩니다.
산에 가면 고전압 흐르는 전신주가 있지요. 이만 오천 볼트 흐릅니다. 그거 만져보세요. 삐찍삐찍 갑자기 하나의 불꽃이 타버리죠. 우리가 하나님 만나는 게 이만 오천 볼트 전신주를 만지는 것과 똑같아요. 똑같은 정도가 아니고 그것보다 더 심하죠. 지가 서울대학 나왔든 지가 이건희가 되서 총재가 됐든 삼성그룹 회장이. 삼성그룹 회장은 전기 만지면 감전사 안 됩니까? 창녀가 되었든 세리가 되었든 지가 백부장이 되었든 그리고 그야말로 강도가 되었든 누구든지 관계없이 하나님은 모든 인간은 감전사되어야 될 죄가 왕 노릇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십자가를 대신 보여줬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사도바울이 자기가 뭐라 했는지 압니까? 나는 율법에서 완벽한 사람이라 했습니다. 선악적인 논리로써 흠이 없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입에서 뭐라 했는지 압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로다. 이게 뭔데? 감전사 당했다.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내가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니게 말할 게 없다. 이게 감전사 당한 거예요. 전신주에 붙어가 있어요. 평소에도 전신주에 붙어있어요. 나는 너희를 예수님께 중매한 중매쟁이다. 나 말고 다른 복음 전하면 전부 저주를 받을지어다. 진짜 하나님이 보내신 사도입니다. 우리는 그분 말을 들어야 돼요. 사도바울을 말 들어야 돼요.
창세기 32장 우리가 다 읽지 않았습니다만 항상 벌벌벌 떱니다. 에서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때부터 벌벌 떨기 시작했어요. 그 벌벌 떤 그 결과가 뭐냐? 살아야 되겠다, 살아야 되겠다. 하는 그 결과로 자기 앞에 등장한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자기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인 줄 모르고 니 죽고, 내 살자. 야곱의 특징을 적어보겠습니다. 죽음은 무엇인가? 죽음의 승리가 뭐냐? 너 죽고, 나 살자.
자기가 죽은 존재인 줄 모르고, 자꾸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상대를 죽임으로써 내가 사는 거예요. 하여튼 날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이게 죽음의 의미에요. 아까 제가 세상적으로 죽으면 모든 게 사라진다했지요. 성경에선 그래 보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죽은 사람들 무덤까지 찾아가서 마지막에 다 불러내요. 이리 와!
그게 뭐냐? 이 세상 중심은 자기 기억중심이 아니고, 이 세상 중심은 예수님의 구조 속에 인간들이 예수님의 주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이 태어난 거예요. 그 관계가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예수님을 생각한 게 아니고 자기 밖에 생각 안 하기 때문에 지 죽으면 세상도 다 없어지고. 그래서 속상하면 약 탁 먹고 죽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해요.
나폴레옹이라는 사람이 실패하고 난 뒤에 영웅답게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자살을 시도하는데 자기가 키는 작지만 신체가 좋기 때문에 약을 적당히 적게 먹어선 안 되지 싶어서 많이 먹었더니만 그게 목에 걸려서 살아났습니다. 나폴레옹은 태어날 때부터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가 태어난 걸 모르고, 그리스도가 주되심을 모르고 자기가 주인이 되는 거예요. 내가 내 힘으로 살겠다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안 되면 약 먹고 죽으면 그만 아닌가? 이래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마지막 때 주께서 부활할 때 모든 사람을 다 부활해서 그것 봐라. 내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 안 카드나? 전부다 다 불러내요. 해서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 보내고, 예수 믿는 사람은 천국 보내는 그 마지막 작업을 해내십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교회 안 다닌다, 나 이제 예수 안 믿는다, 절에 간다, 백날 도망가 봤자 사월 초팔일 날 연등을 달든 무슨 짓을 해도 돼요. 백날 해봤자 주님께서 다 무덤에 나타나서 다 합니다. 이리 와. 소용없어요. 피할 곳이 없어요.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십니다.
미리 눈치 챈 우리들이 다행스럽지요. 매를 미리 맞는 게 좋아요. 죽고 난 뒤에 아니고, 난 몰랐습니다. 하지 말고 미리 맞는 게 좋아요. 너 죽고 내 살자. 이게 야곱이거든요. 야곱은 다른 말로 죽음의 화신. 죽음의 특징이 결국 너 죽고 나 살자니까 이걸 한 자로 하면 뭡니까? 바로 야곱은 죄의 결과.
죄가 뭐냐?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기 목숨을 미워하지 않고 자기 목숨을 사랑한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자기 목숨을 미워한 자는 살리라. 요한복음 12장 25절. 이런 성경구절이 있다는 게 그걸 기존교회에다 적용시켜보세요. 사람들은 귀 막고 안 듣지요. 자는 척하고 안 듣지요.
대번 하는 소리가 목사님, 우린 어쩌란 말입니까? 우리가 직업 가지고 애는 피아노 가르쳐야 되고 해야 되는데 우리는 약 먹고 자살하란 말입니까? 뭐,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제가 이런 이야기했어요. 지난주일 날 아침에.
성경을 볼 때 여러분, 성경 수평이지요. 분명히 문자가 수평으로 깔려 있는데 뭔가 바짝 서있다고 보세요. 수평인데 입체적으로 뭔가 서있다고 보세요. 한분은 성부고, 한분은 성령이고, 한분은 성자입니다. 성경은 이것 없이 문자로 보게 되면 이걸 지켜야 되겠지만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성경 속에 입체로 돋아있으면, 성경은 누가 지키느냐? 삼위일체 하나님이 지켜서 우리한테 공짜로 선물로 줘요. 이게 성경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으리라 하니까 그걸 수평으로 봐서 안 끊어지려고 애를 쓴다고요. 어떻게 스물네 시간 주님만 사랑합니까? 말도 안 되지요. 스물 네 시간 무슨 주님을 사랑합니까? 전봇대 받침입니까? 무슨 수로 스물네 시간을 생각합니까? 끊어지지 않는단 말은 이 말씀은 니가 지키는 게 아니고, 니 눈엔 보이지 않지만 성부, 성령께서 지켜서 너희에게 끊어지지 않는 선물을 주는 겁니다.
그게 뭐냐? 두 자로 ‘용서’에요. 용서를 해주는 게 아니고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의로 공짜로 준단 말이죠. 누구한테? 죄인한테. 왜 죄인입니까? 성경 못 지키니까. 우리가 먹는 것, 입는 걸 족한 줄 아는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에 있거든요. 성경을 보면서 야, 이거 나 죄인이구나. 알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용서가 주어지는데 용서로 말미암아 이것이 성령께서 다 지켜서 우리에게 용서를 주시는 겁니다.
제가 탕자 이야기 전에 여러 번 했지요. 탕자가 집에 돌아올 때 뭐 갖고 왔습니까? 푸짐하게 갖고 왔지요. 뭘 푸짐하게 갖고 왔습니까? 빈 호주머니. 빈 호주머니를 갖고 오니까 거기에 가락지도 담기고, 쇠고기도 먹고 있는 거예요. 지금 비게 되기를 기다린 거예요. 아버지가. 왜냐하면 다 안 털어먹으면 집에 안 들어오니까. 다 털어먹어서 자기 게 남기지 않은 빈 주머니 될 때 주께서 쇠고기 먹여 줘, 옷 줘.
주니까 걔는 동네마다 돌아다니면서 누구 자랑합니까? 지 자랑하는 게 아니고 이것도 아버지 주신 것, 이것도 아버지 주신 것, 전부다 아버지 주신 것 이게 바로 천국이란 거예요. 제발 탕자가 돼라. 맏아들 되지 말고. 옆에 성실하게 봉사한 맏아들 되지 말고, 제발 다 털어먹은 탕자가 되라 이 말이죠.
이게 탕자 되려면 경마해서 털어먹고, 도박해서 이게 아니고, 나는 수평적으로 야곱을 걸치고 걸친 야곱 위에 주님이라는 이스라엘이 덮쳐서 두 개의 자아가 함께 공존하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산다. 유령 아닙니까, 귀신 아닙니까? 용서받는 거예요. 마지막 때에 용서받았습니다. 말 하면 되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런 소리할 필요 없어요.
성령은 나를 보게 만드는 게 아니고, 니가 어떻게 개판같이 살더라도 하나 예수님이 뭘 했느냐 하는 겁니다. 옛날에 닭고기 CF 저는 맘에 드는데. 닭고기가 너무 맛이 있는 거예요. CF에 뭐라고 했는지 압니까? 도대체 닭고기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기를 도대체 예수님이 우리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아하, 십자가란 짓을 했구나. 십자가 피 흘린 짓을 했구나. 피 흘리심이 있은 즉 사함이 있느니라.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고, 피 흘림이 있으면 사함이 있는 거예요.
피는 왜 흘렸습니까? 용서해줄게. 그것 아닙니까? 니는 탕자니까 탕자 속에 용서만 들어가면 되는 거예요. 얼마나 쉬워요. 그 말은 뭔 뜻입니까? 닌 죽은 놈이다 말이죠. 니는 죽은 놈이고, 살아있는 내가 피를 묻히면 산 자로 여길지어다. 참 이 말 로마서 6장에 나오는 말씀, 니는 죄로 인하여 죄 앞에 가면 너는 죽은 놈이지만 예수님 앞에서 너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비록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산 자로 여길지어다. 스데반 집사가 돌아 맞아 죽어도 이미 산 자도 여길지어다.
나를 보지 마시고 그 한 분으로 초점이 모아지는 것,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뭐, 불 받았느니 뭐 받았느니 그렇게 말고. 참 난 예수님 덕분에 산 자지, 내가 내 식대로 아무리 투자를 해봐야 이건 죽음의 공포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돌아서면, 살아야 될 건데 못난 남편 만나서 내가 아주. 다른 남편은 돈도 잘 번다 하는데 팔자가 더러워서.
그런데 정작 그 고민을 누가 하는 줄 알아요? 홍리나 여사님이 하고 있습니다. 홍리나 여사가 누군 줄 알아요? 이건희 부인. 아이고, 괜찮은 남편 만나야 되는데 더러운 남편 만나서 지금 이런 수모를 검찰에 출두하니 이게 무슨 짓이고? 당신 똑바로 해.
자신을 그림자로 볼 줄 아는, 안개로 볼 줄 아는 것, 이것은 더 이상 내가 살 필요 없는 존재가 될 때 사람은 가장 자유를 느낍니다. 내가 더 이상 살 필요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럼 왜 사느냐? 사는 죽으나 우리는 누구의 것이다? 내가 사는 책임자는 내가 아니고 주님이 책임자가 되는 거예요.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한 달 전에. 내일 베어서 아궁이에 가는 들풀을 세상에 얼마나 약 오르는지. 오늘까지 키우시나니, 주께서. 차라리 내일 안 베이면 되는데 내일 풀이 베이는 걸 뻔히 알면서도 오늘까지 그 풀을 주께서 키우신다 이 말입니다. 솔로몬의 입은 옷도 하나님이 친히 키운다는 들풀의 영광보다 못하다 이 말이죠. 주께서 친히 간섭한다는 이것이 주님 보시기에 이게 예쁘지, 저 최선을 다했는데 어때요? 그런 것은 자기 수치를 가리는 더러운 거예요.
좀더 이야기해봅시다. 야곱이 하나님에게 왔을 때 야곱은 뭘 발휘하느냐 하면, 내 속에 이런 더러운 것 죽음 밖에 없습니다. 하는 것을 충분하게 발휘합니다. 언제까지 발휘하느냐? 밤새도록 발휘해요. 그러니까 야곱으로선 끝났지요. 야곱으로선 더 감출 것도 없고, 내숭 떨 일도 없습니다. 야곱은 에서고 하나님이고 날 건드리면 조진다. 이게 야곱의 특성입니다. 나, 한 인간, 한 성격한다. 언놈이든 날 건드리면 조져버린다.
보통 교회 올 때 주님 바라보고 오고, 하나님 생각하고 오지 사람보고 안 온다고 이거는 마치 노래 부르듯이 후렴하듯이 그렇게 해놓고, 막상 교회에서 진짜 시시한 것 있잖아요. 저 집사님은 찬송가 부를 때 너무 빨리 부른다. 이 한 마디 했다고 삐져 교회 안 나와요. 뭐, 주님 바라보고 나온다고요. 언놈이고 날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는다는 죽음의 야곱의 속성을 우리는 타인들과 만나면서 그걸 늘 겪습니다. 나는 버렸다, 나는 죽었다, 나는 이미 십자가에 못 박았다. 백날 이야기해도 누구 하나 자극주면 자극 받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으로써 도저히 저주의 경계를 말할 수가 없습니다. 야곱으로서는 야곱의 속성을 그냥 다 터뜨리는데 그걸 누가 받아줍니까? 받아주시는 분이 있어요. 받아주시는 분이 유일하게 야곱을 살릴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야곱과 주님의 만남의 관계에서 비로소 최초로 밝혀집니다. 당했던 분이 자기를 피해준 사람을 용서해주는 방향으로 구원하는 법칙이 하나님의 인간 법칙입니다. 우리의 나밖에 모르는 인간, 나만 아는 인간에게 된 통으로 당했던 그분이 나를 구원한다는 공식을 아는 사람이 신자에요. 이게 바로 성도입니다.
그때 주님 보기에 미안스럽고 죄송하죠. 그렇지 않고 예수를 바라보면 나, 예수 당신 믿어줬데이. 나, 구원해줘. 잘났지. 이래 됩니다. 예수님이 나로 인한 피해자란 인식은 없고, 당신은 전문가니까 당신은 죄 용서해주는 전문가라며? 그럼 날 용서해줘. 약간의 감사 헌금할게. 됐나? 빠이빠이. 이게 바로 보통 인간들이 생각하는 야곱적인 복음관, 십자가 이해가 그거에요. 십자가 물 건너갔고 부활 남았다. 이렇게 하고 있어요.
주께서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바라볼 때마다 야, 나는 나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구나. 하는 것을 통감하면 통감할수록 그것마저 용서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다시 공식 해봅시다. 공식 네 번째. 공식 앞에 다 잊어버렸지요? 나도 다 잊어버렸어.
[피해자가 가해자를 구원한다.] 왜냐하면 용서라는 게 뭡니까? 용서가 어떤 때 용서입니까? 아무 피해 없는 사람 같으면 용서할 자격도 없어요. 용서가 되려면 피해 당사자가 용서해줘야 용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피해 입을 사람으로 오시는데 그분이 누구냐? 야곱한테 된 통으로 당하는 천사의 모습으로 등장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천사의 모습으로.
그러면 야곱은 어떻게 됩니까? 니 죽고 나 살자 아닙니까? 야곱 이름이 뭐예요? 야곱의 이름 자체가 뭐냐? 나는 사기꾼. 사기꾼이 뭡니까?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양보도 안 하는 걸 말하잖아요.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 아닙니까? 자기밖에 모르는 그 야곱으로 인하여 된 통으로 피해를 많이 보신 그분. 그분이 어느 정도로 피해를 봤느냐 하면, 천사는 날이 새면 다시 가야 되는데 못 가도록 붙잡을 정도로 천사의 신분 자체에 위협이 될 정도로 피해를 입었다 이 말이죠.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었어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지만 죄 많은 자기 백성을 위해서 이 땅에서 사람으로 살았고, 결국 사람이 가야 할 마지막 길, 죽음까지 맛봐야 했습니다. 같이 죽고, 같이 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고통을 당할 수가 있습니까? 당할 필요가 없지요. 그런데 당하신 거예요.
그걸 가지고 예수님이 뭐라고 하느냐? 그걸 가지고 쓴잔. 나는 내가 존경받으려고 온 게 아니고, 나는 너희들을 위해서 대속물로 주려 왔노라. 말이 쉽지요. 죄 없는 분이 죄 있는 자를 위해서 죄 없는 본인이 대신 책임진다는 게 얼마나 이게 어려운 일입니까? 완전히 자기 비움, 자기 포기 되잖아요. 자기 포기가 죽기까지 복종하잖아요. 죄 없으신 분이 죄 있는 인간을 위해서.
참 이게 예수님의 그 모습을 미리 당겨서 보여줍니다. 그렇게 될 때 야곱은 자기가 천사와 싸웠던 이걸 통해서 자기 자신이 극복될 수 없는 저주로부터 못 벗어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부터 야곱이 붙드는 것은 뭐냐? 나의 정체를 알려준 당신이 비로소 나에게 축복할 수 있다고 믿고, 살려달라고 기도하죠. 이것은 죄인으로써 이것은 뭐냐? 나는 뭐다? ‘죄인입니다.’의 반복이에요. 살려주세요. 라는 나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나는 죄인 맞습니다.’를 되풀이하는 거예요.
그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살려주질 않습니다. 야곱을 죽여 버립니다. 죽여 버리고 뭐라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로 살려줘요. 야곱을 죽이고 이스라엘이라는 조건 하에 살려줘요.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저주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을 이기고, 사람을 이기는 사람만이 저주에 속한 자기 백성을 건져낼 수가 있는 속성입니다.
이 이스라엘 속성은 뭡니까? 장차오실 예수님이 행사하고 실행에 옮길 그 속성을 미리 앞당겨서 야곱에게 부여한 거예요.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야곱은 나는 살았다가 아니라 내 안에 뭐가 덮쳤다는 거예요. 나는 뭣이 덮쳤어요? 하나님의 속성이 이제 덮친 거예요. 그걸 제가 아까 하나님이 뭐라 했습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란 말이죠.
그러니까 살려줘서 고맙습니다가 아니라 이리 와! 니는 이제 나의 속성이 덮쳤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가 어떤 분인 걸 보여주는 하나의 증인으로 이제는 주님의 소유로 전환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로.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될 것은 지금 야곱이 죽었거든요. 야곱은 이미 죄에 대해서 죽었잖아요. 이름이 뭐로 바뀌었습니까? 이스라엘로 바뀌었잖아요. 이건 소속이 전에는 죽음의 소속이었다가 이제는 뭡니까? 생명의 소속이죠.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여기 창세기 32장 29절 보면, 이름을 묻지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름을 물으니까 이름을 이야기 안 합니다. 야곱이 당신의 이름을 이야기하세요. 이름을 물으니까 이름을 이야기 안 해요. 이름을 왜 이야기 안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은 이게 야곱처럼 피조물에게 붙는 이름이 아니고, 아 참 이런 말 어렵다. 속성을 받은 사람은 이름이 있어도 속성을 부여하는 쪽은 이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속성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있거든요.
예를 듭시다. 회사 사장님이 오셔서 김 씨, 오늘 이거 용접 좀 하라고 할 때 하나의 기능이 담기죠. 뭐 하라고요? 이거 작품을 용접해 놓으라고. 오늘 오후까지. 그런데 당신 이름은 누구십니까? 그걸 묻는다는 것은 기능을 받은 사람은 기능에 예속되지, 기능을 주신 사람을 자기가 예속할 수가 없어요. 붙들 수가 없어요. 예수님을 내가 붙들 순 없어요. 말하자면 우리는 주님에게 복속이 될 뿐이지, 내가 주님을 붙들게 되면 주님하고 나하고 거래가 되고 흥정이 돼요. 그걸 아셔야 돼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인데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그걸 묻는다는 것은 상대방의 이름을 내가 물을 수 있다는 말은 그 사람도 내 손에 잠긴다 이 말이죠. 사람이 누구 이름을 묻게 되면, 그 사람을 내 속성을 그 사람한테 집어넣는 경우에만 사람의 이름을 물을 수 있습니다.
어이, 강아지야. 너는 뽀삐다. 내가 뽀삐라 할 때마다 와야 돼. 이것은 뭐냐? 나는 뽀삐보다 더 위다 말이다. 층이 더 높은 층이다 말이죠. 니는 내 노예고, 나는 니 주인이다 이래 되거든요. 그때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강아지고 주인이 있을 때는 주인의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묻지 마. 니는 시키는 대로 하면 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 예수의 이름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하나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기능을 할 때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불러야 돼요. 이건 뭐냐 하면, 이건 내 일이 아니고 이건 다 주의 일이다 할 때 우린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게 되는 거예요. 내 이름으로 하지 않고 주께서 시키는 대로 합니다. 라는 뜻이에요.
나, 당신 이름대로 부르고 기도했으니까 해 놔라. 이 말이 아니고, 내가 주님을 부르는 게 아니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이거는 제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입니다. 하는 뜻으로 한다 이 말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저한테 이루게 해달라는. 그래서 야곱이 가는 인생은 야곱의 인생이 아니고, 이스라엘 인생입니다.
약간만 더 해봅시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인생이 뭐냐? 다같이 한번 봅시다. 30절, 시작.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뭐라 한다? ‘브니엘’ 보세요. 하나님의 이름은 없어도 하나님의 기능엔 이름이 붙지요. 뭡니까? 브니엘. 브니엘이 뜻이 뭐예요?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니 내 생명이 보존되었다. 나는 어디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왔지요.
야곱이 갖고 있던 처자식과 재산은 의미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거는 갖고 있으면 빼앗길까봐 두려움만 발생되고 나한테 죽음의 공포만 자꾸 주어지거든요. 그런데 이미 하나님을 만났는데 살았다는 이 말은 뭡니까? 앞으로 어떤 걸 만나도 안 돼진다. 왜 안 죽습니까? 내가 왜 안 죽지요? 질문이 어렵습니다. 내가 왜 안 죽지요? 하나님의 생명의 기능이 덮쳤으니까 안 죽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이 나한테 덮쳤으니까 죽음을 모르는 일이 덮쳤으니까 내가 안 죽는 거예요.
스데반 집사는 죽었잖아요? 헤헤, 스데반 집사가 죽는 것이 살아있다는 증거라니까. 죽으면서 누굴 만났어요? 주님을 만났잖아요. 그러니까 성도가 죽는 것은 그게 하나님의 일의 일종이에요.
산수 2페이지 해야지. 예. 너는 사회 두 장 베끼고. 예. 그 다음에는 뭘 할꼬? 죽고. 예. 산수, 수학하듯이, 영어 외우듯이 그게 주의 일이듯이 뭐도 주의 일이다? 돌에 맞아 죽죠. 예. 죽으니까 누굴 만났어요? 예수님 만나는 거예요. 그게 하나의 일이 되는 거예요.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자기는 죽는 것도 두렵지 않는 겁니다. 죽는 것도 일이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는 이미 죽었으니까.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 소원이 있는데 이 몸을 벗어버리고 주와 함께 영원히 거하는 그것이다. 마지막 쉬는 일을 맡겨 달라. 누구 마음대로. 그래도 내가 안 죽는 것은 너희들 때문에 안 죽고 있다는 거예요. 상당히 화를 내죠. 당신들 때문에 안 죽고 있다고. 당신들 없으면 벌써 죽었는데 편히 쉬는데 당신들 복음 전한다고 안 죽고 있다고. 아, ( ) 자기의 유일한 소망을 막고 있으니까 교인들이.
보세요. 얼마나 정신머리가 우리하고 다릅니까?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결혼을 안 해 봐서 그렇다고 그래요. 사도바울이 결혼 안 한 것도 그것도 주의 살아야 될 일입니다.
브니엘 자체가 이게 하나님의 일이 그러니까 자기는 브니엘, 이스라엘 다 하나님이 주신 외부에서 온 이름 아닙니까? 그 이름대로 기능대로 이제는 움직이는 거예요. 자기는 브니엘 되기 싫어도 브니엘 돼야 돼요. 살아있는 존재라 하는 것은 지 자랑하려고 하는 게 아니고, 살아있게 하시는 일들이 앞으로 남아 있을 거예요.
자, 이제 마지막 어려운 것, 이것만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마지막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야곱은 죽었지요. 이스라엘은 살았지요. 그러면 죽은 야곱에 뭐가 덮친다? 이스라엘이 덮쳐서 이제부터는 야곱이 아니고 뭡니까? 야곱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로 살아가죠. 야곱만 있으면 자꾸 죽는 게 무서우니까. 에서가 따라와요, 따라와요. 날 죽이려고 해요. 자꾸 겁이 나니까 야곱은 죽고 이스라엘은 살려주죠.
그러니까 앞으로 하는 일은 뭐냐? 야곱이 보여주는 일은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일은 죽음이 무엇이며 죽으면 무엇으로 덮이느냐? 양쪽을 다 보여주는 인생을 살아가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오해해서 이제 야곱은 죽었으니까 이거는 없어지고, 이래 돼요. 아니에요. 야곱이 있어야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되는 겁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란 말을 할 수 있어야 나 같은 인간도 창세전부터 택정 받아서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에게 가시가 있어야 나는 약한 중에 강함이라는 게 성립이 되는 겁니다. 야곱이 같이 가야 돼요. 이게 바로 십자가 아닙니까? 사람들은 십자가 지나고 부활 좋아하는 이유는 이 위에 것만 달랑 따먹으려고 하는데, 계속 십자가로 가야 양쪽이 다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게 뭐냐 하면, 우리가 죄 있는 육신의 몸을 갖고 있거든요. 진짜 죄 있는 육신의 몸이 어째서 죄 있는 육신의 몸이냐 하는 걸 평생을 통해서 우리는 드러낼 때 죄 있는 육신의 몸을 주께서 은혜로 영생 줬다 하는 것을 계속해서 십자가의 공로가 나와야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야곱이 앞으로 인생이 험난합니다. 험난하지만 야곱은 그 험난한 가운데 창세기를 끝까지 보게 되면, 험난한 가운데서 아들 죽지요, 요셉 잃어버리잖아요. 그런 가운데서도 뭘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내 소관 아니고, 주님 소관으로 아마 이뤄질 걸. 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또 약속을 믿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끝으로 제가 당부하고 싶은 것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선악적인 구조가 동원돼서 내가 젊을 때 이래 살았으면 지금보다 더 나았을 건데. 지금이라도 내가 반듯하게 살면 복을 받을 건데. 자꾸 지금 야곱 가지고 어떻게 조작하려고 야곱 가지고 승부를 걸려고 해요. 하지만 그것은 내가 보기에는 저 죽기 싫어요, 죽기 싫어요. 를 되풀이 하는 그러한 핑계거리밖에 안 됩니다.
목사님, 저 행동이 나빴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그것도 변명이에요. 원래 나빠요. 누가 뭐랬어요? 우리 모임이 예수님 피 용서받아서 모였지, 누가 남보다 완벽하기 때문에 온 건 아닌데 그렇게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예민하게 굴지 말란 말이죠.
그리고 오늘 강의한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다수에서 성령께서는 하나를 보게 하는. 나를 보는 게 아니고 주님을 바라보게 하는 야, 주님 덕분에 살았다 하는 이러한 죽음의 극복을 여러분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야곱에게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났는데 세상에 야곱이 안 죽고 되살아났습니다. 똑같은 일이 십자가 때문에 우리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이제는 내 자랑, 또 내 두려움 갖지 말고 우리를 어디다 사용할지 주님 손에 맡길 수 있는 하는 일마다 하나님께 용서에 대해서 감사하고 고마워 할 줄 아는 저희들 삼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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