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학 10월 호 수필평)
수필에 반영된 사회적 현상
『월간문학』9월 호에 게재된 15편의 수필 중엔 삶의 직면한 사안, 사회적 현상을 사유하여 창작한 작품들이 몇 편 눈에 띈다.
사회적 현상을 정서적 순화로 형상화한 작품으론 이삼헌의 「길 잃은 괭이 갈매기」를 손꼽을 수 있다. 이 글은 중량천변에 날아든 괭이 갈매기를 두고 환경 파괴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도심지에 날아든 괭이갈매기는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도 피할 생각 없이 울기만 하고 한쪽 발은 찢겨있고 부리엔 기름이 묻혀 있으며 오른쪽 눈마저 감겨 있었다. 이런 갈매기의 상처는 환경오염의 파괴와도 연관성이 짙다. 이 글 내용대로 갈매기가 자신의 서식지를 가르쳐줘도 돌아갈 수 없는 형편이라면 갈매기의 비극적 상황으로 미뤄봐선 환경오염의 심각성이 극에 달했음을 예견할 수 있다. 이 글은 전체적으로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한편 하이테크 사회, 진보된 과학문명에 살아도 인간이 자연을 벗어나선 한 시도 살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괭이 갈매기의 슬픈 울음소리는 현대인에게 보내는 경고음이자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는 울음이란 내용은 환경오염의 위험성에 대한 응집력 높은 표현이었다.
필자의 어설픈 소견인지는 몰라도 수필의 문학성은 감동 그 자체이며 삶의 기록이므로 관찰과 체험한 사회 현상을 현실 직시의 사고와 언어로 직조해 탐미적 창작을 마쳤다면 이 또한 바람직한 작품이 아닐까 한다. 이진술의 「인간관계」가 이런 조건에 합당한 글이다. 이해타산에 얽혀 인간관계도 눈 저울질 하는 요즘 세태에 이 글은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게 하는 힘이 내재 돼 깊은 울림을 준다. 인간의 마음이야말로 행, 불행을 판가름하는 잣대로 작용하기에 마음 자락 간수 여부에 따라 인생 성패가 좌우됨을 이 글은 깨우치게 한다. 이에 예시한 미국 카네기 공대에서 사회적 성공을 거둔 1만 명을 대상으로 알아본 비결이 의외이다. 두뇌, 실력, 노력보다는 올바른 인간관계가 성공의 지름길이었다는 내용에선 원만한 인간관계의 가장 중요한 밑바탕은 겸양과 겸손을 갖춘 지혜로운 처세임을 일러주는 내용이어서 교훈적이다. k라는 만년 계장을 자기주장이 강하고 윗사람에게 안하무인의 언행을 저지르는 교만에 가득 찬 이기적 인간형으로 그린 게 그것이다. 한편 예의 없고 신의 없는 인간, 언행이 일치 하지 않는 인간, 은혜를 모르는 인간은 비인간적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라는 표현엔 절로 고개가 끄덕이게 한다.
이런 처세는 사회생활엔 부적격하다. 그러므로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조직사회에서 겪는 소외의 원인은 능력도 아닌 그릇된 처세임을 밝히고 있어 성찰의 기회를 갖게 하였다. 다만 아쉬움은 지나친 친절이다. 제목에서 이 글의 주제를 드러내 독자의 호기심 반감이 우려 되나 글의 주제, 제제 중심으로 구상한 탄탄한 결속력의 글은 작가의 역량을 충분히 엿볼 수 있게 했다. 이즈막 급증하는 자살자의 원인인 우울증을 다룬 달 산(본명: 이상도)의 「우울증에 관하여」도 이런 친절을 베풀었다. 하지만 이글 또한 스토리의 주제가 선명하게 표출 되도록 구체적 표현에 심혈을 기울인 점이 시선을 끌고 있다. 우울증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찾아오는 병이긴 하나 자살자 대부분이 우울증 환자라는 점으로 미뤄볼 때 마음의 감기라고 가볍게 간과할 병만은 아니니 꼭 병원 치료를 받으라고 권유한다. 무엇보다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면 아까운 목숨을 우울증에 빼앗기지 않는다며 생명경시 풍조에도 경종을 울렸다. 우울증의 병소(病巢)가 집착, 스트레스에 기인한다는 내용에선 이 병 역시 인간의 욕심이 부른 병임을 알아챌 수 있게 한다.
이렇듯 인생사엔 크고 작건 간에 항상 어느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후기 산업 사회 이후 사회는 더욱 복잡해져 세상은 온갖 범죄와 사건으로 얼룩지고 있는 것은 물론 삶의 가치관도 많이 변했다. 이런 요인들이 삶을 위협하여 사회적 불안을 야기 시킬수록 그 곁으로 문학이 한걸음 밀착해야 한다. 세태가 빚는 여러 사회 현상 앞에 문학이 독자와 함께 숨을 고르고 방안 모색에 관심을 기울일 때 언어 예술로써 의미의 재발견이 이뤄지기도 한다. 이는 우리들에게 감동과 비전을 안겨주는 문학의 특성에 연유한 천착이기도 하다. 김학근의 「신문 배달부」또한 이 글을 통해 우리의 직업관에 대해 고뇌 하고 방안을 모색하게 이끌고 있어 인상 깊다. 예로부터 직업엔 귀천이 없다고 했으나 분명 존재했었다. 아직도 먹물 든 사람을 우대하는 풍조는 여전히 잔존해 있는 실정이다. 이런 세태에 김학근의 「신문 배달부」는 40년 동안 신문 돌리는 일을 천직으로 삼은 어느 60대 남성의 투철한 직업의식에 착상하여 현대의 직업의식을 재해석한 내용이어서 독자의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오로지 수십 년 간 신문 배달부 길만을 우직하게 고집한 남성을 바라보며 이젠 우리의 직업의식도 바뀌어야 한다는 표현이 그것이다. 요즘처럼 젊은이들이 극심한 취업난에 부딪칠 때 그들도 전통적인 관존민비 사상에서 벗어나 직업관도 선진국의 세계 조류에 맞춰야 한다는 내용은 ‘그 세대 작가가 쓴 작품은 시대성을 모면할 수 없다’라는「전통론」에서 밝힌 엘리어트의 언술과 일치하여 시대에 걸맞는 의미 부여이다. 이 수복의 「그리운 그 시절」은 환상적 구성으로 첫머리를 시작한 글답게 하모니카를 연주하다말고 30여 년 전 중학교 교사 시절 제자들과의 아름다운 추억을 그리는 장면이 단박에 독자의 마음을 잡아맸다. 이 글 속에선 겨울철 화롯불 같은 따스한 온기가 가슴으로 전해지는 듯하다. 별다른 재주를 부리지도 않은 인생 수필이련만 체험에서 길어 올린 소박한 문체의 사유가 독자로 하여금 감동으로 젖어들게 한다.
푸른 시절 시골 중학교에서 교사로서 후학 양성에 열정을 불태우던 초임지의 추억이지만 숨은 주제는 그리움이었다. 일일이 제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 제자들과의 옛 추억에 잠기는 모습에서 그리움의 실체인 스승의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요즘 교권 상실로 선생님들이 설자릴 잃고 있는 세태에 젊은 날 교사 시절 제자들과의 추억을 반추하는 내용에선 행복이 한껏 묻어났다.
사회 문제성이 반영된 작품들에 눈길을 던지느라 미처 다루지 못한 글들이 있다.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이루지 못한 애틋한 사랑을 그린 전미경의 「의상과 선묘의 다시 필사랑」과 이미 고인이 된 친구와의 지난날 진정한 우정을 꽃피웠던 이야기인 이진이의「아름다운 만남」등의 감동적인 글들을 지면상 언급 못함을 못내 아쉬움으로 남긴다.
(월간 문학 11월 호 수필 평론)
수필의 힘을 얻다
수필 작품의 품평이 객관성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은 수필장르의 정의 설정이 그만큼 난해하다는 의미와 통한다.
수필은 개인 경험의 실화요, 주장의 자유로운 표현이다. 수필 장르의 일반적 정의다. 금월 수필 평의 잣대 또한 이를 바탕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전기(傳記) 형식의 수필인 경우는 실존인물의 일반적 지명도 여하에 따라 소재의 적, 불 합이 평가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탁의『미당 선생과 목탁과 순덕이』의 경우는 성공한 작품이다. 미당은 지명도가 아주 높은 인물이다. 제자로서의 미당에 대한 인간적 교감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하여 작가와 미당의 인간적 체취를 맛볼 수 있다. 특히 작품 속에 보이는 친일행적에 대한 미당의 변은 그간의 친일 행적에 대한 오해를 다소 풀었다는 점에서 시사적이기도 하다. ‘일제강점 기간이 100년 정도 지속될 것으로 생각했다. 살아남아야 항일 운동도 벌일 것 아니냐’ 라는 답변에선 당시 그가 지향했던 국가관과 인간의 생존본능에 대한 고뇌가 담겨 있어 숙연해 지기도 한다. 전기 체 형식의 수필인 경우 자칫 주인공 이야기만 담아 놓아 전기문으로 변신하는 경우를 본다. 수필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작가 자신이어야 한다. 미당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기는 하나, 작자의 나상이 이를 감싸고 있어 문제될 게 없다. 미당에 대한 제자로서의 깊은 존경심이 보일 뿐, 아첨하거나 우상화한 내용도 없어 작품의 순수성을 잃지 않았다. 특히 순덕이의 소임이 눈길을 끈다. 미당의 목탁 소리에 따라 그녀의 할 일에 명분이 생긴다. 목탁을 2회 치면 술상이 차려진다는 대목에선 그의 소박한 풍류마저 느낄 수 있었다.
문학 작품은 참신성이 생명이다. 참신성은 독자를 감동시키는 힘을 가진다. 흔히들 희망, 기쁨, 희열, 환희 등을 기운이라고 여긴다. 문학 작품은 그런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문학작품은 슬픔의 이야기도 기쁨으로 전이시키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 명작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 의미를 달아 황 빈의「미망」을 읽었다.「미망」은 병마에 남편을 빼앗긴 아내의 슬픔과 회한을 서간체 형식을 빌어 쓴 작품으로, 마치 사임당 신 씨의 초충화(草蟲畵)를 연상하며 읽을 수 있었다. 이렇듯 하나의 문학작품은 애간장을 도려내는 별리의 슬픔도 인간의 마음을 잔잔한 호수로 바꿔 놓는 마술의 힘을 가지고 있다. 하늘같은 남편을 잃은 여인의 슬픔을 어찌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한과 설움을 쌓아 두고 사는 것이 인생이다. 가까이 있었기에 느끼지 못한 배우자의 소중함을 다시 환기시켜 준다는 의미에서도 수작이오, 문학의 역할을 다한 글이라고 본다.
「미망」과 성격을 달리하는 작품으로 오우현의「고립무원(孤立無援)의 슬픈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작금의 가족형태는 유행처럼 독거시대로 변하고 있다. 문명사회의 병폐다. 자기중심적 삶에 길들여진 탓에 부모 공경은 남의 일로 여긴다. 일침을 가하는「고립무원-」은 교육적 가치를 담고 있어 호감이 간다. 독거노인의 독거사는 사회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고령화 사회로 변모하는 현실 앞에 속수무책으로 내몰린 독거노인들의 생활고와 견디기 어려운 지병과의 싸움, 그리고 외로움을 소박하게 담아낸 오우현의 글은 인생의 삶을 반추하게 한다. 죽음이 인생의 가장 큰 적이라면 고독 또한 이에 버금간다는 작가 오우현은 9개월 째 독거 생활을 하는 처지다. 직접경험을 가감 없이 그려낸 작품이기에 공감이 간다. 무엇보다 노인에 대한 국가의 복지정책, 자식들의 무관심이 노인들의 외로움과 고독, 죽음을 가중 시키고 있다며, 노인 홀대의 현실을 꼬집고 있어 특히 정치하는 사람들, 부모를 멀리하는 사람들은 가슴에 손을 올려 보라고 권하고 싶다.
「고립무원-」의 아류작으로 서동애의「운조루의 쌀뒤주」를 들 수 있다.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영조 때 삼수부사를 지낸 유이주가 세운 집으로 ‘구름 속에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라고 해서 이름 붙인 ‘운조루’가 있다. 그 집의 곳간에 설치된 독특한 쌀뒤주 이야기이다. 이 쌀뒤주는 쌀이 두 가마 반 들어가는 용량의 크기다. 눈이 가는 것은 주인의 인정과 뒤주 제작의 과학성이다. 퍼 가도 퍼 가도 뒤주의 쌀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뒤주 놓인 위치가 곳간채에 배치되어 있어 쌀을 퍼 가는 이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타인능해(他人能解)’라 하여 뒤주 아랫부분에 가로 5cm, 세로 10 cm 정도의 구멍 마개를 만들어 아무나 옆으로 돌려 필요한 만큼 쌀을 가져갈 수 있게 제작을 하였다는 성의가 그것이다. 욕심의 보따리를 채우고도 모자라 남의 밥그릇까지 넘보는 졸부들에게 유이주의 선행은 귀감이 되고도 남는다. 좋은 소재를 무리 없이 소화시켰기에 부담 없이 읽혀지는 작품이다.
명화를 감상할 때, 그 화폭에 담긴 화가의 예술혼과 표현의 아름다움에 도취 되듯, 우리는 분명 한 편의 수필 속에서 삶의 기운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때론 예술의 힘이 과학을 지배하는 경우를 경험한다.
박동선의 글「세월」속엔 인간의 끈끈한 땀방울이 맺혀 있다. 젊은 날 장바닥에 앉아서 메리야스를 팔았고, 동네 이장을 맡아 마을 일도 챙겼다. 별다른 직장 없이 무위도식하며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낳았다. 그런 이야기를 쓴 글이「세월」이다. 수필은 나를 헐어내어 남에게 보이는 글이다. 그래서 수필을 고백의 글이라고도 한다. 평자는 박동선의 고백을 용기라고 표현하고 싶다. 어두웠던 과거를 여과 없이 펼쳐냈기 때문이다.
수세식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 변화된 세상과 맞닥뜨리며, 자신을 개혁해야겠다는 결심의 표현에서 평자는 신선한 감동을 받았다. 도전 정신과 삶의 의지가 바탕이 되어 국영 방송국 프로듀서의 자리까지 오른 일은 분명 인생 역전이 아닐 수 없다.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 귀감이 될 만하다.
원고 분량에 제한이 있기에 몇 편만 거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