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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11월12일/주일복음말씀묵상/ † 기름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고 있다/ 미련한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의 비유!(마태25,1-13)
혼인식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이미 시작되었다(9,14-15; 22,2). 여기에서는 예수님이 종말에 영광에 싸여 오실 때에 그 혼인이 완성된다는 사실을 문제 삼는다(묵시19,7,9). 이 비유는 신부의 들러리들, 곧 처녀들이 밤이 되어 신랑을 맞아 신부 집으로 안내하려고 저 멀리 그 집 땅의 경계선이나 마을 밖까지 나가서 기다리고 있다.
마태25,1-2절은 “그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고 말한다.
마태오복음 25장에 나오는 첫 번째 비유는 지금 우리가 다니는 교회 안에서 정확하게 성취되고 있다. 이 말씀에서 신랑은 예수님이시다. 열 처녀는 예수님께서 재강림하심을 기다리는 성도들이다.
열 처녀는 예수님께서 오시는 길을 비추기 위해서 등불을 들고 있는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이다. 그런데 열 처녀에게 문제가 생긴다. 열 처녀 중 어떤 사람들의 등불은 환하게 타오르는데, 어떤 사람들의 등불은 꺼지게 된다. 마태25,8절은 “어리석은(미련한)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다오’하고 청하였다.
미련한 처녀들의 등불이 왜 꺼지게 되었을까? 신랑이 더디 오시기 때문이다. 말세가 되어서 예수님께서 곧 오실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늦게 오시면서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둘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나타나고 있는 실제 장면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 성도들은 지금 시간에서 시험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강림이 지체되면서 기다리던 성도들의 신앙과 마음이 변질되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믿는 이들은 신랑이 올 것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성도들이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로 나누어지는 이유를 “기름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미련한 처녀, 곧 등불은 있지만 여분의 기름이 없는 사람들>
마태25,3-4절은 “어리석은(미련한)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라고 말한다.
미련한 처녀는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여분의 기름을 갖고 있지 않았다. 미련한 처녀에게 여분의 기름이 없다는 것은 성령의 결핍을 뜻한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기름은 성령을 뜻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나자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니”(루카4,18).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1요한2,20). 성경에서 등은 기름이신 하느님의 영을 담는 믿는 이들의 영을 상징한다(잠언20,27). 믿는 이들이 그들의 영 안에서 하느님의 영의 빛을 비추어 낸다! 그러므로 등은 하느님의 말씀을 뜻한다(요한6,63).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라.”(시편 119,105). 그러므로 믿는 이들은 세상의 빛이 되고 이 시대의 어둠 가운데서 등불로서 빛을 비추며(마태5,14-16),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주님을 증언하는 일을 감당한다. 그렇다면 미련한 처녀들은 등불은 있는데 여분의 기름이 없다고 했는데, 이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그것은 성경 교리와 지식은 있는데 성령이 결핍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교리와 지식이 내 속으로 들어가지만 죽은 “나”를 살리지 못하는 것이다! 말씀이 내 체험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미련한 처녀도 교리와 지식을 갖고 있다. 교회에서 배운 것이 있고, 설교를 통해서 받은 지식이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통해서 받은 말씀과 교리는 내 것이 아니다!
그런 등에서 나오는 빛은 금세 꺼지고 사라지게 되고 마는 것이다. 미련한 처녀에게는 하느님과 씨름하면서 붙잡은 말씀이 없다! 그래서 지식은 있는데,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이다! 곧 성령의 역사가 없는 것이다! 미련한 처녀가 갖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말씀을 앉아서 듣기만 하는 것이다. 왜 미련한 처녀들은 말씀을 앉아서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을까?
에제(겔)33,31절은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고 말한다. 왜 말씀을 앉아서 듣기만 한다고 말하는가? 입으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 이기심과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미련한 처녀들도 열심이 있다. 교회 활동에 적극 참여한다. 그러나 말씀을 읽고 깨달아도 마음을 바치지 않는다! 십자가에 욕심과 정욕을 못 박지 않는다! 진리를 따라서 좁은 길을 걸으려고 하지 않는다! 미련한 처녀는 하느님의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따르기 위해서 전적으로 굴복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전적인 헌신이 없다. 바로 이것이 등은 갖고 있지만 여분의 기름이 없는 모습인 것이다. 등잔은 있지만 여분의 기름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등잔에서 빛이 계속 나올 수가 없다! 오늘날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말은 하지만, 성령의 은총과 체험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오늘날 교리도 잘 알고 말씀도 알지만 등잔에서 빛이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왜 그럴까? 기름이 없기 때문이다. 성령이 없기 때문에 열매가 없고, 열매가 없으면 말씀이 빛이 되어 나갈 수 없는 것이다. 열매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열매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맺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매가 없으면 이웃에게 빛이 될 수 없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다.
미련한 처녀에게 기름이 부족한 이유는 성령을 거절하기 때문이다. 성령의 음성을 거절하기 때문에 말씀을 무시하게 되고, 성령의 호소를 외면하기 때문에 참된 회개를 못하게 되며, 성령에 굴복하지 않기 때문에 죄를 용서받지 못하게 되고, 성령이 결핍되었기 때문에 하느님을 믿고 말씀을 읽지만 열매 맺지 못하고 빛을 비추지 못하는 것이다!
미련한 처녀는 성령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르기 때문에 참된 거듭남의 체험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의 차이가 무엇일까? 결국에는 “기름이 있는가? 기름이 없는가?”의 차이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있는가? 성령이 없는가?”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다.
<슬기로운 처녀, 곧 등과 기름을 가진 사람들>
우리는 마태오복음 25장에 나오는 슬기로운 처녀의 모습을 잘 묵상해 보아야 한다. 그들이 미련한 처녀와 무엇이 다른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슬기로운 처녀는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다“고 말한다. 슬기로운 처녀는 등도 가져갔지만, 여분의 그릇에 기름을 담아 갔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이것이 마지막 시대 하느님의 백성의 모습인 것이다. 왜 마지막 시대에 슬기로운 처녀들은 그릇에 여분의 기름을 준비할까?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성령이 없으면 살아있는 말씀이 죽은 “나”를 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이 없으면 비록 말씀을 외운다고 할지라도, 말씀이 나를 그리스도께 바치는 지점까지 끌어가지 못한다. 두 번째 이유는 성령이 없으면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내 것이 아닌 말씀은 이웃과 사람들에게 빛으로 나갈 수 없다. 세 번째 이유는 기름이 없으면 사탄의 미혹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을 통해서 영적 인 눈이 열리지 않으면 마지막 때에 교회에서 하느님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사탄의 미혹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전혀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조는 사람들, 잠자는 사람들>
마태25,5절은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잔다.”고 말한다. 신랑의 오심이 지체되면서 열 처녀가 모두 졸고 잔다고 말한다. 이것은 어떤 상황일까?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강림이 늦어지면서 성도들이 조는 사람들과 잠자는 사람들로 나누어지는 모습을 말한다.
슬기로운 처녀는 조는데, 미련한 처녀는 잔다. 졸고 있다는 것이 어떤 상태인가? 자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데 피곤하니까 어쩔 수 없이 머리를 끄덕이는 것을 뜻한다. 잠들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눈을 깜박거리는 것이 조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재림의 징조가 보이면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들지만 징조가 지나가면 다시 잠들지 않으려고 애쓰는 상태가 “졸고 있는 상태”이다. 마지막 시대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을 기다리는 동안 이런 체험들을 통과하게 되는 것이다.
슬기로운 처녀가 졸고 있을 때, 미련한 처녀는 어떤 모습일까? 그들은 깊이 잠들었다. 물론, 그들도 처음에는 졸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깊이 잠들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당신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가? 깊이 잠자고 있는가? 아니면 말씀을 읽고 예언을 살피면서 깨어 있으려고 온갖 애를 쓰고 있는가?
<열 처녀 모두 깨어 일어난다.>
마태25,6절은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때는 깊은 밤이 될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인 라오디케이아(라오디게아) 교회(묵시3,14-22)가 영적으로 깊이 잠들어 있을 때 예수님께서 재강림하실 것이다.
슬기로운 처녀들이 졸고 있고, 미련한 처녀들은 잠들어 있을 때 갑자기 “신랑이 온다!”는 큰 외침이 들리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강림은 미련한 처녀들에게는 갑작스럽게 도적처럼 임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깊이 잠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에게는 오랜 세월 동안 기다리던 구원의 날이 될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슬기로운 처녀들에 대해서 1테살5,4-6절에 “형제들아(슬기로운 처녀들)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고 말한다.
지금 교회 안에 조는 사람들과 자는 사람들이 섞여 있다. 열 처녀 모두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헌금을 드리기 때문에 누가 알곡이고 누가 가라지인지 분별하기 어렵다. 열 처녀 모두 등을 가지고 있고 신랑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누가 슬기로운 처녀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보라 신랑이 온다!”라는 큰 외침이 들릴 때에는 그들이 어떤 처녀였는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마태25,6-7절은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열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열 처녀가 모두 깨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왜 깊이 잠들어 있는 미련한 처녀들까지 일어나게 될까? 왜냐하면 “신랑이 온다!”는 외침이 들릴 때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마지막 징조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곧 열 처녀 모두에게 “이것은 틀림없이 예수께서 오시는 마지막 증거다.”라는 확신을 주는 징조가 일어나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조는 자와 잠자는 자가 모두 깨어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징조를 보고 깨어 일어난 열 처녀에게 어떤 일이 생길까?
<모두 깨어서 일어날 때는 이미 늦은 때이다>
마태25,6-8절은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모두 깨어서 일어날 때는 이미 늦은 때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는 노아의 때와 같다고 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사람의 아들(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태24,37). 노아 홍수 때에도 모든 사람들이 비가 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알았을 때에는 이미 방주 문이 닫혔을 때이다.
소돔과 고모라 때에도 모든 사람들이 하늘에서 유황불이 내려오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멸망을 피할 수 없었다. 이제 곧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재림의 징조와 예언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때 온 세상을 미혹하는 사탄의 역사가 놀라운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사도 요한은 대환난과 짐승의 표가 온 세상에 강요될 때, 수많은 미련한 처녀들이 미혹당하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묵시13,13-15절은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고 말한다.
최후의 미혹은 “큰 기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이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이적을 행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예언자 엘리야의 기적이 나타났다!”고 소리칠 것이다. 모두가 미혹되어 교회와 교파를 초월해서 모든 사람들이 “큰 이적”을 중심으로 하나로 연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미련한 처녀들 중에는 대환난과 짐승의 표 환난에 대한 말씀과 예언을 아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이적이 생겨도 그것이 “미혹”이라는 사실을 분별할 것이다.
“신랑이 온다!”는 외침이 들려올 때 미련한 처녀들은 잠에서 깰 것이다. 그때는 엄청난 징조가 나타나고 예언이 분명하게 성취되기 때문에 잠에서 깨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서 “이제 때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곧 오신다. 이제는 세상 끝이다!”라고 외치게 될 것이다.
요한묵시록 13장에 나오는 짐승의 표가 현실로 나타나고 온 세상이 뒤집힐 텐데 누가 잠들어 있겠는가? 아마 그때가 되면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 것이다. 이미 때는 늦지만 진리가 무엇인지 찾아다니게 될 것이다. “내 삶을 어떻게 주님께 바쳐야 됩니까?”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예언이 어떻게 성취됩니까?”라고 질문할 것입니다.
서로 기도하자고 말하면서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문제를 너무 늦게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랑이 온다!”는 큰 외침이 들려올 때 미련한 처녀들의 문제는 무엇이라고 했는가? 기름이 없는 것이다!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이하러 가야 하는데, 여분의 기름이 없어 등잔이 꺼져 가고 있는 것이다!
마태25.7-8절은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이라고 말한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 “신랑이 온다!”는 확실한 징조가 나타나고 대환난과 짐승의 표 예언이 성취되는 모습을 볼 때에는 기름을 준비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는 지금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것은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진리이다. 왜냐하면 “신랑이 온다!”는 외침이 들려올 때 등불이 꺼진 미련한 처녀가 되지 말라는 것이 예수님께서 열 처녀의 비유를 주신 목적이기 때문이다.
1코린6,19-20절은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지금 성령의 기름을 채우는 체험을 해야 한다! 우리는 성령의 기름을 채우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 지금 기름을 채우려면 하느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는 체험들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더라도 진리를 바라보면서 영을 접촉하는 방법을 배우고 체험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고난을 허락하실 때 말씀을 붙잡고 일어서는 체험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우리 속에 성령의 기름을 채우는 훈련이다! 이러한 체험은 마지막 징조가 나타나고 짐승의 표 환난이 일어날 때 배울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하느님께서 번개와 천둥 같은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을지라도, 성경에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을 붙잡고 성령께서 주시는 확신을 따라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사람들이 슬기로운 처녀인 것이다!
등잔에 성령의 기름을 채우는 일은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이다. 기름을 채우는 체험은 나와 하느님만 아는 체험이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통해서 체험을 주신다. 가난을 가지고 있으면 가난을 통해서 체험을 주시고, 병을 가지고 있으면 병을 통해서 체험을 주신다. 내가 가지고 있는 말씀, 내가 알고 있는 빛을 통해서 우리를 가르치고 인도해 주신다. 그러므로 알고 있는 빛과 알고 있는 말씀에 충성하는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는 것이다.
<진리와 기름의 관계>
기름, 곧 성령은 진리를 통해서만 내 속으로 흘러들어 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소개하면서 “진리의 성령”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요한15,26절은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진리의 성령”으로 부르신 이유는, 성령은 진리를 통해서만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이 비성서적인 복음과 거짓 교리를 믿으면서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대단히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런 분들은 자신이 체험하고 있는 방언과 은사가 정말 성령으로부터 온 것인지 먼저 검증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거짓 복음과 비성서적인 교리를 믿고 있으며 의의 열매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성령께서 기적과 은사를 주신다면, 사도 바오로가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주의하라고 경고할 필요가 어디에 있었겠는가?
1티모4,1-2절은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게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령을 달라고 매달리기 전에 진리가 무엇인지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성령을 구하면, 사탄은 그런 사람을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으로 멸망의 늪으로 끌고 간다. 지금은 영적 전쟁의 시대이다. 하느님과 사탄 사이에 실제적인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름을 채우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간절한 심령으로 진리를 찾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하여 갈급하고 목마른 심령으로 말씀을 읽을 때 성령께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신다! 하느님의 섭리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진리를 가르치고 전하는 하느님의 종들과 만나게 되고, 진리가 담겨져 있는 영적인 책들을 접하게 된다!
그러나 진리에 대해서 갈급하지 않은 사람들은 미련한 처녀가 될 것이다. 대부분의 라오디케이아(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짐승의 표 환난이 올 때 자신이 미련한 처녀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모든 자”가 짐승의 표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묵시13,16절은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라고 말한다.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
예수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재림의 징조는 지진과 전쟁과 홍수가 아니라 “사람의 미혹을 조심하라”는 경고이다! “사람의 미혹을 조심하라”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 그것은 교회 안에 있는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는 말씀이다! 교회 안에 더러운 영들이 들어와서 거짓 가르침, 거짓 복음, 거짓 성령을 퍼트린다는 것이다.
사탄은 마지막 시대의 미혹을 위해서 오래전부터 작업을 해 왔다. 사도 바오로는 “말세에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이 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올 것이라고 말했다.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1티모 4,1-2절).
사도 바오로는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어떤 문제가 생긴다고 말씀했는가? 그리스도인의 양심이 마비된다고 했다! 왜 양심이 마비될까?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거짓 가르침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리를 무시하고 성령의 음성을 거절해도 두려움도 없고 마음이 불편하지 않게 된다.
‘성경을 왜곡한 잘못된 교리,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가르침, 예수를 영접하면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 내가 어떻게 살든지 간에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구원할 것이라는 가르침, 이 세상에서 정의와 평화를 구현해야 한다는 인본주의적 가르침 등’ 이런 가르침들이 이 시대에 가장 강력하게 퍼지고 있는 귀신의 가르침이다.
그런 가르침과 복음을 받아들이면, 양심이 화인 맞게 되고, 하느님께 충성하는 신앙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도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돈과 세상을 사랑하면서 살아도 양심의 가책이 없게 된다. 사탄은 죄를 붙잡고 있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도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는 복음을 교회 안에 깊숙이 퍼트리고 있다.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두 번째 미혹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그것이 거짓 성령(가짜 기름)이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시대에 거짓 복음과 거짓 성령의 역사로 미혹당한 그리스도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묵시18,2절은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도 사도 요한과 같은 시선으로 마지막 시대의 교회를 보셨다. 마태24,24절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말세에는 성령께서 어떻게 역사하는지 모르면 길을 잃어버리게 된다!
사탄의 미혹을 따라가고 있으면서, 자신은 성령을 받았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미혹의 시대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짓 교리로 미혹당하고, 감정적 신앙과 거짓 성령으로 미혹당하고 있다. 마지막 시대 교회의 문제는 기름이 떨어지는 것이다. 참된 성령의 역사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최후의 미혹이 나타날 때 수많은 미련한 처녀들이 짐승의 우상에게 달려가 경배하게 되는 것이다. 묵시13,13-14절은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고 말한다.
<그릇이 비어져야 기름이 채워진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구해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릇이 비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릇이 이미 다른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다. 그릇이 다른 것들로 채워지면 미련한 처녀로 남게 된다. 그릇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남보다 높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더럽고 추한 것들로 채워지면, 기름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 마음이 세상에 대한 근심과 염려로 채워지면, 그릇에 기름이 들어갈 자리가 없게 되고 결국 미련한 처녀가 된다. 루카21,34절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고 말한다.
가난한 사람만 생활의 염려가 있는 것이 아니다. 부자도 염려 때문에 그릇을 비우지 못하게 된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릴까 염려하고, 그릇에 더 많은 것을 채우기 위해서 근심한다. 그렇다면 기름을 채울 수 있는 빈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 하느님께서 주시는 용서와 위로를 갈급하고 구하는 심령을 말한다. 땅에 속한 것들에 시달리고 지쳐서 하늘에 속한 것을 사모하는 심령이다.
세상에 속한 것들에 깊은 허무를 느끼고 간절하게 그리스도를 향하여 손을 뻗는 심령이다. 죄와 세속에 끌려 다니는 삶이 너무나 싫어서 하늘을 바라보며 “주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저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절규하는 심령을 말한다. 이와 같이 어린아이 같은 단순한 마음에 기름이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
마태18,3절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어린아이는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어린아이는 지금 필요한 것이 채워지면 엄마 품 안에서 잠이 든다. 마태6,34절은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고 말한다.
어린아이는 엄마만 있으면 만족하고 행복하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커가면서 장난감이 있어야 행복하고, 예쁜 옷이 있어야 만족한다. 더 나이가 들면 돈이 있어야 행복하고, 좋은 집이 있어야 행복하게 된다. 더 나이가 들면, 말 잘 듣고 신앙 좋은 자녀가 있어야 행복을 느끼게 된다. 또 더 나이가 들어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면, 은퇴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어야 행복하다.
처음에는 엄마만 있으면 만족했는데, 커 가면서 돈과 환경 속에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원하는 물질과 원하는 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행복과 감사가 사라지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그릇이 어린아이 마음 같지 않으면 기름을 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신랑이 온다!”는 외침이 들려올 때까지 세상을 쫓아다니다가 정작 자신이 미련한 처녀라는 사실도 모르게 된다. 하느님만 있으면 자족할 수 있는 사람이 슬기로운 처녀이다. 미련한 처녀들은 세상과 물질을 쫓아다니다가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신념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미련한 처녀들은 입으로는 “하느님께서 나의 주인이시다.”라고 말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세상의 인정과 성공과 욕심에 목을 매고 살아간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하느님 한 분에게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성숙된 성도들이다. 그들은 “하느님, 내게는 당신 한 분뿐입니다. 저는 당신 한 분으로 만족하겠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주변 사람들 때문에 속상해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더 이상 물질 때문에 행복을 잃어버리지 않겠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라고 간증한다!
시편23,5-6절은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말한다. 하느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야 그릇을 비울 수 있다.
마태6,33절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한다.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주께서 나와 내 가족을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릇에 기름을 채울 수 있다. 마지막 시대에 하느님의 약속을 붙잡고 사는 사람들은 죽어 가는 라오디케이아(라오디게아) 교회 안에서 기름을 채우는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그릇이 비어 있으면 하느님께서 기름을 채워 주신다(마태6,25-33). 그릇에 기름이 가득 채워질 때까지 채우실 것이다. 지금, 주님께서는 기름을 채워 줄 성도들을 찾고 계신다. 우리 중 누가 하느님을 위해서 그릇을 비우시겠는가? 우리 중 누가 온갖 염려와 허망한 것들을 버리고 진리와 복음으로 그릇을 채우겠는가? 오래 전에 사르밧 과부의 그릇에 기름을 채워주신 하느님께서 비어 있는 우리의 그릇에도 성령을 가득 채워 주실 것이다.
<성령을 오해하면 그릇에 기름을 채울 수 없다>
오늘날 어떤 믿는 이들은 성령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어떤 기운이나 힘이나 파워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령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대하면 그릇에 기름을 채울 수 없게 된다! 우리와 하느님, 우리와 예수님의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이다. 성령님과의 관계도 인격적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성령과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서 그릇에 기름을 채울 수 있다.
성령을 인격체로 받아들여야만 그분께 도움을 구하고 진리를 가르쳐 달라고 기도하게 된다. 성령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않으면 성령의 판단과 생각과 지혜를 구하지 않게 되고 내 곁에서 도와주시고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분의 임재를 인식할 수 없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이름”을 가진 인격체로 말씀하셨다.
마태28,1절은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고 말한다. 사도 바오로도 성령을 생각하고 근심하는 인격체로 소개하고 있다. 에페4,30절은 “하느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한다.
자녀가 부모의 권면을 거절하면 부모 마음에 근심이 생기는 것처럼, 우리가 성령의 음성을 거절하면 성령의 마음에도 근심이 생긴다. 성령의 마음에 근심을 주는 상황이 지속되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느님의 인”을 쳐 주실 수 없고 결국 구원을 잃어버리게 된다. 인격체가 아니면 근심이 생길 수가 없다.
베드로는 성령을 속이지 말라고 경고했다. 성령께서 인격체가 아니라 단지 하느님께 나오는 어떤 기운이나 파워라면 어떻게 “성령을 속이고 땅 값의 얼마를 감추었느냐?”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도5,3절은 “베드로가 가로되 하나니아스(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라고 말한다. 사도들에게 있어서 성령은 완전한 인격을 가진 하느님이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승천하기 전에 성령을 진리로 인도하는 분으로 소개해 주셨다. 성령은 말하고 듣고 장래 일을 알려주는 인격체이시다. 기운이나 파워는 진리를 가르치고 인도하고 말하고 듣는 존재가 아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거절하면 처음에는 마음이 아프고 상처가 나지만, 계속해서 거절하면 마음의 고통과 통증을 잃어버리고 마비가 된다. 성령의 감동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양심이 단단하게 굳어 버린다. 그렇게 될 때 성령을 거스리는 죄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호소하시고 우리 마음을 찌르실 때 성령의 생각과 지혜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내 속에 있는 그릇에 기름을 계속해서 채우는 체험이다. 우리가 그런 체험 속으로 들어가면,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죄가 떨어져 나가며 하느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기름이 계속해서 우리 마음에 흘러들어 와야 이기적인 생각과 음흉함과 간계가 떨어져 나가게 된다. 또한 세속적인 생각과 욕심으로부터 풀려나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그릇에 기름이 채워져야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옮겨지는 기적이 일어나게 된다(로마6,16-18).
<기름 파는 사람들, 기름 사는 사람들!>
마태25,9절은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하고 대답하였다.” “신랑이 온다!”는 외침이 들려오자, 잠에서 깨어난 미련한 처녀들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눠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기름을 나눠 줄 수 없다고 말한다.
왜 기름을 나눠 줄 수 없을까? 왜냐하면 그릇에 기름을 채우는 경험은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씀을 듣고 읽고 받은 성령의 은총은 다른 사람에게 나눠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스스로 하느님의 말씀과 씨름해야 하고, 인생의 쓴 고난의 체험을 통해서 그릇에 기름을 채우는 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만 배울 수 있으며, 긴 시간을 통해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갈 때 배우는 체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 처녀의 비유는 마지막 때 교회 안에 기름을 파는 자들이 나타날 것을 말하고 있는데, 그들이 바로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거짓 선지자들”이다.
마태24,11,24절은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고 말한다.
물론 그들이 파는 기름은 가짜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아무 때나 팔 수 있다. 가짜 기름의 가장 큰 특징은 사람의 마음과 생애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금 수많은 교회에서 기름을 팔고 있는데, 그 기름을 산 사람들은 이런 간증을 하게 된다.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는데 갑자기 등줄기가 뜨거워졌습니다.” “천장에서 불덩어리 같은 것이 내려오더니 가슴을 쳤고, 그때 내가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 유명한 신부님이 수십 명을 세워놓고 안수를 했는데, 그때 어떤 이상한 힘에 의해서 사람들이 바닥에 쓰려졌습니다. 온 몸에 힘이 다 빠져버렸습니다.” “성령이 내게 임하니까 참을 수 없는 웃음이 나왔는데 교회 전체가 한참 동안 웃었습니다.”
가짜 기름을 받기 위해서 이 교회 저 교회 또는 수도회를 돌아다니는 분들에게 깊은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교회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들의 공허한 마음을 채워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부분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는 성도들인데도 말이다. 그들은 매 주일 열심히 교회를 다니며, 헌신적으로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름이 없기 때문에 공허함을 채우지 못했다! 그래서 어떤 교회, 어떤 수도원, 어떤 성령세미나에 가면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간절한 마음으로 그곳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복음과 진리를 모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정으로 하느님을 찾으려고 하게 된다! 도무지 성령에 충만한 영적인 사역자들이 없다!
허전함과 공허함을 이적과 은사로 채우려는 것은 무의미한 시도이다. 하느님을 느껴보고 싶은 마음으로 기적을 구하다가 사탄의 덫에 걸려들게 된다. 감정과 느낌으로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결국 기적과 은사에 매달리게 되는데, 이것이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려고 하다가 미련한 처녀가 되는 과정을 단순화한 그림이다!
“어떤 교회에 가면 방언을 할 수 있다. 어떤 수도회가 개최하는 기도회에 가면 병고치고 치유 은사 받을 수 있다.”는 소문만 나면 그곳으로 몰려든다! 하느님의 말씀에는 관심도 가르침도 없다! 성령을 팔 수 있는 신부 또는 수도회라는 소문이 나기만하면 헌금과 기부금이 넘친다고 한다.
하느님의 말씀이 왜곡되고 말씀이 없어도, 그들의 겉모습에 미혹되어 전국에서 거의 광적으로 몰려온다고 한다. 왜냐하면 기름(성령)을 사러 오는 사람들은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천주교인들은 하느님 말씀에 허기져서 아무 기름이나 분별없이 쉽게 받을 수 있는 곳을 선호하며, 위험한 사탄의 유혹에 무방비 상태에 놓여 진다고 한다.
왜 그런 교회나 수도회를 선호할까? 죄와 세상을 버리지 않아도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소문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이런 교회를 좋아한다. 회개하지 않고 진리가 무엇인지 몰라도 성령의 기름을 나눠 준다는 소문이 나는 교회, 좁은 길을 걷지 않아도 구원을 보장해 주는 교회, 축복과 기적을 통해서 하느님을 느낄 수 있는 교회, 하느님의 지켜야 할 계명과 원칙은 가능한 적게 말하고, 사랑과 은총만을 강조하는 교회, 이런 이단적인 교회나 수도회들이야말로 마지막 시대 미련한 처녀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교회인 것이다.
몇 년 전 어느 수도회의 신유(치유) 은사 집회에 참석했던 분이 집회 중에 교통사고로 절던 다리를 고치게 되었다. 그 수도원 소식지는 물론 지방 신문에까지 그분에게 일어난 놀라운 기적이 소개되었다. 다리를 절던 분이 안수를 받고 똑바로 걷게 되었으니 세상 언론사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에 그 형제는 다시 다리를 절면서 교회에 나타났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다. 아무도 그분에게 “형제님, 하느님께 고침 받으셨는데, 왜 다리를 다시 절고 있습니까?” 라고 묻지 않았다. 그 교회 교인들 모두 그 형제의 다리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왜 그랬을까? 왜냐하면 그런 질문을 하는 자체가 하느님께 대한 불신이고 불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과 무지 때문에 사탄의 역사가 아무런 저항 없이 퍼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과거 내가 어렸을 때 기억에 의하면, 신유 은사 집회가 서울의 변두리나 가난한 달동네에서 주로 열렸다. 왜냐하면 경제적으로 절박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주로 은사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신유 은사 집회가 강남 부자 동네에서도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고 한다. 왜 그럴까? 가짜 기름을 나눠 주는 집회나 교회가 부자들, 의사, 변호사, 연예인, 교수와 같은 계층에도 깊이 파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지위와 학식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개인적으로 알아주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 자신이 하늘과 직접 연결되었다는 사실이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기쁘게 한다. 사람들의 이런 심리를 이용해서 사탄은 성령 파는 사람들을 대한민국의 상류층에게 보냈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런 수도회나 교회는 그들을 특권층으로 별도로 분리하여 대우하며, 필요시 그들을 최대한 이용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일반적인 현실이며, 그들의 수법은 극히 마귀적이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천주교 서점이나 기독교 서점마다 교수나 영화감독과 같은 사람들이 쓴 신유 은사 서적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고 한다. 지식인, 연예인, 예술인, 성공한 중소 상공인이 책을 썼기 때문에 독자들은 저자가 경험한 기름을 신뢰하게 된다. 신유(치유) 은사가 지식인과 상류층에 접목되면서, 과거에는 신유 은사집회를 “크리스천 무당들의 놀이”라고 비웃던 사람들까지 부정적 이미지를 버리고 받아들이고 있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말세에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교회 안에서 “큰 표적과 기사”를 행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마태24,24절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고 말한다. 왜 하느님께서 “택하신 자들도” 미혹 당하게 될까? 왜냐하면 사탄이 행하는 “큰 표적과 기사”가 성령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묵시18,2절은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라고 말한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때에 교회에서 기름 파는 자들을 향해서 이와 같이 경고했다. 교회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가 모이는 곳”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우리가 그릇에 받아야 할 기름은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이시다! 진짜 기름은 우리 속에서 마음과 생애를 변화시키는 성령이시다. 진짜 기름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 마음과 삶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준다. 그것이 진짜 기름인 것이다! 그러나 미련한 처녀들이 장터에 나가서 사는 기름은 겉에만 바를 수 있는 기름이다. 가짜 기름은 내면은 변화시키지 못하고 겉만 변화시킨다!
속마음은 세상을 사랑하고 욕심을 붙잡고 있는데, 겉으로는 방언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처럼 보이게 해 준다. 그것이 가짜 기름의 특징이다! 물론 가짜 기름에도 능력이 있다. 방언을 하는 것처럼 보이고, 병자들을 고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미혹당하는 것이다. 가짜 기름을 그릇에 담으면, 속은 돈을 사랑하고 정욕적인 반면, 겉은 경건의 모습을 갖게 된다.
그러나 가짜 기름에는 진리가 없고 순종이 없으며 변화와 열매가 없다! 가짜 기름은 순간적으로 환희와 뜨거움을 주기 때문에, 한번 그것에 취하면 그 맛을 포기하기 어렵게 된다. 가짜 기름을 받으면 진리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거짓과 허무함과 감정만 남게 된다. 지금 기름 파는 자들이 교회 안에서 가짜 기름을 나눠 주고 있는데, 그것을 사는 사람마다 미련한 처녀가 되어 참된 변화의 체험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미련한 처녀의 마지막 장면>
마태25,10-13절은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한다.
슬기로운 처녀는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는데, 미련한 처녀들은 문이 닫혀서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다. 왜 들어가지 못했을까? 미련한 처녀들은 여분의 기름이 없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했다. 혼인 잔칫집 주인이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12절).
미련한 처녀들은 오랫동안 신랑을 기다려 왔던 교인들이다. 그래서 “신랑이 온다.”는 외침이 들리자 곧 깨어 일어났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고 거절당했다. 예수님께서는 미련한 처녀들의 슬픈 운명을 맞이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셨다.
마태7,19-23절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진다.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말한다.
이 말씀에 나오는 사람들은 “나는 틀림없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자 노릇했고, 방언을 했으며, 귀신을 쫓아냈고, 많은 권능을 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지막 심판 날에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더욱더 큰 충격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원어로 보면 “나는 단 한 번도 너희를 안 적이 없다”는 뜻이다. 얼마나 두려운 말씀인가? 어떻게 평생 동안 예배드리고 성경을 가르치고 은사와 권능을 행했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단 한 번도 너를 안 적이 없다”고 말씀하실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그들을 거절하시는 이유를 들어 보시기 바란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진다.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태7,19,23). 예수님께서 그들을 알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아름다운 열매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미련한 처녀들에게 왜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지 않았을까? 그들의 마음과 삶이 불법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계명에 충성하는 실제적인 경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련한 처녀들은 입으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주님의 말씀과 계명에는 순종하지 않았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한14,15).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이사29,13).
죄는 기름이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이다. 성령이 결핍되었을 때 온갖 이상한 증세가 우리 마음과 생애 속에서 나타나게 된다. 여분의 기름이 없으면, 유혹과 시험이 올 때마다 죄에 끌려 다니는 무기력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습관적인 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시는가? 하느님의 말씀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고,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만, 순종할 수 없는가? 그렇다면 그릇에 기름이 떨어진 것이다!
지금 주님 앞에 나가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란다! 십자가 앞에 나가 “주여, 제 문제가 무엇입니까? 왜 저는 죄와 나쁜 기질을 버릴 수 없습니까? 붙잡고 있는 죄를 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하며 매달려야 한다!
알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