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 년 1 월 1일 4 시 42 분 (한국 시각 0시 42 분), 남태평양 키리바시의 밀레니엄섬 (캐롤라인 섬) 에 떠오른 태양을
그다지도 가슴 벅찬 감동으로 온 인류가 바라본 적이 있었는가?
하루 밤을 지나면 언제나 동일한 모습으로 떠오르는 해를 지구촌 전체가 가슴 설레며 기다린 것은 인류의 지난 천년 역사가 오만과 광기의 발자취라는 공동 인식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러기에 새로운 천년을 맞는 모든 인간들의 감회는 꼭 같았으리라 본다.
"이제 오만과 광기로 얼룩진 옛 시대는 가고 새 시대여 오라!" 어둠을 꿰차고 물밑에서 솟구치는 태양의 모습만큼 인류의 희망을 가시적으로 표징할 수 있는 상징물이 있을까?
그러기에 밤새 기차를 타고 도착한 정동진에서, 어둔 밤을 뚫고 오른 지리산 꼭대기에서 새 천년 새해를 맡는 이들의 함성을 TV 로 보고 들으면서
바로 나의 함성처럼 느껴지는 것은 새 천년의 새 햇빛이라는 "크로노스적" 시간의 위력 때문만은 분명하다.
2 크로노스의 중지
그러나 일출과 일몰에 의해 계량된 시간, 특별히 누구든지 팔에 차고 있는 손목 시계로 측정되는 시간에 거의 노예가 되다시피 하여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과연 두 밀레니엄의 교차로에 서서 태양을 바라보며 그저 희망을 가져본다는 것이 과연 큰 의미가 있는 것일까?
여기서 밀레니엄이 교차하는 순간 역시 다른 일상적인 날들이나 시간의 교차와 큰 의미가 없는 긴 시간의 흐름의 한 순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오만과 광기, 좌절과 분노, 전쟁과 인재의 지난 천년을 마감하고 새로운 천년을 인간을 위한 진정한 희망의 시간으로 만들려면,
일상적 시간과 현재 인간 공동체의 일상적 흐름을 잠시 중지시켜야 한다.
구약에는 이런 일상적 흐름을 중지시키는 희년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레 25:10을 보면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라 하더라도 한 50 년 정도 지나게 되면 전쟁과 기근, 그 밖의 사회-경제적 이유에서 어쩔 수 없이 땅도 팔게 되고,
마침내 몸도 노예가 된 이들이 속출하게 마련이었다.
이런 상태를 지속하게 되면 가난한 자들이 자유를 회복할 가능성은 정녕 사라지고,
부유한 자들 역시 탐욕의 노예가 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매 오십 년마다 자유를 선포하여 남의 종이 된 자는 누구나 해방되고, 또 자기의 원래 기업으로 되돌아갈 수가 있게 하신 것이다.
신체만 해방되어서는 다시 노예가 될 가능성이 있기에 생활 근거인 자기 기업까지 회복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이런 희년의 조치는 50 년간 지속된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상적 흐름을 정지시키고, 가나안 정복 시의 원 상태,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 안에서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삶으로 회복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3 카이로스의 기쁨
그러기에 희년은 진정한 "자유와 해방," "용서와 빚 탕감"의 시간이었다.
이렇게 지속적인 종됨과 빚짐의 "크로노스적" 흐름을 멈추고,
자유와 해방, 용서와 빚 탕감을 통해 원래의 온전한 상태로 되돌아가게 하는 시간을 가리켜 "카이로스적" 시간이라고 부른다.
크로노스 (chronos) 가 양으로 규정되는 계량적 시간이라면 카이로스 (kairos) 는 내용으로 규정되는 질적 시간이다.
인간이 내적으로 잠시 흐름이 정지된 듯한 느낌을 가지면서도 심각한 영향을 남기는 특정한 사건을 경험할 때 그 시간을 우리는 "카이로스" 라고 부른다.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민들을 염두에 두고 카이로스적 희년을 선포하였다. "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사 61:1-2)."
마음이 상한 자에게 치유를,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종된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는 희년의 소식이 바벨론 포로민들에게도 선포된 것이다.
이같은 희년의 은혜를 체험한 이들이었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느헤미야 시대에 실제로 희년법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 같다.
극도의 흉년으로 먹을 것이 없어서 집과 땅을 팔고, 자녀들이 남의 종으로 팔려가는 상황이 발생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느헤미야는 귀족과 지도자들을 꾸짖어 그들이 취한 것을 돌려보내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느 5장).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나사렛에서의 그의 첫 번째 설교 시에 위의 이사야서 본문을 인용하시면서,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고 선포하셨다는 점이다. (눅 4:21).
실제로 주님의 전 사역은 자유와 해방, 용서와 빚 탕감의 일, 즉 희년의 선포로 점철되어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주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우리 모두가 탕감 받은 자임을 깨닫고 희년의 정신으로 살아갈 것을 가르치셨다.
그러기에 희년을 선포하는 것은 인간의 끝없는 욕심과 탐욕에 제동을 걸고, 일상적인 현실의 흐름을 중단시키고
전적으로 우리의 삶의 방향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회개와 용서, 사랑과 긍휼의 정신에 맞추어 재설정하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지지 못한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끝없는 탐욕의 노예가 되기 쉽다. 그러기에 희년이 없다면 가진 자 역시 끝없는 욕망의 희생물이 되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여호와께서는 희년을 통해 가진 자들로 하여금 욕심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해방시키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희년은 회개의 기회요,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 이기도 한 것이다.
4 희년의 시작
그렇다고 한다면 교회가 말하는 새 천년은 크로노스의 천년이 아니라, 카이로스로서의 천년, 진정한 희년의 시작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에 우리는 19세기 후반부에 한국 교회가 보여온 일상적인 흐름에 희년을 선포하고 회개를 촉구해야 한다. 교회는 부유한 자들의 사욕을 충족시키는 거짓 복음의 선포를 중지하고, 교회 내의 가난한 자들이 진정한 자유와 빚 탕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여야 하며, 여성과 청소년의 참여가 이루어지는 민주화된 교회의 모습으로 바뀌어야 한다. 교회는 희년의 정신으로 사회-경제적 정의가 한반도에 이루어지도록 사회와 정부를 향해 외치는 예언자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경작할 땅을 잃은 농민들, 장애인들, 외국인 노동자들의 편에 서면서, 교인들에게 진정한 희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야 한다. 그 뿐 아니라, 한국 교회는 50년 가량 자유를 상실한 북한 동포에게 진정한 희년을 선포하고 실행에 옮길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자각하고 통일을 위한 구체적 계획을 세워야 한다.
또한 한국 교회는 그 동안 선교사 파송에 적극적인 열심을 보인 전통을 이어받아 개인 영혼 구원에 중점을 둔 선교 뿐 아니라 제 3 세계의 부채 탕감과 기아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스위스 연방 설립 700 주년이 되는 1991 년을 희년으로 선포하고 스위스에 빚을 진 나라들의 빚을 갚아주기 위하여 700,000,000 스위스 프랑을 모금하고 있는 스위스 교회는 한 본보기가 될 것이다. 한편 교단 차원에서는 진정한 희년의 정신이 무엇이며, 이 정신을 구체화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연구하는 위원회를 발족시키고, 그 구체적 실천 프로그램을 짜야 하며, 교단 차원에서 정기적으로 희년을 선포하는 일을 고려해야 한다. 이미 로마 카톨릭은 15 세기 말엽부터 매 25 년마다 "거룩한 해" 로 축하하기 시작하여, 2000 년을 특별히 거룩한 해, 즉 "대희년" 으로 기념하고 있다.
5 카이로스 밀레니엄을 꿈꾸며
새 천년을 맞이하며 종말론적 희망인 카이로스적 천년 왕국의 정신을 우리의 구체적인 윤리적 결단과 실천으로 구체화하지 않으면, 새 밀레니엄은 그저 크로노스적 밀레니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구약의 희년법은 현실적으로 보면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적 발상으로 보이기 쉽다. 그러나 역사적 소명감을 가지고 꿈을 현실화하려는 구체적 노력이 동반될 때, 실현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꿈들이 현실로 바뀜을 성경의 역사와 기독교 역사는 웅변으로 입증하고 있다. "내 백성을 가게 하라" 고 노래하며 흑인들과 길거리 투쟁에 나섰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꿈이 불과 얼마 안되어 현실로 나타난 것을 보기에, 크로노스적 새 천년의 시작점에 일상적 흐름을 중지시키며 한국 교회 안에 침투해 들어오는 카이로스적 천년 왕국의 도래를 꿈꾸는 것은 전혀 백일몽은 아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