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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재경 울산제일중 동문회 원문보기 글쓴이: 유대지
유자상감은 요즘 나라가 건국 이래 왜 이모양 이꼴이 되었는지 이해가 안가서 밤잠을 설치고 있었다. 그래서 중전도, 궁녀도 멀리한 채 은둔의 시간을 가지면서 골똘하게 현정국에 대하여 연구에 연구를 매진하고 있었다.
(참으로 괴이한 일인지고? 어찌타가 이나라가 뒤죽박죽이 되어가는고? 실타래가 엉켜서 어디서 먼저 풀어야 할지도 모를 지경까지 자꾸만 굴러가는 기분이니 ,,참네..이거 원..)
상감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풀수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면서 답답증만 자꾸 생기는것같았다.
그때였다.
내관1: 전하! 너무 생각하지 마시옵소서. 옥체를 부디 보존하시고 오늘은 회의에 참석하시는건가요?
유자상감: (..........)
내관1: 전하!!
유자상감: 알겠도다.오늘회의에 짐이 나갈것이야. 암 나가야지.나가서 대감들의 의견도 듣는게 좋을것같구나
그래서 무거운발길을 옮기고있었다.기상청 일기예보도 맞지 않는날이 훨씬 많고 모두가 이상해지는기분이었다.
내관2: 자!모두들! 조용하셔요! 머가 좋다고들 흰잇빨을 드러내나요! 대감들! 요즘 정국 푸는 사람있으면 상감에게 곱게 추천해 줄건데..히히 유사이래,이런일 첨이죠? 히히 머리 좀 굴러봐요. 기회는 두 번 있는게 아니니깐. 히히
대감들: (저 죽일 내관놈까지! 어휴~ 망조야 망조!)
내관2: 자아! 대감들 좀 조용히 하시고요.오늘안건은 골치 아픈 현안은 좀뒤로 하고 6.25유자녀 한사람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날로 정했소이다.
바로 유아무개라는 사람 이야기인데 1994년.무슨해 인줄 아시나요? 히 히 모르죠? 거쵸?
대감들: (..........)
유자상감: 하하 오늘 우습구나! 하하 오늘 골치 아플줄 알았던 어전회의가 이렇게, 하하 어서 계속해보거라..하.하
내관1: 바로 신라와 고구려가 핵으로 한판 싸움직전까지 간 그날이아닌가요?.히히 백성들이 국시를 사서 토굴속으로 도망치고 난리가 날뻔했던 그날~~
유자상감: 하하 맞아 그날 고구려에서 신라를 향해 핵으로 쳐내려간다고 한 그날이지.암 하마터면 큰일이 날번했던 민족의 위기였지..
대대감: 전하 그날이후 고구려에서는 꾸준히 병기를 개발하였으니..참으로 무서운 날이었다고 생각드옵니다.
한 대감: 그런데, 아까 6.25유자녀 한사람이 그후에 이런 일 재발방지를위해,자비로,,14년째 38길을 말로 달리고,,있다고합니다.
유자상감: 그래요? 거게 정말이야구요?..말로달리고? 그리고 또요?
민대감: 그렇사옵니다. 말로, 가마로도, 여러가지로 방법으로 ,그렇게,,한다고하옵니다,
국대감: 정말 대단한 유자녀이옵니다, 이런 일은 누가 시켜서도 할수 없는줄로 아뢰오..
전대감: 그리고 이유자녀의 가족사도 처절하고요, 전란으로 가문이 무너지고 ,,
몰대감: (갑자기큰목소리로~~)전란은 우리를 다 죽이는거 아닙니까? 궁녀들도 욕을 당하고 그리고 도망가고, 황족녀들도 강화에서, 남산산성에서 욕을 당하고..허참
유자상감: (버럭화를 내면서)전대감! 듣자듣자하니 정말 심한거 아니요? 여봐라!! 저자를 하 옥시켜라!! 어디 왕실을 욕보이고 망말을 함부로 하다니!!그리고 저자의 가족을 전부 관노로 하옥시킬것이야..
군대감: 전하! 고정하옵소서! 그래도 이 나라 사직을 위해서,,전대감의 공이..지대하옵니다,, 전하! 통촉하옵소서..
경대감: 아무튼 이번기회에 왕실을 우습게 보는 무리를 처단하는것도 옳다고 소인은 보옵니다,, 암요 .군기가 안서요!! 말발이 않먹히니,,난세로다~~
유대감: 무엇하느냐? 이죄인을 하옥시키고,,어전 분위기를 새롭게 할것이야,어서 내관은 무얼하는고?
그리하여 그날 전대감 가문은 멸문이 되고 말았다고 유사는 전해 내려온다.
유자상감: 그래 아까 유아무게 6.25유자녀 이야기 말인데 정말 표상이네. 그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을것이야
족대감: 전하! 그렇사옵니다. 유사이래 이런 국가적인 대사를 혼자서 그 업적을 이룬 백성 은 없는 줄로 아뢰옵니다. 대단하옵니다. 그 14년 세월동안 백성의 고통이 서린 38 길을 달리다니요?
유자상감: 일개 유자녀도 그렇게 의지를 가지고 좋은 일을 하거늘 어찌하여 대감이라는 작자가 함부로 입을 마음대로 놀리고 왕실을 욕되는 말을 하다니 짐이 용서치 못할것이야!! 그리고 이참에 대신들의 등록된 노비 가운데 억울한 여자노비가 있는지 조사할것이요!
곡간에는 쌀이 넘치고, 방안 설합에는 금은보화가 구석구석 돌아 단니고, 자녀들은 상평통보 보따리들고 색시집을 드나들고,아낙들은 백두산, 한라산 계곡정보를 몰래 입수해서 투기하는 자들이 이속에서도 있소이다!! 내가 다알고 있소이다.
그러니 나라가 지금 엉망 아니요? 화물연대파업니 촛불시위, 고유가 무대책..어휴~~
내관1:( 이제 당해봐라, 대감들아. 전란때마다 이쁜 여자노비 챙기는자들~~히히 여자노비조사위원회가 발족해서 조사하면 다나오징, 히히 떡고물 떨어지나 봐야징 아암~~ 히히)
회대감: 전하! 그러하오면 이제 유아무개 유자녀에 대한 정보를 보고하겠사옵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에게 보내는 편지
- 한국전쟁발발 58년맞아, 6.25유복자가 38선을 달리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 귀하
안녕하십니까?
조국의 계절은 이제 성하의 문턱에 와 있습니다. 그곳 평양도 요즘 인민들이 여름철 옷을 입고 대동강가나 을밀대를 거닐고 있지 않을까 저는 나름대로 생각해봅니다. 이곳 서울도 한강에서, 전국 바닷가에서 국민들이 물놀이를 즐기는 초여름 날씨랍니다. 장마가 시작되는 요즘 날씨입니다.
김 위원장 귀하
먼저 저를 잠시 귀하께 소개드리는게 도리라고 하겠습니다.
저의 선친께서는 대한민국건국의 경찰로서 경상북도 경주경찰서 안강지서장으로 근무하셨습니다. 전사에 따르면, 한국전쟁 발발 한해 전인 1949년 그해는 귀 공화국에서 남파한 빨치산들로 인해 무고한 국민들이 전국 곳곳에서 목숨을 잃는 그야말로 무법천지의 그 시절이었습니다.
1949년 3월 23일 미명의 그 시각, 경북 경주 안강읍 ‘두류리전투’를 기억하시는지요?
저는 귀 공화국의 인민무력부 산하 빨치산 21명 대원들과 치열한 교전끝에 직원 2명과 함께 조국의 꽃으로 산화한 대한민국 건국의 경찰이신 고 유귀용(劉貴龍)경위와 원옥잠(元玉潛) 여사 사이에 태어난 유대지(劉大知, 58세)입니다. 그리고 선친께서는 국립현충원 경찰묘역에 잠들어 계십니다.
저의 선친께서는 전사 당시 27세의 혈기왕성한 청년이었고 어머니는 18세의 꽃다운 나이었습니다. 신혼의 단꿈도 채 이루지 못하시고, 제가 엄마뱃속에 있는 것도 모르신 채, 그렇게 짧은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그날 두류리전투의 비극은 우리가문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은 먹구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후 어머니도 지병으로 일찍 타계하고 오갈 데 없었던 어린 저는 울산 중앙시장에서 멸치행상을 하시던 할머니 슬하에서 삼대독자, 유복자, 유자녀로서 멸문지화의 그 파란만장한 가시밭길을 걸어야만 되었습니다.
저는 20대 초반에 울산시지방공무원, 국가보훈처 산하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에서 정년을 마친 후에, 지금은 종친회에서 상근이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저는 20대에 동향의 처녀와 혼인하여 슬하에 네 딸을 두고서 이제 환갑을 바라보는 인생의 언덕에 앉아 있습니다. 매년 찾아오는 유월이 되면 선친이 계시는 국립현충원을 가족들과 함께 참배하고 있습니다. 얼굴도 모르고, 목소리도 한 번도 듣지 못했고, 그 넓은 가슴속에 한 번도 안겨 보지 못한 저의 선친이기에 더욱 더 색바랜 사진을 바라보며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초원에 앉아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저의 삶은 전쟁이 가져다 준 눈물겨운 인생의 길이요, 가족사라고 저는 귀하께 감히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김 위원장 귀하
한마디로 어릴 때 아버지, 어머니가 함께 안 계시는 그 아픔을 아십니까?
김 위원장도 어릴 때 어머니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성장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감수성이 예민한 그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면 아마도 먼 훗날 그 고통은 두고두고 가슴에 새겨진다고들 합니다. 그만큼 부모님의 사랑이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닐까합니다. 벌써 59년 전 까마득한 그 옛날 이야기지만, 저는 결코 잊지 못하고 이렇게 위원장에게 눈물의 편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해,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귀공화국에서 국제적으로 조약된 조국의 38선 전역에서 아무도 모르게 막강한 화력으로 우리 대한민국을 분명히 남침했습니다. 이 사실은 모든 전쟁문서에 엄중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으며, 거부할 수 없는 이 땅의 진실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후 1953년 7월27일 휴전이 될 때까지 3년1개월동안 이한반도에서 동족상잔의 그 피비린내 나는 그 유월전쟁의 참상을 어찌 다 글로서 이야기 하겠습니까?
이제 귀공화국에서 그해 왜 그전쟁을 일으켰는지 말해야 된다고 저와 국민들은 믿고있습니다. 지금도 위원장은 북침이라고 우기실겁니까?
이전쟁으로 이 땅에서 숨져간 수많은 고귀한 생명들, 소중한 문전옥답과 가옥, 울부짖는 어린아이들, 그 전쟁발발 후 58년이 된 지금까지도 우리주위에는 그 상흔이 그대로 남아서 우리의 마음을 이렇게 괴롭히고 있습니다.
‘전쟁은 짧지만, 그 고통은 대를 이어 영원하다’고 저는 귀하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김 위원장 귀하
오늘은 바로 비극의 그 한국전쟁발발 58년이 되는 그새벽입니다. 그런데 귀공화국에서 2년전에 핵실험으로 세계 모든 사람과 우리국민들의 마음에 또다시 검은 전쟁의 그림자를 안겨주었습니다.
김 위원장 귀하
핵무기가 무엇입니까? 귀하는 핵무기의 위력을 아실겁니다.
바로 이땅에 모든 생명체를 일시에 사라지게 하는 가공할만한 무기가 아닙니까? 그 무서운 병기를 그토록 많은 시간과 경비를 들여서 자꾸 개발하고 보유하고자 하는 저의가 무엇입니까?
물론 귀공화국에서는 자위를 위해서 핵무기를 개발한다고 하지만 세계의 여론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말해서, 이땅에 제2의 한국전쟁 발발을 걱정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뇌를 아셔야 될것입니다.
얼마전, 귀공화국 매체에서 제2의 6.25발발, 그리고 제3의 서해교전을 예고하는 망말을 늘어놓았습니다. 한마디로 민족을 말살 시키자는 엄청난 말로서7천만 민족들이 분노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전쟁최대 피해자의 한사람으로서 오래전부터 동부전선 양양에서 굽이굽이 돌아 중부전선 임진각까지 우리민족의 한이 서린 38선을 부부가 함께 달리고 있습니다. 이행사를 시작한지도 어느덧 14년째요, 70회가 되어갑니다, 지구 한 바퀴를 도는 어머어마한 거리지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저희 부부는 비극의 이전선을 자동차로, 걸어서, 자전거로 달리고 있으며, 지난 2000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현지에서 자동차를 렌트하여 사상 처음으로 북미대륙 38선을 달리면서 전세계에 우리민족의 평화통일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김 위원장 귀하
김 위원장께서 저의 이 편지를 읽고 계실때면 아마도 저희부부는 38선 분기점을 출발하여 한계령을 넘어, 인제, 원통을 지나 중부전선으로 향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민족에게 다시는 그 끔찍하고도 몸서리치는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될 것이며, 조국의 평화통일을 바라는 7천만 국민들의 가슴에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 저희 부부는 이행사를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할것입니다. 더우기 전후세대에게 우리부부의 이 행사는 특별한 의미를 가질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언젠가 귀공화국에서 승락만 해주신다면 반드시 옹진반도까지 완전한 민족의 38선을 달리고 싶습니다.
58년전 발발한 한국전쟁-
우리민족은 영원히 상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우리민족에게 크나큰 아픔으로 지금도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우리나라 속담같이 이제 남과 북, 우리민족이 아픈 과거를 거울삼아 미래의 희망을 가지고, 우리민족이 평화스럽게 사는 방법은 바로 이 땅에 전쟁무기를 상호 감축하고, 귀공화국에서 대한민국 새정부와 함께 힘을 합쳐서 세계의 흐름속으로 마음을 열고 나아 간다면 반드시 금수강산에 무궁화가 만개할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남북 6.25유자녀 사상 처음으로 유년기때 겪었야만 했던 저의인생길“ 달빛은 민들래를 비추지 않았다”제하의 육필수기집을 집필중이며 2010년에 영어판, 중국어판, 일어판을 출판할것이며, 그리고 귀하가 승인해주신다면 평양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지고 싶습니다.
출판수익금 전액은 반드시 전쟁양로원 건립기금으로 사용할것입니다.
김 위원장귀하
오늘 귀하께 감히 드리는 저의 이 말을 절대 나쁘게 듣지 마시고, 처절한6.25유복자가 그 오랜 세월동안 고뇌에 찬 이야기로 이해하셔야 될것입니다.
아무쪼록 한국전쟁발발 58년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셔서 우리민족에게 통일조국의 그 융성한 모습으로 찬란한 새역사를 꽃피우는 대결단의 한마음이 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끝으로 유난히 무더운 올여름을 귀하께서도 잘 지내시길 바라면서 두서없는 저의 이야기를 마치고자합니다.
감사합니다
2008년 6월25일 새벽 4시
동부전선 강원도 양양 38선출발 선상에서
대한민국 6.25전몰군경유자녀 유대지 드림
sps38@hanmail.net
엠바고: 2008년 6월 24일 00: 00
저희부부의 행사 보도자료입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제2의 6.25결사반대해요!!
6.25유복자부부, 전쟁발발58년 맞아,14년째 양양~ 임진각 38선을 자동차로 달려
38선맨으로 불리는 유대지(劉大知.58.종친회이사),이순필(李順必.58)부부는 6.25발발 58년을 맞이하여 조국의 평화를 위해 6월25일 (수) 새벽4시경 동부전선 양양38선 기점을 출발,국도44번을 타고 한계령- 인제(원통) - 양구 - 북춘천- 화천 - 사창 - 포천 - 전곡 - 문산 - 중부전선 임진각까지 300km을 12시간 달려 오후4시경에 목적지에 도착할 예정이다.
한편, 유씨의 선친은 대한민국 건국의 경찰로서 6.25발발 한해전인 1949년 경북도경 경주경찰서 안강지서장으로 재직하던 중 빨치산과 교전하다가 전사한 고 유귀용(劉貴龍.전사당시 27세)이며 현재 국립현충원경찰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어머니도 일찍 돌아가자, 어린 유씨는 멸치행상을 하시던 할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성장했다. 3대독자,그리고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유복자로서 지금은 경기 성남에서 처와 슬하에 딸만 넷 두고 생활하고 있다. 이들부부는 지난 1994년 남북이 핵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을때,전쟁반대를 외치며,강원도 고성에서 백령도까지 휴전선 155마일을 도보로 20일간 횡단했으며,지금까지 14년째 70회, 40,000km (지구한바퀴)거리를 38선을 자동차로, 도보도, 자전거로 달리고 있다.
그리고 이들부부는 행사를 앞으로도 계속 할 각오를 다지고 있다.
특히, 이들부부는 지난 2000년에는 사상처음으로 북미대륙38선, 뉴욕-댄버- 샌프란시스코 - la까지 4,000km,13개주를 현지에서 자동차를 렌트하여 조국의 평화를 외치며 달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해,인천 -천진 - 베이징까지 중국38선을 선박으로, 기차로 달렸다.
" 6.25전쟁 발발 58년을 맞이하여, 국민들과 전후세대에게 전쟁의 무서움과 가정의 소중한 메시지를 몸으로 보여주기 위해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우리부부는 38선을 달리고 있습니다. 전쟁 피해자의 한사람으로서 끔찍한 유월전쟁을 국민들이 반드시 기억하셔야 됩니다.그리고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불어왔으면 좋겠습니다. 여건이 허락하면 옹진반도까지 완전한 38선을 달리고 싶고요.“
유씨 부부는 이번 행사홍보를 위해, 자동차에 태극기, 반도기, 선친의 영정, 그리고 “제2의6.25 결사반대“ 현수막을 부착하고, 주먹밥을 먹고 달린다.
유씨는 전쟁으로 멸문지화의 인생역정을 담은 ‘민들래는 달빛을 비추지 않았다’육필 수기집을 집필중에 있으며, 전쟁발발 60년이 되는 2010년에 영어판,중국어판,일어판을 준비중이며,그리고 여건이 허락하면 평양출판기념회도 가질 예정이다. 유씨는 현재 대한민국경찰유자녀 회장이다.
sps38@hanmail.net
엠바고:200.6.24.(화) 00:00
"달빛은 민들래를 비추지 않았다" 수기집을 내면서
동서고금을 통하여 비참한 인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이 있다. 첫째, 늙은 홀아비, 둘째, 늙은 홀어미, 셋째, 부모없는 아이, 넷째, 자식없는 늙은이, 바로 사궁(四窮)이 그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네 가지 가운데 한 가지도 거치지 않고 태어나 다복하게 살아 가건만, 어찌하여 할머니와 나는 인생 시작부터 이렇게 힘든 멍에를 등에 지고 허우적대며 시작해야만 했을까.
이것은 바로 할머니와 나의 숙명적인, 그리고 비극적인 인생의 시작을 알려주는 적신호였다.
논어 학이편(學而編)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살아계실 동안은 그 뜻을 살펴 볼것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그 행한 바를 살펴볼 것이니, 3년 동안은 아버지가 행하신 바 도리를 고치지 않아야 효자라고 말할 수 있다” 고 했다.
그런데 나는 나를 낳아 주신 아버지의 얼굴도 본 적이 없고, 그 넓은 가슴에 한 번 안겨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아버지라고 불러 보지도 못했으며, 그 목소리도 들어보지 못했다.
이처럼 아버지라는 존재는 내가 태어 날 때부터 나에게는 전혀 손길이 닿지 않는 저 먼 세계로 인식되어왔으므로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싶어도 그것을 행할 수 없으니 참으로 나의 인생은 기구한 운명이 아니고 무엇인가.
어머니 뱃속에서 내가 채 일 개월도 되지않았던 그때, 어머니 자신도 임신한 사실 조차도 모르고 있었던 그때, 나의 아버지는 전쟁으로 인하여 우리곁을 떠나 순국하셨던 것이다.
바로 나는 유복자, 삼대독자, 대한민국 6.25전몰군경 유자녀,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얕잡아 보던 저 비극의 호로자식이다.
어릴 때의 그날 일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그해 한여름 깊어 가는 밤이었던가. 마당 한가운데 모닥불에서는 모기와 하루살이를 쫓기위해 옥수수 껍질을 태운 흰 연기 꼬리가 이리저리 흔들거리고 파란 모기장 안에서는 어느새 들어왔는지 모기 몇 마리가 앵앵거리면서 잠자리의 어린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내가 분명히 깊은 잠에 빠졌으리라고 생각하신 할머니께서는 부채를 흔드시고 과일을 드시면서 평상에 앉아 동네 아낙네 서너명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그런데 그때 내 귀를 강하게 때리는 엄첨난 이야기들이 아주 조용하게, 그리고 은밀하게 할머니의 입을 통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바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에 대한 그 슬프디 슬픈 사연들이...
(그래 내성이 유가니까 유자녀, 유복자라고, 유가족이라고 저러시는구나)
나는 잠결에 단순히 생각하면서 그날 밤 그렇게 잠이 들었다.
그러나 그후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그날밤 할머니께서 하신 그 이야기들이 한줄기 섬광이 되어 나의 뇌리에 닿았을 때 나는 초겨울 바람을 맞으며 강둑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강둑에 혼자 웅크리고 앉은 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 얼마나 울었던가.
할머니께서는 아마 어린 손자가 아버지가 안계신것을 몹시 상심할까봐 평소 나에 뿌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시지 않았으리라.
1949년 그해는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사변 발발을 한 해 앞둔 시기로서 좌익과 우익의 사상싸움이 그 어느해보다도 치열했으며 그만큼 국내친안도 어지러웠다.
그때 선친께서는 대한민국 건국의 경찰로서 경상북도 경찰국 경주경찰서 안강지서장으로 재직하고 계셨다.
그해 3월 23일 미명의 그 시간. 경상북도 경주군 안강면 두류리. 인적이 드문 산골 어느 오두막집에서 발생했던 그 비극의 전투. 대한민국 경찰관 세명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무력부 산하 인민군 소속 빨치산 부대원 이십명과의 전투.
나의 선친께서는 바로 그 전투에서 직원 두 명과 함께 조국의 수호신으로 순국하신 당시 이십칠세의 유귀용 경위이시다.
아! 하늘도 땅도 무심하셔라.
나는 그해 십일월에 이세상에 태어났으니.........
나에 대한 비극의 역사를 모두 알았을 때 나의 가슴속에서는 예전에 느껴보지 못한 크나큰 격랑의 파도가 엄습해 왔으며, 나는 한동안 참을 수없는 슬픔에 빠졌던 것이다.
그후 나는 차차 성장하면서 조국의 수호신으로 산화하신 선친에 대한 진한 그리움이 차츰 자긍심과 존경심으로 변해 감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평소 나의 가슴에 선친에 대한 그리움이 남달리 쌓이고 쌓였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자수성가의 길을 걸어 가면서 숱한 역경을 할머니와 가족들이 함께 겪었다. 그런 난관에 봉착할 때면 나는 선친에 대한 진한 그리움을 가지고 색바랜 선친의 사진 앞에 앉아 마음을 정리한다.
(아버지,아버지, 나의 아버지, 보고싶습니다. 저를 힘껏 껴안아주세요)
그러노라면 신앙과도 같은 사고와 말로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강한 위력이 나에게 다가온다. 그러한 현상은 아마 선친께서 이 세상에 겨우 남기신 하나뿐인 당신의 혈육에 대한 강한 훈계요, 어두운 망망대해에 뱃길을 잃어버린 채 표류하고 있는 난파선에 마치 환한 등대 불빛과도 같은 구원의 이정표가 아닐까. 이렇게 비춘 그 영롱한 불빛은 힘들고 모진 세파를 헤쳐 나가는 나에게 안정과 희망, 바로 그것이었다.
한가정과 가문에 아버지가 안 계신것은 대문이 없는것과 같고, 어머니가 안 계신것은 방문이 없는것과 같으며, 그리고 일가친척이 안 계신것은 울타리가 없는것과도 같다.
나는 이세상에 태어나기 이전부터 대문과 울타리가 없었고, 다섯 살 때는 방문마저 없어지는 쓰디쓴 비운을 그 누구보다도 일찍 겪으며 성장했다. 그래서 할머니와 어린 나는 가문을 지키기 위해 거칠고 세찬 찬바람을 혼신의 힘으로 막아내야 하는 힘겹고 고달픈 인생의 길을 걸어야만 되었다.
그후 나는 이십대 초반에 가정을 가짐으로서 그동안 방황하던 나와 할머니의 인생항로에 닻을 내릴 수 있는 작은 안정과 평화의 맛볼수 있었다. 나는 부모님께서 다하시지 못하신 그대문과 방문의 역할을 처와 함께 이루는것이 부모님에 대한 효도요, 나의 성스러운 소임임을 확신한다.
2010년, 올해는 동족상잔의 6.25 사변이 발발한 지 어느덧 육십년이 되는 해이다. 이전쟁으로 인하여 수많은 남북한 우리민족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참전결의에 따라 이땅에서 숨져간 젊은이들의 그고귀한 영혼..
우리는 민족끼리 무엇을 위해서 서로 피 흘리고 이땅에 묻쳐야만했는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전쟁 후 지금도 이 산하에는 변한게 아직 아무것도 없다. 38선에서 휴전선으로 남북의 경계선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 민족이 바라는 민족통일의 그염원은 아직도 요원하게 보인다. 우리부부는 지난 1994년 유월경 남과 북이 핵문제로 전쟁발발 일촉즉발의 초긴장의 상태에서 동부전선 고성에서 서부전선 백령도까지 이십일간 사상 처음으로 걸어서 휴전선 155마일을 횡단했다. 그리고 1997년 1월부터 6.26사변 발발 50주년이 되는 2000년 유월까지 3년 6개월간 매월 동부전선 강원도 양양에서 임진각까지 삼팔선을 승용차로 달렸다 그후 일년에 두 번정도 삼팔선을 승용차로, 마라톤으로, 자전거로 달렸다. 지금까지 80회 4만5천km, 지구 한 바퀴를 넘게 도는 이기나긴 거리를 우리부부는 비가오나 눈이오나 달리고 달렸다. 그리고 2000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현지에서 승용차를 렌트하여 사상처음으로 뉴욕 -워싱턴 -덴버 -샌프란시스코-LA 까지 4,000키로 13개주를 경유하면서 북미대륙을 위험을 무릅쓰고 성공적으로 횡단하여 현지교민들의 성원을 받기도 했다. 이어 인천에서 중국천진 베이징 인민일보사까지 선박으로 기차로 달려서 우리민족의 조국평화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왜 우리부부가 이토록 기나긴 세월동안 38선을 달려야만 하는가?
왜 나의 인생역정을 이렇게 기록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바로 전쟁이 얼마나 무섭고 우리인간에게 평화와 가정이 그 얼마나 중요한가를 국민과 전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몸으로, 특히 전후세대에게 이 사실을 똑똑하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우리민족은 반만년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너무나 많은 전쟁속에서 고통을 받아왔다. 이제 21세기에는 우리민족의 소원인 민족통일을 반드시 이루어야 할것이다. 민족통일. 그 찬란한 염원을 우리모두 힘을 합쳐 민족이 하나 될 때까지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될 것이다. 그래야만 인도시인 타고르가 동방의 등불이라고 우리나라를 이름 지은 그 이치에도 부합될것이기 때문이다.
국경을 넘어서, 이념을 넘어서, 시대를 넘어서 이 땅에서 전쟁의 포화 속에서 숨져간 모든 사람들, 그리고 얼굴 한 번 뵌 적 없이 조국의 수호신으로 산화하신 대한민국 건국의 경찰관이신 나의 아버지 고 유귀용 경위의 영전에 삼가 이 책을 바친다.
2010년 6월 25일
동부전선 양양에서 중부전선 임진각을 달리면서
유대지 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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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자매 여러분 ㅎㅎ 잘단녀오겠습니다,
건강하세요
첫댓글 새긴 뜻 이루소서. 윗 부분 (유자상감) 유모어 부분이 편지의 본래 의미를 희석시키는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긴 글에 덧붙인 혹처럼 말입니다. 저혼자 만의 생각인지요?