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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초, 어느 토요일이었다. 그러니까 7월 10일이었다. 벌써 2달도 전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3권) 신간예약을 알리는 문구가 인터넷 서점에 올라온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라면, 언제 읽어도 읽게 될 책, 일단 주문한다. 그렇게 주문하고서 잊고 있었는데, 7월말 배송이 됐다. 사는 곳이 지방인지라, 당일배송이 되는 서울보다 하루 더 늦게 배송된다. 7월 29일이었다. 하필이면 책이 배송된 그날부터 기타등등의 일정이 생긴다. 하여 책장을 넘기는데 별 장애없는 책을 읽는데 생각만큼의 스피드를 낼 수 없었다. 8월 2일 저녁. 드디어 일독했다. 언제 다시 읽게 될지 모르지만, 일단 읽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이 나오면 어김없이 읽는(사는) 나를 두고 한 사람은 이제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것 아니냐며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한다는 커밍아웃을 하라고 한다. 농담처럼. 다른 사람에게서도 들었던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들이 책장에 다수 꽂힌 걸 두고, 그 책들을 간간히 꺼내 읽으면서 뭔가를 찾아내려는 나를 두고, 내가 한사코 부정하지만, 어쩌면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한다. 뭐,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인정하지 않지만, 사실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지도. 그러나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건 호감보다는 다른 이유에서 읽는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자주 읽는 이유란 게 순전히 자발적인 나의 재독이(었)다고 할 수 없지만,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수시로 읽었다. 그 이유 중 하나로는 비평고원 회원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나대로의 시선이 필요해서이다. 아마도 현대 일본문학을 처음으로 접한 작가가 무라카미 하루키였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첫인상이 강했다. 그렇다고 그를 즐겨 읽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읽었고, 다만 여기저기에서 그에 관한 소리들이 들렸다. 그러다가 내가 읽어봐도 될 정도의 시간이 생겨 읽는 중이다. 시간이 없으면, 언제고 읽지 않을 것이다.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읽고나서 하는 얘기는, 순전히,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고나서 내가 하는 이야기] 라는 가제에 타당한 글이 될테다. 아직도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서 뭐라고 마무리하지 못하고 있다. 읽는 가운데 여러가지를 발견하고 찾아냈다. 이번 <1Q84>를 통해서도 뭔가를 또 발견해냈다. 발견과 함께 기시감도 있다. 그건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다수 읽은 까닭에, 반복으로 어느새 발생된 기시감이기도 하다. 숨은 그림찾기를 하는 것처럼, 이유가 뭐지, 왜 나는 읽지 하면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고 있다. 그에 대한 하나의 설명을 그는 패러프레이즈(paraphrase: 글 속의 어구를 다른 말로 바꾸어서 알기 쉽게 풀이하는 것))로 말하고 있다.
마쓰이에 마사시 : 무라카미 씨의 소설은, 오늘 제 질문에도 그런 점이 없지 않았겠지만, 수수께끼처럼 읽힐 때가 아주 많습니다. 실은 그 이름에 이런 의미가 있었구나, 그 연호에 이런 의도가 있었구나, 실은 이런 연결이 감춰져 있었구나, 이런 식으로 '실은' 이라는 표현이 무라카미 씨 주위에는 범람합니다. 그것은 작품의 힘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수수께끼 풀기의 대상으로 읽히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무라카미 하루키 : 내 소설을 해독하는데, 거기에 수수께끼나 질문이 있다면, 그 수수께끼나 질문을 다른 수수께끼나 질문으로 바꾸어 패러프레이즈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게 읽는 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독자가 각자 나름대로 수수께끼를 다른 형식으로 바꿔놓는 것이지요. 그러나 간단한 일은 아닐 겁니다. "
어쩌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으면서 궁금해지는 수수께끼나 질문에 대한 답이 중요하지는 않을지 모르겠다. 그 과정으로서의 책읽기만이 남게 될지도. 하여 굳이 읽지 않아도 괜찮을 독서, 하여 상징적 의미가 없어도 괜찮은 독서가 되는지도.
아직은 무라카미 하루키 읽기를 마무리하지 않는다. 소설에 대한 관심이 없어진다면, 아마도 그땐 읽지 않겠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작법에 있어서 비법 중 하나를 생각하게 된다. 아니 그건 비법이랄 것도 없는지 모르겠다. 없을 수도 있는 세상을 믿어서 가능한 세상에 대한 통찰이라고 해야할까. <제스퍼 존스가 문제다>에서 제프리 루를 통해 들려지는 것처럼, "독자들이란 별 시답지 않은 글조차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 바로 독자여서 그런지 몰라도. 독자는 잘 믿는다. 그렇다고 해서 전적으로 믿는 건 아니다. <신을 옹호하다>에서 테리 이글턴이 문학 평론가 캐서린 갤러거의 입을 빌어 말하듯," 소설을 읽는 일은 내용에 대한 '전적인 믿음에 얽매이지 않는' 것으로서, 무엇보다도 상상력을 발휘하는 행위다. 소설이 허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읽는 데에는, 그 이야기를 믿는 동시에 믿지 않는 '모순적인 고지식함(ironic redulity)'이 상당 부분 관여한다"고 나 역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실제로 소설 속 그들이 있을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니, 이것 참, 아이러니하다. 그런 의식의 줄타기를 무라카미 하루키를 이미 알고서 믿어 가능한 세상을 그리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나 제임스 조이스나 마르셀 프루스트가 보이지 않는, 잡히지 않는 인간의 의식을 소설화한 공덕이 있다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세계는 믿어지는 이야기와 소설이란 하나의 장을 만들것만 같다. 황당하기 그지없어 오래전 동화처럼 생각될지 모르지만, 그건 동화가 아니다, 믿어달라는 말이 참 인상깊었다. 그에 대해서 언젠가 우연한 만남이라는 제목의 비평고원 카페 글에서 썼었다. <해변의 카프카> 서문에서 발췌한 글로부터 나온 생각이다.
“어쩐지 옛날 동화처럼 들리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어떤 의미로든 옛날이야기는 아니다.”( <해변의 카프카<(상), 19쪽>
“It sounds a little like a fairy tale. But it's no fairy tale, believe me. No matter what sort of spin you put on it."( 6p)
어떤 책에서 르 클레지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글을 쓴다는 것과 소통한다는 것, 그것은 아무것이나 그 어느 누구에게든 다 믿게 할 수 있는 행위이다. "
믿음과 소설세계라지만, 믿게 할 수 있 수 있는 행위라는 생각과 믿어 가능한 소설세계라는 차이가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말을 한다고 해서 이해된다고/믿는다고 생각하지 않는 (의심하는) 측면이 강하다면, 르 클레지오는 소통과 믿음의 겹쳐짐을 크게 생각하는 듯하다.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한 단어로부터 나온 소설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들의 얘기인 것처럼 생각되는 건, 믿어달라는 작가의 말 이전에, 이미 믿어지는 인간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슨 일에서건, 혹은 무슨 말에서건, 언제나 그 조각들을 통합하여 의미부여하도록 설계돼있는 것 같다. 서로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단어들이 하나의 문장 속에 들어가게 되면 의미부여 되는 문장이 되기도 한다. 그러한 인간의 성향에서 얘기가 탄생하지 않았을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다보면, 그것이 의식된다.
물론 그 소설세계는 마치 실제 세계처럼 현실감을 갖는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뭘까. 그건 없는 게 확연한걸 굳이 믿지 않겠다는 마음가짐 혹은 의식없이는, 그저 믿어지는/믿게되는 믿음의 본성이 인간의 의식에서 가능하다. 인간이 종교를 갖을 수 있는 근거도 거기에 있다. 신을 보아서, 신의 존재를 믿는 건 아니라고 본다. 신이 있다는 믿음에서 신은 있게 된다. 소설 또한 그러하다. 믿음으로 가능한 신앙의 세계와 문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뭔가를 믿는 그 소설(얘기)의 세계에는 그러한 유사성이 있다.
<1Q84> 1권과 2권이 내게 흥미를 유발했던 것은 종교와 혁명(운동권) 그리고 다양한 폭력이 내재된 세상에 대해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또 얼만큼 구체적으로 실감나게 그리게 될까에 대한 관심에서였다. 1권에서 종교 단체 선구가 발생하게 된 배경이 일본 전공투 세대가 세상과 단절하게 된 후 세상과 괴리된 집단으로서 자기들만의 세상을 꿈꾸게 된 시대흐름이 나온다. 그것이 1970년대와 무관하지 않았기에 그 시대 공기를 다소 느낄 수 있어 흥미로웠다면, 소설은 2권을 지나 3권에서 점차로 아오마메와 덴고와 우시카와라는 개인에게로 포커스가 집중된다. 우린 모두 외로워요, 라고. 그러면서 조금은 느슨하고 조금은 시시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독서 후 감상이다.
한겨례신문의 최재봉은 말한다. 잘 읽히는 소설인 <1Q84>는 책을 읽는 동안 옴진리교에서 비롯된 듯 보이는 신흥종교, <1984>와 <아큐정전>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제목, 그리고 리틀 피플의 정체로 인해 소설에 대한 궁금증이 커 독자에게 끝까지 내용에 대해 궁금하게 하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이 덴고와 아오마메의 순애보 들러리가 불과한 것 아니냐며, 어째 "많은 흥미롭고 중요한 이야기의 씨앗을 뿌려 놓기는 했지만 제대로 수확하지는 못했(최재봉)"다고 말하며, "날림 공사 같은 느낌"(가와무라 미나토 호세이대 교수, 문학평론가)도 준다고 말하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언급하며 총합소설을 쓰고자 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야심은 <해변의 카프카>에서 이미 언표됐다. 그 책을 처음 읽었던 2003년, 책을 읽고난 뒤 마음이 심란하였다. 지금 시대 작가가 만들 수 있는 새로운 것이란 없다는 걸 인정하는 작가의 작품을 읽는 가운데 즐기기까지 하는 독자가 짊어져야할 공범자로서의 꺼림칙함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 있었다.
<해변의 카프카>를 일고 난 뒤 쓴, 나의 옛글에서 끌어온다.
" 분명 읽는동안 흥미롭고 재미있는데 어디서 본 듯한 구조와 어디서 본듯한 내용, 어디서 느낀듯한 느낌이다. 분명 의도적으로 그가 자주 반복하며 말하는 기억과 재생의 삶에 대해 말하고자 했을지라도, 시도라기보다는 자신의 작품을 새로운 다른 작품에서 재사용한듯한 느낌이다. 왜 그래야 했을까? 왜 그러고 싶었을까? 의도적으로 그랬을까? 이런 질문을 하고 싶지만, 질문보다는 이렇게 재생시켜서 무엇을 말하고자 했나만을 살피려한다. 물론 이 작품안에 나오는 무수한 인용이 그의 작품과 그의 문구만은 아니다. <아라비안 나이트>, 그리스 비극인 <오이디프스 왕>, <일렉트라>, 카프카의 작품, 나쓰메 소세키의 <산시로>, <갱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괴테의 말, 아이들을 다른 세계로 이끌고 가는 동화인 피리부는 사나이에서 아버지는 고양이의 영혼으로 만든 피리를 통해 인간의 영혼을 유인하려고 한다. 그리고 하이든, 슈베르트, 베토벤 등의 고전음악가와 재즈 음악가들, 헤겔, 루소, 프로이트, 베르그송 등의 철학자들, T.S.엘리어트, 예이츠 등의 시인, 프랑수아 트뤼포 등 항상 그렇듯 기성의 창작과 사람을 이용하여 독자들도 미리 알고 있는 공통적인 교감부분을 자극하는 기법을 하루키는 소설속 하나의 장치로 잘 사용한다. 가장 재미있는 것은 주니치 드래곤즈의 호시노감독에서 나와 나카타를 도와주는 삶이 되는 호시노 상과 KFC의 간판인 커널 샌더스의 만남이다. 사람에서 사람이 나오고, 물체에서 사람이 나와 그들은 만나 일을 만들어 간다. "
2003년 <해변의 카프카>을 읽고나서 나는 위와 같이 감상을 적었다. 그 책에 대한 말을 할 때, 오랫동안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어온 사람들이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기까지인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에 반해 새롭게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게 된 사람들의 반응은 책에서 언급하는 내용들이 너무 어렵다, 알아야할 것이 많아 재미있다는 반응이었다. 그걸 보면서 사실 나는 놀랐다. 새로운 애독자의 탄생이라고 할까. 그후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들은 <상실의 시대>이후 다시 붐이 만들어지고 있다. 사실 그건 한국에서의 붐이라기보다는, 해외에서의 재평가에서 가능한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해변의 카프카>가 2005년 뉴욕 타임즈 올해의 책이 되고, 이곳저곳에서 상을 받게 되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주가는 계속 오르고 있다. 이런 시대적 흐름에서 독자는 살피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를 데려오고, 카프카를 데려오는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총합이란, 복잡한 실제성이 아니라, 사실성으로는 소설의 흥미가 될 수 없음을 받아들인 다음에 가능하다. 누가 등장하여도 그는 기존의 누구라기보다는 기존의 누구로부터 나온 이미지로 생각해야한다. <해변의 카프카>에 나오는 섹스 머신인 여대생 역시 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이미 이미지화된/시스템화된 기계로 보여지니 말이다. 매체에 등장하는 이름도 없이 회자되는 지하철녀, 명품녀, 몸짱녀/남, 짐승남 등등 한 사람의 내면보다는 말하기 좋게 이미지화된 칭호로 불리는 데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세상에 눈 닫고 사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기사를 볼 때처럼, 역시나 유쾌한 기분이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하는 총합이란 새로운 인물들에게 경험하게 할 거대 서사로서의 총체가 아니라, 인물들의 입을 통해서 말해지는/그려지는 세상이다. 융라는 이름, 셰익스피어라는 이름, 프루스트라는 이름, 마들렌이라는 이름 등, 무라카미 하루키는 단어(개념)로 이뤄진 한 사람의 세상으로부터 세계를 만든다. <1Q84>에 언급된 단어들, 과연 누가 만든 단어들인가. 그 단어들로부터 소설이 나왔다. 의미가 만들어진다. 누군가 만든 개념들에서 만들어진 세상이다. 그 세상은 분명 언어로서 만들어졌지만, 독자는 실재로서 받아들인다. 어느 누구에게는 소설 속 인물들이 영혼을 지닌 인물들로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천착하는 작법 하나는 이렇듯 소설은 언어들이 상호협력하여 만들어진 가짜 세계지만 그 세계는 실제 세계보다도 더 실감나는 세계라는 믿음이다. 상상이 현실을 압도한다는 믿음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불려나온 말들에 의해 창조된 사물에 의해 만들어진 사건이 실제 사건보다도 더 현실적이라는 데 있다. 그걸 혹자는 표현의 디테일에서 이유를 찾고 있다.
이번 책 <1Q84>(3권)이 나오는 과정이 조금 수선스러웠다. 3권을 기다리는 동색(同色)의 무라카미 하루키 팬들을 이용하는 듯, 4월 16일 전국 동시 자정 발매를 선택한 일본의 상술이 들려지더니, 한국에서는 발매도 되기 전, 그러니까 예약발매로 이미 베스트셀러에 오르게 되었다. 물론 나 역시 그 무리에 한 몫 했다. 그래서인지, 기사를 통해 무라카미 하루키 신간 소식이 유독 이슈가 된 것 같다. 그 중 내 귀에 유독 크게 크게 들리는 말이 있었다. 3권 읽기를 마친 지금, 새삼 상기되어 떠올려진다.
--3권을 손에 쥔 독자라면 여전히 4권 출간에 대한 궁금증은 계속될 것이다. 하루키 자신은 "지금 단계에서 말할 수 있는 건, 그 전에도 이야기가 있고 그 후에도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라고 말을 흐렸다. 이어 "그 이야기는 내 머릿속에 막연하게나마 수태돼 있다"며 "다시 말해 다음 권을 쓸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여지를 남겼다.--
역자 양윤옥과의 인터뷰 글이 실린 기사였다. 그 전에도 이야기가 있고, 그 후에도 이야기가 있다는 것, 그건 이와미야 게이코의 <사춘기를 둘러싼 모험>이라는 책을 읽고 난 뒤, 나의 짤막 소감이었다. [이야기를 살려라, 이야기를 들어라]는 제목으로 언젠가 썼던 글이다. http://cafe.daum.net/9876/ExU/9496
새삼 지난날의 소감과 조우하게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통해서 문학의 어떤 특성을 상기하기도 한다. 그건 바로, 독자 중 누군가 스스로 외톨이라고(외롭다고) 생각한다면, 당신만 그런 게 아니라, 세상은 어느 누구도 그렇다는 걸 인식시켜주는 의미를 지닌다. 무심한 당신 혹 누구를 외톨이로 만들고 있지는 않는지 라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작가에게 자기치유나 의미찾기가 가능하게 하는 글쓰기라면, 독자에게는 나만 그런 게 아니네 하는 자기위안이 되는 문학이다. 분명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재미와 자기위로 혹은 어루만져줌. 세상을 치유할 수 있는 문학이라기보다는 겨우 한 사람의 자기를 위안할 수 있는 문학. 좀더 생각해보면, 독자를 치유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겨우 작가 자신을 설득하는, 겨우 작가 자신이 설득되는 과정으로서의 문학. 누구도 이해하기 어려운 세상,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지 않겠어 하는 과정으로서의 문학. 창문 틈으로 새어들어오는 햇살로서의 문학을 미리 인정한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데서 나는 어쩌면 긴 시간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으면서도 무라카미 하루키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 같다. 보편이란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차원에서의 의문에서 나는 긴 시간 무라카미 하루키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단독자로서의 길밖에 걸을 수 없으면서, 일반적인 성향으로 문을 빼꼼 열어둔 보편성의 한 속성에 손을 든 건 아닌가 싶다. 공감이라는 것이 모두가 다 걸어서 가능한 공감이 아니라, 한 사람만이 걷는 길에 대한 모두의 눈돌림에서 가능한 공감으로부터, 문학이 가능하다는 걸 간과했었다. 특별하지만, 보편성을 잃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부정하건 인정하건, 그러면서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었던 것은 한 사람의 소리에 귀 기우릴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묵직한 현실이 아닌, 무라카미 하루키 개인에게 내면화된 세계를 읽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읽노라면, 누구나에게 통하는 말은 아니지만,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얘기)이지만, 바깥에 나가서 큰소리로 나눌 말은 못되지만, 듣고 있노라면, 그래, 그럴 듯해,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글쓰기 재능과 비법(?)에 대한 탐구심이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다보면, 오랫동안 끝없이 소설을 쓴 사람답게, 소설법의 재미가 읽혀진다. 소설로서 가능한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한다. 글을 읽지만 음악이 들리는 소설, 그림이 그려지는 소설도 가능하다. 기존의 소설을 인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다른 소설이 낭독되는 걸 받아적는 것도 가능하다. 작가 자신이 소설가인 까닭에 작법에 대한 방법의 탐구--소설쓰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도 가능하다. 이렇듯 소설은 그 무엇도 가능하다. 그야말로 무한지대. 현실이 상상력이란 이름으로밖에 부여할 수 없는 걸 소설은 가능하게 한다.
그의 글을 통해 다른 책들로 뻗어가는 길이 많았다. 아마도 그것도 역시나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재미였던 것 같다. 나 역시도 그러하니까.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니었다면, 《겐지 모노가타리 》에 대한 궁금증과 관심이 증폭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가라타니 고진에 의해서도 유인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읽어볼까 하다가 잊어버렸다. <해변의 카프카>에 나오는 생령에서, 다시금 일본 고대문학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하여 궁금증 정도는 풀어야겠다는 생각에 잠시 들추어보았다.
이렇듯 무라카미 하루키는 독자 스스로 읽게 될 책을 발굴하는(발굴해내는) 작가이다. 독자들이 할 일을 다 알아서 해주는 친절한 작가라고 할까. 그러나 친절한 무라카미 하루키는 상품을 구매하는 손님의 비위를 맞추는 점원이 손님이 무엇을 구매하러 온 것인지 아는 것과 달리, 저자는 다수의 독자가 원하는 걸 모른다. 아니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하여 독자가 원하는 걸 상대하는 점원의 친절을 작가에게는 바랄 수 없다. 책을 읽는 독자는 상품 구매자는 아니다. 작가인 그가 하는 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다. 하여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 등장하는 것들에 대해 궁금하면, 독자 스스로 발 품을 팔아야 한다. 그렇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다른 소설이나 다른 책으로 독자의 관심을 이동시킨다.
작가적 재능이야 개인 스스로 개발할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작법에 관한 비법은 객체가 알아채는 것. <1Q84>를 읽고나서야 겨우, 무라카미 하루키가 도스토예프스키를 빌어 말하는 총체성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소화할 수 있는 총체성이 아니라, 프레데릭 제임슨이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인 패스티쉬와 정신분열증이 내재된 총체성이라고 할까. 오만 가지 잡동사니가 섞여있는 세계, 융합되기에는 너무 성질이 강해서 각기 다른 성질들로 부유하는 세계. 그러한 세계처럼 인간의 내면이 분열된 세계가 담긴 총체성이 무라카미 하루키가 쓰는 소설에서의 총체성이라는 걸.
이번 책 <1Q84>에서 반복되는 말이지만, 논리로서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설명할 때 듣는 자나 스스로에게, 그저 믿어주세요,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히브리서 11장 1절)가 아니겠는가. 사실 그러한 믿음이야말로 관계를 맺는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는 통용되지 않던가. 이 소설에서도 그렇다.
"이 계단이 반드시 고속도로로 통한다고 진심으로 믿어야 한다. 믿는 거야, 그녀는 스스로를 타이른다. 그 뇌우의 밤, 리더가 죽기 전에 했던 말을 아오마메는 떠올린다. 노래가사다. 그녀는 지금도 그것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여기는 구경거리의 세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꾸며낸 것/ 하지만 네가 나를 믿어준다면/ 모두 다 진짜가 될 거야 "( 3권, 722-723쪽)
그렇다면 개인은 무엇을 믿을까, 자기 믿음이고, 자기 신념이다. 자신이 받아들였던 세상에 대한 믿음이다. 자신이 구조화된 세상에 대한 믿음이다. 그걸 믿음이라고 할 건 없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저변에는 분명 믿음이 내면화되어 있다. 의식하는 나를 나라고 가정한 믿음. 너를 너라고 믿는 믿음. 내 생각이 옳다는 믿음. 믿음이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생각한다해도 어김없이 돌아가서 믿게 되는 그 감각에 대한 믿음. 그 믿음이 없다면 실제 삶은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처럼 믿음은 이미 내재돼있다. 그러한 믿음생성습관으로인해, 의미는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쉽게 이해가능하지 않는 얘기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이미 오래전 소설보다 더한 세상이 돼버렸다. 아니 소설은 세상 이후 나온 무엇이다. 세상 이상이다. 그에 반해 세상은 소설과 무관하여 비약한다. 선후가 있다고 해서 무엇이 더 크고 더 적은지를 비교할 수는 없다. 소설에나 있을 법한, 영화에서 있을 법한 일들이 발생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사실 더한 무엇이라기보다는, 이제서야 알려지게 된 무엇이 아닐까 하는 측면이 있다. 인간이기에 자행되는 수많은 만행이 발생한 인류 역사이다. 선행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도, 진화하는 인류라고 쉽게 말할 수 없는 인류역사이다. 하루는 분명 일상인데, 멀리 멀리 인류의 역사를 상기해보면, 인간의 역사/이야기는 환타지에서나 가능한 것들의 총체이다. 규범도 없고, 경계도 없는 얘기들이 바로 인간의 얘기인지 모른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얘기하는 내용은 사실상 환타지라고 할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흥미로운 것은 아마도, 그것이 바로 알 수 없는 세상 아닌가 싶은 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 종반부 아오마메의 말처럼, 오른쪽 옆얼굴이 이쪽을 향하는 세상과 왼쪽 옆얼굴이 이쪽을 향하는 세상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아무런 의심없이 생각하는 주인공의 등장으로, 마법처럼, 구멍나지 않는 벽을 통해 다른 곳으로 빠져들어갔다가, 구멍도 없는 곳이 통로가 되어 빠져나오기도 하는 얘기가 실재한다고 믿게 된다. 어떤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어른들을 위한 환타지소설이라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계속해서 읽어가면서 맘에 들지 않는 구석이 바로 그것이다. 믿어지지 않으세요? 그럼 믿지 마세요, 라는 말이 들린다고 할까. 믿지 않는 당신이 꼭 믿어야 할 이유는 없어요, 라는 말이 들린다고 할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믿어주세요라고 나직하게 말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닌데도. 한편으로는 그 헛됨이 인식되어 읽는 데 가벼운 재미를 느끼고, 다른 한편으로는 헛됨 때문에 인정하는 데 인색하다고 할까.
세상에서 벌어진 사건이란 것이 인간적으로 상상가능한 일들만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어떻게 그런 일이, 어쩌다 그런 일이, 왜 그랬을까, 하고 놀라는 일들이 세상에는 분명 발생된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지, 가 아닌, 사람이라서 이런 일이 발생했지 라고 생각하게 되는 현실이니까. 도저히 수긍하기 힘든 일들이 실제로 사건화되는 현실이다. 이때 세상을 다루는 소설의 영역은 어디만큼일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무한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무한한 세상 속 얘기를 꽉 채워 말하는 게 아니라, 빈틈이 많이 남겨둔 채 글을 쓴다는 데서, 주관의 내가 아닌 객관의 세상사람들이 읽는 글인데도, 주관의 독자가 읽는 소설이라고만 말하고 있다. 하여 쓰다 만 얘기같은 감상이 나타날 수 있다. 물론 그 무한이 아무런 연관성 없는 무한이 아니라, 연관성 있는 무한이기에, 읽는 독자들 중 많은 이들이 흥미를 느끼는 것이다. 연관될 무엇은 세상 속 사건 사고들, 연관될 누군가는 고독한 젊은이들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주체로서의 고독한 누군가를 끌어들인다. 그들은 흔히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들이다.
<1Q84>3권에는 덴고, 아오마메, 우시카와가 그 누군가로서의 주체들(객체들)이다. 아오마메가 아는 덴고는 그녀가 10살이었을 때, 자신의 손을 꼭 잡았던 그 덴고이다. 20년이 흐른 지금 그가 어떤 사람이 됐을지도 모르는데, 막연히 그를 사랑한다. 사실 이런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다. 20년의 시간이 만나서 그들은 몸으로 느낀다.
"그들은 방을 어둡게 하고 옷을 벗고 침대에 들어가 서로를 안는다. 말해야 할 일들이 아주 많지만, 그건 날이 샌 다음에라도 괜찮다. 그보다는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있다. "( 735쪽)
그리고는 얘기한다.
"우리가 얼마나 고독했는지 아는 데는, 서로 이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던 거야."
그 둘을 보면서, 언제까지나 아오마메를 받쳐주는 덴고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사람간의 관계에서 이전과 이후가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나 소설 속 그들은 서로 믿는다. 그리고 덴고(아모마메)에 대한 사랑을 믿는다. 사랑이란 차별화될 수 없는 세계에서 그 한 사람이 존재해야만 하는 존재이유를 만들어주고, 한 사람의 존재를 의미있게 하는 것이라는 긍정의 효과가 이 작품에서도 어김없이 잘 드러난다. 허나 소설 밖 독자는 이런 믿음에 의한 사랑은 다른 곳에 돌릴 수 없는 소설 속 주인공에게나 가능하지, 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여 이건 소설이다, 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삶이 그처럼 사랑에 목맨다? 잘 수긍이 잘 안된다. 소설이니까, 라고 말한다면, 그렇지라고 대답할테지만.
그 믿기 어려운 덴고와 아오마메의 사랑얘기가 스토리 주된 흐름인데도, 내게 < 1Q84>는 사랑을 다룬 소설로 생각되지 않는다. 1권과 2권을 통해서는 사랑이나 판단의 모호함에서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면, 3권을 읽고 난 소감은, 사랑이라는 탈을 쓰고서 믿음으로 가능한/지탱되는 세상에 관해 생각하게 하는 소설로 생각된다. 각자 믿음으로 사는 세상에 관한 소설로. 누구는 사랑을 믿고, 누구는 종교단체를 믿고, 누구는 선구 세력을 믿고, 누구는 NHK를 믿고, 누구는 자기 몸을 믿는 세상.
추리소설을 즐겨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는 뭔가(범인)를 잡는 소설을 쓰지만, 범인이 누구인가, 혹은 누가 살인을 했는지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소설가가 범인이나 살인자를 잡는 형사가 아니라는 걸 아는 무라카미 하루키이다. 그의 말을 빌어서 <1Q84>를 말해보자면, <1Q84>라는 작품은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 것, 누가 누구랑 사랑하게 된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단지 한 사람을 살아있게 하는 어떤 동력(믿음)으로서 사랑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1, 2권에서 대필작가, 공기번데기, 아이스픽을 닮은 살인도구, 리틀 피플, 두개의 달, 사념의 세계, 고양이 마을, 코뮌 선구의 리더 , 체홉의 길랴크인, 원나이트 스탠드, 기이한 성행위, 동성애자 경호원, 버드나무집 노부인 등등으로 호기심을 자극하며 수다스럽게 자기(내면)들을 설명(설득)하던 무라카미 하루키가 <1Q84>에서는 눈에 띄게 말이 줄었다. 그에 대해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인터뷰에서 말하고 있다.
"만약 3권을 쓴다면, 이건 거의 움직임이 없는 이야기가 되리란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문학동네 가을호, 하루키, 하루키를 만나다, 인터뷰 글에서)
얘기가 1권과 2권에서 끝내도 괜찮을 그 부분에서 다시 시작했다면, 스토리는 그 둘이 만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한 나의 예상한 대로 가는데, 뭔가 전달하려는 포인트가 적어진 느낌이다. 이동할 때는 몰랐는데, 그들이 가만 있으니 남일 같다고 할까. 간결해졌으면서 단순해졌다. 어떤 자리를 찾아가는 기분이었다. 웬지 시시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1984년을 경유한 독자와 상관있을까 싶었더니, 독자와는 상관없네, 하는 마음이 들었달까. 소리 높여 할 말은 전작 1, 2권에서 이미 다 말해버린 듯하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강도로 글을 쓰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피로한 탓은 아닐까. 독자에게 친절한 게 아니라, 작가 자신에게 너무 시시콜콜한 건 아닐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남과 여가 열렬히 사랑하는 시간도 고작해야 2년이라고 하지 않던가. 4권이 나오게 될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1984년의 4월 부터 시작한 <1Q84>는 평행 우주처럼 난데없이 두개의 달이 떠 있는 저기 1Q84의 세계로 갔다가, 다시 3/2쯤 찬 혹은 이지러진 하나의 달이 뜬 1984년 12월로 돌아왔다. 물론 그들이 머문 곳이 1984인지, 1Q84인지는 잘 모른다. 호랑이 오른쪽 얼굴이 보이는 세계와 호랑이 왼쪽이 보이는 세계가 같이 간다는 생각은 소설이 실제 삶만큼이나 실재적일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1Q84든 1984든, 그것이 중요하지는 않다.
한 사람의 삶은 결국 한 사람의 삶? 설득할 사람도 결국 자신. 용서할 사람도 자신. 사랑할 사람도 자신. 새로운 길을 걷고자 한 발을 내디딜 사람도 자신이다. 그렇게 사람은 각기 자기의 노래를 부른다. 이때 중요한 건, 너무 크게 노래불러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는 않는지, 그것만 유의하면 될까. <1Q84> (3권)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한다.
"담배는 삼가 주시겠습니까, 우시카와 씨?"( 3권 ,9쪽)
이렇듯 그 공기를 원치 않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는 주지 않는 삶이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 속에 그리는 세상이다.
잃어버린 뒤 그것을 찾아 사실이라고 믿는 과거로 여행하는 듯한 여행이 있다. 아마도 <상실의 시대(노르웨이 숲)>이 그런 류의 소설일테다. 그런 다시는 <상실의 시대>와 같은 사실주의 작품을 쓰고 싶지는 않다고 한다.
"리얼리즘 장편은 이제 쓰고 싶지 않아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와 같은 리얼리즘 소설은 "나 자신의 내면을 드러낸다는 실감이 없어요." 라는 말을 하면서, 그 이상이 상상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다른 소설을 쓰고 싶은 듯하다. 사실의 무거움에서 벗어나고 싶어한 듯하다. <해변의 카프카>도 <1Q84>도 사실로서 기록되는 과거로 향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10살부터 얘기가 시작되지만, 그들이 향하는 곳은 현재 혹은 미래라고 할 수 있다. 아직 만나지 않은, 혹은 이젠 만난 지점. 과거 사실의 확인보다는, 말(예언/믿음)이란 살아있는 한 사람에게 어떤 힘으로 작용하는가에 대한 탐구여정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물들은 걷는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그러하다. 가 본 길을 걷는 게 아니라, 아직 가지 않는 길을.
첫댓글 <1Q84>에 대한 묵직한 글 잘 읽었습니다. 오래 전에 <상실의 시대>를 읽고 특이한 소재를 재미있게 풀어가는 작가라는 생각을 하고 넘어갔는데, 이제 다시 <1Q84>를 읽었고 <해변의 카프카>를 읽었습니다. 오래 전의 느낌이 되살아납니다. 아직 독후감을 쓸 단계는 아니지만, 폭주기관차 님이 지적한 '페스티쉬와 정신분열증이 내재된 총체화'라는 요약에 가까울 듯싶습니다. 그럼에도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힘(기법, 장치, 스토리텔링)이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그에 대한 분석이 중요하겠구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제가 계속해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건 사람들이 계속해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것과 함께, 어쩌면 제 안에 내재된 모순을을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을 통해서 의식하게 되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해요. 어느 인터뷰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일은 "세상과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이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더라고요. 거기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 말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뭔가가 있지 않을까... 하고 언젠가 생각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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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그야말로 주렁주렁 달린 무라카미 하루키 감상인 글이 돼버렸더군요. 언제 루쉰 P님의 생각도 한 번 들어봐요. 무관심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끝일텐데, 아직가지 무관심하지 않는 걸 보면, 또 읽게 될 것 같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