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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시 금마면 미륵산(430m) 남쪽 기슭의 미륵사지(彌勒寺祉; 사적 제150호)는 용화산(龍華山; 430m) 부근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마를 캐며 살던 서동(薯童)과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와의 국경을 넘은 러브스토리로 잘 알려진 고찰이다.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에서 후에 백제 30대 무왕이 된 서동이 고향인 용화산의 사자사(獅子寺)를 찾아갈 때 연못에서 미륵 삼존불이 나타나 영접하는 것에 감동하여 사자사의 지명법사에게 명하여 이곳에 절을 짓도록 했는데, 약40년이 걸렸다.
미륵사를 완공한 후 용화산은 미륵산으로 불렀는데, 산세가 사자처럼 생겼다고 해서 사자봉이라고도 했다. 사자봉에는 마한의 도읍지로 알려진 기준성(箕準城)터가 있으며, 현재 약1822m가량 성터가 남아있다.
1993년 발굴조사에서 사자사(師子寺)라는 명문 기와가 발견되어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2년 중국에서 불교가 전래한 이후 삼국은 처음에는 목탑을 세우다가 삼국 최초로 백제가 석탑을 세운 곳이 미륵사였다. 삼국사기는 미륵사의 3 금당 앞에 3개의 탑을 세웠으며(殿塔廊廡 各三所創之), ‘사철 꽃과 나무가 수려해서 임금이 자주 배를 타고 들러서 아름다움을 감상하던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언제부턴가 폐사되어 민가가 들어서고 농경지로 변했으며 석재들은 인근 민가의 담장이나 주춧돌로 사용되었다.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는 것은 일제강점기 때 무너진 석탑을 시멘트로 발라놓은 모습이었으나, 1990년부터 대대적인 발굴조사에 나서서 1998년 3금당과 3개의 탑지를 찾아내고, 동·서탑은 석탑이고 가운데 탑은 목탑인 것도 밝혀냈다.
미륵사지를 찾아가는 길은 호남고속도로 익산나들목을 빠져나와 722번 지방도를 혹은 서해안고속도로 동군산나들목을 빠져나온 뒤 718번 지방도를 달리면, 금마면 입구에서 미륵사 이정표가 보이고, 강경역에서 익산 방향으로 계백로를 약 22㎞에 미륵사지 안내판이 보인다.
대중교통은 호남선 익산역이나 금마에서 41번, 60번 시내버스를 타고 미륵사지 입구에서 내리면 되는데, 주차비와 입장료가 모두 무료다.
유물전시관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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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내에 들어서면 정문에서 직선으로 유물전시관이 있는데, 1997년 개관한 유물전시관에는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금동향로(보물 제1753호)를 비롯하여 치미, 금동풍탁, 사리장엄구 등 1만 9000여점을 각종 자료화면과 함께 전시하고 있다. 미륵사는 동서 172m, 남북 148m으로 약2만 5000여 평에 이르는 국내 최대의 사찰로 밝혀졌으며, 무너진 석탑에 시멘트를 발라놓은 14.2m 높이만으로도 국내 최고(最古) 최대의 석탑으로 알려졌는데(국보 제11호), 사찰의 큰 행사 때마다 깃발을 걸었던 당간은 대개 사찰마다 1개인데도 2개나 둔 것에서 당시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준다(보물 제236호).
그런데, 미륵사지를 돌아보면서 혹시라도 무왕은 적국인 신라가 진흥왕 14년(553)부터 진평왕 6년(584)까지 17년 동안 약 2만평의 황룡사와 66.7m로 추정되는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운 것을 보고,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뒤 수도를 사비성에서 고향으로 옮기고 자신을 미륵불의 환생으로 미화하기 위하여 거대한 미륵사와 석탑을 세운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2014.09.14. 경주 황룡사지 참조).
복원된 동탑(우측)과 서탑 복원을 위한 임시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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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 원년(600)에 착공하여 41년 만에 완공한 동양 최대의 사찰 미륵사 창건 전후를 살펴보면, 26대 성왕(523~554)은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을 되찾으려고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충북 옥천)전투에서 시체도 찾지 못하는 죽음을 당했고, 그 뒤를 이은 위덕왕(525~598)은 중국 남북조와 외교관계를 여는 등 국가체제를 재정비하다가 14년 만에 죽자 동생 혜왕이 즉위했다. 그러나 혜왕(598~599)도 즉위한 이듬해에 죽자 그의 아들 법왕(599~600)이 즉위하여 불교중흥을 위해 노력했지만, 2년 만에 죽었다.
이렇게 왕권이 불안정한 시기에 위덕왕이나 혜왕의 후손이 아닌 무왕이 즉위한 것은 혹시 익산 지역으로 밀려났던 왕족으로서 부를 축적한 서동이 쿠데타로 즉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결과 자신의 고향으로 천도를 계획하고, 또 미륵사를 창건함으로서 자신을 미륵불의 화신으로 강조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미륵사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도 논란되는 점이 하나둘이 아니다.
먼저, 미륵사 석탑의 건립시기에 관한 것인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학자들은 미륵사 석탑과 비슷한 양식인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을 모두 고려시대의 탑이라고 했지만, 해방 이후 우리 학자들의 꾸준한 연구결과 두 탑 모두 백제시대의 탑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특히 2009년 1월 미륵사 서쪽 석탑의 해체 복원과정에서 사리장엄과 함께 발견된 금판 봉안기의 기록으로서 백제 무왕 때 창건한 석탑임이 재확인됨으로서 이런 논란은 앞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서탑에서 출토된 사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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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삼국유사에서는 무왕과 선화공주가 미륵사를 창건했다고 하지만, 서탑의 해체 복원 중 심초석에서 사리장엄과 함께 발견된 금판 봉안기에서 삼국유사의 기록과 달리 좌평(佐平) 사택의 딸인 왕비의 발원으로 창건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자 삼국유사의 기록이 틀렸다는 설에서부터 삼국유사에 나오는 600년은 미륵사를 짓기 시작한 해이고, 금판 봉안기에 나오는 ‘기해년(639)은 절과 석탑의 완공시기이어서 착공 후 39년가량 지나는 동안 선화공주가 죽고 사택 왕비와 혼인한 것이라는 해석 등 이론이 분분하지만, 현재로서는 봉안기의 기록을 부인할 근거는 없다.
당간지주 |
셋째, 미륵사 석탑은 삼국통일 후인 성덕왕 29년(730) 지진으로 절반쯤 무너졌다고 하는데, 미륵사탑이 본래 7층 석탑이었는지 혹은 9층 석탑이었는지에 관해서 기록이 없다.
최근 현대과학기술로 탑의 모습을 스캔하여 3D로 복원한 결과 9층탑이라는 분석이 나와서 1993년에 동탑을 복원할 때 9층 석탑(27.67m)으로 지었지만, 아직도 7층탑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무왕이 신라의 황룡사와 황룡사 9층 목탑을 모방하여 그보다 훌륭한 절과 탑을 지으려고 했다고 생각한다면, 9층탑이 옳다고 생각한다.
넷째, 대개 사찰은 1금당 1탑이다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1금당 2탑이 유행되었지만, 미륵사의 3금당 3탑 양식은 동양 어디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다. 학자들은 미륵사라는 절 이름에 근거하여 56억년 뒤 미륵이 세상에 내려와서 '3회' 설법을 하면 272억 명이 교화된다는 불법을 강조하며 3금당 3탑의 근거로 삼고 있지만, 아직 설명이 미흡하다.
마지막으로 미륵사가 언제 어떻게 폐사되었는지에 관해서도 기록이 없다.
고려 4대 광종 때 최초의 국사였던 혜거국사 탄문(惠居國師 坦文; 900∼975)의 비문에서 후백제 견훤 31년(922) 미륵사탑을 개탑하였다는 기록으로 성덕왕 때 지진으로 무너진 미륵사탑을 이때 복원한 것으로 추정하고, 또 조선 초 동국여지승람에서 "석탑이 극대하여 그 높이가 수십 척으로 동방석탑 중 제일이다."고 하여 조선 초까지 미륵사탑이 온전하게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영조 때 문인 강후진(康侯晋; 1685~1756)의 와유록(臥遊錄)은 "밭둑 사이에 7층 석탑이 있는데, 나이 지긋한 촌로가 탑에 올라가 비스듬히 누운 채 곰방대를 뻐끔뻐끔 물고 있더라. 탑은 100년 전 벼락으로 절반이 허물어졌고, … 밭둑 사이에 초석과 석조가 널려있는데, 대단히 높고 크며… 세상에서 이르기를 동방 석탑 중 제일이란 말이 거짓이 아니다."고 하여 이때 사찰은 이미 폐허가 되고 석탑도 무너진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1400년 후 못난 후손들은 조상의 위대한 불사를 대리석으로 현대화 작업을 하고 있어서 안타깝기만 하다.
서탑 복원동 주변에 쌓아둔 금당지 석재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